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 - 살면서 늙는 곳, 요리아이 노인홈 이야기
가노코 히로후미 지음, 이정환 옮김 / 푸른숲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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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TV에서 네덜란드의 호그벡 마을에 대한 프로그램을 봤다. 거대한 세트장 같은 이곳은 치매환자들만을 위한 마을로 자신을 치매환자가 아닌 마을의 주민으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설립자는 '치매노인도 행복할 권리가 있다'를 목표로 병원 안에 갇힌 채 여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일상을 살기 위해 호그벡 마을을 계획했다고 한다. 호그벡 마을은 충격이었고 부러움이었다. 주변에 치매를 앓고 있는 어르신들이 많다. 초기에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병의 증세가 심해지면 곧바로 요양복지센터나 요양병원에서 남은 일생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제대로 보살펴 주는 사람이 없는 집보다 프로그램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치매 증세가 좋아지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병원이나 건물 안이라는 제한적인 공간 안에서만 생활한다. 이런 환경에서 생활하는 한국의 치매환자들에게도 호그벡 마을 같은 행복한 삶을 제공해 주는 공간이 생길 수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네덜란드라는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멀게만 느껴졌다.

제목부터 무척 예의바른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는 일본의 치매노인들을 위한 요양시설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 정확하게 '다쿠로쇼 요리아이'의 탄생에 대한 대서사시이다. 에이, 무슨 노인 요양 시설 하나 생긴 걸 대서사시라는 단어를 붙이느냐고 하겠지만 한 명의 치매노인을 위해 평범한 세 사람으로 시작한 '다쿠로쇼 요리아이'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시작했고 현재는 2호, 3호 요리아이까지 늘어났으니 엄청난 일인 것은 분명하다.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의 저자는 자신도 모르게 요리아이의 멤버가 되었고 어쩌다 보니 요리아이에서 발간하는 잡지인 '요레요레'의 편집자를 맡고 있다. 얘기를 듣고 적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쿠로쇼 요리아이'와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라 그의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글에는 요리아이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책은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힌다. 치매노인에 대한 이야기라고 절대 우울하거나 무겁지 않다. 오히려 유쾌해서 책을 읽는 내내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치매에 걸려도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이 성립하는 이유는 '치매에 걸리면 평범하게 살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리라. 왜 이런 사회가 되었을까. 누가 이렇게 만들어버렸을까. 단순히 '치매'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정든 집과 이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비극에 종지부를 찍는 사람은 누구일까. 내쫓듯 노인을 시설에 들여놓은 이후에 마음 놓고 살아가는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잘 죽고 싶다, 행복하고 늙고 싶다. 늙었다고 더 이상 청춘이 없고 건강하지 않다고 해서 쓸데없는 시간인 것은 아니다. 일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노년의 시간들. 그 어떤 순간보다 반짝여야 할 시간들이다. 나이 들고 아프다고 해서 함부로 해야 할 사람은 없다. 죽음에 가까워 졌다고 그들의 시간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도 행복하고 평범하게 일상을 누리며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의 요리아이에서 치매노인들은 마치 집처럼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식사를 하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신다. 젊었을 때처럼 그 공간 안에서 충분히 자유를 누리며 일상의 행복을 즐기며 살아간다.

요리아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간하는 잡지인 '요레요레' 역시 저자의 친구 아들이 그린 그림을 표지로 사용한다.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에는 '요레요레' 창간호를 소년이 그린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상화를 사용했다고 쓰여있다. 그래서 찾아봤더니 정말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정말 이런 요양 시설이 있을까? 진짜 이런 잡지가 있을까? 내내 의구심이 들었다.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의 이야기는 진짜가 아닌 저자가 지어낸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찾은 요리아이의 사진 속에는 따뜻한 공간과 행복한 모습의 어르신들이 있었다.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의 '다쿠로쇼 요리아이'에는 행복한 치매노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일에 열정이 가득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요리아이라는 요양 시설이 생긴 과정에 대한 이 책을 읽으면서 누구는 치매라는 병에 대해 생각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우리나라에도 이런 시설이 생겨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요리아이의 창립 멤버인 '시모무라'라는 사회복지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치매라는 것, 노인이라는 사실을 차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사람의 태도. 어쨌든 해내고야 마는 긍정적인 생각, 하루하루를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시모무라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가끔 나의 노년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다. 안 아프고 건강하게 살면 가장 좋겠지만 누가 확신할 수 있으랴. 몸이 아플 수도 있고 치매에 걸릴 수도 있다. 지금보다 더 편하게 살 수도 있고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노년을 보낼지 아무도 모르지만 늙는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늙음과 함께 주어지는 시간들, 죽음을 향해 가는 그 순간들을 평범한 일상 속에서 평온하게 보내고 싶다. 내가 노인이 되었을 때면 일본의 요리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노인 요양 시설이 생길 수도 있겠지? <정신은 좀 없습니다만, 품위까지 잃은 건 아니랍니다>속의 일본 노인들처럼 시원한 바람이 부는 요리아이의 숲에서 향기좋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그런 노년의 일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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