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9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악령의 늪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사건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말에 의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주요인물들이 모두 말이 굉장히 많아서 읽다보면 지칠 수 있다.

하지만 역시나 읽은 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드는 작가만의 저력이 있다.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하나의 주제로 엮어내는 방식이 정말 탁월하다. 또한 인물 모두의 생각이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이 좋았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들을 자극하고 사회에 혼란을 일으키는 비밀조직이 있다. 이들은 5인밖에 안되는 조직이지만 전세계 곳곳에 그들과 같은 소규모 조직이 새로운 체제 구축이라는 대의를 위해 활동한다고 믿고 있다. 이 믿음부터가 얼마나 허황되고 부질없는지는 이들이 악행을 저지르고 발각되면서 밝혀진다.

특히 이 조직의 중심인물인 뾰뜨르는 정말 뱀같은 인물인데, 그의 간교함을 추진력이라고 믿고 일을 진행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대단한 일을 한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들의 리더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않았으니, 단순한 협업이어도 결국엔 망칠일이었다.

그들이 격문을 뿌려 민중들을 계몽하고 사회에 불안을 퍼뜨려 새로운 이념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그들의 선택일 뿐이다. 현 체재의 문제와 그것을 바꾸고자 위대한 혁명을 꿈꾸는 것도 그들의 선택이다. 하지만 대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방화를 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더이상 선택이 아니라 그들이 책임지고 가져가야 될 평생의 죄다.

밀고를 할 것 같아 한 때 뜻을 함께했던 사람을 죽여야 했을 때, 왜 좀 더 뭔가 잘못됐다고 강력히 주장하지 않았을까? 더더군다나 그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돌아오고 비록 그의 아기는 아니지만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는 것을 그들 중 일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잡힐 것 같다는 두려움에 눈을 감고 그를 죽여버린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가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 나선 여자와 아기는 추운 날씨에 무리하게 돌아다닌 탓에 모두 죽어버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5인조는 정말 공동의 과업이라는 대의를 위해서 그를 죽인 것인가? 절대 아니다. 그들은 그럴 용기도, 양심도 없었다. 리더의 잘못된 주장을, 처음에는 반대했으면서도 아닌 것을 아닌 것이라 끝까지 주장하지도 못한 비열한들일 뿐이었다. 자신들의 눈과 귀를 모두 닫은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새 삶을 살 꿈에 부풀었던 한 가족을 파멸시켜버렸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세우고자 했던 사회는 어떤 것인가? 끔찍한 사회다. 뾰뜨르가 얘기하는 바에 따르면 하급 계급의 인격적인 것들은 모두 없애버리고 과학과 종교의 자유도 없이 열등한 존재 그 자체로 남고, 그들을 다스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이 인간이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를 마치 선별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권리인 것처럼 가질 수 있다. 결국 그것들을 가지는 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결국엔 체제를 바꾸기 전의 상류층일 것이다. 그들이 가진 부와 명예뿐만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그들에게 ‘부여‘될 것이다. 정말 말도 안되고 정신병자 같은 생각이며 자기 자신을 얼마나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실제로 실행하려 했는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

상류층은 또 어떠한가. 상류사회에 진입하고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자 그들이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과 행동은 정말 어이없게 웃긴다. 스타브로긴 부인이나 미하일로브나 부인이나 모두 귀족이라는 계급이 자신이 모든걸 할 수 있는 권리인양 행동한다. 계급사회에서 그들이 하는 ‘일‘이란 것은 상류사회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로 올라가기 위해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가진 것을 베푼다고 할지라도 대상을 조종하기 위함이다. 모두 가식적인 인물이며 특히 미하일로브나 부인은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뾰뜨르의 간사함에 속아넘어가 그가 하는 말이라면 덮어놓고 믿는데 결국엔 뾰뜨르가 미친 짓을 할 수 있게 도와준 든든한 배경이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시험해보고자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스타브로긴은 뾰뜨르와 비견될 정도로 비정상적이다. 언뜻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를 생각나게 하는데, 라스콜니코프가 본인이 비범한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회개하는 것과는 다르게 스타브로긴은 얼마든지 악행을 누를 수 있는 정신력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두 인물 모두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에 공통점이 있지만 스타브로긴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소시오패스같은 면이 더 강하다.

그래서 그가 자살을 했을 때 놀랐으면서도 뭔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됐다. 한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긴 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구원자로 생각하며 그녀가 곁에 있음으로써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가 자살하게 만든 불쌍한 소녀에 대한 진정한 양심의 가책보다는 잡힐 것 같다는 공포감이 더 큰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가 자살을 한 것도 더이상 악행이 자신을 흥분시키지 못하고 종교도 그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한 게 아닐까 싶다.

스타브로긴은 신부와의 담화에서도 그가 참회라는 위대한 일을 행하고 있다는 신부의 말을 믿지 않고 시종일관 비웃는듯한 태도를 유지한다. 분명 어떤 것이든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랬기 때문에 신부를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도, 종교도 순수한 악령의 늪으로 빠진 그를 구할 순 없었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삶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기로 했다.

이 모든 사건과 인물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 그 종착지는 거창하면서도 암울하다. 악령이란 타인에게 가하는 악행뿐만이 아니라 삐뚤어진 사상, 그것을 용인하는 또 다른 사람들의 내부에서 살아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개인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썩어갈 것이고 그 때에야말로 진정한 혁명이 필요할 것이다. 악령이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들을 제어해야 한다.

지금도 악령은 있다. 요즘 화두가 된 n번방부터 시작해서 그 밖의 많고 많은 범죄들 그리고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범죄를 저지른 주체들은 알량한 자기고백이나 참회로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구원을 믿지 말길. 당신들은 참회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직 죄를 평생 지고 가야할 책임만 있을 뿐.

이 모든 것을 얘기하는 것은, 이 감각이 나라는 존재를 송두리째 정복한 적은 결코 없었으며, 언제나 의식이, 그것도 가장 완전한 의식(더욱이 모든 것이 바로 이 의식 속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이다. 비록 이성을 잃을 정도로 감각이 나를 점령하는 일은 있었지만, 나 자신을 완전히 망각하도록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나의 내부에 있는완벽한 불꽃에 이르면, 난 동시에 그것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고 심지어 최고 정점에서도 정지할 수 있었지만, 단, 나 자신은결코 정지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천부적으로 짐승 같은정욕을 타고났으며 언제나 그것을 자극시켜 불러낼 수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한평생을 수도사처럼 살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열여섯 살까지 나는 정상적인 중용의 정도를 완전히 넘어선 상태에서 장 자크 루소가 고백한 바 있는 그 죄악에 몸을 내맡겼지만,
말하자면 열일곱 살이 될 무렵 내 마음이 동했던 바로 그 순간에중단해 버렸다. 난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나 나 자신의 주인이다. 그러니 내가 환경이나 병 따위에서 내 범죄의 면죄부를 찾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는 점을 알아 두는 게 좋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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