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솔지 소설
손솔지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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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 그래 이 한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손솔지 작가의 <휘>의 마지막 장을 덮고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이다. 처음 빠졌을때는 마음만 먹으면 금방 나올 것 같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빠져나오기 힘든, 인식하지 못한채 서서히 잠식해 가는 그런 늪. <휘>라는 한글자의 제목 옆에 적어두고 싶었다. 또 다른 한글자, 늪. 이 책은 늪과 같으니 처음 한두장으로 판단하지 말 것.

 

 

스타카토처럼 <휘>에 들어있는 단편 8편의 제목은 모두 단 한글자이다.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 한글자 한글자를 소리내어 읽어봤다. 제목을 이어 말하면 왠지 또 다른 제목이 튀어 나올것만 같았다. 글자가 가진 힘은 길이에 상관이 없다. 단 하나의 글자가 가진 깊이가 이토록 깊다니. <휘>라는 책을 읽기 전에 8개의 단어가 가진 독특함에 먼저 매료되었다.

손솔지 작가의 <휘>는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독특하고 재미있고 흡입력이 강했다. 단편이 가지는 매력을 고스란히 드러낸 <휘>의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것부터 눈물이 핑도는 휴먼 다큐를 보는 것 같은 이야기까지 <휘>에 담긴 8편은 톡톡튀는 제목처럼 서로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 각 단편들을 읽으면서 입안으로 제목을 되뇌였다. '홈'이라는 단편에서처럼 홈안으로 일호가 빨려 들어가듯, 한글자의 제목 안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완전히 들어갔다.

단편의 매력 중에 하나는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는데 있다. 독특한 이야기를 읽기 전에 예열하듯 무난한 이야기부터 읽고 싶다면 '개'를 권한다. 온몸이 검지만 백구라는 이름을 가진 개의 시각으로 바라본 인간들의 모습은 씁쓸하다. <휘> 안에는 평범하고 무난하다는 원 안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개'에 등장하는 백구의 눈을 통해서도 알 수있다. 어쩌다 주인찾아 삼만리를 읽는 것 같은 '개'는 색다른 짧은 영화 한편을 보는 것 같았다.

휘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이야기 '휘', 아버지의 종이지만 고귀한 종이 되고자 했던 누이의 이야기 '종', 전교 십일등과 십등이 자살을 한 후 어느날 일호는 십일등의 책상에서 홈을 발견한다는 '홈', 중국에 사는 유부남과 한국에 있는 여자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소설인지 아직까지 궁금한 '못', 소녀가 바라본 어머니의 비밀 '톡', 꿈인듯 아닌듯 '잠' 그리고 마치 <휘>의 에필로그 같은 느낌의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 '초'까지 8편의 단편은 어느것 하나 비슷하지 않아서 읽는 재미가 톡톡하다. 나는 이 중에서 '종'과 '홈'이 무척 재미있었고 특히 '초'를 읽을때는 예전 세월호를 볼때의 느낌이 되살아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느꼈던 좌절감, 슬픔, 무력함이 떠올랐다. '초'는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에세이같았다. 8편의 단편이 아니라, 7편의 단편이 있고 '초'를 통해 부드럽지만 강하게 마무리하는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작가는 제목을 먼저 정한 후에 글을 썼을까? 퍼즐처럼 한편의 글이 채워진 후 마지막 퍼즐 자리인 빈 귀퉁이에 한글자의 제목을 놓아 한 편의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닐까. 한단어지만 긴 제목보다 더욱 강렬하고 이야기의 의미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휘>를 처음 읽기 시작했을때는 독특함에 잠시 주춤했다. 8편의 이야기를 다 읽을 수 있을까. 하지만 한편 한편 읽어나가면서 나는 어느새 휘파람 소리가 난다는 첫 글귀처럼 어디선가 들리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책안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손솔지 작가의 책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1989년 생이라는 젊은 작가의 이전 책을 읽어보고 싶었고 다음 책이 기다려졌다. 서른이 되지 않은 저자의 글과 세상을 보는 시각이 한없이 부러웠다. 나는 그녀의 나이였을때 어떤 글을 썼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작가는 책을 들고 있는 내 손을 잡고 그녀의 세계로 잡아 끌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 그때까지 나는 이 '늪' 안에서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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