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 - 신약 성경과 현대의 속죄
마크 베이커 외 지음, 최요한 옮김 / 죠이선교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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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중추다. 십자가 없이 기독교 신앙을 논할 수 없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돌아가셨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그가 대신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대신 죽었기에 내가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형벌 보상론'으로 알려진 이 교리를 교회는 지금도 가르치며 찬송으로 고백하고 있다. 나 역시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형벌 보상론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이것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면, 더 나아가 형벌 보상론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프레즈노에 있는 메노나이트성서대학의 교수인 마크 베이커(Mark D. Baker)와 애즈베리신학교의 신약해석학 교수인 조엘 그린(Joel B. Green)<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죠이선교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하며 '형벌 보상론'을 비판한다. 이들은 던(James D. G. Dunn)과 골딩게이(Goldingay)를 인용하며 구약성경의 제사가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제물이 되는 동물이 제사 행위의 객체를 대리할 수 있지만 제사 행위 자체가 보상이나 형벌이라는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88).

 

이들이 괜히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이 속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이들이 살펴본 바로는(2~4)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아예 속죄 신학이 없다. 예수님은 제사 없이 죄를 용서해 주신 적이 있다. 구약에서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이 잔인하게 죽으셨다는 사실 즉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그 사실의 해석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바울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속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관점에서 강조했다. 이처럼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다양한 형태의 속죄론을 제시한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회사를 통해 소개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즉 속죄의 네 가지 중요한 견해를 소개한다. 승리자 그리스도, 보상설, 도덕 감화설, 형벌 대속(보상)론이다(178).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각각의 견해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은 속죄에 대한 의견들이 다양하다는 것과 그 의견들이 시대에 따라 달랐다는 점이다. 당연히 우리가 지금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형벌 보상론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 온 교리가 아니라 중세 때 서구 문화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형벌 보상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형벌 보상론이 속죄론의 유일한 교리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비판하는 까닭은 이 교리가 가진 위험 때문이다. '형벌 보상론은 의심스럽고 위태로운 형태의 믿음을 낳는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형벌 보상론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에만 감사하고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악에 대해서는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게 한다. 또한 용서받는 죄는 언급하지만 정작 싸워 이겨야 할 죄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하고 결국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만 있고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할 나는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너무 개인적이며 이기적이다. '값싼 구원'의 원인이 '형벌 보상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분석은 옳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판단을 하는 분들이 계신다. 얼마 전 42일에 한국개혁신학회 108차 정기 학술 발표회에서 연세대학 조현철 교수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대속적 이해가 가지는 신 인식의 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조 교수는 이 논문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속죄적 의미를 제거하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이크와 그린처럼 조 교수도 십자가의 대속의 교리가 값싼 구원을 가져왔다고 본 것이다. 김세윤 교수 역시 이미 <한국교회, 개혁의 길을 묻다>(새물결플러스, 2013)에서 한국교회의 구원론이 최근 세월호 사건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구원파의 구원론과 흡사하다며 비판한 바 있다. 윤리적 삶이 부재한 구원파의 신학적 오류 역시 속죄론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믿음이 도리어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막는 다면 이보다 더 큰 아이러니는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형벌 보상론은 경계해야 하고 십자가의 또 다른 풍성한 의미를 고찰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벌 보상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은 형벌 보상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긍정하는 것은 형벌 보상론의 내용이 아니라 형벌 보상론의 존재다. 이들은 형벌 보상론이 나름대로 시대적인 사명을 다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들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형벌 보상론은 적실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십자가는 분명 하나님의 저주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셨다(3:13). 이들은 하나님은 저주를 내리는 분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진노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십자가는 분명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나는 지점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다. 그리고 우리를 취하셨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동시에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우리가 해명할 수 없는 신비다.

