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웨이크
무르 래퍼티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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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도 권력의 부조리함과 이념간의 갈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인간의 DNA를 복제해서 클론으로 만들 수 있게 되면서 불로불사의 미래가 열리게 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뇌를 해킹할 수 있어서 멀쩡한 사람을 이중인격자로 만들거나 싸이코패스로 만드는 일도 가능해진다.
또한 불로불사가 신의 영역임을 주장하는 종교계와 무한한 삶을 살고자 하는 클론의 갈등 또한 존재한다.

항성 간 이민 우주선에서 여섯 명의 승무원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깨어난다. 그들이 원래 갖고 있어야 할 기억마저 잃은 채.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범죄이력을 지우기 위해 이 우주선에 탔다는 것과 누군가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다.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서로를 의심하고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의 과거가 드러난다.
모두 저마다의 서로 다른 역사를 갖고 있지만 공통됐던 점은 그들 모두가 한 사람과 연관이 있었다는 점이다.

샐리 미뇽이라는 최고의 권력자가 그들 모두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돼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적을 편리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그 이민여행을 직접 설계했다. 자신이 망가뜨린 사람들을 승무원으로 태운 채.

다만 그녀가 클론의 정체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히려 클론의 권리를 상당히 제한하는 보충법안을 통과시키고 히로를 다중인격 싸이코패스 클론으로 만든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진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샐리 미뇽의 큰 그림에 대한 묘사와 그녀가 왜 사람들을 그렇게 이용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면 좀 더 재밌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 대한 것들은 철저히 여섯 명의 과거에서만 드러나는데 그걸로서는 최고의 악인에 대한 임팩트가 좀 떨어졌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시리즈물로 기획됐다면 굉장히 흥미진진한 SF 스릴러물이 될 것이다. 결국 샐리 미뇽의 의도와 사건의 전말을 여섯명이 알게 됐고,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비극적 사건만이 발생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주선에 그녀의 적들이 타고 있다고 했으니 그들 모두가 힘을 합쳐 샐리 미뇽에 대항하는 조직을 만든다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최고의 부와 권력을 가진 샐리 미뇽의 적이라면 그들 또한 만만치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이 샐리 미뇽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샐리 미뇽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활용해 이들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매우 재미있을 것 같다. 살짝 터미네이터 같은 느낌일 것이다. 존 코너가 연합군의 수장으로 로봇과 대항해 싸운다면 이 작품에서는 마리아가 샐리 미뇽의 적들로 구성된 지하조직의 리더로서 샐리 미뇽과 싸우게 되지 않을까.

배경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 때문에 SF물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심리적으로 스릴감이 느껴지는 작품, 예를 들면 에이리언 시리즈는 굉장히 재밌게 봤었다. 이 소설은 에이리언 시리즈와 결이 다르지만 밀폐된 공간에서 사건을 짜맞춰가는 추리극으로서 인간의 심리적 변화와 향후 미래에서 인간이 불로불사의 삶을 살게 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갈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만약 기술이 발전해서 인간이 불로불사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이것에 대한 욕망을 제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확실히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가 모호해지고, 죽음으로 인해 조명됐던 삶의 가치가 이전보다 떨어질 순 있겠지만 자신의 삶을 연장시킬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법적으로 제재하기는 힘들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삶의 연장이 계층간의 차별대우로 이어지면 어떻게 될까? 자본으로 계층이 나눠지는 것과 시간으로 계층이 나눠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문제다. 요즘에는 금수저, 흙수저라는 단어가 생겼을 정도로 돈과 재산에 대한 서로 다른 출발점에 대해 자조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로서 돈을 취한다는 개념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은 어떠한가? 죽음이라는 종착지까지 가기 위해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정해진 시간을 지나간다. 그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병에 걸려서 죽을 수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클론을 통해 다시 한 번 살 수 있게 된다면 상당수의 많은 사람들은 클론으로 다시 한 번 살기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클론이 될 수 있는 값을 지불해야만 다시 한 번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것 또한 자본력에 의한 자연스러운 대가라고 할 수 있을까? 돈과 시간을 교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소설에서는 이런 생각이 명확히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 번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클론이 되고자 하는 자유를 인정한다면, 클론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내가 클론이 될 수 있는 조건마저 돈과 교환해야 하는 세상이 온다면, 그건 어떤 기분일까? 현재는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저축을 하고 있다면, 미래는 클론으로서 영생의 삶을 살기 위해 돈을 모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결국 현재의 자본에 의한 계층갈등이 더 심화되어 아예 삶을 자본과 등가교환해야 하는 세상이 올 것이다. 클론이 만들어지는 순간 그런 공평성은 파괴되고, 가난한 자들은 시간의 타당한 순리대로 삶을 마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옳은 것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서쩌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던 시간을 돈으로 연장시키는 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간이 올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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