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 - 북아일랜드 캠프힐에서 보낸 아날로그 라이프 365일
송은정 지음 / 북폴리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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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떠나면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몇 개월이라도 한국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적이 있다. 그래서 떠났고, 돌아왔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녀와 나의 차이점은 그녀는 견뎠고 나는 타국에서의 낯섬을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 며칠간의 여행이 아닌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곳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익숙함을 그리워하지 않고,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낯섦 속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 물론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긴 인생의 빠른 속도를 반 템포 정도 늦추는 휴식기가 될 수도 있지만 낯섦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살아보고 견뎌낸 사람들을 보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녀는 떠났고, 살았고,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보는 법을 배웠다.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 지기도 한다.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을 읽으며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을까. 그녀의 용기가 부러웠고 분명 힘들었던 적이 꽤 많았을 텐데도 평온하고 담담한 그녀의 이야기가 놀라웠다.


'북아일랜드 캠프힐에서 보낸 365일'이라는 소개처럼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은 저자가 캠프힐에 가게 되는 순간부터 그곳에서 일 년을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의 모든 시간을 담은 책이다.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써 내려간 일기처럼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가 머물렀던 북아일랜드 캠프힐에 있었다. 단숨에 읽었다. 조곤조곤 적어내려간 저자의 글은 그녀가 머물렀던 북아일랜드의 풍경처럼 조용했지만 계속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캠프힐은 장애인과 함께 일하며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는 프로그램으로 처음에 그녀는 무료 숙식이라는 말에 솔깃해 캠프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캠프힐에 대해 알아보면서 점점 더 그곳 생활에 대해 매력을 느꼈고 특히 그곳에서는 지금과는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10여 곳의 커뮤니티로 메일을 보냈지만 북아일랜드에 위치한 몬그랜지 커뮤니티에서만 승낙 메일이 왔다. 그녀는 우연히 알게 된 캠프힐, 더군다나 생각해 보지 않은 북아일랜드로 떠난다.

일상을 산다는 말만큼 다정하지만, 또 겁나는 게 있을까. 출근길 지옥철과 야근, 다달이 빠져나가는 카드 값과 게으른 자신과의 싸움이 일상의 맨얼굴이었다. 언제나 여행을 갈망했던 건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잠시나마 나를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의 차분한 글도 좋지만 일상이 아니면 담아내지 못하는 그곳의 사진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출근길에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예뻐서 찍고, 갑자기 내리는 비가 만들어낸 창밖 풍경이 분위기 있어서 찍은 사진처럼 캠프힐의 일상과 그곳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의 사진을 보니 왜 그녀가 이 책의 제목을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이라고 지었는지 십분 이해되는 것 같았다.

책 속에는 물론 그녀가 생활하면서 힘들었던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일까. 힘들었던 상황 역시도 참 즐거운 추억이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에 캠프힐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을 읽는다면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도 있다.

좋은 환경과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더라도 사람들마다 기억은 제각각이다. 살만하다고 느꼈던 그녀의 캠프힐과 이전의 누군가, 또는 이후에 그곳에 가서 일 년을 살아갈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곳으로 추억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만약에 내가 그녀와 비슷한 또래거나 한국에서의 생활을 잠시 접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분명 나는 캠프힐에 관한 정보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


느슨한 일상이란 삶에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지 시간적 여유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 부끄럽게도 이곳에 오면 모든 고민거리가 자연히 해결될 줄 알았다. 대책 없는 긍정이었다. 혹은 그저 당장의 처지를 벗어나는데 만 혈안이 되어 나 자신을 속여온 것이지도 모르겠다. '어딜 가든 삶은 따라온다'라는 마루야마 겐지의 따끔한 충고는 옳았다. 우리는 여전히 다음을 걱정하고 또 두려워하는 중이었다.

두려웠다. 캠프힐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진 몸과 마음, 다시 한국에 돌아간다면 그곳에서 생각했던 것들을 잘 지켜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다시 한국에서의 삶에 익숙해져 살겠지만 캠프힐에 오기 전보다는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녀가 인용한 마루야마 겐지의 '어딜 가든 삶은 따라온다'라는 말이 깊은 울림을 던져주었다. 떠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 하지만 결국 살게 되는 모든 곳이 내 인생이다. 문제는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삶을 대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잠시 멈추고 앞으로의 인생을 위해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녀는 캠프힐에서 그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면 그곳은 추억의 순간이 된다. 하지만 그 추억의 모든 순간이 기억 속에 새겨져 앞으로 그녀의 인생을 함께 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견고한 나를 만들어 준 순간순간이 <천국은 아니지만 살 만한>에 담겨있다.

격렬한 고통의 순간이나 힘겨움은 없다. 너무 편하게 지내다 온 게 아니냐라는 반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저자는 무척 평온하게 그곳에서 생활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요점은 이것이다. 비록 한국과 전혀 다른 환경이었지만 그녀는 그곳의 일상 속에서 자신을 찾았다. 만약에 완벽하게 현재를 바꿀 수 없다면, 그럼에도 나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우선 일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늘 똑같은 일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본다면 분명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도 나를 변화시킬 수많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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