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어떻게 동물을 헤아릴 것인가- 사람과 동물의 윤리적 공존을 위하여
셸리 케이건 지음, 김후 옮김 / 안타레스 / 2020년 6월
19,800원 → 17,820원(10%할인) / 마일리지 990원(5% 적립)
양탄자배송
4월 29일 (월)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20년 08월 14일에 저장

호모 사피엔스 씨의 위험한 고민- 미래 과학이 답하는 8가지 윤리적 질문
권복규 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5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20년 08월 14일에 저장
품절



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롬멜전사록
리델 하트 엮음, 황규만 옮김 / 일조각 / 200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삼 월 전, 롬멜 전사록을 읽었어. 롬멜은 사막의 여우야, 아니 사막의 여우로 알려져 있지. 롬멜의 혁혁한 전공의 대부분은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 대륙에서 이루어졌어. 그래서 전사록을 史가 아닌 沙로 적었나봐. 암튼,

사막의 여우라는 표현이 과연 롬멜에 어울릴까를 해. 쬐끔 그렇고 많이 아니야. 여우 보다 독수리 같아 시야가 넓고 행동이 빠르거든. 롬멜은 참 매력적인 남자야. 장군이지만 하급 병사들과 뒹굴며 그들을 아꼈어. 공격은 과감 신속 정확했고. 정치적으론 우직했지. 우직이라는 표현은 군인다웠다는 뜻이야. 별 달았으면서도 이리저리 아첨하고 눈치 살피는 조무래기들 똥 별들이 좀 많아? 난 2차 대전 중 독일이 낳은 명장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롬멜을 꼽아.

롬멜은, 기습을 감행한 후 우물쭈물하는 적군의 종심을 빠르고 깊숙이 찌르는 작전을 쓰곤 했어. 프랑스 점령은 전광석화 같았지. 전차의 굉음에 잠을 깬 주민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롬멜 탱크부대를 환영했어. 롬멜의 진격속도가 너무나 빠른 탓에 모두들 영국군으로 오인했던 거지. 적의 고사포부대를 통과하자 위병소 초병까지 아군으로 알고 경례를 올려붙였다니까 더 뭘 말해.

롬멜은 '롬멜 보병전술' 이라는 책을 낼 정도로 학구적인 면이 있어. 언제 어디서나 기록을 꼼꼼히 하는 치밀한 성격이지. 롬멜은 적과 조우했을 때, 엎드려 상황을 파악하려 들지 말고 즉각 사격해야 한다는 점을 부하들에게 강조하곤 했어.

모든 정황을 꼼꼼히 살피고 계산한 다음, 준비가 완료됐을 때 비로소 행동을 개시하는 영국군이나 기타 연합군과는 전혀 다른 패턴이었어. 그래서 다들 롬멜에게 당했어. 자신들의 틀을 벗어 던지지 못했으니까.

명성이 자자했지만 롬멜은 늘 보급품 부족에 시달렸어. 풍부한 물자와 신형무기를 충분히 공급 받던 연합군과는 달리 롬멜은 필요한 군수품의 반 정도나 보급 받았을까? 내 짐작으론,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초기 아프리카 전장에서조차 롬멜이 운용한 병력이나 장비의 규모는 적의 70%수준이었을 거야.

독일의 패색이 짙을 즈음은 더욱 심했지. 탱크를 움직일 기름조차 제대로 보급이 안 됐어. 예비 연료가 겨우 3일치정도였으니까. 포탄 부족으로 적을 만나도 맘대로 실탄을 쏠 수 없는 형편이었고 트럭의 대부분은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거였어. 때론 별 다섯의 장군이 병사들과 끼니걱정을 할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롬멜은 늘 아내에게 편지를 썼어.

그의 편지는 언제나 -사랑하는 루에게- 라고 시작 되었지.

적 탱크와 모래 바람, 히틀러의 무모한 명령서, 군 수뇌부의 냉대,

오지 않는 보급품, 사막의 전갈과 모기에 둘러싸인 채

머나먼 독일의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 한 남자를 생각해.

롬멜은 초라한 천막에 웅크리고 앉아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사흘이 멀게 일기를 쓰듯 편지를 써 우편으로 보냈지.

달콤하다든가 애틋한 사연은 한 줄도 없어.

무사하다. 진격중이다. 전투가 벌어졌다. 현재 휴식중이다.

뭐 그런 덤덤한 이야기들 끝에 당신과 아들 만프레드만을 생각한다고 적곤 했어.

읽으면서, 부러웠던 부분이야. 조금 신비하기도 했고.

독일 패망 직전, 롬멜의 삶은 히틀러와 그 추종세력들에게 갑작스레 단절돼. 롬멜이 히틀러 제거 계획에 가담했는지는 잘 모르겠어. 내가 읽은 책에 그 부분은 상술되지 않았거든. 그가 남긴 전투일지와 일기 등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롬멜은 그러한 거사에 적극 가담했기 보다는 동조 내지 묵인하지 않았나 싶어. 가증스러운 건, 히틀러와 그 추종세력이 롬멜을 죽인 후, 가족에게 보낸 조문이야.

