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란 무엇인가 -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기독교 신학 입문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김기철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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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사람은 적어도 세 번은 놀라게 된다. 먼저 책의 분량에 놀란다. 무려 1177쪽이나 된다. 두께로는 자그마치 8cm. 300페이지 책 4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겉만 봤을 때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쉽게 못할 것 같다. 책을 펼치자마자 두 번째 놀라게 되는데, 이 두꺼운 신학 책을 "16세 어린 학생들이 재미있게 잘 이해하면서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소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덮을 수 없다. 하지만 정작 더 놀라는 것은 책을 덮으면서다. 이처럼 방대한 신학 이야기를 어쩜 그리 잘 정리해 놓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가 소개하는 자료의 양은 정말 경이롭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정말 쉽게 읽힌다.
이처럼 분량과 주제에 비해 내용이 쉽고 간결한 것은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E. McGrath)가 기독교 신학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집필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사와 신학 용어 등이 생경할 수밖에 없는 이들도 신학이라는 매력적인 학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부해 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이 빈약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목사인 내가 새롭게 접하는 내용이 많을 정도로 전문성도 갖추었다. 중요한 용어들은 해당 페이지 여백에 따로 소개하고 있고 책 마지막에 용어와 인명 색인을 따로 마련해서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보도록 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읽어도 되지만 항상 옆에 두면서 필요할 때마다 찾아보며 도움을 얻는 책으로 활용하기에도 충분하다.
이 책의 초판은 이미 1993년에 나왔고 우리 손에 들려진 것은 2011년에 5판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렇게 판을 거듭한 것은 그동안 꾸준히 내용을 수정 보강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학생들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귀를 열어 놓고 있다는 증거다. 그는 신학이 신학자들과의 끊임없는 소통과 대화를 통해 성장해 나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학함이 무엇인지 그가 이 책으로 몸소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내용을 고치고 보완해서 6판 출판(2016년)을 준비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초판을 대한기독서회에서 <역사속의 신학>이라는 제목으로 1998년에 번역 출간한 바 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길라잡이 : 시대, 주제, 인물로 본 기독교 신학'인데 기독교 역사를 초대교회부터 현대까지 시대, 주제, 인물별로 간추린 것이다. 전체의 1/5에 해당하는 이 부분만 잘 공부하더라도 기독교 역사에 대해 기초적이면서도 폭넓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스콜라주의와 중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보기에 스콜라주의란 기독교의 개념들을 더 명확하게 만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리고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라 도리어 은총과 칭의의 교리가 발전한 시기다. 이런 중세가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더구나 종교개혁의 울타리 속에 가톨릭의 개혁을 포함시킨 것은 매우 이채롭다.
2부는 '자료와 방법론'인데 신학의 정의를 비롯해서 신학이라는 학문을 이루어 가는 자료와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성경뿐만 아니라 전통과 이성 그리고 종교적 경험이 신학의 자료로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지 200페이지에 걸쳐서 살핀다. 이것은 자연신학 즉 일반 계시와 직결되고 철학의 위치와도 관련이 있다. 그는 특히 신학의 분과 중 역사신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역사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에서 형성된 개념들은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아니고 부적합하거나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판명된 과거의 신학 공식은 수정할 수 있다(260쪽)"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신학 방법론이 고스란히 이 책에 묻어 있다.
3부는 '기독교 신학'인데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교의학의 주제를 따라서 신론, 삼위일체론, 기독론, 인간론, 교회론, 종말론은 물론이고 다양한 종교 이론을 소개하면서 타 종교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시각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간다. 이는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에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를 비롯한 개신교의 여러 교파에서부터 가톨릭, 정교회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울려 퍼졌던 다양한 의견들을 간략하면서도 자세히 그리고 담담하게 서술해 가고 있다. "설명은 하지만 설득은 하지 않는다"는 집필 의도를 끝까지 관철하는 셈이다.
이처럼 "이 책은 신학적으로 중립을 지키며, 특정 교파의 견해를 옹호하지 않는다. 또한 특정한 견해들에 제기된 비판을 다루지만, 이 책 자체가 그러한 견해들을 비판하지는 않는다(16쪽)"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런 객관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놀라울 정도로 쭉 유지된다. 이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어렵다. 내용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듣고 스스로 평가하고 자신의 신학을 정립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대단히 유용하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교파의 신학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전수받는다. 그래서 그 교파의 신학을 뛰어넘기란 매우 어렵다. 물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신학적 전통을 소중이 여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다른 교파 신학에 대한 배타성으로 전환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저자도 이것을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약점으로 파악하고 있다(369쪽). 다른 교파의 신학은 아예 들으려 하지 않고 존중하지도 않는다면 스스로 입지를 좁히는 것이고 그 명맥이 장차 사라질 위험마저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전수된 신학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도, 땅에서 솟아오른 것도 아니라 여러 신학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씨름해서 얻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바르트에 대한 이야기가 페이스북을 뜨겁게 달구었던 적이 있다. 알다시피 바르트 신학은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그 시대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20세기 신학의 교부라고 칭송을 괜히 받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그를 터부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르트와 대화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막아 버리는 분들이 있다. 그래서 바르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다. 그래서 이 책이 한국교회에 더 절실한지 모르겠다. 바르트를 비롯하여 교회사를 통해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신학자들의 사상을 제대로 소개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을 향한 비판이 있다는 점도 빠뜨리지 않는다.
