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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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크리스천도 아닌 내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좋아하는 것은 딜레마에 처한 인물을 성실하면서도 당혹스럽게 다루는 방식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로드리고는 자신의 스승이자 일본에 선교사로 33년간이나 체류한 신부 페레이라가 고문을 받고 배교했다는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신부다. 일본 관헌에 의해 붙들린 로드리고는 성화를 밟지 않으면 자기뿐 아니라, 일본의 신자들도 죽게 되는 상황에 몰린다. “너는 그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너 때문에 저 사람들이 죽어 간단 말이야.”(212쪽)라는 일본인의 말이 드러내듯이 엔도 슈사쿠는 예수가 십자가를 져야만 했던 상황보다 더 어려운 상황으로 로드리고를 몰고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고통의 문제’라는 거창한 신학적 주제에 위축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기독교 소설이기 이전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질문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약한 부분이 있다. 어떤 인간은 종교에 의지하여 그 약함을 극복하기도 하지만 끝내 그 약함을 안고, 그것을 인정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작가는 고통이란 신앙의 힘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경솔하게 말하지 않는다. 신앙만 있으면 세상에서 강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결론 내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장렬히 순교하는 대신에 배교한 로드리고를 비추는 작가의 시선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다. 엔도 슈사쿠는 신부로서 혐오스러운 배교행위를 한 로드리고를 통해 치명적인 약함이 있는 자들도 현실에서 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그와 같은 전개는 독자들, 특히 크리스천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신앙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던 소설이 인간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배교행위에 대해 자기합리화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로드리고의 감상으로 끝맺는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나면 “이렇게 끝나도 되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실제로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죽을 수도 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배교를 선택한 로드리고의 행동은 냉정하게 보면 신앙적이라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로드리고는 배교하는 순간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267쪽)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만, 이는 작가가 배교를 종용한 이노우에란 자의 말을 통해서 반문하듯이 자신을 속인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그러한 지점까지 건드리지만 로드리고의 배교가 인간을 위한 또 다른 의미의 순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 그것은 작가가 로드리고를 지칭하는 주어로서 기능하던 ‘신부’라는 3인칭을 ‘나’라는 1인칭으로 바꾸면서 소설을 끝맺는 방식을 상기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침묵》은 특정한 신학적 메시지에 경도되기를 포기함으로써 독자가 깨달아야 할 지점을 일일이 지시하지 않는 미덕을 지닌 작품이다. 좋은 문학작품이란 독자에게 표지판을 세워 가야할 길을 직접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석이 가능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이라는 거대한 신학적 주제에 압도되기 쉬운 종교소설들 중에서, 이처럼 인간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면서 치열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소설을 읽는 것은 정말 가슴 떨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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