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 - 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문학을 둘러싼 대논쟁 우리 시대의 주변 횡단 총서 6
김경연.김용규 엮음 / 현암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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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 시장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소설이다. 일단 판매부수부터가 이전에 영어로 번역된 한국소설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데다, 맨 아시아 문학상까지 최초로 수상했으니 말이다.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에 발맞추어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주제에 대한 여러 의견이 제출되었다. [엄마를 부탁해]처럼 세계인들의 보편적 공감을 얻을 만한 작품을 지원해 번역해야 한다는 의견이 특히 지지를 받았던 것 같다.

 

사실 [엄마를 부탁해]는 비평가들 사이에서 문학적 성과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던 작품이다. 한국문단의 거목 백낙청 교수의 극찬이 있기는 했지만, “작가의 문학적 행보에서는 가장 성취도가 낮은 작품”이라는 김형중 교수의 비판도 있었다. 지금 내가 독후감을 늘어놓으려는 책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의 필자로 참여한 조영일 선생도 글의 주석에서 “신경숙의 통속소설”(313쪽)이라고 언급하여 [엄마를 부탁해]의 문학적 성취를 낮추어 보는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문학적 성취도가 낮다고 여겨지는 [엄마를 부탁해]를 미국 시장에서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세계문학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문학적 성취도 높다고 여겨지는 [외딴방]이 번역되어 세계 시장에서 실패한다면 덜 좋은 세계문학이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지니고 이번에 만난 [세계문학의 가장자리에서]를 읽었다.

 

우선 현재의 세계문학 시장은 소비가능성과 번역가능성이라는 두 잣대가 존재한다. 확실히 [엄마를 부탁해]는 두 기준에 모두 부합한다. 판매도 잘 되었고, 김지영이라는 탁월한 번역자의 공이 크겠지만, 번역에 대한 찬사도 넘쳐났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소비가능성과 번역가능성의 측면에서만 좋은 세계문학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박상진 교수는 <세계문학 문제의 지형>에서 “진정한 보편적 문학 가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지금까지 생산된 모든 문학 텍스트들에 대한 전면적 재조명과 재평가를 수행해야”(199-200쪽) 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외딴방]과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를 수행한다면 어떨까.

 

[엄마를 부탁해]에 대한 외국 독자들의 반응을 언급하는 게 좋을 듯하다. 아마존닷컴에 게시된 리뷰를 보면 가족 관계에 큰 방점을 두고 감명 깊게 읽었다는 글이 많다. 특이한 점은 영어권 독자들이 이런 가족 서사는 이제껏 읽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를 부탁해]의 가족 서사는 한국 소설에서는 흔하디흔하게 관찰된다. 그렇기에 “통속소설”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일 테다. 그러면 한국의 가족 서사가 잘 녹아있는 한국의 걸작 소설들을 번역하기만 하면 세계문학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글쎄, 나는 잘 안될 거라는 데 걸겠다. 그런 성공이 쉽지 않기에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은 놀랍다. 만약 ‘보편’이란 개념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본다면, [엄마를 부탁해]가 [외딴방]보다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어쩌면 한국 비평가들이 [외딴방]을 [엄마를 부탁해]보다 높이 평가하는 그 이면에는 한국사회의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가 있지는 않았는지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외부의 시선에 주목한 것이다. 오길영 교수는 “세계적인 한국문학을 논하기 전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식민주의의 실체를 먼저 밝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세계가 한국문학을 어떻게 보아줄 것인가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정작 한국에 소개된 여러 나라의 문학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비평가들의 역할을 강조하며 외국문학 번역 작품과의 생산적 대화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지 가늠해야 한다는 주목할 만하다. 한국 문학비평가들의 관심은 여전히 한국문학에만 머물러 있다. 유력 출판사들에서 세계문학전집이 수년 째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는 만큼 한국문학의 문학적 성취가 외국문학과 견주어 어떠한지, 한국의 비평가들이 심도 있게 논의를 전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오길영 교수는 조심스러운 판단이라고 전제하면서도, “토머스 핀천, 코맥 맥카시, 필립 로스, 돈 드릴로 등에 견줄 만한 한국 소설의 거장은 누가 있는가”(241쪽)라고 묻는데, 이 질문을 읽는 내 마음은 씁쓸하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내가 높이 평가하는 한국의 뛰어난 작가들의 이름 몇몇을 대며 반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길영 교수의 의견에 동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오길영 교수의 저 질문이 그가 앞에서 말한 “문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 활동에 등수를 매길 수는 없다.”(237쪽)는 진술과 모순되지는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차동호 선생이 카자노바의 세계문학론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근대적 시각주의를 넘어서>라는 글은 의미가 있다. 파스칼 카자노바는 [세계문학공화국]이란 책으로 명망을 떨친 프랑스의 비교문학자다. 차동호 선생은 영미문학 헤게모니,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은 카자노바의 세계문학론이 오히려 중심부와 주변부의 이분법적 구분을 심화한다고 비판한다. 예컨대 한국이라는 주변부가 서구라는 중심부에 대항하여 자신을 민족 주체로 구성하고 나서는, 또다시 자기 안의 소수집단을 주변화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국격을 자꾸 연관시키려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시각주의는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다.

 

이 책은 세계문학은 무엇인가에 관해 확실한 해답을 내어주는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세계문학에 대한 설왕설래만 가득할 뿐,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논의는 부족한 한국 사회에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어떻게 세계에 내놓을 것인가의 물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내놓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놓은 ‘무엇’이 무엇인지”(199쪽) 고민해야 한다는 박상진 교수의 주장은 두고두고 숙고해 볼 문제다. 흔히 말하는 ‘보편성’이란 개념이 어디까지나 서구 독자들의 기호가 반영된 것은 아닌지도 계속 되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계문학의 보편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시각주의에 함몰되어 약한 대상을 주변화하지는 않는지 세심한 관찰해보아야 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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