 

교회가 형벌 보상론을 신조로 받지 않았다는 이들의 주장은 옳다. 사도신경을 신조로 받은 이후로 기독교회 전체가 받아들인 신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파의 신학에 지배를 받지 않는 신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벌 보상론이 마치 한 개인의 의견인 것처럼 호도되는 것은 옳지 않다. 형벌 보상론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교회(교파)가 고백하고 전수한 교회(교파)의 신앙고백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일치 신조는 공히 형벌 보상론을 고백한다.

 

뿐만 아니라 형벌 보상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십자가의 윤리적 측면이 무시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형벌 대속(보상)론을 주창하는 사람으로 소개한 존 스토트는 그의 책 <그리스도의 십자가>(IVP, 1989)에서 십자가를 형벌 보상론의 입장에서 소개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가지는 폭넓은 의미를 상세하게 소개한다. 십자가가 개인의 사죄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정복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를 희생하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형벌 보상론이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성경을 따라 바르게 전하며 가르치지 못한 교회와 사역자가 문제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게 해 주기에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과 삶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역인 영역으로 축소된 복음을 공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가야 할 때이지 않는가! 그리고 시대의 언어로 진리를 선포해야 할 신학적 사명을 강조한 것 역시 귀담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형벌을 내림으로 구원하는 하나님을 현대인들에게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이 말한 대로 신학자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아닌가. 이런 사명에 충실한 더 많은 신학자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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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가 저버린 보화들 - 반세기의 개신교인이 改宗한 사유思惟
임승만 지음 / 좋은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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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가톨릭의 성장세가 눈에 띈다. 개신교의 하락세가 분명한 가운데 가톨릭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분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개신교가 저버린 보화들>(좋은땅)이라는 책을 출간한 임승만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무려 50년 동안 개신교인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하지만 지금은 가톨릭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개신교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누구보다 많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가 천주교로 개종한 이유와, 천주교와 개신교가 어떻게 다른지 소개한다(1). 그리고 성경이 어떤 책인지 살피면서,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종교개혁이 특별히 예배가 불완전한 개혁이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기독교(천주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2).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처럼 그는 개신교가 저버린 보화 셋을 소개하는데 개신교가 외경이라고 분류하는, 그러나 가톨릭은 제2의 경전으로 받으며 구약성경으로 읽고 있는 7권의 책과 거룩한 전통, 즉 성전 그리고 연옥 교리다(3).

 

먼저 개신교를 향한 그의 일침은 매우 매섭다. 그리고 정확하다. 여느 '교회 개혁서'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핵심을 잘 짚고 있다. 대개 교회 개혁은 목사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평신도들도 교회의 문제점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목사에게 과도한 권한이 집중된 것, 성장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는 것, 교회의 직분 때문에 생기는 위화감, 특히 서리 집사 제도가 직분의 계급화를 부추겼다는 그의 지적은 뼈아프다. 명분 없는 분열, 준비 없이 베푸는 세례 등도 마찬가지다.

 

