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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5월
평점 :
건축가 유현준씨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새로운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제목에 들어간 단어들이 꽤나 묵직하죠?
‘인문(人文)’, 인류의 문화, 인물과 문물을 이르는 말로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을 인문학이라고 하죠. 거기에 유현준 건축가의 전공인 ‘건축(建築)’이 중심에 자리 잡고 여행하는 동안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는 ‘기행(紀行)’이란 단어까지 더해졌습니다.

이 책은 건축물에 대해 건축가 유현준씨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고 적은 글입니다. 처음 책을 마주하고 492쪽이나 되는 두툼한 두께에 살짝 놀랐지만 책을 읽다보면 유현준 건축가가 풀어내는 이야기에 푹 빠져들게 됩니다. 건축물을 바라보는 건축가의 전문적인 지식과 일반 독자들에게도 무리 없이 다가오는 편안하고 다정한 설명들로 페이지가 순식간에 넘어갑니다.

여는 글에서 유현준 건축가는 자신이 건축 공부를 하면서 감명 받은 서른 개의 근현대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세계 곳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 같은 건축물이라고 하는데, 서른 개의 건축물을 뽑은 기준은 ‘기존에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발상의 전환에 성공한 건축물들’ 이랍니다.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건축물들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 사람들의 흔적이라는 것이죠.
서른 개의 건축물을 뽑기 무척 힘들었을 것 같은데, 유현준 건축가는 마치 ‘이상형 월드컵’ 하는 것과 같았다고 표현해요. 백 개 가까운 쟁쟁한 후보 중에서 고르고 고른 서른 개의 건축물들을 ‘기행’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대륙별로 모아서 1부에서는 유럽, 2부는 북아메리카, 그리고 마지막 3부에서는 아시아에 있는 건축물들을 소개합니다.
아무래도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독보적인 건축가들과 주머니 두둑한 건축주들이 많은 곳에 혁신적인 건축물들이 세워지는 것이 순리인지라 유럽에 12개의 건축물, 북아메리카에는 11개, 아시아에는 7개의 건축물이 이 책에 이름을 올렸어요.

1부에 소개된 유럽 대륙에 세워진 건축물들을 읽다보면 역시 현대 건축사에서 빼놓을 없는 스위스 태생의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라는 건축가 이름이 뇌리에 박힙니다. 빌라 사보아, 롱샹 성당, 피르미니 성당, 라투레트 수도원, 유니테 다비타시옹까지! 유현준 건축가의 말을 빌리자면 ‘또 르 코르뷔지에다. 정말 지겹게 나온다. 웬만하면 다섯 개까지는 소개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p.121)’라고 하는데 그만큼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들이 현대 건축물에 끼친 영향이 크고 혁신적인 건물이었다는 증거겠지요.
건물로 들어서게 되는 입구 풍경에서부터 마주하게 되는 입면, 내부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 건축물에 쓰인 재료, 그 건축물이 우리들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건축물의 평면도와 조감도는 마치 VR로 가상체험 하듯 건축물을 느끼게 해요. 거기에 유현준 건축가의 다채로운 묘사는 친절한 가이드와 함께 건축 투어하는 기분이 듭니다. 각 건축물의 설명이 끝나는 부분에서는 건축물의 이름과 건축 연도, 건축가와 위치, 주소와 운영시간까지 디테일한 부분까지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유현준 건축가는 '이 건축물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각 장의 말미에 위치를 정확하게 수록했다고 하는데, 건축물을 직접 보지 못한 이들에게, 또 직접 가서 확인하려고 마음 먹은 이들에게는 더 없이 친절한 책이에요.

퐁피두 센터를 통해 ‘하이테크 건축’이 무엇이며 왜 이런 건축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개미지옥처럼 퐁피두 센터 쪽을 향해 빠져드는 건축학적 이유와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에 숨겨진 동양의 음양 사상을 엿봅니다. 또 롱샹 성당에서는 벽이 주인공인 서양 건축과 지붕이 주인공인 동양의 건축의 차이점, 피르미니 성당에서는 한 건축가의 가치관 변화가 건축물에는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지,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통해서는 우리나라 아파트 천장고 2.3미터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깨알 건축 상식도 얻게 된답니다. 독일 국회의사당을 통해서는 건축을 통해 드러나는 국격, 퀘리니 스탐팔리아에서는 ‘테토닉tectonic'이란 단어와 함께 건축을 보는 또 하나의 눈을 얻게 되죠.
이런 건축학적 지식 외에도 유현준 건축가의 입담에 빵 터지는 부분도 있었어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명하면서 르 코르뷔지에나 아이젠먼을 종로에 깡패 조직을 가진 김두한이라면, 프랭크 게리를 만주 일대를 다니며 혼자서 주먹 세계를 평정한 시라소니에 빗대어 표현하는데 건축 비전공자인 일반 독자들 머리 속에 르 코르뷔지에와 프랭크 게리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이해되는 설명이라 할 수 있지요.

