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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ㅣ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내가 한 배우에게 빠져들 때에는 늘 확실한 기점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사람이 남긴 깊은 인상이나 역량이고, 나아가 외모이고, 우연히 읽은 인터뷰에서 엿본 가치관이다. 물론 배역이 잘 어울려 눈여겨 보는 경우도 있지만 많지는 않다. 사람 자체에 대한 나 자신의 감정은 누구보다 멋진 배역으로 달구거나, 아주 형편없는 배역으로 식힐 수 없을 정도로 꽤 확고한 편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입문작에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반면 한 저자나 감독의 작품을 시작할 때에 나는 늘 고민한다. 초기 작품부터 맛볼지, 최신 작품부터 맛볼지에 관한 고민이다. 저자나 감독은 말 그대로 플롯이나 표현 방법 자체가 그 자신의 역량이기에 입문작이 아주 중요하다. 앨리스 먼로 삼부작을 처음 보았을 때도 어떤 책을 가장 먼저 읽으면 좋을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성미가 급한 나는 『런어웨이』를 입문작으로 결정했다. 이번 탐독은 차근차근 밟아 올라오기보다 정점을 먼저 둘러본 뒤 천천히 내려가 보는 쪽이다.
「런어웨이」에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칼라와 클라크, 그리고 실비아이다. 칼라와 클라크는 부부 사이이며 실비아는 칼라에게 남 몰래 호감을 품고 있다. 클라크를 벗어나고 싶다는 칼라의 심정 토로에 실비아가 도피를 돕는다. 「우연」에서는 줄리엣이 기차 안에서 만난 에릭과 사랑에 빠진다. 「머지 않아」에서는 줄리엣이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나러 간다. 부모님의 집에는 일을 돕는 아이린이라는 사람이 있다. 「침묵」에서 줄리엣은 딸 퍼넬로피의 연락을 기다리지만, 연락은 오지 않는다. 「허물」에서는 델핀이라는 여자가 에일린과 해리의 딸 로렌에게 접근한다. 델핀은 로렌에게 자신이 친모라고 말한다. 「반전」의 시작부에 로빈은 갑자기 “그 드레스 내일까지 준비되지 않으면 죽어 버릴 거야”라고 말한다. 이후 극장에서 가방을 잃어버린 날로 돌아간다. 그녀는 가방을 찾으러 돌아갔다가 허탕을 치고 나오면서 다닐로라는 남자를 만난다. 「힘」에서는 낸시가 윌프에게 만우절 거짓말을 한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며 장난을 했다가 윌프가 정색하자 머쓱해진 채로 귀가한다. 이후 부제로 나뉜 이야기들은 연작 소설처럼 낸시를 중심으로 하되,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킨다.
다 읽고 나서 사실상 시간의 역순으로 정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제작이자 이 소설 모음집의 첫 시작인 「런어웨이」에서는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끼지만, 그 관계를 위해 포기한 것들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먼 길을 온 상태이다. 「우연」에서 「침묵」까지는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어슴푸레 느끼는 단계, 초보 어머니인 줄리엣의 이야기가 연장된 것처럼 느껴졌다. 「허물」로 오면서 비로소 어머니나 아내의 입장이 아닌 딸의 입장으로 옮겨 온다. 대부분이 바라는 모습과 사뭇 다른 결혼 생활을 폭로하다가 다시금 이면을 모르던 때로 돌아가고, 사랑을 꿈꾸는 식이다. “앞으로 이전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상한 예견과 함께. 특히 표제작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장치를 설치해 두고, 조심조심 피해 가는 대신 실비아의 감정을 그려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허물」과 「반전」이 장면장면 영화처럼 머릿속에 쏙쏙 박혀 들어왔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도전적이지 않다. 관습을 벗어나나 싶으면 애써 날갯짓을 하다가 떨어진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도전 의식이나 탈출 욕구는 ‘일시적인 욕망’이기에 인물들은 시달리는 삶 한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탈출구를 애써 외면한다. 도피할 경우 잃게 될 것들을 지키러 그 목구멍으로 자진해 들어간다. 더군다나 작가 본인도 책의 구성처럼 결혼이 상상 같지 않다며 보여 주고서 원점으로 돌아가 사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책을 읽으며 그 답습이 갑갑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실체를 결코 외면하지 않아서일까, 자간마다 연륜이 흥건히 묻어나서일까. 어쩌면 내가 요즘 부드러워져서인지도 모르겠지만, 결혼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살짝 돌아서고 ‘그래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랑’을 향한 희망으로 점차 바뀐다.
※ 본 게시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