그가 특히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성찬이 사라진 예배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예배를 개혁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성찬이 사라진 자리에 설교가 들어섰는데 그 후로 자연스럽게 예배가 목사의 독무대가 되었다는 그의 지적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가톨릭에서 소수 정예로 사제를 선출하는 것에 비해, 개신교의 무분별한 목회자 양성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그의 말도 새겨들어야 한다. 한마디로 함량 미달인 목사가 너무 많다. 이것은 곧바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로 이어졌는데 목사의 신뢰도가 신부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이 책은 개신교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 주며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종교개혁가들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는 개신교회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루터는 교권의 횡포에 곤욕을 치렀지만 지금처럼 교권이 횡포를 부리는 적은 없었을 것이다. 교황의 독주를 반대했지만 지금 개신교는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교회의 숫자만큼의 교황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 사제의 위계질서를 비판했지만 지금 개신교회 안의 서열화는 심각하다. 오직 성경을 외쳤지만 성경을 벗어난 번영 신앙이 교회에서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다. 그러나 직면해야 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유익은 가톨릭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이다. 가톨릭으로 개종 후 큰 기쁨을 누리게 된 그는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그들이 가톨릭을 잘 알아 갈 수 있도록 펜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와 비교해서 두드러진 특징을 잘 짚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신교인들의 가톨릭 이해는 천차만별이다. 대게 마리아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아주 잘못된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저자는 가톨릭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평신도의 수준에서 설명한다. 마리아는 가톨릭에서 어떤 위치인지, 가톨릭 제사와 유교의 제사는 어떻게 다른지, 제사를 가능하게 한 통공의 교리는 어떤 것인지, 술과 담배는 왜 금하지 않는지, 미사의 뜻은 무엇인지, 가톨릭 교인은 왜 성호경을 긋는지,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이 있는 이유 등 평소 가톨릭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미흡하다. 관계 개선의 첩경은 상호 존중이다. 서로 다르지만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관계는 개선된다. 하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저자의 개신교에 대한 입장은 매우 부정적이다. 가톨릭의 견해는 옳은 것으로 개신교의 견해는 틀린 것으로 여기고 있다. 개신교의 핵심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이신칭의'를 평가절하하고 루터를 인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대화를 하려는 자의 자세가 결코 아니다.

 

그가 제시한 보화 셋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생각이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이다. 그의 말대로 개신교는 이것을 버렸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개신교의 정체성이 있다. 외경을 정경으로 받지 않은 이유, 성전을 거부하고 오직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유, 연옥을 거부하는 나름의 이유가 개신교 안에 존재한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을, 오직 은혜를, 오직 믿음을 보화로 여기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임승만이 언급한 세 가지 보화는 참된 보화를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개신교가 이런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것 같다.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공존이다. 이 공존을 위해 존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지난 513일 예장합동 전국 목장 기도회가 있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의 피터 릴백 총장이 강사로 나섰다. 그는 한국에서 가톨릭의 인식이 좋아지고 있는 것을 염려하면서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고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며 가톨릭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요청했다. 가톨릭에 대한 그의 시각은 한국의 보수 교회의 것과 동일하다. 실제 많은 성도들은 가톨릭에는 구원이 없으며 가톨릭이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종교개혁 후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6절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 교황은 결코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교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대적하고 자신을 높이는 적그리스도, 죄의 사람이며 멸망의 자식이다.' 대부분의 장로교회는 이 고백 문서를 교단(교회) 헌법의 교리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문서상으로 교황(가톨릭)에 대한 장로교의 공식적인 입장인 셈이다. 개신교를 향한 가톨릭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은 트렌트 공의회(1545)를 통해 개신교를 저주하며 정죄하였다.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적대적인 관계가 이해된다. 그때는 서로 원수처럼 적대시하고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변화는 가톨릭에서 먼저 일어났다.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개신교에 대해 '분리된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199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는 회칙을 발표하면서 개신교를 향해 '갈라진 형제들'이라는 용어 대신에 '세례받은 이들' '다른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 '가톨릭과 완전한 일체를 이루고 있지 않은 교회와 공동체들'이라는 더 전진된 표현을 사용하였다. 아쉽게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황과 관련된 내용을 뒤집는 결정이 나온 바는 없다.

 

