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는 집과 울타리가 그런대로 견고하는 생각 역시 근대적 관념이다. 현실적으로 헌법은 국가 내에서 통합적이고 통일적인 규범의 기능을 담당하리라 기대한다. 개별법은 끊임없이 제정과 개정 그리고 폐지를 반복하면서 현실에 적응하는데, 그모든 변화는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헌법은 세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안정적 견고함을 제공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헌법도 흔들리는 조짐을 보였다. 헌법적정의가 자연법적 정의와 법적 정의 사이에서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헌법의 흔들림은 헌법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의존 때문에 발생했다. 헌법은 규범으로서 이중적 성격을 지녔다. 이상적 근본규범이라는 상징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범의 하나이기에 현실적효력을 발휘하는 실정성이 혼재되어 있다. 헌법의 상징성을 강조하여손이 닿지 않는 추상의 허공에 올려놓고 세속의 문제는 헌법이 거느리는 모든 실정법이 해결하도록 한다면, 헌법의 고결성은 보존할 수 있겠지만 헌법을 만든 국민과 헌법 사이의 괴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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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가 고색창연한 자연법의 편린인지 정치적 인간의 가냘픈 희망인지 불분명하다.
각자의 마음속에 잠재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논쟁하는 가운데 세속의정신과 물질 사이의 경계를 가늠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헌법은 그 항로의 등대가 되어주면 충분하다.
등대가 항해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등대가 항해술을향상시키지는 못한다. 등대를 멋지게 지어 꾸민다고 더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헌법 조문을 가장 좋다는 내용으로 구성한다고 최고의 헌법이나 국가가 되지 않는다. 헌법은 법이면서동시에 규범이다. 법적 형식의 헌법 조문뿐만 아니라 헌법이 가리키는정치적 공동체 구성원의 삶의 형태가 모두 헌법에 포함된다. 불문헌법국가든 성문헌법 국가든 그것이 한 국가의 총체적 헌법이다. 성숙한헌법적 관행은 성문법의 자구만 따져서는 형성될 수 없다. 훌륭한 헌법적 관행이 현실의 정치 행위를 통해서 거듭 확인되고 다져져야 최고의 헌법과 바람직한 국가의 가능성이 잉태된다.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헌법과 현실에 눈길을 주는 국민은 누구나 정치인이다. 근대 헌법 탄생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의 하나다. - P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