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여자의 향기
왕안이 지음, 김태성 옮김 / 한길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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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과 상하이, 중국의 대표적인 도시를 배경으로 쓴 두 권의 에세이를 만났다. <베이징, 내 유년의 빛>이 남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도시를 이야기한다면 <상하이, 여자의 향기>는 여자 작가가 자신이 살아온 옛 상하이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는 책이다. 나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루쉰의 아큐정전 등 주로 중국 작가들이 쓴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라 에세이는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왕안이의 <상하이, 여자의 향기>는 그동안 읽어왔던 에세이와는 또 다른 느낌과 깊이가 있는 책이었다. 작가가 살아왔던 옛 상하이를 기억하는 가벼운 에세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상하이, 여자의 향기>는 왕안이 작가의 기억 속에 있는 상하이의 모습을 그려준다. 하지만 크로키를 하듯 특징만을 빠르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정밀화를 그리듯 그때의 상하이를 독자들에게 꼼꼼하게 보여준다.

 

 

 

'상하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급격한 변화, 중국의 떠오르는 도시라는 말이다. 마치 어딘가에서 만들어놓은 도시를 옛 도시 위에 탁 하고 얹어놓은 것 같았다. TV에서 본 상하이는 어느 순간 높은 건물과 번쩍이는 네온 사인이 가득한 미래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아마 그녀는 급변하는 상하이를 온몸으로 느꼈겠지. 작가는 1955년에 상하이로 이주해서 60년 가까이 상하이를 회상하고 바라보고 관찰하면서 변화하는 상하이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상하이는 그녀의 삶, 그 자체이다. 그래서 <상하이, 여자의 향기>에는 상하이를 지독히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때로는 미워하는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살고 있는 이 도시를 제대로 바라보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녀가 들려주는 상하이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니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나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상하이, 여자의 향기>는 사진처럼, 때로는 냄새로 옛 상하이의 골목과 그 속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을 보여줬다. 너무 빠른 시간에 도시가 생겨나고 변화했기 때문에 역사와 자료들이 묻혀버렸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상하이의 옛 모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민속학자나 탐험가 같았고 <상하이, 여자의 향기>의 시작을 알리는 1부 '상하이를 찾아서'는 역사 여행기와 같았다.

 

 

<상하이, 여자의 향기> 속 하나의 주제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작가의 기억 속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일상, 장면들을 이야기하는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내가 그때의 그곳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작가의 글은 디테일하고 생동감이 느껴졌다. 특히 상하이의 골목과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글에서는 그녀가 맡았던 그때의 그 골목의 냄새를 나도 맡은 것만 같았다. 요란하지도 급하지도 않게 조곤조곤 들려주는 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들숨과 날숨을 그녀와 함께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읽어본 중국 작가의 에세이 <상하이, 여자의 향기>는 내게 여러모로 색다른 책이었다.

사실 거리의 풍경은 드러난 삶의 결심이자 활짝 열린 얼굴이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되다 보면 한 겹 단단한 허물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이를 굳은 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거리 풍경은 더 거칠고 지저분해지는 것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거리 풍경일수록 더 거칠고 약간의 폭력마저 동반하여 흉흉한 기질을 드러낸다.

 

 

<상하이, 여자의 향기>1부와 2부로 나눠져있다. 그녀가 기억하는 옛 상하이를 추억하고 현재의 상하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1부라면2부는 상하이라는 도시와 여자, 격동의 시절을 지나온 여자 작가의 생각을 더 많이 들려준다. 아마 <상하이, 여자의 향기>는 중국 에세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독자들에게 조금은 낯선 책일 것이다. 세계사 시간에만 들어봤던 '문화대혁명'이라는 시기를 겪어 온 작가의 그때 그 풍경들은 분명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상하이, 여자의 향기>의 한 페이지, 페이지를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그녀의 글 덕분이었다.

공간과 시간, 어느 것도 나와 교집합을 이루는 것이 없는 왕안이 작가가 들려주는 30편의 추억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내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깊이 있게 주변을 관찰할 수 있는 실력이 생긴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의 모습을 그녀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도시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만큼, 때로는 그 이상으로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가보지 못한 상하이의 과거와 현재, 그곳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상하이, 그녀의 향기>를 통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상하이의 냄새를 맡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희미한 등이 달린 어두운 골목의 구석구석을 걸어왔다마지막 이야기를 읽고 책을 덮으니 제일 뒷장에 책 속의 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단 한 번도 추적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듯 상하이를 표현한 그녀처럼 나도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를 다른 누군가에게 그려서 보여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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