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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ㅣ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평점 :
벌써 이 책을 품은지 2주가 넘었지만, 왜 내가 감동적으로 느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기술하기가 힘들었다. 나중에는 이 모호한 감동이 그야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위 ‘먹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호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글의 목적이나 스타일이 다소 전방위적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목적없이 씌여진 것처럼 흩어져 있는데 자세히 관찰하면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여온 식물들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자서전도 소설도 과학책도 아닌 이 글이 뭐길래 나의 신경을 자극해 콧끝을 시리도록 만들었나. 언니는 내게 처음에 과학 실험 파트가 지루할 수도 있을거라고 내게 경고했는데, 지루하긴 커녕 이 파트가 더 흥미로웠다. 그것이 단순히 나무의 일생과 역사를 설명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 이유랄 게 결국 예상가능하게도 생존과 번식이지만 기특하게 멸종하지 않고 건재해 준 지구상의 가장 오래된 생명체들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 새삼. 게다가 호프 자런의 여성으로서의 캐리어, 독보적인 호기심과 상상력이 그녀를 훌륭한 과학자로 만들어주기까지의 아드레날린 넘치는 과정들이 감격적이었다랄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휘리릭 앞을 지나쳐보다가 맨 앞장은 자신의 글이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이라고 했고, 그 뒷장은 헬렌 켈러의 말이 적혀 있다. “더 많은 것을 만져보고 배우고, 그들의 이름과 용도를 알아갈수록 나는 더 기쁨에 넘쳤다. 그렇게 얻은 자신감은 내가 세상과 밀접히 관계 맺은 존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만들어갔다.”
이런거였구나…
언젠가 정재승 과학자를 보고서 깨달은 것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과학이야말로 망상에서 시작되어 차츰 더 현실적인 차원으로 실현하게끔 만드는 거대한 기획같다고 생각한다. 책에 나오듯이 사막에 떨어진 씨앗 하나가 이파리를 만들었다가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가시로 전환하고, 그렇게 뾰족하게 그곳에서 수분을 덜 뺏기며 거친 환경에서 살아갈 방법을 찾은 돌연변이같은 존재들. 감성 없이는 과학은 존재할 수도 없다고.
내가 과학을 하지 않은 이유는 좌뇌 우뇌의 발달이 어느 쪽이 더 우월한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나는 이과를 갔고, 이유는 문과의 지지부진한 애들과 선생님들이 싫어서였고, 쿨해보이고 싶었고, 의대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생물이나 화학을 흥미로워했으나 젬병이었따. 겨우 친구를 붙잡고 물어물어 이해를 하더라도 머리만 돌리면 새하얗게 기억이 나지 않아 두려움이 있었다. 공부 잘하는 이과의 여학생들은 내게 차마 설명을 못해줘도 이미 감각적으로 ‘과학’이 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것을 설명하지도 못하면서도 이해한다는 사실에 더 감탄을 하던 시절이었다. 수학에도 흥미를 보였고, 심지어는 잘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대학 가서까지 수학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게 느껴졌고 그렇게 예체능이라는 제 3안으로 도피하고 말았다.
과학은 확신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한 답이 있는 곳이고, 정확한 구상이 가능한 곳이지만 나는 느슨한 성격이지만 의외로 결벽증이 있어서 내가 확실하지 않은 것에는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자꾸만 나의 뇌를 믿으려 하지 않고, 다른 이의 뇌를 믿고 싶어지는 불확신의 상태가 계속 될 것 같았다. 어떤 과학영화나 의학드라마에서도 “이게 확실해??” 하면, 대개 똑똑한 의사들이나 과학자들은 “내 말이 맞다니까! 날 믿어요!” 라고 할테지만 나라면 “제가 실험을 100번 했는데,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오차가 있을수도 있겠죠…중간에 실수를 했을지도… ” 라며 끝을 흐릴 것이다. 이건 결벽증일 수도 있고, 책임 회피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일까.
하지만 예체능이라는 곳은 본디 내추럴본 ‘자기확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내가 망하고 만 것이다.
길을 잘못 든 것이지. 내가 과학으로 갔다면 크게 위험을 조장할만큼 좋은 직업을 어차피 가지지 못했을테니 자잘하고 소소한 무엇인가를 하고 살았을수 있겠지만, 제3세계인 예체능으로 오면서 나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뿌리를 잘 못내렸다. 하지만 나는 식물이 아니므로,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뿌리를 내릴 수도 있다. 모를 일이다.
소소하게 집에서 식물을 기르는 것 중의 하나가 선인장이다. 점점 길어지고 위로 자라서 화분이 감당할 수 없게 되면서 부러졌다. 그 애를 잘라서 다시 작은 화분에 소분했다. 그렇게 해도 또 다시 잘 자란다. 처음에는 좀 징그럽게 느껴졌다. 물론 팔을 잘라서 처음에는 썩지 않도록 살짝 말려준 후에 다시 심으라고 하더라. 그렇게 했다. 그러자 어느 날부터 옆에 점이 하나 생기고 그 위로 또 다른 팔이 하나 튀어나왔다. 그런식으로 만세형의 선인장이 되었다. 그런데 한동안 까먹고 물을 주지 않자, 한 애는 팔 하나를 떨어트렸다. 물을 주면 줄기가 탱탱해지고, 물을 주지 않으면 쭈글쭈글해졌다.
