부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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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청년시절 유혹하고 버린 마슬로바를 재판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회개의 길을 다루고 있다.

네흘류도프에게는 총 3단계의 각성이 일어난다. 먼저 첫 번째는 첫사랑인 마슬로바가 자신 때문에 타락한 이후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죄를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다.

네흘류도프가 고모집에서 지내던 시절 마슬로바는 고모들의 수양딸 겸 하녀 역할을 하고 있던 순수한 처녀였다. 네흘류도프도 그 때는 순수했기에 마슬로바의 순수함을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았고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네흘류도프가 군대에 입대하고 동료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본래의 순수성을 잃어버렸고, 인간애와 동정심, 연민보다는 자신의 쾌락과 탐욕을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다시 고모집을 방문했을 때 그가 예전처럼 순수하게 마슬로바를 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보다는 육체에 정신을 쏟았고 그녀를 유혹했다. 하룻밤 정사 이후 그는 그녀에게 100루블을 주고 떠나버렸고 아이까지 임신했던 마슬로바는 깊은 상처를 받은 채 고모집을 떠나 종국에는 유곽으로 흘러들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생계의 수단으로 자신의 몸을 앞세웠음에도 그녀 안에는 아직도 순수함이 남아있었다. 그녀가 기소된 죄목은 독살죄였으나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간절한 외침과 눈물어린 호소를 통해 마음으로 느낄 수 있던 부분이었다. 다만 배심원과 재판관의 직무유기로 인해 그녀는 어처구니없게도 4년형을 선고받게 되고 유형을 떠나게 된다.

바로 이 과정에서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의 한 명으로서 재판에 참석하여 마슬로바를 버린 이후로 그녀를 처음 보게 됐다. 그때의 그는 마슬로바보다 타락한 상태였다. 마슬로바는 자신이 고귀한 사랑이라고 믿었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충격과 육체노동으로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유곽에 몸을 맡겼으며 이는 분명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나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낄만한 부분이다.

그렇지만 네흘류도프는 방탕한 생활 속에 빠져있었고 자신의 의도대로 세상이 흘러가야 된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인간을 대했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이 받게 될 상처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순수함과 인간애를 잊어버린 것이다.

재판에서 그녀를 보게 됐을 때도 네흘류도프가 느낀 첫 감정은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폭로하여 사교계에서 자신의 지위와 명예가 추락하는 것만을 걱정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잘못된 판결이 선고돼 죄없는 그녀가 유형생활을 떠나게 되자 그는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며 비로소 내면의 인간애를 각성시킨다.

수감자가 무고함을 알고도 무책임하게 유형을 선고해버린 재판관과 배심원들로 인한 부당함을 바로잡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인맥과 지위를 동원하여 그녀를 구해내려고 애쓴다. 그 과정에서 그가 당면한 것은 공권력을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는 정부 관료들의 몰상식과 잔인함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견고한 위치를 유지하고자 하층민들을 핍박하는 불합리한 체제를 그대로 용인하는 상류층들의 특권의식이었다.

마슬로바와의 면회부터 시작해서 감옥 안 수감자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그들이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는 모습을 보며 그는 크게 충격을 받고 비로소 제대로 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모든 생각이 자신의 출세와 안위로 집중됐던 때를 벗어나서 하층민들의 고달픈 삶과 법적인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는 불합리함을 온 몸으로 느끼며 그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네흘류도프의 이러한 각성은 한순간에만 이루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그는 자신이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의 이면을 깊이 고찰하고 그것이 자신이 역겨워하던 상류층의 전유물과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먼저 그는 자신이 지주로 있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임대하기로 한다. 그가 소유한 땅은 농민들의 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례로 농민의 소가 지주의 풀밭에서 풀을 조금 뜯어먹었다는 이유로 소를 며칠간 뺏기는 일이 일어난다.

그의 두 번째 각성은 하층민들을 향한 온화한 마음과 봉사정신으로 발현된다.