맥그래스는 우리가 대화해야 할 상대에 가톨릭을 포함시킨다. 가톨릭을 이단으로,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보수적인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가톨릭에 대한 소개는 매우 전향적이다. 그는 이미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국제제자훈련원, 2011)에서 가톨릭을 개신교, 정교회와 함께 기독교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만일 이게 일반적인 견해라면 한국교회는 세계적인 흐름에서 이탈한 셈인데 어떻게 이 간격을 좁힐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 책에 소개된 아퀴나스를 비롯한 가톨릭 신학자의 글은 물론이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자료들을 통해 이들과도 대화하며 가톨릭의 신학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명만 하고 설득하지 않는 것이 꼭 유익한 것만은 아니다.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을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피터 와그너는 신사도주의 운동으로 교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여기에 대한 언급은 없이 오순절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소개한다. 마르키온 역시 정경의 형성 과정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사람인데 맥그래스는 그를 급진적인 인물로만 소개하며 루터와 연결시킨다.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기독교 안에서만 주장해야 한다고 말한다(647쪽). 그는 아마도 타 종교에 대해 포괄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 같다. 물론 보수 신앙인으로서 그의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맥그래스가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이라고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안다면 그리 놀랄 만한 것은 아니다. 종교 다원주의와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견지하면서 또 다른 입장을 듣고 배우면 된다. 그 또한 자신과 다른 나의 생각을 듣고 배울 준비가 된 사람이다. 혹시 자유주의와 바르트 그리고 가톨릭의 견해를 배우면서 그리로 경도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런 분들은 틀림없이 최근 논란이 되는 영화 '노아'를 보지 말라고 할 것 같다. 보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다. 그러나 영화가 과연 위험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 영화를 보고 위험하다고 판단했다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판단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하는 것 같다. 보지 않는 것이, 읽지 않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칼뱅은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자신의 개혁 즉 자신의 신학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겸손하게 인정한 것이다. 미완의 개혁 미완의 신학을 후배들이 보완해 주기를 기대하며 과감하게 자신을 밟고 지나가라고 등을 내준 것이다. 우리는 이런 훌륭한 선배를 두었다. 자신이 속한 교파의 신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신학의 진보는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책은 이런 소통을 돕는 멋진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신학생들의 필독서다. 전수된 신학을 보수하면서 교파 신학의 담벼락 너머에 있는 사람들과도 대화하며 소통할 수 있는 여유가 절실하다. 이 책을 통해 교회의 역사를 통해 피고 진 다양한 생각들을 살펴보며 자신의 견해를 키워 나갔으면 좋겠다. 신학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들과 평신도들에게도 이 책은 마른 땅의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와 같은 책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제대로 '신학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신학'이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두껍다고 비싸다고 망설일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사서 책꽂이에라도 꽂아 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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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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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제 2권은 릴라와 레누의 청년기를 담고 있다. 청년기를 거치면서 릴라와 레누는 그야말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릴라는 스테파노의 부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남편인 스테파노를 견딜 수 없어한다. 대신 레누의 남친 니노와 열애에 빠져 니노의 아이를 갖게 된다. 릴라의 남편은 여기에 질세라 자신도 바람을 피우는데 급기야 정부인 아다가 스테파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아다는 당당하게 릴라의 자리를 차지한다. 릴라가 누군가. 릴라는 비굴하지 않게 니노의 아이를 데리고 자신을 짝사랑하던 엔초와 함께 안방을 아다에게 내주고 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며 살아간다.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은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레누는 어떤가? 늘 릴라에게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며 살아왔던 레누다. 어떨 때는 가깝게 어떨때는 멀리서 릴라를 지켜보면서 릴라처럼 하지 못하는 자신을 못마땅해 한다. 자신의 남친 니노를 릴라가 빼앗아갈 때 니노의 아버지에게 몸을 맡기는 레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레누는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전념해 대학에 진학한다. 그리고 거기서 운명처럼 만난 피에트로를 통해 신분상승의 기회를 잡는다. 피에트로는 상위 1%에 속하는 계층의 가문이다. 더구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쓴 소설이 피에트로의 어머니의 도움으로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출판.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는 것. 옛적 릴라와 함께 꿈꾸었던 일이다. 레누는 높은 고료는 물론이고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릴라 곁에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레누였는데 청년기를 거치면서 그녀 역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변화를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책에는 평소 그가 불렸던 이름 레누가 아닌 다른 이름이 적힐 것이다.