한국의 개신(장로)교는 가톨릭에 부정적이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가톨릭을 개신교, 정교회와 함께 기독교의 주류 교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가톨릭은 엄연한 실재다. 그렇다면 가톨릭의 미사를 우상숭배라 하고(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30주일)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면서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교황을 향한 신앙고백서의 표현이 시대의 반영이라면 전향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가톨릭에 대해 경계령을 내릴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마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한국의 개신교(장로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이고 술과 담배를 금할 것이다. 또한 연옥의 교리를 거부하며 마리아를 가톨릭처럼 격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외경은 정경 속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종교와도 대화를 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하물며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대화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대화의 첫걸음은 바로 존중이다. 가톨릭이 무엇을 보화로 삼고 있는지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존중은 시작된다. 이 책이 가톨릭을 향해 존중의 마음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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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 배신의 입맞춤
토스카 리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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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사람에 대한 이보다 더 큰 저주가 있을까? 유다 이야기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다. 그런데 성경은 배신의 동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물론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는 암시는 있지만 유다를 통해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유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가 '가룟' 유다라는 것 밖에. ‘가룟도 그 뜻이 분분하다. 거짓말쟁이라는 뜻에서부터 단검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 염색한 사람 등의 뜻이 있다. 일반적인 의미는 '그리욧' 출신의 남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리욧의 위치 또한 불분명하다. 이래저래 우리는 유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유다는 메시야인 예수님을 배신한 중죄인이다. 그는 기소되었고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형은 집행되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 바로 변론이다. 모든 법정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변론을 잘 하지 못해 자신을 방어하지 못하는 자를 위해 변호사도 선임할 수 있다. 그런데 유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소명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그리고 그때 도대체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그에게서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우리는 단지 그의 잘못만 알고 있을 뿐이다. 상대적으로 유다에 대한 여백이 많은 셈이다.

 

<유다 : 배신의 입맞춤>(홍성사, 2014)은 토스카 리가 이 여백을 파고들어 채운 소설이다. 토스카 리는 <데몬 : 악마의 회고록>(홍성사, 2011)<하와 : 상실의 로맨스>(홍성사, 2012)라는 소설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한국계 미국인 작가다. <데몬 : 악마의 회고록>은 한 번의 타락으로 저주받은 악마가 자신들과 달리 용서의 기회를 얻은 인간을 보면서 느끼는 질투와 분노를 모티브로 했고 <하와 : 상실의 로맨스>는 아담의 죽음 이후 하와가 회고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특히 그녀의 처녀작인 <데몬 : 악마의 회고록>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네덜란드어, 폴란드어, 인도네시아어로도 번역되기도 했다.

 

토스가 리가 유다에 대한 여백을 상상력으로 채운 내용 중에 아마도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유일 것이다. 소설 <유다>의 유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유다와는 사뭇 다르다. 소설 속 유다는 돈에 눈이 어두워 스승을 판 파렴치한 악당이 아니라 예수님을 제사장의 손에서 보호하려고 한 사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유다의 절박함을 직접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생생하게 유다의 생각을 우리에게 쏟아 놓는다. 마치 유다의 변호인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 수밖에 없는 정황을 읽을 수 있고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허구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럴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렇게 행동한다. 과거에 그가 살아온 배경을 알지 못하면 지금 그가 하는 행동과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에게 이유가 없을 수 없다. 이것을 알기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은 직접 유다에게 듣는 것이다. 그래서 토스카 리는 유다가 되기로 결정했다. 사실 소설 <유다>의 유다는 토스카 리다. 혼란스러웠던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산 유다가 되어 보니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겨준 수많은 이유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그녀는 유다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유다가 되어 유다를 보니 유다를 정죄했을 때 보이지 않았던 유다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유다가 배신의 키스를 했는지 아니면 사랑의 키스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녀가 이 책을 통해 유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훨씬 더 돋보인다. 일방적으로 정죄하기보다 그 사람의 입장에 한번 서 보는 것. 이것이 소통과 섬김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 속으로 들어갈 때 그의 말이 다르게 들리고 행동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삶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역사소설을 집필하는 모든 작가가 그러하겠지만 토스카 리 역시 이 작품을 위해 1세기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 제법 많은 공부를 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을 수없이 오고 간 것은 물론이고 학위 논문 세편을 작성할 만큼의 분량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1세기 팔레스타인 땅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올 메시야를 갈망했던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서 유다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다를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처럼 유다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일을 벌인 것이라면 성경의 기록은 잘못되었다. 잘못된 성경 기록은 유다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했고 사람들은 성경이 만들어 낸 이 선입견 이상 나가지 않는다. 이미 유다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토스카 리는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 혹은 선입견을 깨고 고정관념 너머에 있는 사람의 실체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성경이 틀렸다는 말도 소설처럼 유다를 복원시키라는 말도 아니다. 성경과도 같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선입견 혹은 고정관념에 도전해 보라는 것이다.

