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아버지가 누구인지 안다면 그가 어머니에 대해 좀더 말해주지 않을까. 그러나 모든 사라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후광뿐이었고, 그 때문에 그는 거리 어디에서나 마주치는 흔한 아저씨다운 모습과는 멀어졌다.

나로 말하자면 어머니보다 긴 생을 남겨놓았고, 그 시간을 빚을 갚는 일에 투신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어머니의 과거에서 쓸모 있다 여겨지는 것들로 어머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관둘 것이고, 결국에는 어머니를 미워하고 알 수 없는 대상에게 화를 낼 것이고, 이내 모두 포기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 우리의 미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지금은 살아 있다는 듯 가벼이 숨을 내쉬었다.

대신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내게 책을 읽어주다 깜빡 잠든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내려놓은 책을 들고 아무렇게나 이야기를 지어냈다.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소년이 그려진 책이었는데, 그애가 물고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눈을 뜨더니 "그래서 어떻게 됐어?" 하고 물었다. 나는 물고기가 강을 타고 흘러갔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게 틀렸다는 걸 알았고 제대로 글자를 읽지 못해 어머니를 실망시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미소를 짓고는 "그랬구나. 물고기가 왜 그랬어?" 하고 물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강을 좋아해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어머니를 따라 웃었다. 어머니가 나를 안아주며, 흘러가는 건 다 좋은 거라고, 좋은건 다 흘러간다고 말했다.

나는 곤히 잠든 어머니를 깨워 그 얘기를 해주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그때 웃음을 터뜨린 어머니가 얼마나 환했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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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도, 환자도, 가족과의 상처도, 사람들의 시선도 아니었다.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해 아주 처절하게 울었다. 소방관의 사망보험금을 전부 쏟기에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까마득했으므로, 보경은 결국 식당과 집을 마련했고 남은 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살면서 그렇게 비참하고 서글펐던적은 처음이었다. 소방관의 사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 일은 애초에 보경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문제였으므로 탓할 수있는 것이 세상에 많았다. 억울하다고 소리치며 삿대질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손가락이 보경의 가슴을 찔렀다. 날카롭게 파고들어 기어코 상처를 덮어둔 가슴을 짓이겼다.

그날 이후로 보경과 은혜 사이에는 갚을 수 없는 부채가 쌓였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어서 결국 서로가 떠안고 있어야 했다.

은혜는 그때부터 바라는 것이 없어졌고 보경은 반대하는 일이 사라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선이 생겼다. 서로에게 쉽게 상처줄 수 없도록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고, 그 관계에 연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보경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어쩌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보경은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없는 채 엄마가 되었으므로 두 아이에게 이해를 바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때는 도망치는 기간을 정해뒀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정확한 날짜를 정해두지 않으니 돌아가는 날이 점점 미뤄졌다. 가끔 세상은 은혜가 들어갈 틈 없이 맞물린 톱니바퀴 같았다. 애초에 은혜가 들어갈 수 없게 조립된 로봇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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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그곳에 오래도록 있고 싶어서 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공간이 은혜가 오래 머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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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매일, 매시간마다 색과 모양이 바뀌었다. 하늘은 파란색이었지만 가끔 보라색이나 분홍색, 노란색, 회색이 섞이기도 했다. 그렇게 섞인색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콜리는 ‘파랑분홍‘이나 ‘회색도랑‘으로 단어를 합쳐서 불렀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동시에 걱정이 들었다. 혹시 세상에 이미 그만큼의 단어가 있는데 자신이 모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단어들은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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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가의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나를 죽이고 싶어할지 모르지만, 지렁이들은 제때 왔다. 우리가 다른 모든 종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하기 전에 와줬다는 게 감사할 정도다. 궤도는 가까스로 수정되었다. 나는 배낭에 들어 있던 은박 담요를 덮고 잠들며 가끔 웃는다. 내가 죽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살아날 거란 기쁨에, 기이한 종류의 경배감에.

사람들이 죽었다. 지렁이들은 사람을 표적 삼아 공격하진 않았지만 건물들을 집어삼키면서 같이 삼켜버렸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었으므로, 그리고 그 죽음은 대개 즉시 확인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감정들은 유예되었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때의 사람들이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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