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평점 :
신경숙이 돌아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고싶다. 신경숙을 처음 접했던 건 외딴방이지만 가장 좋아했던 책은 깊은 슬픔이다. 자전적인 이야기로 유명한 외딴방보다도 깊은 슬픔이 신경숙의 삶을 잘 보여준다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신경숙은 누군가가 잊히고 떠나고 죽고 의미가 다시 생겨나는 모든 과정을, 쓰는 사람이다. 정말 모든 과정을 말이다. 누구보다 자세하게 그러나 두 발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아주 깊은 슬픔을 쓰더라도 절대 축축히 젖어있는 문장을 내지 않는다. 물에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있는 문장을 내어준다.
신경숙의 표절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나 또한 너무도 놀랐다. 우선 그 표절의 문장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작가의 모호한 태도가 논란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잘 모르겠다, 기억엔 없으나 나를 믿지 못하겠다.' 라는 해명 아닌 해명이 어느정돈 진실이라고 믿는다. 사람이 무언가에 미치면 틱-틱-하고 피치가 나가듯 기억이 없어질 수 있다. 내가 집중하고픈건 그 상황 맥락이 아니다. 어찌됐든 훔친 문장이 있는 건 사실이니 엇비슷한 농도로 미치게 사죄했어야한다. 11년의 시간을 들이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말로, 마음으로, 온 몸으로 말이다. 원작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그녀에게 감회된 나를 포함한 모든 독자들에게, 신경숙은 깨끗한 사과를 했어야한다.
번듯한 사과없이 혼자만의 자숙을 끝내고 돌아온 신경숙의 책을 받아본 나의 심정은 이렇다. 이 책을 내심 기다려왔단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사실이 나를 괴롭게한다.
<아버지에게 갔었어> 는 딸을 잃는 소설가가 홀로 지내게 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J시에 머물게 되며 펼쳐지는 이야기다. 어머니가 수술을 위해 상경할 때 아버지는 우셨고 그 소식을 들은 '나'는 5년 만에 J시에 당도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건강상태를 모르던 것은 아니었으나 딸을 잃은 심정을 보여주기도, 그렇다고 덮어두지도 못하는 '나'는 가족들의 사정을 애써 무시해왔다. 아버지가 울었다는 소식은 꽤나 생경한 소식이었고 J시에서 '나'는 아버지의 생애를 들으며 그 눈물의 줄기를 하나하나 더듬어보게 된다.
헤어지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관계에 봉착할 때면 그때 그 신작로에서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던 절박한 내 목소리가 북소리처럼 둥둥둥 머릿속에 울린다. / 14p
소설에는 서로의 의도와는 다르게 끝을 맺게 된 것들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만든 궤짝이 그렇고, 내가 아버지에게 건넨 인사가 그렇다. 내가 그쪽을, 그쪽이 나를 놓아버릴 의도는 없었음에도 끝을 맞이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놓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문장으론 설명되지 않는 것들 말이다. 작가는 이런 것들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잊을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을 보여준다. 어른이라면 말로 뱉을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을 부녀의 대화를 통해 담담하게 조명한다.
매일이 죽을 것 같어두 다른 시간이 오더라. / 69p
아버지의 생을 통해 '나'는 점차 회복의 관점을 가지게 된다. 농사꾼이지만 제대로된 농사꾼으로는 보이지 않던 아버지에게도 사계절에 대한 정의가 있었으며, 삶의 굴곡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사는 일이 꼭 앞으로 나아가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돌아보고 뒤가 더 좋았으믄 거기로 돌아가도 되는 일이제.
•••붙들고 있지 말어라. 어디에도 고이지 않게 흘러가게 둬라. / 90p
마음을 고이지 않게, 흘러가게 하라는 아버지의 말씀. 그리고 딸을 마음에 묶어둔 나 또한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것. 슬픔의 흐름이 가지는 연쇄적인 구조는 신경숙의 특기와도 같은데 역시나 이번 작품에도 감정의 구도를 통한 서사 전개가 돋보인다.
살아가는 시간 속엔 기습이 있지. 기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도 있어. / 323p
그저 살아내기만 하는 '나'에게 나도 그저 살아내기만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소설은 나와 아버지가 함께 있는 시간들을 그리지만 이 안에는 둘의 현재가 없다. 모두 과거의 이야기만 하고있다. 허나 인생에 있어서 어떤 정확한 지점을 곱씹어 생각하는 것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감에 보탬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나, 심경의 변화에 대해 떠들지 않는다. 그저 삶은 묵묵히 살아온 풍경을 보여줄 뿐이다. 모두가 이렇진 않겠지만 모두가 이런 식으로 살아왔다고 말이다.
감정을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한국전쟁부터 노동운동까지의 굵직한 현대사들을 개인사로 풀어낸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상엔 쓰지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신경숙이 바로 그렇다. 이런 사람들의 글에는 확실히 특별한 절절함이 있다. 이 절절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여전히 혼란스럽다. <아버지에게 갔었어>의 평점에 1점과 5점이 가득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