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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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아온 흔적을 더듬어 한 권의 책을 쓴다면 나는 나폴리 4부작처럼 디테일하고 생동감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 당시의 상황들을 엘레나 페란테와 비슷하게라도 묘사할 수 있을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책 한 권은 언감생심이다. 나는 A4 한 장에도 제대로 된 글을 쓸 수조차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한다면 책 한 권도 모자란다고 말한다. 하지만 막상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인생을 반추하며 적어보라고 한다면 과연 책 한 권이 나올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 이르러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 책은, 나폴리 4부작은 소설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까. 주인공인 레누의 이름은 엘레나 그레코이고 작가의 이름은 엘레나 페란테이다. 이름만 같다고 이 소설이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없겠지만 소설이라고 하기엔, 상상 속에서 빚어낸 이야기라고 하기엔 나폴리 4부작은 대단하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생생함과 느껴보지 않은 일이라면 묘사할 수 없는 감정 표현들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베일에 싸인 작가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느꼈다.

사실 자전적인 이야기든, 소설이든 혹은 적당히 섞여 있는 책이든 상관없다. 나폴리 4부작의 4권인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가 11월에 출간 예정이라 지금은, 앞선 두 권보다 더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의 마지막 장을 덮기가 아쉬울 뿐이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한 단어로 적어보라면 '휘몰아치다'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 앞선 두 권과 전혀 다른 속도감과 긴장, 끊임없이 일어나는 릴라와 레누의 변화,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와 이탈리아의 격변하는 상황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물론 <나의 눈부신 친구>부터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까지 그녀들과 함께 등장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언제나 변화무쌍했고 다채로웠다. 그리고 3권인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 이르러 그 변화는 회오리로 변했다. 페이지마다 작은 회오리가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속에 말려 들어가는 글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점점 더 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그녀들의 중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레누는 아이로타 집안의 피에트로와 결혼을 하고 릴라는 엔초와 함께 살며 햄공장에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그녀 방식대로 견디며 살아간다. 서로 다른 쪽을 보며 걸어가는 표지처럼 이 책에서 그녀들은 점점 더 멀어지고 각자만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 릴라와 레누는 무의식적으로 절대 서로를 잊지 않고 살아간다. 물론 그 연대감이라는 것이 항상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시기와 질투, 때로는 연민 그리고 때로는 우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그녀들의 끈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는 특히 그녀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정세와 함께 변화해 가는 주변 사람들의 불안한 감성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허덕이며 따라가기에 바빴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2권의 마지막 장에 등장한 니노 사토라레와 레누가 결국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말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남겨둔 채 니노를 따라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레누는 릴라뿐만 아니라 실비아라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두고, 결혼은 또 다른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을 한 니노에 대해 끊임없이 비난한다. 그녀는 릴라와 자신 둘 다 니노에게 굴욕당했다고 생각했다. 미친 멜라니가 니노를 보며 소리친 것은 니노를 그의 아버지와 혼동한 것이 아니라 니노 안에 숨겨진 부자 간의 유사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니노와 사랑에 빠진다. 서로의 아내와 남편에게 이혼을 말하고 아이들을 남겨둔 채 둘만의 세상을 위해 떠난다. 레누가 반복해서 말하는 니노에 대한 비판은 결국 그녀의 마음을 현실에 주저 앉히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것이었다. 착한 아이의 역할을 충실히 해온 레누는 그녀 인생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의 소리를 따라갔고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원했던 니노의 사랑을 가졌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사랑이 예쁜 동화의 아름다운 마무리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이 날까?

하늘 위에서 모든 것이 단순해진 것 같았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멈추려고 했다. 가끔 니노에게 행복한지 물으면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 키스했다. 드높은 창공에서 두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표면인 비행기 바닥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니노와 떠나는 레누의 불안한 감정으로 끝이 난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떠나간 자를 릴라라고 생각했었다. 떠난다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용기가 필요한 행위이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릴라의 삶에 또 다른 변화가 생겨 떠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의 이런 짐작을 보기 좋게 날아가 버렸다. 떠나간 자는 레누였다. 그것도 니노와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린 채 불안하게 흔들리는 비행기에 몸을 맡기며 떠난다. 몇 문장 만으로도 앞으로 레누에게 어떤 변화가 닥칠지 추측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그런 지레짐작은 하지 않겠다. 이탈리아 나폴리의 작은 마을의 작은 소녀들에서 출발한 이토록 방대하고 깊은 이야기를 저자는 어떻게 마무리해 줄지 기대하며 11월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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