거침없고 명석한 릴라, 남부러울 것 없이 풍요롭게 살아가던 릴라가 고기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햄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의 인생을 여기로 이끌었을까? 물론 전적으로 그녀의 선택이고 그녀의 책임이다. 그녀는 독단적이고 이기적이다. 거칠고 난폭하다. 이것으로 다 설명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릴라의 이른 결혼, 그것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결혼이 그녀의 인생을 망쳤다고 할 수 있다. 이 끔찍한 결혼 이후 그녀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게 자신의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드리면 될텐데 하고 릴라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릴라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이런 결혼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주체적이다. 스테파노에게 매를 맞지만 자신을 굽히지 않는다. 남자로서 릴라는 조금, 아니 많이 부담스럽다. 릴라와 레누 둘 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레누다. 그래서 난 릴라를 흠모하고 몸은 섞지 않으면서 같이 살고 있는 엔초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자라면 릴라를 어떻게 생각할까? 레누는 언제나 릴라에게서 영감을 얻는다. 글이며 말이며 어느 것 하나 릴라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레누는 이렇게 릴라 덕택에 조금씩 서서히 자신을 채워가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레누는 이처럼 강하게 릴라 자신을 이끌어가고 있는 릴라가 고마울 뿐이다.

 

소설에는 성불평등에 대한 묘사가 자주 증장한다. 남편에게 매를 맞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레누가 대학생활을 할 때 그녀의 위치가 그녀의 남자 친구에 의해 결정된다. 이 대목들을 읽으면서 여자에 대한 남자의 편견과 몰이해는 동서양을 구분하지 않는 보편적인 정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씁쓸했다. 여자의 권리, 남녀 성평등은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그래도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것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끊임없이 불평등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저항은 다름 아닌 여자를 남자와 동일한 인간으로 봐달라는 것이다. 혹시 이 소설이 이런 것도 염두해 두면서 썼는지 모르겠다.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아직 3권과 4, 두 권이나 남아 있다. 릴라와 레누의 미래는 어떻게 채워질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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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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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패란태가 지은 <나의 눈부신 친구>(한길사)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레누와 그녀의 단짝 릴라의 우정을 담은 소설이다. 엘레나의 나폴리 4부작의 제 1부인 이 책은 레누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릴라와 만나-사실은 릴라가 성인이 되어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이긴 하지만- 릴라가 겨우 16세에 결혼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레누의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소설은 이 시기 동안 릴라가 레루의 성장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릴라는 표독스럽고 영리하다. 반면에 레누는 착하고 평범하다. 릴라는 언제는 레루를 앞서 있다. 레누는 학교교육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지만 릴라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리고 현실에서 경험을 통해 지혜와 지식을 습득한다. 그러니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런 릴라를 레루는 늘 부러워하며 따라간다. 하지만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레루가 릴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고, 또 소설의 첫 장면이 성인 릴라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에 이후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고 릴라와 레누가 꼭 이랬다. 이 둘은 서로에게 눈부신 친구였다. 레누가 릴라를 눈부신 친구로 묘사하고 있지만 아마도 릴라 역시 레누를 눈부신 친구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레누가 릴라를 눈부신친구로 여기고 있을까? 얼마 전에 중학교 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이 친구가 혹시 나를 눈부신친구로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그를 눈부신친구로 생각하고 있나? 아무래도 눈부신은 부담스럽다. ‘눈부신은 접어두고 그냥 친구가 좋다. 이 후의 소설이 이와 같이 서로에 대해 균형을 잡아가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을 해본다.

