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도망칩시다. 안 되겠다 싶으면 도망칩시다. 나중에 다시 어떻게든 하면 될 거예요. 

인표가 은영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크게 말하지 않았으므로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인표가 아니라 은영 스스로가 말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말이어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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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서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만 더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칙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은영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잘되지 않았다. 강선이 방충망에 등을 기댔다. 천천히 망 사이로조그만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고 나선 금방이었다.

빛나는 가루가 강선이 처음 서 있던 가로등 쪽으로 흩어졌다. 상자를 들고 달려가서 주워 담고 싶다고, 은영은 생각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대신 아주 오랜만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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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만약 능력을 가진 사람이 친절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치관의 차이니까.

"한참 노래를 부르던 남편이 저를 보더니 ‘팬도 아니면서 왜 왔어요?‘ 하고 대놓고 물었어요."
"설마 마이크를 잡은 채로요?"
"팬들이 남편 대신 후렴 부분 부를 때요.."

소문대로 직설적인 사람이구나 싶은 일화였다. 그러더니 나중에 매니저를 통해 연락처를 물었다고 한다. 막상 팬이었던 친구는 뭐라도 연결 고리가 생겨 기쁨과 동시에 왜 자기가아니라 래디 엄마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 복잡한 심경을이기지 못해 멀어졌다고 했다.

"팬이 아니라서 좋았대요. 영원히 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좋았대요."
"역시 독특하시네요. 음, 팬이면 좀 불편할 것 같긴 해요."
"팬이면 차분하게 대화가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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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으로서 상현은 결점을 많이 갖고 있었다. 세상에 결점이 많지 않은 남편이란 없을 것이다. 남편이 되는 순간 여자는 그에게서 수많은 결점을 발견한다. 자기 아내가 되는 순간 남자가 여자에게서 수많은 결점을 보게 되듯이, 그것은 결혼을 함으로써 역할분담을 하게 된 동업자들 사이의 이기심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상현이 남편으로서 결점이 많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을 얻기 위해 한숨짓고, 얻은 다음에는 믿지 못해 조바심을 내고, 결국에는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스스로 피폐해지는 과민한 사랑. 어쩌면 그것은 나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의존적이고 어리석은 방식으로 타인에게 사랑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에게는 그런 사랑을 원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나는 사랑의 소모를 두려워했다. 마치 광합성으로 스스로 제 먹이를 만드는 녹색 식물처럼, 햇빛을 받아들이고 물을 길어올려 자기 안에서 스스로 먹이를 만드는 사랑을 원했다. 내 몸속에서 혼자 사랑이라는 먹이를 만들고 그것을 먹으며 생존해가기를 말이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황량한 겨울 들판을 헤매며 타인을 찾아 울부짖고 싶지는 않았다.

현석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상현도 받아들일 수 있다.
내 안에서 사랑을 만들 줄 안다면 상대가 굳이 운명적 대상일 필요는 없다. 인간이란 결코 제 운명을 바꾸지 못하는 대신 적응할수는 있으니 말이다.

누구나 마지막 춤 상대가 되기를 원한다. 마지막 사랑이 되고싶어한다. 그러나 마지막이 언제 오는지 아는 사람이 누구인가 음악이 언제 끊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마지막 춤의 대상이란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대와의 춤을 즐기는 것이 마지막 춤을추는 방법이다. 마지막 춤을 추자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대답하면된다. 사랑은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고.

그의 말이 맞다. 춤 상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인가. 춤을 즐기면 그만이다. 모든 게 다 마지막이다. 마지막 춤이 아닌 것은 없다. 그리고 또한 마지막 춤도 없다. 단지 춤뿐이다.
구석에서는 계속 딸꾹질 소리가 들려온다. 노래도 계속된다. 남자는 눈길을 던지고 그리고 차는 밤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나는 취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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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순간에서 순간으로 떠다닐 수는 없어."
"나는 인생에 자신이 없어. 그래서 가볍게 살고 싶어하는 거야. 난 내 인생을 사소하고 잘게 나누어서 여러 군데에 걸쳐놓고, 그리고 작은 긴장만을 갖고 그 탄성으로 살아갈 거야. 전부를 바쳐서 커다란 것을 얻으려고 하기엔 나는 삶의 두려움을 너무 빨리 알았어.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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