2부 북아메리카에서는 11개의 건축물을 소개합니다.
공중권 개념이 만들어진 배경과 함께 제약을 넘어 창의적인 디자인으로 우뚝 선 ‘시티그룹 센터’, 건축에 관심이 없더라도 그 이미지는 친숙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유기적 건축물 ‘낙수장’,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인류는 왜 돌을 세우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소개되는 ‘베트남 전쟁 재향군인 기념관’, 철학적 질문을 던지며 건축 설계를 한 루이스 칸의 ‘킴벨 미술관’, 게비온(Gabion)이라는 용어와 함께 불규칙한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도미누스 와이너리’, 헷갈리는 발코티와 베란다, 테라스 용어를 말끔하게 해며 소개하는 ‘해비타드 67’ 등 독특하면서도 이전에 없던 새로운 공간을 찬찬히 설명하고 있어요.

'인류의 조상들은 왜 죽음을 기리기 위해 노력했을까?'라는 질문과 '공감을 자아내는 기념의 공간을 만든다는 의미' 부분에선 건축물을 통한 인문학적 접근에 감탄했었고, 킴벨 미술관에 방문할 때 어떤 시간대가 방문해야 가장 멋있는지를 알려주는 부분(해가 서쪽에 있을 때)에선 역시 한국인의 감성을 아는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집의 가치를 왜 집값으로만 보는지를 찬찬히 짚어내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탁 쳤어요. 발코니가 확장되어 모든 세대의 모습은 유리창 뒤로 숨어 버리고 각 집들은 개성을 잃어버린 현상을 꼬집으면서 모든 집의 모양이 획일화 되면서 가치관이 정량화되는 문제가 생겨버렸다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인스타나 페이스북 같은 SNS에 공간에 왜 카페나 펜션 인증샷 남발로 이어지죠.
우리에게 '해비타드 67'같이 마당 같은 공간에서 내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아파트가 필요하다는 말에 큰 공감이 갔습니다. 법규 문제나 건설비 상승, 방수 공사와 단열 처리 같은 현실적인 벽도 함께 언급하셨는데, 법규라는 소프트웨어가 업그레이드 되어서 마당 같은 발코니나 베란다가 있는 아파트가 중산층 주거의 표준 모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유현준 건축가의 바람에 저도 격하게 동감했습니다.

3부에서는 아시아에 건설된 7개의 건축물이 소개됩니다.
현대 건축계의 진정한 힙스터 이토 도요오의 ‘윈드타워’로 시작해, 일본 전통 건축의 공간 시퀀스와 서양 전통 건축의 기하학적 특성을 융합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 ‘아주마 하우스’, 두꺼비집을 짓는 원리를 이용해 완벽한 아날로그적인 아름다움을 재현한 ‘데시마 미술관’, 혁신적인 구조를 이용해 랜드마크로 자리잡은 'CCTV 본사 빌딩’,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의 공간적 차이를 설명하는 대표적 하이테크 양식의 금융회사 사옥인 ‘홍콩 HSBC 빌딩’, 아랍 전통 건축에서 사용되는 마시라비야에서 모티브를 따와 환경과 물질, 현상과 체험자의 심상을 완전히 이해하고 조율한 장 누벨의 ‘아부다비 루브르’ 등을 다루고 있어요.

아시아에 있는 건축물들을 다룬 챕터라 반가우면서도 우리나라 건축물들은 목록에 없어서 살짝 아쉽더군요. 3부를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부분들도 많습니다. 일본이나 중국, 한국에서는 집에서 담장이 아주 중요한 건축 요소가 된다는 점이라던가, 일본 전통 건축에서 진입로가 복잡하게 디자인 된 이유,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한 실질적인 이유, 안도 다다오 스타일을 우리나라에스 무작정 따라해서는 안되는 점 등 이었어요. (궁금하신 분들은 꼭 책을 읽어보세요!!)
건축의 묘미는 경험하는 자의 신체의 크기, 과거의 경험, 무의식 등에 의해서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건축 공간은 자세하게 설명된 소설이라기보다는 읽는 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시와 더 비슷하다. 나에게 의미 있게 다가왔던 30편의 ‘공간의 시’가 독자들에게도 의미 있게 느껴졌으면 좋겠다.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닫는 글 중에서, p.485
유현준 건축가가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해석을 달아준 30편의 '공간의 시'- <유현준의 인문 건축 기행>.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의 삶과 시대가 투영된 건축물들을 살펴보고 우리가 공간에 담아야 하는 마음과 방향을 조심스레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건축물들을 보며 마냥 부러워할게 아니라 우리 건축물은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할지, 어떤 생각과 마음을 품고 지어져야 하는지도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확장된 인문학' 책이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신 유현준 건축가에게, 또 아름다운 건축물 사진과 도면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편집하고 출간한 을유문화사 담당자분들께 감사를 전하며 독서 기록을 마무리 합니다.

*본 서평글은 을유문화사에서 진행한 서평단 모집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해당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