 

사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기만 하더라도 우리가 겪는 거의 대부분의 갈등은 해결될 수 있다. 거기에다 그 사람이 자란 환경을 이해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지도,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더욱 강화될 뿐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그와 소통할 수 있다.

 

손케 보르트만 감독이 2003년에 만든 <베른의 기적>이라는 독일 영화가 있다. 1954년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이 헝가리를 3:2로 극적으로 역전시켜 우승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이 영화 주인공인 마테스는 소련에 11년간 포로로 억류되었다가 이제 막 돌아온 아버지가 있다. 마테스의 아버지는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아이들을 권위적으로 대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없었을 때가 더 행복했었다고 할 만큼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 역시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갈등은 깊어 갔고 아버지는 신부에게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한다. 신부는 마테스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들려주라고 아주 적절한 조언을 한다. 어느 날 마테스의 아버지는 저녁 식사 시간에 11년 간 포로로 억류된 자신의 삶이 어땠는지 자녀들에게 하나씩 들려준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얼마나 추웠는지 얼마나 가족들이 보고 싶었는지.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자녀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서 마테스의 아버지 역시 달라졌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은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들이다. 이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뛰어넘어야 그 사람을 바르게 알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는 것이다. 이게 교회며 공동체다. 어쩌면 오늘 교회는 이야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 판단과 정죄만 난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백성을 이끌었던 메시야 예수의 민낯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더 각별하다. 유다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녀가 말한 대로 이 책은 예수님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이점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믿고 섬기는 예수님이 바로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으로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이런 정황의 빛 아래서만 정확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복음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유다에 비해 예수님의 말과 행동이 복음서의 내용과 너무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쉬운 이유는 이 소설이 유다는 물론이고 1세기를 살았던 역사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학자들 간에 차이는 있지만 대략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 적어도 30~40년이 지난 다음에 기록된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기에 너무나 많은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그녀가 이왕에 유다의 편에 서 보기로 결정한 이상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행적도 그 의미가 바르게 전달되는 한에서 작가적 상상력을 더 많이 발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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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시대 순결한 정의 - 불의한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다니엘서 메시지!
브라이언 채플 지음, 김진선 옮김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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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좋은 설교집을 만났습니다. 평소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법 유명하신 분들의 설교집을 여러 번 접했었는데 제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역시 설교는 현장에서 들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분의 설교집은 실망만 남겼습니다. '내가 해도 이 정도는 하겠다.' 이런 교만한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설교집은 손에 집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설교집은 달랐습니다. 브라이언 채플의 다니엘 강해서인 <불의한 시대 순결한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최근 저는,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부르셨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사람의 아들 즉 인자라고 부르신 배경에 다니엘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니엘서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난 것입니다. 제목도 강렬했습니다. <불의한 시대 순결한 정의>.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원제목이 훨씬 더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제목은 <The Gospel according to Daniel>입니다. 그런데 이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신약의 사복음서의 영어식 표기가 'The Gospel according to'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책의 원제목을 한국어로 옮기면 '다니엘 복음'이 됩니다.

 

이 원제목은 브라이언 채플의 구약 독법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브라이언 채플은 목회자이자 교수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신 분은 아닙니다. 책의 표지에 브라이언 채플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 중의 한 분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 리폼드신학대학원에서 가르쳤고 지금은 미국 일리노이 주에 소재한 그레이스장로교회를 담임하면서 카버넌트신학대학원 명예총장, 낙스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로 섬기고 계십니다. 한국에 소개된 책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은성), <성화의 은혜>(지평서원) 정도가 있습니다. 이런 채플 목사님의 이력을 살피면 정통주의 보수 신앙을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신학은 고스란히 그의 설교 속에 녹아 있습니다.