=============

夫君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롬멜원수의 명성은 북아프리카에서 이룩한 영웅적 전투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

우리가 항상 독일 국민과 함께 있기를 열망했던 롬멜원수께서 부상으로 인해 영웅으로서의 최후를 마친 데 대해 본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본인과 전 독일 공군은 영부인께 마음으로부터의 깊은 조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 대독일제국 제국원수 괴링

夫君의 서거로 인한 婦人의 불행에 접하여 진정어린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롬멜원수의 서거로 독일 육군은 가장 위대한 지휘관을 잃게 되었습니다마는 원수의 이름은 2년간에 걸친 아프리카군단의 영웅적 전투와 함께 영원할 것입니다. 영부인의 슬픔에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국무대신 괴벨스

2010.9.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점선뎐
김점선 지음 / 시작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알라딘 서점에 들렀다가 보았다. '화가 김점선 별세 別世' 순간 건강이 좋지 않던 선생이 별세하셨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선생은 워낙 괴짜시니까, 이번에는 '화가 김점선의 별세계' 즉 자기 방식의 別世界를 살아가는 이야기가 출간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더구나 광고의 상단에는 -알라딘 기획-이라는 홍보성 멘트와 웃는 선생의 얼굴 사진이 걸렸다. 그런데 사진을 누르자 선생이 지난 3월22일 돌아가셨다고 나온다.

내가 서른 살 쯤, 서울 구로공단에서 밥벌이 할 때로 기억된다. 그때 '삶과 꿈' 아니면 '열매'라는 잡지였는지 모르겠다. 샘터 크기의 작은 잡지에서 오리 그림 한 점을 보았다.

오리 한 마리가 몸뚱이를 반쯤 물에 담근 채, 가랑이를 쫙- 벌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는 그림이었다.

간결하고 ,단순하고,어떤 명징함이 느껴지는 그림. 그때, 나도 이런 그림 한 점 걸어놓고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모 일간지의 칼럼에서 선생의 글을 보았다. 제목은 '잠과 그림'

선생은 이렇게 쓰셨다. 서울올림픽 조직위에서 세계현대미술제라는 책이 나와 별 볼일 없는 책이거니 했는데, 그 속에는 잠과 그림뿐인 화가들이 수두룩 했다는 것. 선생은 기껏해야 십오, 이십 정도의 숫자에 익숙해 있었는데, 남들은 이미 오십 번, 백 번씩이나 개인전을 열고 있더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면서, 이제 자신도 무자비하게 잠과 그림뿐인 세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다짐이었다.

그때, 무슨 바람이 불어 선생께 전화를 드릴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다. 아마 선생의 외모가 방금 산에서 내려온 선머슴을 닮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이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거나 교수처럼 근엄한 표정이었다면, 선뜻 전화를 걸 용기가 있었겠나 싶다. 신문사로 문의 , 당시 구리시 아천동 댁으로 전화를 드렸다.

그림에 대해 아는 게 없지만 잡지에서 본 선생님의 오리그림이 너무 좋다. 그림을 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여쭙자, 직접 팔지는 않고 마침 강남의 박여숙화랑에서 전시회를 하니 한 번 가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 끝에 글을 써 보고 싶다고 했더니, 열심히 노력해라 잘 쓰면 내가 글쟁이들도 제법 아는데, 혹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생전 처음, 화랑이라는, 평소의 나와 어울리지 않는 처소에서 선생님의 그림(개인전)을 보았다. 그런데 잡지의 사진으로만 보았던 오리그림들이 현장에서는 좀 낮설었다. 일단 크기가 가로세로1미터가 넘는 것들이어서, 책에서 보았던 정취와 맞지않아 왠지 서먹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림에 문외한 내게는 그저 10호 내외, 기껏 20호 정도가 걸어놓고 보기에 편할 터이다. 전시회에서 선생을 뵙지 못하고, 그림 값은 묻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몇 달치 박봉을 털어야 겨우 4호짜리나마 한 점 살수 있었을까 싶었는데 4호는 커녕, 10이나 20호도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이후로도 나는 가끔 지면을 통해 선생의 개인전과 환상적 분위기의 작품평을 만났고, 샘이깊은물 잡지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소회의 글을 만나는 행운도 얻는다. 그럴수록 선생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선생이야 나를 반기든, 내치든, 언제 한 번 찾아 뵙고 땡깡을 부리고픈 마음이 솔솔 일었다.

그러나 무얼 들고 찾아간담? 꼭 무얼 들고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는 이런 놈입니다. 혹은 저 이렇게 살아요 하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한다는 자격지심이랄까 자존심 같은, 아니 그런 건 아니더라도 '무엇'이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책을 한 권 냈다거나. 하다못해 그럴듯한 원고뭉치라도 끼고 간다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선생님 저 좀 늦었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과 요번에 결혼 했답니다. 그냥 선생님 뵙고 인사드리고 싶어 왔어요. 밥 좀 주세요 어쩌구 너스레를 떨어야 할텐데, 도무지 그런 꺼리가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그림처럼 재밌는 책을 잇달아 쓰시게 된다. 10cm예술, 나는 성인이야, 나 김점선..