 

그러나 정작 이 소설이 내게 흥미로웠던 것은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내내 내가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나의 친구들, 내가 뛰놀던 개천, 산과 들, 한 폭의 그림처럼 추억들이 지나갔다.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흐릿하게 이 소설은 나를 추억 속으로 데려다 놓았다. 입가에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이겠지만 과거의 기억을 저렇게 촘촘하게 재구성해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작가의 위대함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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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비밀 - 하나님 나라 내러티브와 교회의 비전과 사명
스캇 맥나이트 지음, 김광남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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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 것일까? 스캇이 던진 약간은 생뚱한 이 질문은 몇 가지 신학 주제를 담고 있다. 간디는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을 했다. 불신자가 하는 선한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일반은총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답변이 준비되어 있다. 신약학자인 스캇은 이 답변을 이미 알고 있다. 그는 불신자가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물은 게 아니라 간디의 선한 일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선뜻 답변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다. 간디의 선한 행동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불신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고(5) 교회 밖에는 하나님나라는 존재하지 않고(6) 교회의 사명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라고(7) 거칠게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방점을 찍는데 스캇은 이것을 뒤집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라는 말인가? 당장에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런 스캇의 생각은, 그가 4장에서 잘 정리하고 거부한 예수님 당시 하나님 나라를 표방했던 5가지의 유형 중, 거룩한 후퇴전략을 쓴 에세네파의 견해 같아 보여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졌다.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스캇은 7장에서 하나님 나라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의 사명을 아홉 가지로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사회정의를 다룬다(216). ‘복음적이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스캇은 사회복음과 해방신학을 수용한다.(217). 하지만 이런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조차도 하나님 나라의 일로 편입시키지 않고 개인의 선한 행동으로 치부한다.

 

사실 난 이 차이를 잘 모르겠다. 신자든 불신자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로 명명하든,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선한 행동으로 묘사하든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큰 문제점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장차림 스타일의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교회 안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밖을 보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로 받아드렸을 때 교회가 세속화 될 수 있다는 스캇의 염려에 공감한다. 이 땅에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나그네라고 하는 성도와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스캇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런 것이 자칫 세상을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될 위험을 안고 있다는 말에도(222)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일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렇게 말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난 자칫 이런 스캇의 염려 때문에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성도와 교회가 움츠려 들까봐 더 염려스럽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정장차림 스타일의 사람들교회가 하나님 나라다는 스캇의 말을 접하고는 스캇이 채워넣은 중요한 가르침은 다 들어내고 제목만 사용할 공산이 크다.

혹 진보적인 스키니스 스타일의 사람들이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며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스캇의 말대로 틀렸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장차림 스타일의 사람들보다 스키니즈 스타일의 사람들을 통해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스키니즈 스타일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오류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을 장을 담그는 것에 비유한다면 신학적 오류는 구더기에 불과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담는 것을 포기할 순 없다.

 

스캇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현재가 불완전함을 알아차려야 함을 말하지만 정작 신학도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은 간과한 것 같다. 설령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것에 대한 신학적 언명이 미숙할 수 있더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을 격려하고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나오게 해야 한다. 신학적 미숙을 온전케 하려는 신학자의 사명이 엿보이긴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도들을 교회 안에만 머물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이것이 내가 느끼는 이 책의 분위기다.

