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는 1478년 2월6일 영국의 보토법원 판사인 존 모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귀족이 아니었지만 명성이 자자했다. 모어가 12살일 때 당시 정계 및 종교계에서 등 여러 분야에서 최고의 존망을 얻고 있던 캔터베리 대주교이며 대법관이었던 존 몰턴의 집에 머물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4살에 옥브퍼드에 입학 2년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그 시간동안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리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한다 당시에 르네상스와 종교개력이 일어났다 아버지가 모어를 법률가로 만들기 위에 린카스에 입학시켰고 거기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린카스 입학 후에 에라스무스를 알게 둘의 우정은 오래토록 이어진다 국회의원 초선이되지만 헨리7세의 가혹한 세금 부과안에 반대해서 벌금형에 처해졌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 소박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되코의 저술을 번역하는 것과 파리나 루뱅에 가서 대학제도를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나는 토머스모어의 유토피어가 자신이 실제 정치에 적용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후세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수호자‘자란 명예를 얻을 정도록 독실한 가톡릭 신자였던 모어가 직접적인 박해는 아닐지라도 종교개혁을 내세운 신교도들에 대한 박해를
묵인한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유토피아)에 나타난 자유로운 종교관과 달리 종교개혁이 기독교 문명과 사회제도를 파괴한다고 생각했고 유토피아에서 나타난 신앙의 자유를 실제의 정치에 적용할 생각이 없었던 듯 하다 그런 모어도 결국 헨리8세가 혀아서의 미망인 캐서린과 결혼 후 메리 공주만을 낳고 소생이 없다는 이유로 캐서린과 이혼하고 안과 결혼한다 그러나 교황은 그것이 불법이라고 선언 파기하지 않으면 파문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헨리8세는 로마교회와의 결렬을 선언함과 동시에 영국왕이 영국의 모든 교회의 교주임을 선언한다 카톨릭을 옹호하던 모어는 입장이 곤란해져서 대법관직을 사퇴한다 왕이 계승법이 의회의 동의를 얻어 통과하고 헨리8세와 안 왕후의 소생에게 왕위 계승권이 인정되고 메리공주는 서출로 인정되는 이 법안을
모어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것은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결국 모어는 1535년 7월6일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죽기 진전에 사형집행인에게 ˝내 목은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며 농담을 하며 최후를 맞는다.
헨리8세는 모어를 죽일 수 있을 지언정 그의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매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사누 아메리카 즉 테라 피르마(남미 본토)를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쓴<신세계>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암튼 매력적이고 논리적이 박학한 라파엘이란 인물이 이 책에서 모어의 사상을 대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엄현히 다르고 사상과 실제가 다르듯이 토머스모어의 삶속에서 유토피아의 자유로운 세계관을 적용시키지 못한 것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지만 많이 아쉽고 그의 확고한 신념으로 인한 사형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너무나도 가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이 읽히는 책중에 하나이며 후세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제시해주었고 좋은 귀감이 된다는 점에서 여러분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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