읽어야 할 목록에 선생의 책들이 늘어가지만,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선생의 책을 많이 읽지 못했다.

선생의 글은 대체로 짧고, 불교에서 말하는 公案으로도 읽힌다.

 

"나는 토끼를 좋아한다. 실제 토끼를 보고 좋아하기 보다, 어릴때 읽은 동화 속에서 느낀 토끼를 이제껏 좋아한다. 어느날 나는 토끼를 그렸다. 몰래 토끼를 그렸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토끼를 그렸다. 그랬더니 나는 자유로웠다. 아무도 없는 대낮에 제빨리 토끼를 그려 놓고 그림 앞에 행복했다."

"눈도 실컷 나빠지고, 무릎도 삐걱거리고, 몸 구석구석에 피로와 나태가 찐득찐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요즘, 나는 늙은 마티스를 생각한다. 두꺼운 안경을 끼고, 배가 남산만큼 부른 늙은, 무거운 마티스. 몸이 날렵하고 기운이 넘칠 때, 별 볼일 없는 그림만 그려대던 마티스가 그 지경에 이러러서야 좋은 그림을 그려냈다. 사람은 다 망가지고 죽을 무렵이 돼서야 자유로워지는, 괴로운 동물인가?"

또 이런 글도 서슴없이 쓰셨다.

"남편은 또 며칠인가 외박하고 늦은 밤중에 나도 잘 아는 선배와 함께 들어왔다. 선배가 있건 없건 나는 또 싸움을 걸었다. 막 싸우고 있는데 오줌이 다급해졌다. 나는 더 빨리 내 분노를 말하고 또 말하고 싶어 변소에 가기 싫었다. 싸우다 변소에 가는 일은, 그것도 내가 건 싸움을 내가 중단시키는 일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잔뜩 밟고 선 자세로 그대로 쏴악 오줌을 누었다."

 

알라딘 서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암 투병생활 중에도 꾸준한 창작활동을 펼쳤던 화가 김점선씨가 22일 오전 향년63세로 별세 했습니다. 자신의 생을 점검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기에 '암은 축복'이라고 말했던 김점선 화가. '장엄하게 죽기 위해 이제목을 택했다'고 고백하며 담담한 필치로 써낸 자전적 에세이 <점선뎐>은 마지막 저서로 남게 되었습니다."

선생의 그림을 만나 선생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가 어릴적 토끼를 길렀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고, 물가에서 하염없이 오리들을 바라보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고, 꽥꽥, 뒤뚱뒤뚱, 거위를 좋아하는 때문이고, 대상이 무엇이든, 최대한 줄을 당기고, 자루를 확 뒤집어 보이는, 선생의 소탈함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삶을 한마디로 쓰면, 파란만장 좌충우돌이 되겠지만, 늘 밝고 깨끗한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이었을 것이고, 남자같은 외모로 무수한 여성을 울렸던 사람이었을 것이고,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명징함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던,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선생님 부디 토끼와 오리들 품에 영면하소서..

2009.3.29

---------------------

일전에 선생의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추모의 글을 썼다. 그 어떤 미진함 혹은 연모의 정이었을까. 나는 선생이 병상에서 직접 제목을 붙였던 이 책이 몹시도 궁금했고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다. 출판사측의 판매 전략인지 유명 인사들과 함께 찍힌 사진과 일화가 제법 섞인 이 책은 선생의 간략한 전기라 할만하다.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칼럼과 수필 단행본 등에서 일부를 뽑아 묶은 것으로, 어린 시절 돌 사진에서 시작하여 암 선고 이후의 글들로 막음된다. 대체로 선생의 글은 빠르고 짧아 쉽게 읽히지만, 이 책은 오래 틈틈이 조금씩 읽혀졌다. 작은 인연이었으나 떠나버린 사람의 글 행간 읽기는 아무래도 난감한 데가 있다. 더구나 선생의 글은 갑자기 절벽처럼 가파르게 솟구치거나 수직으로 떨어지는 괴팍한 버릇까지 있지 않은가.

나는 이 책을 누구든 권할 생각이 없다. 읽다보면 필시 낮선 거리를 만나 문득 길을 잃을 것이다. 유일한 혈육이던 아들의 결혼식에 운동화 신고 반바지 차림에 하객으로 당당히 참석하는 여자. 장엄하게 죽기 위해 스스로 '점선뎐' 이라는 책 제목을 붙여 놓고 껄껄 웃는 , 저 불같이 황홀하고 발칙한 여자를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2009.9.17

----------------------

붙임: 이글은 오래전 개인 블러그에 올렸던 글인데 문득 독후감으로 알라딘에 올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