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양장)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이영의 옮김 / 새움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읽다보면 이야기의 배경이 궁금해지는 책이 있다. 유명한 고전소설이라고 하지만 난 <대위의 딸>을 몰랐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한 <대위의 딸>은 재미있었다. 고전이라고 하지만 읽기에 전혀 어렵지 않았고 두껍지 않은 분량이라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의 배경은 읽은 시간의 몇 배를 들여 찾아봐야 하는 것들이었고 책 이상으로 놀라운 사실들이었다. 제목처럼 '단순한' 젊은 귀족 장교와 대위의 딸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다. 러시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이 담겨있는 굉장한 역사소설이자 정치소설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유명한 푸시킨의 유일한 장편 소설인 <대위의 딸>은 허구가 아니라 완전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책을 읽다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이냐가 아니라,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누가 허구의 인물인지를 궁금해 해야 할 정도로 이 책은 대단히 역사적인 소설이다.

책을 읽을때는 이야기에 열중하느라 몰랐다. 다 읽은 후에 <대위의 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인 '푸가초프의 난'에 대해 알게 되면서 섬뜩한 기분과 푸시킨에 대한 존경심이 함께 들었다. 굉장히 사람이구나. 소설이라는, 특히 젊은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라는 조미료만 살짝 넣었을 뿐 스스로 황제라 말하며 러시아 18세기의 가장 큰 반란을 이끌었던 푸가초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그의 대담함이 놀라웠다.


<대위의 딸>은 일단 연애 소설을 지향한다. 주인공인 '표트르 안드레이치'는 귀족 집안에서 귀하게 자라 철들지 않은 도련님이다. 전방에 나가 어른이 되어 오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기대와 다른 장교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야기 초반 근무지로 가는 도중에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도련님답게 어리석은 행동도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인 '마리야 이바노브나'를 만나고 반란군과의 결투, 푸가초프와의 관계등을 경험하며 점점 어른이 되어간다. 한심스러워 보였던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내기 위해 용기를 내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가는 성장을 거듭하는 것을 보면 <대위의 딸>은 연애소설이지만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역사 속 실제 인물, 스스로를 표토르 3세 황제라 참칭하며 농민의 지지를 얻어 반란군을 이끌었던 푸가초프는 <대위의 딸> 속에서 우락부락한 반란군의 수장이 아니라 위트와 의리가 있고 때로는 귀엽게 느껴지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의 시각으로 보자면 푸가초프는 그들 지배의 오점이다. 하지만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푸시킨은 <대위의 딸>에서 주인공들과 엮이게 되면서 보여지는 푸가초프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냄으로써 정부를 비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부에 대항하는 반란군의 시작과 죽음, 수많은 평범한 농민과 군인들의 죽음이 가득한 <대위의 딸>은 그 안에 담겨진 무거운 내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책이다.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 시작한다면 아마 꽤 진중한 분위기의 역사소설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반대로 아무런 지식없이 보더라도 고전 소설이라는 선입견으로 지루한 이야기라고 판단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대위의 딸>은 심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밝고 때론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위트 있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책으로 오랫동안 남아있는 거겠지. 사랑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젊은 장교의 모험과 성장 스토리는 지금 읽어도 재미있을 뿐 아니라 스피드 있는 내용 전개와 깔끔한 문장 덕분에 이해하기도 쉽다.


<대위의 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연애소설인 듯 하지만 성장소설이며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날선 정치소설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를 아무런 거부감없이 읽을 수 있게 만든 위대한 작가, 푸시킨의 재능이 더해진 책이다. 남들이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내게 오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참 좋은 책들이 많다. <대위의 딸>도 그런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숨어있는 보석을 알게 된 느낌이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에 소개되어 꾸준히 읽히는 책이라고 하지만 나처럼 아직 이 책을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좋아한다면 푸시킨의 유일한 장편 소설인 <대위의 딸>을 읽어보길 바란다. 고전이라고 불리는 소설을 읽어보고 싶지만 지루하고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면 이 책부터 시작하길 권한다. 어떤 이야기인지 모른 채 읽은 후 다시 <대위의 딸>을 집어들었다.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18세기 제정 러시아의 상황과 푸가초프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배경과 결말, 민초들의 어려운 삶에 대해 알고 난 후였다.

처음과는 전혀 다른 책이었다. 특별한 걸림돌 없이 부드럽게 모험이 진행되어 살짝 밋밋하다고도 느껴졌던 처음의 연애소설이 아니라, 작가가 문장 곳곳에 숨겨놓은 현실에 대한 비판과 날선 지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과 아내를 모욕한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총상을 입어 38세에 죽었다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안타까웠다. 만약에 그가 오래 살았다면, 변화하는 러시아의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면 우리는 더 많은 소설들을 재미있게 읽고 감동받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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