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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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한 드라마 한편을 본 것만 같았다. <악녀에 대하여>를 읽는 내내 소설보다 TV에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일본 소설이라는 정보 외에 아무런 지식 없이 읽기 시작한 <악녀에 대하여>가 마치 고전 드라마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역시 1978년에 '주간 아사히'에 연재된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을 그냥 책으로만 묵혀 두지 않을 것 같아서 책을 읽은 후 검색을 해보니 2012년에 사와지리 에리카 주연의 드라마스페셜로 제작되었었다. 역시 이런 흡입력 강한 이야기를 내버려 둘리가 없지.

글에 대한 집중력이 대단해 숨을 제대로 쉬지 않아 얼굴이 새파래질 정도로 글 쓰는데 몰두한다는 저자 아리요시 사와코처럼 책을 읽은 내내 몰입과 긴장을 반복했다. <악녀에 대하여>의 기본 스토리는 간단하다. 미모의 여성사업가가 어느 날 자신의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 하지만 자살인지, 타살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죽음이었다. 그녀에 대한 가십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작가는 그녀 주변의 사람들을 차례차례 인터뷰하면서 그녀의 삶과 죽음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악녀에 대하여>는 작가가 만나는 그녀 주변의 인물 27명과의 인터뷰한 내용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풀어나간다. 27명의 사람들은 인터뷰에서 모두 1인칭 시점으로, 각 장의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더 몰입도가 높았다.

 

 

27명의 기억 속에 있는 기미코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고 책을 읽을수록 점점 그녀의 정체가 혼란스러웠다. 마치 28개의 조각으로 나눠진 퍼즐 판 같았다. 마지막 한 조각은 바로 그녀의 이야기이지만 끝까지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악녀를 대하여>를 읽으면서 내심 마지막에는 이미 죽었지만 과거 한때의 그녀가 등장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만약에 그녀가 28번째의 인터뷰이가 되었다면 이 책은 내가 느낀 만큼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어떻게 하면 독자를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일본이 전쟁이 패한 후를 배경으로 하는 40여 년 전의 소설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작가의 재능과 인간의 본성은 과거나 현재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녀'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를 떠올린다. 여러 유형의 악녀가 있겠지만 <악녀에 대하여>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한국의 악녀와 1978년도에 아리요시 사와코가 탄생시킨 그 시대, 일본의 악녀는 분명 큰 차이가 있다. 책을 읽을수록 내가 생각한 패악질도 서슴치 않는 -많은 아침드라마에 등장하는- 악녀와 기미코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읽고 있으면 정말 그녀를 악녀라고 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웠다.

많은 여자들이 악녀가 되는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속이고 남자를 이용하고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악녀에 대하여>의 기미코 역시 평범함 채소가게의 딸로 태어난 자신을 부정하고 주변 사람들을 속이고 이용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원하는 삶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역시 일본이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 <악녀에 대하여>라는 제목과 달리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최선을 다하며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래서 속았던 사람도 그녀가 죽은 후에 기사를 보고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끝까지 자신이 겪은 기미코가 진실이라고 믿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은 모두 주관적이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악녀에 대하여>에 등장하는 기미코의 주변 인물 27명도 모두 자신이 보고 느낀 데로 그녀를 평가하고 있다. 결국 진실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수십 년이 지난 후 제삼자의 독자 입장에서 책을 읽는 나도 인터뷰 내용을 듣고 주관적으로 그녀를 평가하고 있었다. 결국 나 역시도 기미코가 정말 악녀인지,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책을 덮고야 말았다. <악녀에 대하여>에는 그녀를 악녀라고 생각하는 날실과 둘도 없는 천사라고 생각하는 씨실이 촘촘하게 얽어있다. 그 사이사이의 빈 곳을 어떤 방향의 실로 메꿀지는 각자의 몫이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더 매혹적이고 치명적이며 달콤한 것이다. 나는 아직 진실을 찾지 못했지만 <악녀를 대하여>를 읽는 당신은 부디 결론에 이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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