 

저는 다니엘서가 복음서라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구약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러니 다니엘서를 비롯한 구약의 책들도 복음을 전하는 책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합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복음을 찾는 해석의 틀을 구속사적 해석이라고 부릅니다. 브라이언 채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와 같은 구속사적 해석의 틀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구약에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보다 믿음 좋은 사람을 전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채플은 구약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다니엘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왕의 진미를 거절해도,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않더라도, 기도하면 죽는다는 칙령이 내려졌음에도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하더라도 채플의 시선은 언제나 그들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입니다. 10장의 제목은 이러합니다. '세 번의 손길로 전달된 복음' 이 장에서 브라이언 채플은 다니엘의 약함을 드러내고 이 약함을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설교합니다. 다니엘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자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저는 이 장에서 특히 많은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니 내가 약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브라이언 채플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영웅에 기죽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가 보여 주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C. S. 루이스에 따르면 '은혜'야말로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구별점입니다. 은혜라는 말 안에 이미 '무조건적'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무조건적인 은혜'라는 말은 은혜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균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타락한 우리의 사고는 무조건적인 은혜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브라이언 채플은 다니엘을 통해 무조건적인 은혜를 전합니다. 4'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이라고 하는 바벨론의 포악한 군주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모습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적으로 어떤 선함도 없는 자에게 하나님이 아무 조건 없이 은혜를 베푸신다는 진리가 바로 다니엘서에서 캐내야 할 황금 같은 복음의 진리입니다'(152).

 

그렇다고 해서 브라이언 채플이 흔히 말하는 값싼 은혜를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값싼 은혜는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생긴 말입니다. 그는 5'사랑의 경고'에서는 벨사살 왕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우리를 엄중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도로서 책임 있는 삶을 회피하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버릴 마음이 없는 우리는 십자가를 버젓이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상처를 헤집고 손을 넣어 그 피를 받아 죄를 가리는 데 쓰려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186) 기가 막힌 표현이지 않습니까! 복음은 우리를 결코 방종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깨닫는다면 값싼 은혜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값싼 복음은 번영신학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번영신학은 값싼 복음의 파트너입니다. 값싼 복음이 참 복음이 아니듯이 번영신학 역시 복음이 아닙니다. 다니엘서가 복음서로 불릴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번영신학을 바르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도 번영신학이 번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어려움과 고난을 비껴 갈 수 있다는 달콤한 메시지에 속아 넘어가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이 씁쓸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번영신학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른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경건하게 살았지만 도리어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집니다. 다니엘이 예언했던 이스라엘의 미래는 여전히 어두운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겪었던 숱한 어려움은 물론이고 당시 바벨론 땅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묻어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 이것은 이 땅의 교회와 성도가 비껴 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번영신앙에 취한 자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구절을 지워 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존 파이퍼 목사님은 번영신학이 우상숭배라며 아주 직접적으로 번영신학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번영신학은 기독교의 변종이며 거기에 복음이 없습니다. 십자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가 복음서라고 불려도 괜찮을 또 다른 이유는 다니엘서가 복음의 공동체성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공동체적입니다. 우리가 개인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렇다고 공동체가 무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체를 훨씬 더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 대안 위협은 바로 개인주의입니다. 나홀로 신앙.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 나만 은혜받으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교회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브라이언 채플은 9'형제의 고통에 동참하다'에서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잘못을 정죄하고 책망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잘못을 범한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동체며 교회입니다. 이것 외에도 이 책 매 장의 설교마다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브라이언 채플이 참 좋은 설교자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니엘서는 에스겔, 스가랴, 요한계시록과 함께 묵시문학에 속한 책입니다. 앞부분 다니엘의 행적과 관련된 부분은 스토리가 있으니 별로 어렵지 않지만 후반부로 넘어가면 사람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채플은 정말 단순하게 접근합니다.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소개합니다. 하지만 그는 더 중요한 전체의 그림을 놓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시기와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보다 환란 중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이처럼 그의 설교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인자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기대하면서 이 책을 들었지만 그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설교를 읽으면서 나의 마음은 복음으로, 하나님으로, 은혜로 채워졌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설교다운 설교를 듣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의외로 율법적인 설교, 정죄하는 설교, 인간의 열심과 헌신을 요구하는 설교가 허다합니다. 이런 설교는 하나님의 은혜와 맞닿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죄책감에 들고 실의에 빠지며 낙심하게 됩니다.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바벨론과 같은 이 세상이 교회와 성도를 어떻게 위협하는지에 대한 언급이 부족한 것이 아쉽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여러분들에게 무엇보다도 복음을 더 깊이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복음의 은혜에 깊숙이 잠겨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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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예언자, 헨리 나우웬
마이클 앤드류 포드 지음, 김명희 옮김 / 포이에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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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란 누구일까? 아브라함 헤셸이 그의 대표작인 <예언자들>(삼인, 2004)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예언자는 자기 말로써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우웬은 예언자임에 틀림없다. 그가 숨지기 전 10년 동안 봉사했던 데이브레이크 사람들은 나우웬을 향해서 '하나님을 보여 준 예언자'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346). 그들이 10년 동안 나우웬을 직접 보고 내린 결론이니 다른 의견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는 숨지기 3주 전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죽은 이후에야 그들을 칭송한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예언자가 될 마음이 있는가?" 나우웬은 예언자 되고 싶어했던 것일까?