마슬로바를 유형지에서 꺼내는 과정에서 그는 다른 수감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돕게 된다. 그러다 정치범들과 친해지게 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불합리한지, 정치범들이 왜 살인이나 폭력 같은 방법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야 하는지, 정치범을 향한 탄압이 얼마나 쉽게 이루어지는지 속속들이 알게 된다. 마치 국가가 소수의 상류층의 권리만을 보장하기 위하여 운영되는 것처럼 농민과 정치범 등 그들이 하층민으로 분류하는 이들의 소유물은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를 다방면으로 느끼고 체험하게 되며 그는 어느새 그들의 삶에 깊이 동화된다. 하루에 반절 이상을 오로지 노동으로만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가족에게 모두 보낸다는 농민, 단지 선전물을 인쇄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은 어린 소년들, 수갑을 채운 채 땡볕에서 유형지로 이동하다 죽음을 맞이했지만 관료들에게 귀찮은 일로 취급당한 노인, 그 밖에도 인간적인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한 채 도움을 청할 곳이라고는 신뿐이었던 불쌍한 사람들이 네흘류도프의 길을 함께 한다. 그는 그 길을 고통스럽게, 부끄럽게, 속죄하며 걷는다. 그리고 함께 가는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의 불쌍한 청을 들어주며 그들을 돕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마지막 세 번째 각성은 그가 찾던 단 하나의 답이자 궁극적인 삶의 목적으로 귀결된다. 모든 이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도록 신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감옥에서 수감자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던 영국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네흘류도프는 집으로 돌아와 성경을 자세히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모두 이해가 되고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할 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종교적 믿음으로 사람들을 고통에서 구하고자 일평생 노력하게 될 것심을 암시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개인적으로는 네흘류도프가 찾은 답이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네흘류도프가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했던, 하층민에게만 부여된 고통을 해소할 근본적인 해결책이 결국 종교라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영국인이 수감자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는 모습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수용인원의 두 배가 넘는 사람들을 한 곳에 몰아넣은 곳에서 그들에게 당면한 고통을 종교적 힘으로 극복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고통스러운 각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죄를 지었으니 개인이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권력자들의 편의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법체계를 개인의 종교적 각성이 과연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네흘류도프가 만난, 종교를 믿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 믿는 기묘한 노인처럼 종교적 각성이 필요하지 않은 이들을 어떻게 돕는단 말인가? 그는 신을 믿지만 종교는 믿지 않았다.

분명 작가도 이 점을 고민했기 때문에 그 노인을 등장시켰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작가가 찾은 해답은 결국 종교의 힘을 믿음으로써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과 신의 말씀을 전하는 언어와 그것을 해석하여 실천하는 종교는 사람들에게 일원화돼 전파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고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불교, 개신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많은 종교가 각자 다른 신을 주장한다. 또한 무교도 있다. 제각기 수많은 삶이 탄생하는 다채로운 세상속에서 특정 종교를 실천하며 사는 것이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게 가능한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작품이 전하는 종교적 메세지보다는 인간이 생겨난 이래 줄곧 유지돼왔던 체제의 불합리함이 더 강력하게 다가왔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고발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모든 것이 부의 집중현상을 유지하게끔 체제가 운영되고 이것의 수혜자는 소수에게 집중돼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세상에서 제외된 다수의 삶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들을 그저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어떤 고통을 받든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그들이 겪어야 할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할 것들을 누리는 것처럼.

현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단만 달라졌을 뿐 체제의 불합리함은 정치, 경제, 사회를 아우른다. 또한 주체가 자본이든 공권력이든 어디에서나 불평등과 특권층은 견고하다. 그렇다면, 그것에 옳고 그름의 가치를 부여하기 이전에 인간이 탄생한 이래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을만큼 끈질기게 생성되는 계급의식과 불합리함을 그저 인정해야만 할까?

요즘 어떤 연예인이 운영하는 회사의 채용공고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경력자 3명은 채용해야 될 것 같은 업무 인력을 한 명만 구하면서 연봉은 최대한 낮춰서 신입 기준 2,500만 원이다. 월 실수령액이 200도 안된다. 반면 그 연예인은 호화로운 생활을 유투브로 맘껏 자랑하며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다시 그것을 사업에 활용하여 억대의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 한 명 채용하는 것에, 그것도 온갖 업무를 다 소화하길 원하는 탐욕의 대가가 3,000만 원도 안된다.

이 작품에서 상류층이 타 계층을 착취하는 방식과 똑같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여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전형적인 특권의식이다. 그 자신은 아마 그것을 효율적인 주인의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수단만 바뀌었을 뿐 이런 사람들은 넘쳐나고 그들의 탐욕과 무지성이 이 체제를 유지하는 훌륭한 원료다.

이러한 불합리함은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할 것이 아닌, 명확히 인식해야 할 문제다. 예전부터 그러한 체제를 이용하여 노동을 착취하는 사람들은 있어왔지만 마찬가지로 그러한 불합리한 행태를 인식하고 고발하는 사람들도 있어왔다. 어떤 형태의 권력이든 사람을 통해 그 힘이 구현된다.

세상의 불합리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힘이 진정한 권력의 본질로 나타나는 것이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는 첫 번째 단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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