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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의 태양
돌로레스 레돈도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8월
평점 :
비극과 비극이 모여 거대한 강을 이룬다.
읽고나니 왜 이렇게 마음이 허한지. 긴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모두 생생하게 다가오도록 묘사한 작가의 힘이 대단하다.
인기 작가인 마누엘이 그의 배우자인 알바로의 사망소식을 전해듣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가 대단히 명망있는 귀족 가문의 후계자로서 집안의 여러 일을 처리했다는 비밀이 드러나고, 그의 죽음을 수상하게 여긴 퇴역 중위인 노게이라와 사건을 추적해가며 가문을 둘러싼 추악한 진실이 드러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것은 막강한 힘을 지닌 귀족 가문을 지키기 위해 주인공의 목숨까지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스릴러였다. 읽다보니 완전히 다른 분위기와 방향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고뇌와 고통이 서로 얽히면서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 매우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잔인한 통념들이 강력한 힘을 지닌 곳에서 사랑이 피어났다는 것이 참 슬펐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결국 사랑으로 위로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알바로도, 산티아고도, 프란도 모두 그랬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런 것들에서 벗어났다면 행복하게 살았을 사람들이 결국 죽어간 곳에서 마누엘이 느꼈을 허탈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릴적부터 비정상적인 희생과 형벌을 받아야했던 알바로는 마누엘을 만나서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다. 마누엘도 어린 시절 겪었던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알바로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그것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알바로의 진실을 알면서부터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배신감과 모욕으로 몇 번이고 도망치려 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보여주던 그의 진정한 사랑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와 자신의 지난 날들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어떤 것이든, 그것에 대한 집착은 광기를 만들어낸다. 후작가문이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들을 처단해 온 것은 가문의 정통성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광기어린 믿음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낳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사랑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권력과 힘에 대한 정통성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자연히 없어져야 할 것들에 집착하며 인생을 흘려보내기보다 현재 내가 가진 것들에 감사하며 살고 싶다. 그렇다고 욕심이 독은 아니다. 더 좋은 것들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존재이유와 혼돈하기 시작하면 위험해진다. 수단이 목적을 집어삼키고, 명확한 시선이 현재를 직시하기보다 초점없는 눈빛이 미래를 바라볼 뿐이다.
요즘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고 있다. 바라던 것들이 단념됐을 때 나는 어떤 생각을 해야하고 다시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 등, 여러가지로 내가 원하는 것들에 대해 그게 뭘 뜻하는지, 그게 궁극적으로 내 삶의 방향과 어떻게 연결될지 고민하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이 책을 읽으니 내가 내린 결론과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간단하다. 내가 가진 것들에 만족할 줄 알고, 사랑을 사랑으로써 대하며, 지금 이 순간들을 느낄 줄 알면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