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타이쿤 환상의 숲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임근희 옮김 / 이모션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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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설 쓰기에 대한 노하우를 담은 책 <잘 쓰려고 하지 마라>를 읽다가 저는 분개했습니다. 제인 스마일리라는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롤모델이 될 만한 작가들을 언급하면서 피츠제럴드를 두고 한 표현 때문이었지요. 스마일리의 표현이 이랬습니다. “피츠제럴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그는 책 네 권을 출판하고 알코올중독으로 죽었으며 그의 첫 번째 책이 유일하게 훌륭한 책이었다. ‘그리’ 되는 걸 누가 바랄까?”(이 대목에서 피츠제럴드에 관한 사실관계가 조금 불명확합니다. 여기서 ‘네 권’은 장편을, ‘첫 번째 책’은 <위대한 개츠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이 작가가 제 옆에 있었다면, “<밤은 부드러워>도 충분히 훌륭한 책인데, 왜!”하고 따졌을 겁니다. 그리고 알코올중독 운운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소설로 자신의 삶을 극복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니냐고 덧붙였을 테지요.


저는 피츠제럴드의 팬입니다. 어느 정도냐면, 온라인상에서 제 닉네임으로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 ‘캐러웨이’의 이름을 따와 지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피츠제럴드가 무얼 쓰든지 제게는 환호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지요. 그럼에도 이번에 <라스트 타이쿤>을 읽으면서 부디 이 작품이 피츠제럴드의 반대자들을 반박할 만한 강력한 논거가 돼 주길 간절히 바랐던 건, 방금 전 언급한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피츠제럴드를 얕잡아 보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으니까요.


우선 <라스트 타이쿤>의 주인공 먼로 스타는 할리우드의 프로듀서입니다. 단순한 프로듀서라기보다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제작자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그는 이를 테면 사람들이 “왕은 왕비를 하나 만들 수 있을 뿐이지만 스타는 많은 여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능력 있는 프로듀서입니다. 먼로 스타는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촬영현장에서 감독을 교체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먼로 스타는 능력만 있는 게 아니라, 영화 산업에 대한 책임감도 지니고 있어서, 꼭 돈이 되지 않는 영화 프로젝트에도 그는 투자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스타는 영화가 산업을 넘어 예술에 이르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아내와 사별한 그는 일에 미쳐 살아갑니다.


그러던 먼로 스타에게 한 여인이 나타납니다. 죽은 아내와 꼭 닮은 캐슬린이라는 여자가. 소설은 먼로 스타와 캐슬린, 그리고 먼로 스타를 사랑하는 세실리아의 삼각관계로 흘러갑니다. 세실리아는 먼로 스타의 라이벌이기도 한 프로듀서 브래디의 딸입니다. 브래디는 먼로 스타와는 정반대편에 있는 속물적인 인간이고요.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짐작하시겠지만, <라스트 타이쿤>의 이야기가 특별한 건 아닙니다. 사실 제가 아끼는 <위대한 개츠비>와 <밤은 부드러워>의 이야기도 그랬지요. 피츠제럴드 소설의 이야기가 통속성을 가득 품고 있음에도 제가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건, 그의 소설이 통속성이 인간 본연의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라스트 타이쿤>에는 그런 것들이 잘 들어 있느냐?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이 미완성이기 때문입니다. 피츠제럴드의 장편은 결말을 읽은 뒤 다시 헤아려야 고개를 끄덕이게 될 수 있을 정도로 잘 만들어진 건축물을 연상시키는데, 이 소설은 짓다 만 건물이니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위대한 개츠비>의 이야기가 통속적으로 흐르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 가서는 그런 통속성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완벽에 가까운 소설을 이루었던 것을 떠올리면 아쉬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실망하기엔 이릅니다. 피츠제럴드의 장기인 섬세한 묘사는 이번에는 할리우드를 겨냥하는데, 우리가 할리우드에서 궁금해 할 법한 것들을, 특히 영화 제작에 관한 사항들을 제대로 묘사해 주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아름다운 문장도 역시 빛을 잃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먼로 스타가 케슬린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다음 문장.


“돌아온 것인가, 그 을씨년스러운 조용한 방에서, 숨을 죽이고 달리는 영구차에서, 떨어져 뒤덮여 있는 꽃다발의 꽃잎 속에서, 피안의 어둠 속에서─지금, 여기에 따뜻하고 찬란하도록 싱싱하게 냇물이 곁을 흘러가고, 거대한 스포트라이트가 내려와 반짝거리고 그리고 스타의 귀에 들린 목소리는 죽은 아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름다운 문장들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이 책은 사실 책 말미에 실린 피츠제럴드의 창작노트만으로도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일급 작가의 창작노트가 책에 묶여 출간되는 일은 드무니까요. 피츠제럴드가 작성한 개요를 보면 그가 각 챕터에 단어 수를 얼마만큼 분배할지까지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피츠제럴드는 이 노트에서 독자의 반응을 세밀하게 예상해 보기도 하고, 문장에 캐릭터와 주제를 어떻게 실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펼쳐 놓기도 했습니다.


“이 장은 단순한 성격의 분석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주인공 먼로 스타)에 관해서 무엇을 얘기하든 수백 단어마다에 무엇인가 함축성 있는 일화 등을 삽입하여 이야기를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작노트를 읽으면서 저는 피츠제럴드가 그야말로 칼을 빼들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피츠제럴드는 <라스트 타이쿤>을 <위대한 개츠비> 이상의 걸작으로 써낼 야심을 품었지요. 이제 막 미완성작인 <라스트 타이쿤>을 다 읽었을 뿐인 저는 이 작품이 <위대한 개츠비>를 뛰어넘는 걸작이 될 수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라스트 타이쿤>이 <위대한 개츠비>보다 더 피츠제럴드라는 작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되었으리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피츠제럴드는 그야말로 이 소설에 자기의 모든 것(그가 이전에 쓴 작품들까지도)을 담아내려고 했으니까요. 저는 단지 소설 맨 뒤에 실린 피츠제럴드 연보 속 한 구절을 야속한 심정으로 읽고 또 읽을 뿐입니다. 1940년 12월 21일 심장발작으로 사망(만 44세). 아, 그는 너무 빨리 가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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