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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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길고양이 순무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아이 황세이 그리고 유명한 상담사였으나 의도치않게 방송에서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어떤 한 배우를 자살로 몰고 간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한순간에 추락해버린 임해수.
그들 셋은 말이라는 도구를 통하지 않고도 서로를 점점 이해하게 된다.
경청. 어쩌면 그 단어는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에 귀기울이는 것이 아닐까싶다.
고단한 길생활을 하는 길고양이에게든, 지금은 학교라는 작은 사회 속에 있지만 언젠가는 냉혹한 진짜 사회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 아이든, 사회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배척받은 성인이든, 그 누구도 연약한 부분 한 가지쯤은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서로서로 기대고 의지하는 것. 그럼으로써 우리는 냉혹한 세상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녀는 트럭 아래 웅크린 그 고양이에게서 자신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상기하고, 자신의 가여운 처지를 되새긴다.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길고양이에게서 자신의 슬픔과 비애, 비통과 울분을 발견하는 건 얼마나 쉬운지, 철저한 피해자 되기. 자신을 향한 이 연민에는 끝이 없다. - P18

근데 고비는 넘긴 거랬어요. 여기 밥 주시는 어떤 아줌마가요. 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대요. 그래서 잘 이겨 낸 거래요. 길에서 사는 고양이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랑은 다르다고 했어요. 진짜 똑똑하고 용감하대요. - P24

수직으로 솟구치는 힘. 안간힘으로 피워 내는 잎사귀. 그녀는 흔하고 평범한 나무 한 그루에서조차 고통의 흔적을 발견하려는 스스로가 안쓰럽고 또 얼마간 역겨워진다. - P45

고양이들은 소리 나지 않게, 보이지도 않게 골목 이곳저곳을 바쁘게 오간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움직임. 그것이 학습된 것이라면 고양이들은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끔찍하고 오싹한 경험들을 지나왔을 것이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선과 악. 그런 인간적인 가치와는 무관하게 습득해야 하는 생존의 법칙들.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다만 받아들여야 하는 규칙들.
그녀는 가혹하게 느껴진다.
무엇이, 누구에게, 얼마나, 가혹하다는 것일까. 그녀는 다시금 자기 연민 쪽으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힘껏 붙든다.
- P56

전부를 건 싸움. 전부를 잃을 수 있는 싸움. 보잘것없는 자신을 지켜 내기 위한 전투.
그러니까 그 밤, 그녀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순무가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니, 순무에게서 그녀가 보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 P88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을 아낀다. 보도블록의 좁은 틈을 비집고 나온 푸릇푸릇한 풀들이 보인다. 그녀는 눈에 보이는 온갖 것들에서 작은 고통의 흔적이라도 발견하려는 스스로가, 어떤 위안을 찾아 헤매는 스스로가 끔찍해진다. - P96

가슴이 아프다.
동정, 연민, 연약하고 가여운 동물에게 느끼는 흔해 빠진 감정.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이 순무를 사로잡은 고통인지, 그런 고통에 노출된 삶인지, 고통을 견뎌 온 지금까지의 시간인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앞으로의 시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이 순무에 대한 것인지, 자신에 대한 것인지, 그 둘이 뒤섞인 것인지도.

- P109

이런 대화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녀가 한동안 경험하지 못했고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장벽 없는 소통. 두 사람의 대화에는 장애물이 없다. 대화는 앞으로 나아가고 부드럽게 방향을 틀고 서로의 마음속을 자유롭게 활보한다. 말들이 완강하게 닫힌 내면의 문을 열고, 서로의 내면 깊숙이 진입하고, 그 안에서 자신과 꼭 닮은 말을 길어 올린다. - P181

언어가 생략된 순무와의 교감이 그녀에게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수없이 많은 말들로 소란스럽던 세계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헤아림과 공감, 위로와 포용.
그런 것들은 이처럼 완전한 침묵 안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일까.

- P224

이처럼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에 기대어 있는 것이라면 자신은 무엇에 기대고 있는 걸까. 반대로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때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어떤 이름들이, 어떤 순간들이 있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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