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과 개방이 혁신적 국가건설을 위한 토대임을 역사적 사례를 들어 증명하고 있어 설득력이 높다. 더더군다나 이 역사적 사실들이 모두 강대국이었던 몽골, 영국 등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타당성까지는 힘들어도 명확한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즉 다원성을 기반으로 한 국가 내부 구성원들의 집약을 통해 강대국이 된 사례들이기 때문에 한 뛰어난 지도자의 힘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느니 등의 냉소주의를 약화시킨다.개인적으로 너무 재밌게 읽었지만 마지막 편인 미국에서는 의아한 대목이 있었다. 인종차별을 자행한 남부 백인들 또한 인종차별의 피해자라는 부분이었다. 이 책의 주제가 무엇인지 내내 읽었고, 또한 동감하고 있던 터라 거대한 공감속에서 관용과 개방성의 힘에 대해 느끼고 있었는데 이 구절은 그 힘에 전혀 반대되는 논리였다. 남부 백인들이 인종차별의 피해자라니? 흑인들을 인종차별하면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될 중요한 자원을 지역성장에 기용하지 못했고, 결국 그 때 당시의 일반적인 소득수준에 비해 한참 못미쳤다는 것은 너무나 힘의 논리에 따른 설명이 아닌가싶다. 다원성을 성장동력으로 삼아 성공한 국가라는, 힘의 논리에 따른 성공을 강조하다보니 결국 경제적 패권에 대한 우호적, 옹호적 설명이 들어갈 수 밖에 없지만 피해자의 인권과 가해자의 가난을 동일선상에 올려놓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들었으며 더불어 책에 대한 몰입도도 깨졌다. 저자는 그 시대의 상황은 그 시대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가해자가 초래한 상황으로 발생한 결과를 가해자를 피해자로 만드는 도구로는 적어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내가 이해하는 관용은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에게 행사하는 것이 아닌, 집단의 지성이 올바르게 작동하여 인류 본연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서로 합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절이라니. 아쉽다.이 한 부분 때문에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는 않으나 울림이 작아져버렸다. 숲을 못보고 나무만 보는 것을 싫어하지만 그 나무가 너무 커서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