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릴라 코딱지 ㅣ 밝은미래 그림책 66
다나카 나오토 지음, 호리카와 리마코 그림, 김보나 옮김 / 밝은미래 / 2026년 9월
평점 :

여기 고릴라 한 마리가 있습니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림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인화된 귀여운 고릴라가 아니라 <혹성 탈출>에 등장할 법한 고릴라가 입을 꾹 다문 채 진지한 표정으로 독자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그림책일까요?!

<고릴라 코딱지>가 어떤 그림책인지 가늠할 수 있는 띠지가 있는데요, “폭소 만발! 대화 유도 그림책!”이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들어오고, “고릴라 코딱지를 계속 외칠 수 있을까?”라고 물어요. “네가 이길까? 고릴라가 이길까?” 이 문장에서는 독자와 고릴라가 대치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어요.
띠지 앞에는 글을 담당한 다나카 나오토 작가의 “그림책의 근본은 결국 소통의 도구”라는 말이, 띠지 뒷부분에는 작가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어요.
이 그림책의 가장 큰 목표는 ‘대화를 얼마나 재밌게 만들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어요. 아이에게 “오늘 학교는 어땠어?”라고 물었을 때, “몰라.”, “별로.” 이런 대답만 돌아오면 대화가 이어지질 않죠. 어쩌면 질문 자체가 재미없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상대의 입을 열게 하려면 뭐가 필요할까요? 그때 떠오른 것이 어릴 때 하던 말놀이었어요.
다나카 나오토 작가에 대해 찾아보니, 그림책 출판사인 그랜마마(Granmama)의 편집장이면서 2003년부터 약 23년 동안 '아빠의 그림책 프로젝트(パパ's 絵本プロジェクト)'의 일환으로 전국의 서점과 도서관에서 그림책 라이브 공연을 해왔답니다.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그림책의 본질이 소통의 도구임을 깨달았고, 그림책을 정제된 문학으로 말고, 사람들이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일상적인 소통 도구로, 상호작용을 활기차게 만드는 참여형 그림책을 만들고 싶었다고 해요.
그래서 이 책은 아이가 무조건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는 "무적의 치트 키 단어"를 쥐어줍니다. 제목인 “고릴라 코딱지”예요. <고릴라 코딱지>는 독자에게 아주 강력하고 황당한(!) 규칙을 제시합니다. 핑클의 <영원한 사랑>에서 옥주현씨가 불렀던 그 '약속해 줘~' 부분처럼 고릴라는 포인트 포즈를 취하며 진지하게 당부합니다.

약속해 줘!
앞으로 어떤 물음에도
"고릴라 코딱지!"라고 말하는 거야.
꼭이야.
'답정너’라는 말이 있죠.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줄임말.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원하는 답을 미리 정해 놓고 상대방이 그 대답을 하도록 유도하는 화법이지요.
그림책에서 이런 답정너 유형의 대화가 등장하는 이유는 이미 인쇄된 책의 물리적 한계 때문입니다. 책은 실시간 채팅이나 메신저처럼 '실시간 양방향 소통'은 불가능하죠. 하지만 아이들은 답정너 장치에 마치 자신이 책 속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성취감과 재미를 느낍니다. 제본되어 있어 가만히 넘겨 보기만 하던 그림책이 상호작용이 가능한 장치로 둔갑하는 거죠.
답정너식 규칙은 느긋한 그림책 읽기에 긴장감도 불어 넣습니다. ‘놀이’ 같아진다고 할까요. 질문에 바로 반응하려고, 또 틀리지 않겠다는 마음에 아이의 주의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책이 짜놓은 판이지만, 아이는 "내가 이 책이랑 대화하고 있어!", "내가 규칙을 완벽히 지켜내고 있어!"라고 느끼는 것이죠.😁

이 유쾌함을 완성한 것은 그림의 힘입니다. 이야기 자체는 조금 밋밋할 수 있어요. 글을 쓴 다나카 나오토 작가 역시, 이 책은 그림이 가진 특별한 힘이 없었다면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답니다. 코딱지나 응가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니까 글 그대로 호응하는 그림이 그려진다면 너무 저속한 작품이 되어 버릴 테니까요.😅 글과 묘하게 어긋나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일치하는, 그 미묘한 줄타기를 호리카와 리마코 작가가 그림으로 해냈습니다.
첫 장면부터 눈길을 확 휘어 잡아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 책의 유일한 캐릭터 고릴라가 자신을 소개하는데, 세상만사가 귀찮고 무덤덤한 표정과 아이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행동으로 등장합니다. 츤데레 표정으로요.

호리카와 리마코 작가는 이 책의 고릴라를 일반적인 물감이나 디지털 도구가 아니라, 먹을 갈아서 화선지에 그림을 그렸답니다. 주방용 스펀지를 붓처럼 사용해 고릴라의 털을 거칠게 표현했고, 그 위에 검은 크레용으로 선을 더해 고릴라를 완성했다고 해요.
그리고 장면마다 찍힌 빨간 도장― 동양화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낙관이라고 하죠? 이후에도 계속 낙관이 등장하는데요, 낙관이나 낙관의 단어 역시 호리카와 리마코 작가가 먼저 제안했다고 합니다. 낙관은 질문과 답에 호응하는 듯, 이 대화의 분위기를 더 고조시키는 추임새 역할을 합니다.
동양화 느낌이 물씬 나는 묵직한 필치에 화룡점정으로 빨간 낙관을 꾹 찍어, '코딱지'로 가벼운 대화를 하면서도 마치 하나의 서예 작품이나 동양화를 보는 듯한 멋스러운 반전 매력을 더해줘요. 그림으로 무게감을 잡아준거죠.

모두 보여드릴 순 없지만, 처음에는 고릴라와 같이 검은 먹으로 표현되었던 코딱지가 다양함과 긍정의 의미로 다가오는 장면도 나오고, "오!" 하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도 꼭 이야기하고 싶어요. 글을 쓴 다나카 나오토 작가가 마지막 장면은 구상만하고 색상이나 모양을 구체적으로 지정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런데 호리카와 리마코 작가가 딱! (스포 방지 차원에서 보여드릴 순 없지만) 그려온 것이죠. 글 작가는 마지막 장면 그림을 보자마자 감탄하며 최고의 결말이라고 극찬했다고 하니까요, 여러분이 직접 확인해 보세요. 이 글에선 아껴둘게요~❤️

어른들이 평소에는 하지 말라고 하는 '똥', '코딱지'라는 단어를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마음껏 외칠 수 있어요. 처음에는 약간 민망해 하던 아이도 질문에 답하다보면 자지러지게 웃게 되지요.
요즘 문해력 때문에 독서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책이 숙제처럼 느껴지면 아이들은 책과 멀어지기 쉽습니다. 앞서 언급한 다나카 나오코 작가가 말한 것처럼 책의 세계로 가는 길은 재미에서 시작되는데요, <고릴라 코딱지>는 그 첫걸음을 웃음으로 이끄는 책입니다. 책 읽기의 장벽을 낮춰주는 그림책, 아이와 어른의 대화를 이끄는 그림책! 오늘은 아이와 함께 <고릴라 코딱지> 책을 펼쳐보면 어떨까요?! 😊📖
*본 서평글은 제이포럼에서 진행한 서평단 모집 이벤트를 통해, 밝은미래 출판사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