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더 초이스
이영도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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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은 언제나 놀랍다. 새로운 세상, 신기한 종족들에 대한 묘사는 내게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탄생하고 소멸하는 제국에 대한 서사시. 수많은 공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던 그때, 판타지 소설은 언젠가 꼭 한번 써보고 싶은 장르였다. 어느 날 우연히 '드래곤 라자'를 읽었다. 그 책 덕분에 판타지 소설에 제대로 입덕했지만 동시에 내겐 판타지를 쓸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시작'이라고 하면 이영도 작가가 떠오른다. 웹 소설의 인기로 수많은 판타지를 접하고 있지만, 한국 판타지 소설의 세계를 확장한 작가는 바로 이영도이다. 동생이 읽던 '드래곤 라자'를 우연히 읽은 후 '피를 마시는 새' 등 그의 책을 도장 깨기 하듯 읽어나가며 이영도만의 판타지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의 책을 기다렸다. 화려한 책표지만큼 화려한 그의 판타지 세계 앞에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2018년 6월 21일, 이영도만의 판타지 세계가 <오버 더 초이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열렸다.


<오버 더 초이스>를 읽기 전에는 책표지가 참 예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 다시 표지를 보니 처음과 전혀 다른, <오버 더 초이스>가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만약에 당신이 이영도의 팬이라면 문제없다. 하지만 이영도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한다거나, 판타지 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오버 더 초이스> 읽기가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이 책은 짧은 호흡으로 빠르게 읽히는 일반 판타지와는 다른 책이다. '판타지'를 쉽고 유치한 장르로 생각했다면 <오버 더 초이스>를 통해 그런 선입견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오버 더 초이스>에 나오는 지역은 제국 전체가 아니라 작은 도시이다. 하지만 그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은 생물계를 아우르는 넓고 깊은 이야기이다. 단순한 사건, 사고가 아니라 식물과 동물이라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원인을 소개하기 위해 첫 단계는 일단 참아야 한다. 나는 100페이지에 이르러서야 <오버 더 초이스>의 세계가 보였다. 처음에는 도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늙어서 이제 판타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건가. 왠지 씁쓸한 생각까지 들었었는데 100페이지가 넘어가며 판타지 읽는 맛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고작 여섯 살인 아이, 서니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딸을 잃은 슬픔에 서니의 엄마인 포인도트 부인은 독미나리풀을 먹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난 후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부활. "그 칼만 찾아내면 지데 양도 되살아날 수 있어요." 포인도트 부인이 말하는 그 칼이란 사고에서 구해낸 황족 덴워드의 장검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나의 사건만 단순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왜 티르 스트라이크의 옷이 초록색으로 물들었을까, 왜 덴워드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는 걸까, 딸의 부활을 외치던 포인도트 부인은 왜 갑자기 아이들을 공격하는 걸까, 지상과 지하의 주인은 진짜 악마를 의미하는 걸까. 한껏 뻗어나간 작은 줄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손으로 모으며 읽어야 한다. 

"앞으로 120일 후 인류의 1/3이 죽을 거라는 이야기라면 어떤가요?"
"그리고 300일 후 다시 1/3, 그러니까 살아남은 자들 중 반이 죽을 테고요."

포인도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듯 보안관보 티르 스트라이크가 목을 베어 죽인 웨어울프 지데가 부활했다. 부활한 지데는 식물 왕을 대신해 동물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식물들과의 약속을 엄중히 지킨다면, 그 대가로 식물은 사람이 죽어도 되살아나게 해주겠다고 한다. 부활이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인데 120일 후에는 식물들에 의해 동물계가 멸망한다고 말한다. 작은 마을의 보안관보인 티르는 어떻게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오버 더 초이스>안에 담긴 철학으로 인해 단숨에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오버 더 초이스>를 읽으며 각자마다 다른 질문이 주어질 거라 생각한다. 나는 책 속에서 등장하는 부활자들을 보며 '다시 나로 태어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목을 베어져 죽은 지데는 늑대로 변하지 못한다. 환기공에 빠져 죽은 단 하나뿐인 딸 서니는 열명 이상 끊임없이 부활한다. 대마법사는 다시 태어났지만 마법은 부리지 못한다. 정작 그 사람을 나타내는 중요한 본질 없이 외형이 비슷한 채로 태어난다는 것은 진정한 부활일까. 만약에 내가 죽어 다시 태어난다면 그 사람은 나일까? 나를 닮고 비슷한 기억을 가진 또 다른 나일까? 어짜피 죽어도 다시 살아날텐데 부활한 후의 삶에 '의미'라는 것을 부여할 수 있을까.

10년 만에 돌아온 이영도의 세계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짧고 단순한 호흡의 판타지에 익숙해져서인지 진중하고 철학적인 그의 이야기에 적응하기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한 문장 한 문장 꾹꾹 눌러가며 읽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식물계의 반란, 식물에 의한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놀라웠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너머에 있는 세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판타지 세계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곳이다. 이영도의 팬이라면, 깊이 있는 판타지를 읽어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영도만의 판타지 세계 <오버 더 초이스>로 들어가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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