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권면에 남겨진 작가의 말이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조용한 세계를 상상했다’고 하는데, 이 상상의 단초는 작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어느 날 하얀 풍산개를 산에서 산책시키다가 고라니를 마주하게 됐고, 고라니를 향해 뛰쳐나가려는 풍산개의 목줄을 부여잡으며 문득 우리가 서로 속한 세계가 다르다는걸 느꼈다고 한다. 인간에게 길들여지기 이전, 그들의 본능 속에 잠재된 늑대의 야성과 본능을 그림책으로 옮겨오고 싶었다고 한다.
Youtube채널 [보림TV]에 소개된 이미나 작가의 작업 브이로그를 보면, 늑대의 본능을 그림책 한권에 담아내기 위해 얼마나 시간과 노고가 들었는지 알 수 있다.
(https://youtu.be/pM7_tVRCYBM)

독자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앞표지 제목 <조용한 세계>에는 파란박이 입혀져 있다. 각도에 따라서 검정 또는 반짝이는 파랑으로 보이는데,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듯 하다. 우리 눈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지만, 허기진 늑대에게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보름밤이다. 숲 속은 고요하지만 사냥의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긴박하고 숨가쁘다.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반짝이는 ‘박’의 쓰임에는 그런 이중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건 아닐까?

표지그림은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지 않다. 텔레비전 화면처럼, 액자 속 그림처럼 하얀 틀 안에 조용한 세계가 담겨 있다. 표지를 마주하는 독자를 액자 밖의 관찰자로 확실하게 선을 긋고 출발하는 느낌이랄까? 그 덕에 표지 그림을 더 찬찬히 바라보게 된다. 보름달이 뜬 밤, 늑대들의 눈빛이 숲 속 어딘가를 향하고 있고, 나무 가지 위에 하얀 눈이 쌓인 숲 속 풍경은 거친 붓 터치로 살아 꿈틀댄다.
뒷표지에는 그림책 작가 류재수 선생님의 추천사가 담겨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고맙고 아름다운 그림책'이란 류재수 선생님의 추천사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살아있는 날것 그대로의 느낌을 나타내려는 듯, 모든 페이지에는 이미나 작가의 고민이 깃든 붓 자국이 가득하다. 예술 작품을 모은 도감을 만난 느낌이다.

눈이 쌓여 광대한 바다를 닮아 있는 숲 속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늑대 한 마리가 등장하고 그 늑대의 독백으로 이야기는 이어진다. 혼자 나서는 사냥은 번번이 실패하고, 하루, 이틀이 지나 빈 속으로 닷새가 지났다. 허기가 턱밑까지 찬 늑대는 달빛을 조명삼아, 친구들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사슴 사냥에 나선다. 과연 늑대는 고픈 배를 채울 수 있을까? 조용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야기는 길지 않다. 각각의 페이지에는 최소한의 글자만 담겨 있다. 하지만 리듬이 있고, 긴박함이 전해진다. 배경음악이나 효과음 없이 단지 거친 붓질로 나타난 질감과 다양한 구도의 화면 구성으로 원초적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이미나 작가의 소재를 대하는 독특한 시선과 압도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회화적 특징은 전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익숙한 장소인 ‘터널’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해석한 데뷔작 <터널의 날들>(2016)이나 어릴적 살던 동네를 떠올리며 친구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이야기를 출어낸 <나의 동네> (2019) 역시 평범한 일상을 회화적 터치로 살려낸 작품들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확실하게 구축하고 있는 이미나 작가에 대한 평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림책계의 두 거장의 말로 대신할 수 있다.

이미나 작가표 생명력과 생동력이 담긴 <조용한 세계>. 첫 장면을 마주하는 그 순간부터,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 강렬하게 그림 속에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고, 우리는 무리에서 떨어진 외로운 늑대처럼 사력을 다해 뛰고 있다. 처음 맞이하는 낯선 환경 속에서 사냥에 서툰 늑대처럼 얼음물에 빠지기도 하고, 사슴 발굽에 맞아 상처가 남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버텨내야한다. 내일 드넓은 숲 속을 뛰어다니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다시 이 숲을 누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 내야한다. 이미나 작가가 오랜기간 공을 들여 작품을 완성해낸 것은, 절망하고 포기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건 아닐까??
지쳐버린 당신이 호흡을 고르고 다시 한 번 달려주길 바라며, 이 아름다운 그림책 <조용한 세계>를 조심스레 들이밀어 본다.
* 본 서평글은 보림수피아23기로 선정되어, 보림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