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머무는 밤
현동경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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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일의 밤을 그녀와 함께 했다. 그녀가 이끄는 곳이 어딘지 모른다. 그래서 더 두근거렸나 보다. 내일은 어떤 곳으로 떠나게 될까. 그다음 날에는 어떤 풍경을 보게 될까. <기억이 머무는 밤>현동경 작가의 여행 에세이이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은 현재에 충실한 메모이자 짧은 일기와 같은 책이었다. 한 발자국 뒤에서 보고 쓴 글이 아니라 그곳이 어디든, 언제든 간에 그 순간 담아낸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작가는 첫 번째 밤부터 일흔여섯 번째 밤까지 그녀의 기억이 머물렀던 순간들을 들려준다. 하룻밤에 하나의 이야기만을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짧지만 깊은 여운이 남겨지는 글과 사진 덕분에, 그리고 여행 에세이를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괜시리 나도 나도 펜을 들어봤다. 왠지 일흔일곱 번째의 밤은 나의 이야기로 채워야 할것만 같았다. 


<기억이 머무는 밤>은 친절하지 않은 여행 에세이이다. 작가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알려주지 않고 사진에 담겨있는 풍경을 소개하지도 않는다. 오직 그 순간에 느꼈던 감정들과 자신만의 짧은 이야기로 채워놓았다. 만약에 여행지의 이야기가 가득해 나도 당장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여행 에세이를 읽고 싶었다면 <기억이 머무는 밤>은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언젠가 야간 기차를 타게 된다면 나는 <기억이 머무는 밤>을 가방에 담아 가져갈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뿐인 바깥은 보이지 않고 곳곳에서 들리는 코 고는 소리와 일정하게 덜컹이는 기차 바퀴 소리만 들리는 야간열차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를 여행하고 쓴 글인지, 어느 나라를 찍었는지 전혀 소개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여행 에세이지만 현실에 충실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누군가의 여행을 부러워하며 읽는 책이 아니라서 좋았다. <기억이 머무는 밤>은 여행이라는 출발선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그녀의 이야기이다.


캐나다의 어느 시골에서 지낼 적에 바깥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펼쳐지는 광활한 모습에 문득 '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종류를 막론하고 문을 연다는 행위만으로도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고나 할까.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시작하기 싫은 하루를 벗어나거나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서도 일단은 문고리를 돌려 봐야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짧고 간결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작가의 글도 좋았지만 <기억이 머무는 밤>에서 나는 특히 그녀의 사진들이 마음에 들었다. 사진은 '내가 지금 그곳에 있어요'라고 말 하는 것만 같았다. 최대한 배경이 잘 나오도록 구도를 잡아 찍은 셀카카도 아니다. 분명 사진 속에 작가는 없지만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뷰파인더 뒤에서 그 순간을 찍으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된다.


여러 밤의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지만 그중에서도 마흔세 번째와 마흔여덟 번째 밤의 이야기가 좋았다. '언젠가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저자는 용기의 단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루라도 숱하게 쏟어지는 칼럼과 SNS 속 열변을 토하는 청년들은 하나같이 '떠나라'고 말한다. 수능 대신 떠나고 사표 던지고 떠나고 떠나지 못할 이유가 더 생기기 전에 떠나야 한단다. 그러나 그 누구도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이에겐 위로와 응원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 돌아가는 것에 대한 용기, 너무나 당연하다 여기기 때문인 걸까.

'싫어할 권리'에 대해 말하는 마흔여덟 번째의 글은 여행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나의 경험을 비슷하게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는 오만하지 않았을까. 여행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단지 이 세상에 수많은 참 즐거운 것들 중에 하나일 뿐인데 요즘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비롯해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경험을 했다는 것에 대해 경쟁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

여행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느샌가 이 작은 나라 안에서 떠나는 것마저도 경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누구' '~보다'라는 단어로 본인의 여행에 대해 자부한다. 물론 스스로에 대한 자부와 자신감은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겐 오히려 갖추어야 할 것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넘치는 자신감이 타인의 감정이나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다.

저마다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 시작한 여행인데 요즘은 무슨 인생의 전 부인 양 그것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설령 싫어하기라도 하면 마치 인생을 모르는 것처럼 치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좋아하는 것에 대한 자유는 보장이 되면서 싫어하는 것에 대한 권리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고나 할까.


<기억이 머무는 밤> 끝부분에 작가의 삼촌이 이런 말을 한다. "동경아, 오십이 넘으니 이제 세상이 좀 보여. 어차피 언젠가 늙고 죽는 거야. 서두르지 말고 화내지 말고 살면 되는 겨."

나도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즐겨 읽는 여행 에세이의 취향도 달라졌나 보다. 예전에는 읽고 나면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이 좋았는데 이제는 이 책이 여행을 말하는 건지, 에세이에 대해 말하는 건지 애매모호한 책이 좋다. 당장 보이지는 않아도 그런 책에도 흥분과 열정이 잔잔하게 깔려있다.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여행을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해 준다.

<기억이 머무는 밤>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작가의 이야기와 짧은 단상들 매력적인 사진들이 가득한 이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 나는 여행 중이었다. 그녀가 했던 모든 순간의 기록들이 가득했던 나의 76일의 밤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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