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검은 강>에 실려있는 저자의 인터뷰는 다음과 같다.

장면과 줄거리는 실제 사건과 유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인물의 배경과 내면세계는 순전히 허구입니다. 이것은 소설입니다. 독자들이 실제 사건과 인물에 일일이 대입하지 않길 바랍니다. 훙타이를 포함해 모든 인물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그녀의 대답을 먼저 봤었어야 했다. <검은 강>의 모티브가 되는 사건은 실제 대만에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만 알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곧 실제와 허구의 경계를 잊어버렸다. 핑루는 <검은 강>을 통해 집단의 무서움,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어두운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지만 나는 그녀의 의도와는 달리 자전과 훙타이, 훙보에게 돌아가면서 빠져들었다.

<검은 강>에 등장하는 인물을 비롯한 모든 이야기는 소설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자전에 몰입해 그녀를 욕하면서도 동정했고, 훙타이가 되어 그녀의 자존심을 비웃다가 처량하게 바라보았다. 교활하고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던 훙보 역시 어느 순간에는 늙은 그의 육체처럼 한없이 작아 보이기까지 했다.

누구에게나 이유가 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만의 이유에 따라 행동한다. <검은 강> 속 세 명의 인물 역시 그렇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악인인지 책을 읽을수록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니 <검은 강>을 읽는다면 잊지 않길 바란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다. 허구이다. 그러니 나처럼 검은 강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 않기를.


2013년 2월 대만 단수이허 기슭에서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남자는 79세의 사업가이고 여자는 57세의 교수로 두 사람은 부부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을 흉기로 찔러 죽인 사람은 근처 카페에서 일하는 27세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부부의 돈을 노리고 살인을 저지른 냉혹한 가해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를 비유하는 말인 사갈녀라고 불렀다.

<검은 강>은 대만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한다. 저자인 핑루는 재판 과정과 언론의 행동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젊은 여자가 돈을 노리고 부유한 노인을 유혹한 후에 죽였다는 정해진 틀 안에 피의자를 맞춘 채 그녀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녀는 '왜' 부부를 죽였을까.


<검은 강>은 자전이 살인을 저지른 순간을 시작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왜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과정을 보여준다. 자전의 시각과 이미 죽은 훙타이의 입장이 서로 교차되는 이야기 구조가 무척 독특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후 사람들의 생각을 보여주는 페이지는 제 삼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카페 점장으로 일하는 자전은 가난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지만 언젠가는 자신만의 카페를 운영하고 남자친구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는 평범한 젊은 여자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이 든 남자들의 사랑과 욕망을 구별하지 못한다. 역시 가난으로 힘겨워 하는 엄마로 인해 주눅 들어 성장하게 되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었다. 그런 그녀가 넉넉한 경제력을 앞세우고 사랑이라는 달콤함을 건네는 훙보와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야 할까?

<검은 강>은 질문을 하게 되는 책이었다. 저자가 '왜'에 대한 의문으로 이 책을 쓴 것처럼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들의 행동에 끊임없이 '왜'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만약에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들은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다. 두 명의 여자, 자전과 훙타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잃고 싶지 않았고 훙보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새롭게 가진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남자친구와의 평범한 삶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던 자전, 남들의 이목이 신경 쓰여 쇼윈도 부부로 살아온 훙타이, 그리고 늙어버린 육체 속에 갇혀있는 열정적인 영혼의 훙보, 모두에게 사회가 가진 문제들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돌이길 수 있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서랍에서 캡슐을 꺼내던 순간?
수풀 속에 칼을 숨겨두었던 순간?
결정적인 것은 그날 오후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 여러 가지 필연과 우연히 얽히고설켜 룰렛판 위의 흰 공이 돌다가 한순간 어느 칸에서 멈춘 것이다.

범인은 실제로 돈을 노리고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해 노부부를 죽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검은 강>의 자전처럼 의도하지 않은 채 관계가 시작되었고 자신의 소박한 꿈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검은 강>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작가인 핑루의 이야기 솜씨는 유려하고 마음을 흔드는 매력이 있다. 만약에 내가 책 속 실제 피해자의 가족이었다면 분명 그녀의 책에 분노했을 것이다. <검은 강>에서 저자는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인인지 구분짓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충분히 동정심을 가질만 하다.

<검은 강>은 단지 잘 쓰여진 소설이라는 생각으로 읽어서는 안될 책이다. 실제 사건을 이야기하는 허구의 소설을 통해서 그녀가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도 수많은 자전과 수많은 훙보와 훙타이가 있고 누가 언제, 어디에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지 알 수 없다. <검은 강>은 길지 않지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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