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흔적을 걷다 - 남산 위에 신사 제주 아래 벙커
정명섭 외 지음 / 더난출판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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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서 끝나는 역사가 아니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슬프지만 제대로 바라보고 해결해야 할 많은 근대 역사의 잔재들이 우리들과 같은 시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만 우리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일제의 흔적을 걷다>는 잊혀졌거나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우리 땅안에 있지만 전혀 다른 공간을 찾아가는 기행문과 같은 책이었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겠지만 작가의 노력 덕분에 깊숙히 숨겨져 있던 가슴아픈 역사적 사실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서울을 출발해서 저 아래 제주까지 우리 땅 곳곳에 남아있는 장소들을 작가와 함께 걸어다니며 긴 여행을 함께 한 기분이 들었다.

용산 미군기지, 경희궁의 방공호에서 남산까지 서울에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은 가끔 TV방송을 통해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곳이 예전 일제시대부터 있었던 장소였다는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말해준다. 왜 그 장소가 그 곳에 있는지,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는지 등 일년 중 특정한 날이 되면 몇 번씩 듣게되는 비통한 역사의 장소가 아니라 그 장소의 시작과 현재를 제대로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청나라가 탐을 냈고 일본이 차지했던 용산에는 이제 미군이 자리 잡고 있다. 달러로 결제해야 하고, 우편번호와 전화번호 모두 캘리포니아의 것을 사용하고 있는 이곳은 우리 근대사의 혼란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흔적을 걷다>를 기행문이라고 말한 이유는 각 장소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에 책을 읽은 독자들도 찾아갈 수 있도록 가는 길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 가덕도의 외양포 포대와 같은 곳은 찾아가기 힘들겠지만 서울 안에 위치한 곳이나 인천 개항누리길로 알려져 있는 장소, 목표와 군산의 가옥들, 제주의 성산일출봉등은 충분히 일반 독자들도 답사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장소이다.

특히 각 장소에 대한 설명과 함께 첨부한 사진 덕분에 일제의 흔적들이 어떤 형태로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인천개항누리길에서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일본 제 1은행 인천지점과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동척 목포 지점 금고의 사진을 보고 생각난 곳이 있다.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이용하고 있는 곳인데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사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식산은행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큰 역할 했던 곳으로 조선총독부 산하 최대의 금융기관이었다. 다양한 전시물과 기획전시가 있어서 자주 찾는 장소 중의 한 곳인데 이 곳도 일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한다. 모르고 본다면 이 곳은 근대풍의 엔틱한 건물일 뿐이지만 장소의 진실을 알고 보면 일제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비통한 역사의 흔적인 것이다.

서울부터 제주까지 많은 장소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 중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군산 시마타니 금고와 이영춘 가옥에 관한 이야기였다. 근대문화를 관광명소로 적극 홍보하고 있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여행지인 군산은 만약에 이 책을 모르고 갔다면 대구근대역사관을 바라봤을때 처럼 독특하고 이국적인 장소가 많아 사진찍기 좋은 여행지 중의 한 곳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군산을 가게 된다면 <일제의 흔적을 걷다>에서 읽은 시마타니의 금고와 이영춘 가옥을 꼭 찾아가보고 싶다. 부를 간직하기 위해 세워둔 건물 전체가 금고인 시마타니 금고, 자신만의 제국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건물에서 해방 후에 이영춘 박사의 헌신적이고 따뜻한 의술이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와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역사를 알고 본다면 분명 이국적인 옛 집이 아니라 가슴깊이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장소일 것이다.

<일제의 흔적을 걷다> 한 권을 들고 근대문화유산 답사를 다녀도 좋겠다. 이 책을 기준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남겨져 있는 일제의 잔재를 찾아보는 걷기 여행을 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일제와 관련된 역사는 현재 진행형일 뿐만 아니라 만족스럽지 않게 흘러가고 있는 화나고 슬픈 우리의 역사이다. 괴롭다고 피해서는 안된다. 이미 우리는 많은 순간들에 눈과 귀를 막아버렸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수많은 일제의 잔재들 중 공간과 관련된 흔적을 차분하게 말해주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놓쳤던 슬픔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길 바란다. '꼭 넣고 싶었지만 들어가지 못한 이야기들은 다음 기회에 풀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더 많은 장소를 알려주는 다음 책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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