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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배반한 역사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4월
평점 :
절판
박노자의 <나를 배반한 역사>에 나오는 ‘국민’ 담론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이다. 사실 메이지 시대의
‘국민국가’ 개념을 영역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국민’을 ‘nation’의 번역어라고 볼 수 있지만 ‘nation’은 근대국가 형성 과정의
역사적 주체로 설명될 수 있으며, 후발 근대국가의 통치 대상인 ‘民’을 지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국민학교’라는 용어가 최근까지도 쓰인 것은
현대 한국어에서 국민이 관습적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의 의무’와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국민교육헌장’, ‘국민의례’ 등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은 특권층을 위해 대다수를 전체로 만들 때 동원되는 용어다.
구한말 '국민' 담론은 국가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유길준이 말한 인민은 ‘권리’보다 ‘국법’을 우선에 두어야 했다. 이러한
국가지상주의적 ‘인민’ 담론에 있어서 인민은 개화 행위의 대상에 불과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독립신문』은 하강식 개화를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官은 법률, 규칙을 만드는 주체가 되지만 民은 감시자로서 만족해야 한다는 조건부 ‘인민 참정론’을 제안했다. 이때의 국민참정권 모델은
극소수만이 선거권을 가졌던 일본이었으며, 유럽 선진 국가들의 모델과는 차이가 있었다.
1900년대 지식인들의 국가주의는 제국주의적 담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국가주의를 부추긴 것은 당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 아니었으며,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에 이론적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들이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당시의 민족제국주의와 같은 사상적 조류에
기인한다. 그들은 자연발생적인 민족을 결속력 있는 국민으로서 동원해야 강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국민정신을 고양할 주체로 자처하면서
국민 국가의 주체로 군림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국가와 황실의 구별과 같은 논의가 민주주의에 일정부분 기여하였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문명화 과정에서 ‘배제’와 ‘억압’이 필수요건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계몽주의적 담론에서 배제의 대상에는 외적(外敵)만이 아니라 내적(內敵)도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외적에 대한 배제는 단순한 일제침략에
대한 반응이 아닌 ‘국민 단결’에 필수적인 구별짓기와 배제하기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내적에 대한 배제의 대상은 개화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무당, 승려 등이었다. 이 같은 구습에 대한 멸시와 배제는 개화나 국민 담론을 생산하고 담지했던 자들의 결속을 도왔다. 심지어
동학교도들도 개화파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친일 지주들에 의해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의 자강에 도움되지 않는 자들은 ‘비국민’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구한말 그 모습을 갖춘 ‘국민’의 담론은 구별짓기 배제의 논리를 강조했다. 이는 망국에 대한 위기의식이라기보다는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근대 민족주의에 의한 배타주의는 다른 나라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배제 논리의 희생자들을
외면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국민의식’에 순치된 우리들 역시 창조성, 개성, 자유를 파괴당한 희생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사회는 '국민적 전체주의'에 대한 대안이다. 그러한 시민사회는 국경을 초월해야 하며, 그때 비로소 국민을 통한 동원과 구별짓기 논리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