 

<상처 입은 예언자 헨리 나우웬>(포이에마, 2014)은 언론인이자 방송인인 마이클 앤드루 포드가 쓴 나우웬 전기다. 포드는 신학을 전공했고 나우웬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나우웬의 전기 작가로서는 안성맞춤인 셈이다. 이 책은 1999년 나우웬이 숨을 거둔 지 10년이 되는 해 나우웬을 기념해서 출간된 것으로 영국,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캐나다, 미국, 남미에 거주하는 나우웬과 관련된 125명과 이런저런 형태로 나눈 대화의 결과물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이미 이 책을 2003년에 번역 출간한 바 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나우웬의 동성애 성향과 관련된 부분을 삭제 편집하여 독자들을 기만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포이에마 출판사에서 나우웬 서거 10주년 기념 서문을 포함한 완역본을 출판한 것이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마음'으로 나우웬 생애의 중요한 주제들을 개략적으로 다룬다. 하지만 연대순으로 되어 있지 않다. 그의 내면과 외적 세계를 탐사하고 그의 성품의 어려움 조사했다. 반면 2부와 3부는 연대순으로 기술되었다. 2'지성'에서는 네덜란드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학생, 교사, 교수로 지내며 심리학과 신학적 지식이 성장했던 시절 그리고 라르쉬에 합류하기까지의 삶을 따라간다. 3''은 생애의 마지막이자 가장 의미 깊었을 10년을 다룬다. 회의와 고뇌, 부활과 기쁨의 시기를 지나 자신과 하나님 그리고 그의 말대로 몸이 어떻게 영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50)

 

먼저 이 책은 나우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자료와 증언에 기초해서 나우웬의 신화적인 모습을 제거했다. 물론 나우웬의 글이 그의 생각을 다 담지 못하고, 포드가 만난 사람들이 나우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포드는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나우웬이 우리처럼 상처 입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알려 주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마도 포드가 사실에 근거해서 기사를 작성하는 훈련을 받은 저널리스트라는 점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을 분별하는 능력에 대해 매력적으로 썼지만 정작 자신은 고독을 좋아하지 않았고(85),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주목받고 싶은 욕구가 넘쳤다는 것(105), 심지어 그가 말한 내용과 그가 사는 모습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했다는 점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떡이게 된다. 그도 별수 없는 연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포드는 나우웬이 동성애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런 나우웬의 모습이 나우웬의 명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점을 알게 될 때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포드는 우리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친절하게 나우웬의 민낯을 보여 준다.

