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가 저버린 보화들 - 반세기의 개신교인이 改宗한 사유思惟
임승만 지음 / 좋은땅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최근 가톨릭의 성장세가 눈에 띈다. 개신교의 하락세가 분명한 가운데 가톨릭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신 분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개신교가 저버린 보화들>(좋은땅)이라는 책을 출간한 임승만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무려 50년 동안 개신교인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하지만 지금은 가톨릭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개신교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누구보다 많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그가 천주교로 개종한 이유와, 천주교와 개신교가 어떻게 다른지 소개한다(1). 그리고 성경이 어떤 책인지 살피면서,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종교개혁이 특별히 예배가 불완전한 개혁이었다는 것을 주장하고 기독교(천주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2).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처럼 그는 개신교가 저버린 보화 셋을 소개하는데 개신교가 외경이라고 분류하는, 그러나 가톨릭은 제2의 경전으로 받으며 구약성경으로 읽고 있는 7권의 책과 거룩한 전통, 즉 성전 그리고 연옥 교리다(3).

 

먼저 개신교를 향한 그의 일침은 매우 매섭다. 그리고 정확하다. 여느 '교회 개혁서'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핵심을 잘 짚고 있다. 대개 교회 개혁은 목사들의 전유물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평신도들도 교회의 문제점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목사에게 과도한 권한이 집중된 것, 성장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이는 것, 교회의 직분 때문에 생기는 위화감, 특히 서리 집사 제도가 직분의 계급화를 부추겼다는 그의 지적은 뼈아프다. 명분 없는 분열, 준비 없이 베푸는 세례 등도 마찬가지다.

 

그가 특히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성찬이 사라진 예배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예배를 개혁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성찬이 사라진 자리에 설교가 들어섰는데 그 후로 자연스럽게 예배가 목사의 독무대가 되었다는 그의 지적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가톨릭에서 소수 정예로 사제를 선출하는 것에 비해, 개신교의 무분별한 목회자 양성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그의 말도 새겨들어야 한다. 한마디로 함량 미달인 목사가 너무 많다. 이것은 곧바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로 이어졌는데 목사의 신뢰도가 신부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이 책은 개신교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 주며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종교개혁가들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는 개신교회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루터는 교권의 횡포에 곤욕을 치렀지만 지금처럼 교권이 횡포를 부리는 적은 없었을 것이다. 교황의 독주를 반대했지만 지금 개신교는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교회의 숫자만큼의 교황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 사제의 위계질서를 비판했지만 지금 개신교회 안의 서열화는 심각하다. 오직 성경을 외쳤지만 성경을 벗어난 번영 신앙이 교회에서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다. 그러나 직면해야 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유익은 가톨릭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는 점이다. 가톨릭으로 개종 후 큰 기쁨을 누리게 된 그는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그들이 가톨릭을 잘 알아 갈 수 있도록 펜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와 비교해서 두드러진 특징을 잘 짚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신교인들의 가톨릭 이해는 천차만별이다. 대게 마리아를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아주 잘못된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저자는 가톨릭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평신도의 수준에서 설명한다. 마리아는 가톨릭에서 어떤 위치인지, 가톨릭 제사와 유교의 제사는 어떻게 다른지, 제사를 가능하게 한 통공의 교리는 어떤 것인지, 술과 담배는 왜 금하지 않는지, 미사의 뜻은 무엇인지, 가톨릭 교인은 왜 성호경을 긋는지, 세례를 받을 때 세례명이 있는 이유 등 평소 가톨릭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도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이 책은 미흡하다. 관계 개선의 첩경은 상호 존중이다. 서로 다르지만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관계는 개선된다. 하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저자의 개신교에 대한 입장은 매우 부정적이다. 가톨릭의 견해는 옳은 것으로 개신교의 견해는 틀린 것으로 여기고 있다. 개신교의 핵심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이신칭의'를 평가절하하고 루터를 인격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대화를 하려는 자의 자세가 결코 아니다.

 

그가 제시한 보화 셋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생각이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이다. 그의 말대로 개신교는 이것을 버렸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개신교의 정체성이 있다. 외경을 정경으로 받지 않은 이유, 성전을 거부하고 오직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는 이유, 연옥을 거부하는 나름의 이유가 개신교 안에 존재한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을, 오직 은혜를, 오직 믿음을 보화로 여기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임승만이 언급한 세 가지 보화는 참된 보화를 가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개신교가 이런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것 같다.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공존이다. 이 공존을 위해 존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지난 513일 예장합동 전국 목장 기도회가 있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의 피터 릴백 총장이 강사로 나섰다. 그는 한국에서 가톨릭의 인식이 좋아지고 있는 것을 염려하면서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고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며 가톨릭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요청했다. 가톨릭에 대한 그의 시각은 한국의 보수 교회의 것과 동일하다. 실제 많은 성도들은 가톨릭에는 구원이 없으며 가톨릭이 이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종교개혁 후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6절은 이렇게 말한다. '로마 교황은 결코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교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대적하고 자신을 높이는 적그리스도, 죄의 사람이며 멸망의 자식이다.' 대부분의 장로교회는 이 고백 문서를 교단(교회) 헌법의 교리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것이 문서상으로 교황(가톨릭)에 대한 장로교의 공식적인 입장인 셈이다. 개신교를 향한 가톨릭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은 트렌트 공의회(1545)를 통해 개신교를 저주하며 정죄하였다.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적대적인 관계가 이해된다. 그때는 서로 원수처럼 적대시하고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변화는 가톨릭에서 먼저 일어났다. 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개신교에 대해 '분리된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199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는 회칙을 발표하면서 개신교를 향해 '갈라진 형제들'이라는 용어 대신에 '세례받은 이들' '다른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 '가톨릭과 완전한 일체를 이루고 있지 않은 교회와 공동체들'이라는 더 전진된 표현을 사용하였다. 아쉽게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황과 관련된 내용을 뒤집는 결정이 나온 바는 없다.

 

한국의 개신(장로)교는 가톨릭에 부정적이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가톨릭을 개신교, 정교회와 함께 기독교의 주류 교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처럼 가톨릭은 엄연한 실재다. 그렇다면 가톨릭의 미사를 우상숭배라 하고(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30주일) 교황을 적그리스도라 부르면서 대화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교황을 향한 신앙고백서의 표현이 시대의 반영이라면 전향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가톨릭에 대해 경계령을 내릴 것이 아니라 서로 존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마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한국의 개신교(장로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이고 술과 담배를 금할 것이다. 또한 연옥의 교리를 거부하며 마리아를 가톨릭처럼 격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외경은 정경 속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종교와도 대화를 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하물며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대화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대화의 첫걸음은 바로 존중이다. 가톨릭이 무엇을 보화로 삼고 있는지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존중은 시작된다. 이 책이 가톨릭을 향해 존중의 마음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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