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 한국화 그리는 전수민의 베니스 일기
전수민 지음 / 새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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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여행 사진 폴더를 열었다. 작년 이탈리아 여행 이후에 늘 정리해야지 생각만 했었지 제대로 사진을 본 적이 없었다. 카메라 메모리에 넘치도록 담긴 이탈리아의 순간들은 그대로 컴퓨터 안에 갇혀 버렸다.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을 읽는 도중에 책을 덮고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담아놓은 사진을 이제야 제대로 봤다.

 

 

그녀의 베니스를 따라가다 보니 문득 작년의 나의 베니스가 어땠는지 궁금했다. 그녀가 조금 더 베니스에 머물렀다면, 혹은 내가 조금 더 빨리 여행을 떠났다면 아마 그녀와 나는 베니스 어느 골목길에서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비슷한 시간에 같은 공간에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내게 여행의 한 귀퉁이를 함께 공유하는 소중한 책이 되었다.

하지만 나의 베니스와 그녀의 베니스는 분명 다르다. 짧은 휴가 기간 동안 더 많은 곳을 보기 위해 내가 베니스에 머문 시간은 고작 1박 2일이었다. 이런 나와 달리 그녀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오직 그곳에만 머물렀다. 그래서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내게 알려준다. 내가 들어가 보지 못했던 골목들, 내가 미쳐 느껴보지 못한 베니스의 사람들과 여행객들. 이 책은 베니스에서 머문 시간을 들려주는 그녀의 에세이지만 나에게는 여행의 여운을 마음껏 느끼게 해준 여행 노트와도 같았다.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전통 한지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전수민 작가가 베니스의 스튜디오에 한 달 간 머물면서 느꼈던 감정들, 일상적인 순간들을 일기처럼 조곤조곤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한 도시에서 한 달간 머문다는 것은 여행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익숙하고 현지인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낯선 상태이다. 매일이 여행인 듯 약간은 들떠있고, 점점 익숙해지는 공간에 조금씩 스며들어 편안한 마음이 들 때쯤이라고 해도 좋을까?

차분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작가의 그림처럼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 속의 그녀의 글도 사람의 마음을 바람결에 흔들리는 스카프처럼 하늘하늘하게 만들어주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그녀는 힘들게 살아왔고 뒤늦게 미술 공부를 했다. 그리고 죽음을 늘 떠올리며 일 년에 한 번씩 유서를 작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수민 작가의 글은 마치 흔들리는 해먹 위에 누워있는 것처럼 무척 유유자적하다. 나도 왠지 그녀처럼 몰랑몰랑한 '~했어요'라는 말투로 적어야 될 것만 같았다.

 

 

'한국화를 그리는 전수민의 베니스 일기'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작가가 베니스에 머물기 시작하면서 돌아올 때까지의 일상을 사진, 그녀의 그림과 함께 이야기한다. 베니스에서 여유롭게 길을 잃은 일, 골목골목의 순간의 기억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지낸 다른 예술가들과의 일상과 근교로의 짧은 여행, 오픈 스튜디오와 돌아오는 비행까지 베니스에서 함께 한 그녀의 모든 순간의 삶이 가득하다. 그곳에서 일상을 보낸 그녀가 담은 베니스의 사진들은 여행자의 눈으로 만났던 그곳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을 통해서 전수민 화가를 알게 되었다. 책에 나오는 그녀의 그림에 반해 버렸다. 여러 번의 붓질을 통해서 드러나는 은은한 색의 아름다움, 꽉 차게 그리지 않았지만 물이 흘러넘치듯이 그림 한가득 풍성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그림들을 찾아봤다. 그림들은 한참을 들여다봐도 자극적이지 않았고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나는 평생 꼭 예술가로 살아가고 싶어요. 언젠가 엄마에게 힘들다고 했더니, "그럼 너무 애쓰지 말고 형편이 나아지면 그림을 그리는 게 어때.' 말씀하셔서 겁에 질리고 말았어요. 나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를 살고 싶습니다. 바로 지금, 이곳에서, 물러나지 않고, 나 자신이 주인이 되어 완전히 연소하면서.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녀가 들려주는 베니스에서의 일상과 베니스의 그림 같은 풍경이 담긴 사진들, 그리고 베니스에서 그린 한국화가 담겨 있는 독특한 에세이이다. 그녀가 들려주는 베니스의 생활은 분명 짧은 시간 동안 머물다가 가는 여행자들에게는 조금은 낯선 풍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들 한 번씩 길을 잃는다는 베니스에서 골목을 헤매봤다면 아마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엔 어딘지 몰라 두려웠지만 곧 좁고 낯선 골목을 헤매는 재미에 빠졌었다. 그곳에서 베니스 사람들의 일상을 잠시나마 느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스쳐갔다. '아, 이곳에서 며칠만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순간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관광명소가 아니라 허름하고 장미 넝쿨이 늘어져 있던 골목에서였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으로 피곤과 잠에 취해 돌아다닌 베니스에서의 첫날밤,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만약에 내가 이곳에 산다면 그림을 배워 수많은 베니스의 골목을 그려보고 싶다. 골목마다 묘하게 다른 느낌들을 그림과 글로 표현해 보고 싶다. 바다 위에 도시. 이토록 굉장한 베니스에서 조금만 더 머물다 가고 싶다."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그림 같은 베니스를 그린 한국 화가 전수민의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을 통해 다시 베니스의 빛나는 물빛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베니스를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곳을 그립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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