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창식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전작에 비해 너무 아쉬운 이야기
먼저 전작인 양들의 침묵에 비해 너무 아쉽다는 얘기부터 해야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주인공, 서사, 결말까지 온통 아쉽다.
일단 전개가 너무 암울하다. 스탈링을 공격하는 권력자에게 스탈링은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전작에서는 그녀 주변의 조력자들이 그녀를 지원하고 스탈링도 빛나는 추리력과 순발력으로 사건을 풀어나갔다. 하지만 이 작품 속의 스탈링은 개인의 능력은 정점에 도달해 있을지언정 권 력자들의 부조리한 결정과 압력에 저항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당해버리는 약자가 되고 말았다.
그녀에게 큰 힘이 돼주었던 크로포드도 아내가 죽은 후 급격히 쇠약해지고 스탈링의 친구인 아델리아만이 곁에 남아 정신적으로 무너진 스탈링을 위로해준다. 하지만 스탈링에게 가장 절실했던건 폴 랜들러에게서 그녀를 보호해줄 권력이었다.
폴 랜들러의 야비함은 정말 화났다. 성공에만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권력자의 모습이 생생했다. 특히 남성과 권력이 결합했을 때의 그 막강함을 소설이지만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남자인 자신이 여자인 스탈링의 능력에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탈링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오직 남성이라는 이유로 스탈링을 무시하고 그녀를 성적으로 유린한다는 상상을 하며 스탈링이 자신에게 굴복당하기를 원한다. 여성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약자를 억압하고 잔인하게 굴복시키는 것을 원하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이자 비겁한 쓰레기다. 그래서 한니발 렉터에게 잡혀 최후를 맞이한 것이 이 작품에서 거의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다.
한니발 렉터 박사와 스탈링의 마지막은 정말 안타까웠다. 그 둘에게 심적으로 공감하여 안타까웠다는 것이 아니라 결말이 그런식으로 쓰여졌다는 것 자체가 너무 안타까웠다. 스탈링은 여성 수사관으로서 성차별과 권력의 부당함을 온몸으로 겪지만 끝까지 당당하게 자신이 가야할 길을 가는 인물이다. 렉터 박사는 인육을 먹고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이코패스지만 스탈링의 어린 시절에 관심을 갖고 그녀와 묘한 유대감을 갖는다. 이 둘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갖는 유대감과 동점심, 친밀함 등으로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절대로 이 둘이 섞이지는 않았다. 전작에서 내가 느꼈었던 이 둘의 목적은 너무도 달랐고 서로에 대한 감정들도 수단적으로만 활용될 뿐이었다. 마치 빨강과 파랑이 서로의 강렬한 색감을 인정하면서도 섞여서 보라색이 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결말 부분에서 스탈링의 색감이 완전히 무너졌다. 스탈링의 진취적이고 당당하며 부당한 것에 끝까지 맞서 싸우는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스탈링에게 기대됐던 것들, 여성 수사관으로서 고난과 역경을 딛고 결국엔 자신의 목적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약물과 렉터 박사의 심리치료로 인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렉터 박사의 곁에 남는 스탈링이 돼버렸다. 이와 동시에 렉터 박사의 캐릭터성도 무너졌다. 박사의 잔인함이 왜 스탈링에겐 적용되지 않는가? 그녀가 박사의 동생 미샤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동생의 순수함을 오직 스탈링만이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샤를 추억하는 방법으로 그녀를 죽이는 것과 그녀를 자신의 곁에 남도록 만드는것 중 박사는 후자를 택했다. 그녀에게 지루한 심리치료까지 동원하면서.
하지만 그의 본성은 잔인함이자 인간 자체에 대한 불신이 아닌가. 스탈링에게 정액을 뿌려 모욕을 줬다는 이유로 죽게 만들고 온갖 피튀기는 살해현장을 만들고도 죄책감 하나 느끼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이 신과 같이 인간에 대한 심판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이코패스다. 이런 인물이 동생의 순수한 영혼이 들어앉을 수 있는 자리로 스탈링을 선택했더라도 스탈링의 트라우마를 그가 직접 치료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죽이고자 했다면 이해가 갔을지도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흔히들 말하는 클리셰가 이 작품과 꼭 맞아들었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다. 스탈링이 FBI를 떠나는게 아니라 계속 남으면서 사건을 수사하고 약자를 도우면서 멋진 활약을 계속하다 렉터 박사와 종국에는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흔하디 흔한 클리셰. 다만 스탈링이 안타까운건 그녀가 거의 내쫓길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그녀의 능력과 지성이 발휘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정말 아쉽고 특히 결말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엄청나게 멋진 캐릭터들이 탄생했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억지로 클리셰를 비틀려다 실패해버린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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