 

또한 아쉽게도 세상에 대해 가진 스캇의 생각은 너무 부정적이다. 그는 심지어 예수는 세상을 보다 나은 장소로 만들거나 세상에 영향을 주거나 변화시키러 오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분은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다.(46) 신약성서에서 세상은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이다(367)’고 주장한다. 이는 바르트와 재세례파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사실 스캇은 이 책에서 바르트와 재세례파를 비중있게 다룬다.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3:16)’ 그리고 범죄하기 전 아담에게 뿐만 아니라 홍수 후 노아에게도,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문화명령에 대해서도 균형있게 다루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스캇의 일차독자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성도들이다. 미국의 상황을 고려할 때 스캇의 말은 충분히 이해된다. 미국은 한때 하나님이 나라라고 일컬어지던 곳이다. 미국을 이룬 청교도들 역시 국가교회 즉 콘스탄티누스주의의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스캇의 지적은 매우 중요하다. 부록에서 더 상세하게 기술하지만 루터와 칼빈 뿐만 아니라 카이퍼의 신칼빈주의도 콘스탄티누스주의라고 하는 틀로 봐야 한다는 스캇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실 이것이 이 책의 유용한 점 중의 하나다

 

한국교회도 정교분리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정파를 따라 움직이는 경향을 보인다. 콘스탄티누스주의의 흔적이다. 복음화 성시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스캇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교회에만 오면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인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세상을 안고 있는 것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는 교회가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캇이 말한대로 정의와 평화가 먼저 교회에서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세상에 증언하는 것이 교호의 일차적인 사명이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게 하나님 나라 일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적어도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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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 - 리처드 마우가 개인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는
리처드 마우 지음, 강성호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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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는 화란의 대표적인 신학자이자 수상까지도 역임한 정치가다. 신학자이자 정치가. 이런 그의 특이한 이력은 그의 신앙을 가늠케 한다. 그는 교회 안에만 있는 성도들을 공공의 장소로 불러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더구나 그는 자유주의 신학에서 복음주의로 전향한 인물이다. 사회변혁이 자유주의 신학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것을 카이퍼는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카이퍼 신학에 대한 개괄서인 이 책은 한국교회에 매우 적절하고 절실한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카이퍼의 신학과 문화관을 개관하며 소개한다. 그 출발점은 하나님의 주권이고 정점은 영역주권이다. 그는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가 존재하는 삶의 영역들 중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영역은 단 한 평도 없다’(21)는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거듭 강조했다. 이런 그의 믿음은 영역주권을 통해 구체화된다. 영역주권이란 하나님이 여러 영역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영역에 주권을 부여하셨기에 다른 영역이 그 고유한 주권을 침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영역주권 사상으로 그는 교회가 모든 영역을 독점하려 했던 카톨릭과 하나님의 통치를 교회에 국한 시키려 했던 계몽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다.

 

2부는 ‘21세기를 위한 카이퍼인데 마우어는 카이퍼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21세기에도 여전히 카이퍼의 통찰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나는 이처럼 맹종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좋다. 카이퍼 역시 칼빈을 맹종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래서 카이퍼를 신()칼빈주의자라고 하지 않는가! 모든 사람은 그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이런 것을 알면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우어는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카이퍼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다. ‘이슬람의 도전에서 그는 이슬람과도 적극적인 대화에 임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슬람의 확장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 지점에서 머뭇거릴 것 같다. 하지만 카이퍼가 왜 타종교 특히 이슬람과의 대화에 적극적이었는지에 대한 마우어의 설명을 읽어보면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는 여지는 있어 보인다. 그의 영역주권은 다형성을 존중하는 카이퍼의 생각 속에서 자랐고 일반은총을 통해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다.

 

리처드 마우는 아브라함 카이퍼상을 받을 만큼 카이퍼 전문가다. 또한 그는 <버거킹에서 기도하기>(IVP) <칼빈주의, 라스베가스 공항을 가다>(SFC)에서 볼 수 있듯이 쉽고 간결하게 성경과 신학을 소개하는 분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 역시 마찬가지다. 카이퍼에 대한 논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편하게 쓴 책이기에 쉽게 읽힌다. 카이퍼의 방대한 신학을 모두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간략하게서술했기에 질리지 않는다. 카이퍼 입문서로 매우 적합한 책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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