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트레일스 - 길에서 찾은 생명, 문화, 역사, 과학의 기록
로버트 무어 지음, 전소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온 트레일스>는 제목 그대로다. 길 위의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온 트레일스>는 마치 내가 저자가 걸어왔던 그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책이다. 하이킹과 또 다른 분야인 트레일은 백패킹 분야에서 '걷는 길'이라는 의미로 쓰이며 <온 트레일스>에서 저자가 2009년에 시작한 3,360킬로미터에 이르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비롯해 페루의 잉카 트레일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의 올레길이 트레일 코스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온 트레일스>의 프롤로그에는 왜 저자가 트레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트레일을 통해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길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한 편의 에세이와 같은 저자의 이야기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길에서 겪고 느꼈던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도 한편의 완벽한 기행문이었다. 그의 걸음을 따라가면서 가벼운 준비운동을 하자. 이제 당신의 눈앞에 펼쳐질 길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도시의 편리한 아스팔트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온 트레일스>는 길에 대해 다섯 종류의 역사와 하나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바라보는 길은 흥미롭고 신선했다. 단순히 걷는다는 행위를 좋아할 뿐, 나는 그동안 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길 위를 걸은 후 길에 대해 알고 싶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어대고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가 온몸으로 길의 기록들을 배워 나가는 저자의 도전정신이 부러웠다.

길의 기원은 말 그대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트레일을 발견한 대학 연구원 리우와 함께 길의 시작을 알아보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질학적인 면에서 바라본 길의 역사는 인간이 지구 최초의 정복자가 아님을, 지금의 길을 처음으로 걸었던 존재가 아님을 알게 해준다.

2장에서는 곤충 트레일을 통해서 본 인간의 길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특히 트레일에 대해 흐릿한 개념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온 트레일스>에서 말하는 trail(트레일)은 무계획적이고 단정 짓지 않으며 제멋대로인 느낌이다. 오직 야생의 지역에만 존재할 뿐 문명화된 지역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흙 묻은 발이 지나가면서 뒤범벅된 자국을 남겨서 형성되는 경향이 있는, 믿고 따라갈 수 있는 흔적의 연속이다.


1장이 지질학, 2장이 곤충학에서 바라본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3장에서는 우리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수많은 동물과 가축들의 길에 관해 들려준다. 저자는 인간이 다른 종의 동물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함께 살거나, 죽이거나 또는 연구하는 세 가지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온 트레일스>에서는 동물들의 트레일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트레일 위에서 동물들을 관찰하고 기르고, 사냥하는 방법을 통해 동물들이 길 위에서 생존해 온 방식을 이해하고 그들의 방법이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분별한 길의 파괴로 인해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그들의 길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저자는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길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종과 함께 걸어온 길의 역사가 있다면 온전히 인간만이 걸어온 길의 역사도 있다. 4장 인간과 역사와 이야기가 얽히는 길에서는 저자가 걸었던 수많은 길의 역사와 처음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묻어있다. 개척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미국의 땅에 오기 전부터 그 트레일을 걸어왔던 인디언들의 이야기는 신비하고 재미있었지만 동시에 길을 잃고, 더 이상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수많은 길 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평온함보다 고난과 피의 흔적이 가득한 한국 역사 속의 길 또한 미국의 트레일보다 더 많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트레일을 처음 만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왜 트레일을 만들게 되었고, 현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트레일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5장 속에는 트레일을 걷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여유롭게 생각하며 느긋하게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극한의 체험으로 트레일을 종주하는 그들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아주 오래전에 포기했었던 도전에 대한 열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트레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트레일은 오직 눈을 떴을 때 걷는 것과 걷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단 두 가지의 선택만 있는 아주 단순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 극한의 행동을 취함으로써 무엇을 얻고 잃는지는 오직 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하고, 실패하고 성공한다. 하지만 성공한 모든 사람이 <온 트레일스>의 저자처럼 길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쌓고 여전히 길 위에 서 있지는 않다.

길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온 트레일스>는 단지 미국의 트레일 코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아니다. 길 위에 있는 수많은 길을 보여주며 말한다. 이 길을 걷는 것도 당신의 몫이며 다른 길로 들어서는 것도 당신의 선택이다. 나는 <온 트레일스>를 읽으며 인생에 대해 떠올렸다. 각자 인생의 역사와 이야기, 앞으로 펼쳐질 것들은 끝없이 이어지는 트레일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거대한 나무 밑동과 갑자기 내리는 폭우, 미칠듯한 추위처럼 언제 어디에서 고통과 좌절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내리쬐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멋진 풍경이 펼쳐질 것이다. 저자가 길을 걷고 길을 알게 되고, 앞으로 더 많은 길을 계획할 것이라 말하는 <온 트레일스>는 길에 대한 종합 인문학이자 생생한 기행문이다.

트레일을 걷는 사람들은 트레일 위에서 불리는 이름이 따로 있다고 한다. 저자인 로버트 무어의 트레일 이름은 스페이스맨이다. <온 트레일스>의 길을 걸으며 생각해봤다. 나는 트레일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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