 

그리고 포드는 '치유자'가 나우웬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우웬은 치유자 이상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나우웬을 '예언자'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나우웬을 예언자라고 부른다고 해서 치유자로서 그의 역할이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나우웬의 치유자로서의 흔적은 그대로 예언자의 이미지 속으로 편입된다. 치유자로서 타인을 향한 동정심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헤셸이 말한 대로 예언자의 필수적인 요건이기 때문이다. 나우웬은 예언자로서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치유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앞서 말한 데이브레이크 사람들의 증언 외에 포드는 나우웬이 예언자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나우웬이 수많은 독자들에게 성령을 전했다는 점(78), 사람들에게 특히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하나님을 보여 준 점(346) 그리고 가톨릭 교인뿐만 아니라 개신교인 더 나아가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성찬을 개방했다는 점(379)등이다. 그러나 <예언자>에서 헤셸은 예언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언이란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라고 빌려 주신 말이며 착취당한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불경스런 부자들에게 내리신 말이다"(36). 헤셸에 의하면 나우웬은 불완전한 예언자다.

 

나우웬은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며 그 아픔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들을 치유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의 주된 사역이었다.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고 예언자가 감당해야 하는 영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언자의 또 다른 사역인 '착취당한 가난한 자들과 세상의 불경스런 부자들에게' 나우웬이 어떤 말을 했는지 이 책에서는 소개되지 않는다. 물론 포드는 나우웬이 미국의 걸프 전쟁을 공개적으로 반대한 것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시위에 동참하며 사회적 정의를 위해 힘을 쏟은 사실을 알려 준다. 그뿐만 아니라 나우웬이 남미에서 만난 해방신학의 창시자 구티에레즈가 나우웬을 향해 "가난과 불의 그리고 가난을 일으키는 요인에 맞서는 사람이었다"고 말한 사실도 들려준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예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나우웬의 영성이 개인의 영성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 만난 구티에레즈 신부와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나우웬은 구티에레즈로부터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헌신을 배울 수 있었고 구티에레즈는 나우웬으로부터 사회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이들에게도 영성 생활이 중요하다는 점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나우웬은 구티에르즈가 '역사 속 가난한 자들의 난입'이라 칭한 것을 충분히 이해했을 때 자신의 영성이 "영적으로 되었다"고 말했다. (256) 그러므로 이 책은 영성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하다. 참된 영성은 개인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계신다.

 

그가 숨지기 전 10, 그가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랜 기간 동안 머물렀을 라르쉬 공동체로 들어간 것은 정의를 위한 그만의 해법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은 그가 치유자를 넘어 예언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가져오기 위해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 그런데 불의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바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바로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내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가진 것에 의해서, 생긴 것에 의해서, 지능에 의해서 차별받지 않고 오직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는 곳이 바로 라르쉬다. 여기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평화는 다름 아닌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한 대로 정의의 결과다.

 

이와 같은 나우웬의 헌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빛을 비춘다. 결국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드러내야 한다. 이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가 친히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교회다. 교회는 그런 공동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교회의 공동체적인 부분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역을 위한 사역 단체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은 있지만 정작 중요한 사람은 거기에 없다. 교회는 기계적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적 생명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이 땅에서 예언자적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드러내며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드러내는 일은 나우웬의 말대로 분노와 두려움이 아니라 원수에 대한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불의한 부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사명을 잊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쉽지만 나우웬은 이 점에서 약간은 불완전한 모습을 보였다. 우리는 이런 불완전한 나우웬의 모습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개인을 치유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세상을 치유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넘쳐나도록 자신을 드려야 한다. 이 책이 그런 결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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