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죽음은 내 안의 모든 걸 산산이 부서뜨렸다. 마음만 남기고. 네가 만들었던 나의 마음. 사라진 네 두 손으로 여전히 빚고 있고, 사라진 네 목소리로 잠잠해지고, 사라진 네 웃음으로 환히 켜지는 마음을. - P13
나는 관들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내게 소중한 장면이다. 나는 이 이미지를 내 곁에 간직하고, 내 옆에 잡아둘 수 있는 빛을 찾는다. 너에 대해 씀으로써 그 빛을 찾는다. - P20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죽음은 게걸스러우며,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것뿐이다. 마치 보물을 낚아채는 도둑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눈이 텅 비고 목소리가 꺼진다. 그리고 끝이다. 영원히. (p.29~30) - P29
죽음은 예측할 수 없고, 어디에서든 불쑥 나타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네 죽음의 소식은 단속적인 작은 음들로 내게 전해졌다. 그때마다 소리를 들었고, 알았고,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건 마치 네가 주소도 남기지 않고 외국으로 떠나 편지를 보낸 것과 같았다. 너는 잉크도 종이도 없는 ‘그곳‘에서 무엇이라도 사용하여 편지를 쓴다. 네가 좋아하는 고광나무꽃이나 제비꽃 향으로, 움직이는 빛의 이미지로, 혹은 오늘, 텔레비전에 나온 나무들 사이의 오솔길 이미지로 네 죽음을 생각하면 왜 이토록 여린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일까. 그건 실제의 나무도 아니었는데, 단지 색조의 점들이 화면에 띄운 이미지일 뿐이었는데. 그리고 난 다시 깨달았다. 우리가 더는 함께 산책하지 못하리란 것을, 아카시아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네 웃음소리와 이별했음을. 이렇게 나는 매일 깨닫는다. - P45
사랑을 말할 때 사랑의 단어가 늘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겁거나 가벼운 말, 심각하지 않은, 절대 심각하지 않은 무겁거나 가벼운 말, 눈물과 웃음이 필요할 뿐이다. (p.47~48) - P47
죽은 자들에게 말하는 방법은 수천가지가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는 것보다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은 단 한 가지뿐이다. 변함없이 계속 살아가라. 더욱더 잘 살아가라. 무엇보다 악을 행하지 말고 웃음을 잃지 말라. - P49
너를 둘러싼 삶은 휴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가 쉴 수 있도록 죽음이 있는 것이다. - P67
주방으로 가는 복도 바닥에서 60센티미터 높이에 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이 인쇄된 달력을 걸어놓았다. 달력을 그렇게 낮게 걸어 놓은 걸 보고 놀라는 내게 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앞을 지나다니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거라고, 아름다움은 다른 것들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우리를 깨우친다고 설명한다. - P76
우리는 특정한 어느 지역에서 살지 않는다. 심지어 이 땅 위에서 사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거처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p.85~86)
- P85
나는 네가 이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들을 열거해보았다. 너는 이제 더는 결코 눈을 보지 못한다. 너는 이제 더는 결코 라일락을 보지 못한다. 너는 이제 더는 결코 태양을 보지 못한다. 너는 눈이 되었고, 라일락이 되었고, 태양이 되었다. 거기서 너를 다시 보게 되어 슬프면서도 행복했다. 늘 그랬듯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춤추는 너, 흰빛으로 흩어지는 너, 핑그르르 세 번 돌다가 공중에서 두 번 춤추는 마흔네 살의 너, 너무도 젊고 싱그러운 너. 눈과 라일락과 태양, 그리고 잉크. 나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 너를 사방에서 다시 본다. - P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