또 하나는 미나리. 어릴 적에 미나리를 엄마가 집에서 가위로 숭겅 잘라 된장국에 넣었던 걸 기억하고 나도 미나리를 사서 먹고 남은 몇개를 물에 담궈봤다. 그랬더니 점점 뿌리가 생기고, 새순이 돋아나고, 또 자라기 시작했다. 그뿐인가, 양파도 당근도 고구마도 싹이 나고 조금씩 자란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 안의 곰팡이들을 바라보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난 증상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앞장으로 돌아가면 저자가 쓴 프롤로그에 이런 말이 있다.
눈앞에 보이는 이파리에 대해서 질문을 하라고. 그러면 이제 과학자가 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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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과 내가 좋아해 마지 않는 영화 <어댑테이션>이 갑자기 오버랩이 되었다.
<어댑테이션>은 찰리 카우프만 작으로, 스파이크 존즈가 감독을 맡은 2004년의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인 찰리 카우프만이고, 새로운 기획으로 꽃에 대한(다시 찾아보니 난초도둑) 영화시나리오를 각색중이다. 찰리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시나리오를 쓰지 않고 순수하게 꽃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하지만 매번 확신이 없어 관련자들을 회피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저자의 심리상태를 살펴보게 되는데, 그가 피하려고 했던 비현실적이고 전형적인 시나리오 전개인 총과 마약, 섹스 그리고 액션이 난무하는 스토리가 실제로 그의 눈 앞에 벌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으로 봤던 장면이 저자인 수잔이 친구들과 저녁식사 중에 라로쉬(난초수집가)의 외모를 비웃으며 기인이라고 놀려대는데 혼자 화장실에 들어와 그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의 난초를 향한 열정에 뜨겁게 홀로 감동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왜 이 장면이 그토록 강하게 마음에 와서 들러붙었을까. 호프 자런과 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로에게 반할 때 서로의 열정에 반하게 되는 거다.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사실 드물기 때문에 더 소중하다. 일상을 버리고 싶은 사람은 실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일상이라는 게 하찮게 느껴지는 순간이 강력히 들만큼 해야만 할 일이 있다면, 그런 명분과 당위가 있다면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공감할 친구가 있다면 그걸로 된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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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영화를 보았다. <어댑테이션>
그러자 수잔 올린의 <난초도둑>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글을 읽으면 보다 정수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책을 찾아보다 절판이 되었길래 중고책을 알아보던 도중,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난초도둑’에 쓰인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은 난초를 좋아하지 않고, 유령난초가 궁금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무엇이길래 누군가를 이렇게 매료시킬 수 있는 것인지 그 대상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하지만 막상 그 실체를 보고 나면 거대한 ‘실망감’이 찾아오고 그로 인한 허탈함과 미묘한 상실감과 심지어는 배신감 등이 조금씩 뒤섞여 나온다.
영화에서 쌍둥이 형제는 두 연인이 총을 겨누는 와중에 늪지에 숨어 죽기 전에 나눌법한 대화들같지 않은 첫사랑에 대한 농담을 나눈다. 그 안에서 일말의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한다는 그 마음 자체가 내것이므로, 그건 심지어 대상이 날 어찌할 수 없다. 내 감정이고 내것이다. 난 그렇게 살기로 오래전에 결심했다라는 동생의 말에 감화되는 형. 이것은 열정과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가진 열정의 감정이 내것이지, 그 대상은 그저 거기에 있는 것일 뿐.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는 대단한 것 같다. 흔히 캐릭터들의 입체감과 밀도얘기를 하며 칭찬할 때마다 속으로 나는 코웃음을 쳤다. 반전있으면 입체감 있나? 끝에 가서 캐릭터가 변화하면 입체감 있다고? 의외성이 조금만 보이면 입체감 운운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미안하지만 진짜 입체감 있다. (이래서 입체감 있단 말 하기 싫은데, 칭찬의 표현 자체가 너무 전형적이다… 크, 나의 한계다) 물론 이 영화의 주인공도 미국 지식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지만 늘 그 안에서 현실감각으로 와닿는 충돌을 준다. 과연 이 사람이 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일까? 조금씩의 반전과 반전. 영화를 다시 보니 한 장면 한장면에 감정 하나씩을 얹고 쌓아가는 디테일에 소름이 끼쳤다. 2003년에 비디오 대여해서 볼 때만 해도 낄낄거리면서 니콜라스 케이지 분장과 멘트에 빵 터졌는데. 그땐 보는 수준이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속에 오래 남아 늘 좋은 영화로 기억되었던 영화였다. 당시만 해도 수잔 역의 메릴 스트립의 매혹당한 나레이션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소심해서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주인공의 일상을 그리고, 내면을 그리면서도 이렇게 다이나믹하고 코믹하게 그려내기는 쉽지 않다. 본인도 실은 이 시나리오를 쓸 때 아무도 승인해줄 것 같지 않고, 커리어가 끝장 날 것 같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냥 썼다고 한다. 헐리우드나 한국이나 전형적인 스크립트를 벗어나 글을 쓴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렇게 훌륭하게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파트너 스파이크 존즈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쉽지가 않다. However, 팩폭 in fact, 잘난 놈들은 끼리끼리 모이기 마련이고, 잘될 놈은 잘 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