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김승연 회장 사건과 한국인 코드

막간에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력 사건과 관련한 칼럼 두 개를 옮려놓는다(사건은 김회장이 구속되는 선에서 조만간 마무리될 모양이다). 사건 자체야 어처구니 없지만(사실 더 뉴스거리가 될 만한 건 이 사건에 대한 경찰의 대응태도였다), 과연 그게 국민적 에너지를 투여할 만한 일인가에 대해선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인민재판식 여론몰이 또한 국외자적 시각에서 보자면 좀 이해하기 어려운 '한국인 코드'와 관련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한국인 코드'가 새삼 너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뒷맛은 씁쓸하다. 아래는 그런 씁쓸함을 되새기게 해주는 칼럼들이다.  

문화일보(07. 05. 04) 미국과 다른 한국의 문화

한국에 20여년 살면서 한국인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집단적으로 무척 감정적인 대응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좋게 말하면 한 마음이 된다는 뜻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집단편집증 같기도 하다.

우선, 2002년 당시 효순·미선 양 사건을 돌이켜보자. 그 꽃다운 여학생들의 불행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진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 뒤 조사 결과에서 드러났듯이 미군 운전병이 그 학생들을 죽이겠다는 의도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 불행한 사고가 마치 주한미군, 나아가 미국 전체의 문제에서 비롯됐다는 식의 반미감정 차원으로 비화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근 버지니아공대 조승희 사건이 터지자마자 미국 정부는 가장 먼저 조승희 부모의 신변 보호에 들어갔다. 사건 초기 한때 재미 한국인들에 대한 보복 우려가 제기됐지만 기우로 끝났다. 한국교포가 보복 당할지 모른다는 발상은 어떻게 보면 한국인 스스로의 피해 의식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오히려 조승희 가족도 피해자라면서 동정론까지 펼쳤다.

한국인인 아내와 함께 미국이나 유럽여행을 하던중 전철이 고장나 발길이 묶인 적이 가끔 있다. 그러나 그 사고가 의도적인 게 아니었다면 이용객들은 묵묵히 전철이 출발할 때까지 기다린다. 이런 모습을 보며 아내는 한국에서라면 벌써 전철 역무원과 거친 목소리가 오갔을 것이라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최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사건은 미국에서라면 이렇게까지 1주일 이상 전국이 들썩거릴 정도로 난리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김 회장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극히 개별적인 사안인 이 사건을 마치 한국 대기업 전체의 문제, 나아가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대립구도 식으로 몰아가는 듯한 움직임은 서양인의 시각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인 친구들은 대부분 본인이 술집에서 얻어맞으면 대항할 생각도 못하고 참았을 것이라고 한다. 술집 배후의 조폭 보복이 무섭기도 하거니와 술집에서 얻어맞아 이마를 10바늘 꿰맸대서 그것을 법에 호소한다고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식 문제로 가면 달라진다고 했다. 결국 이 사건의 본질은 자식 사랑이 지나친 어느 아버지의 성급한 과잉대응이 아닐까.

한국인들의 끔찍한 자식 사랑은 사실 유별난 데가 있다. 한국인 아버지들은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내심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자문해봤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속마음은 깊이 감추고 돌연 이 사건을 대기업 총수의 문제로 보아 가진 자와 힘 있는 자가 당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듯하다.

과연 이번 사건을 막강한 대기업 총수 대 무력한 술집 종업원이라는 전형적 이분법의 틀에 담는 게 바람직한 자세일까. 미국인들은 조승희 사건에 대해 민족·인종·계급의 문제와 무관한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면서도 그 사회·문화적 맥락을 차분히 따져보는 성숙한 자세를 보였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우선 개별 사안이라는 전제를 분명히한 뒤 혹시 그 배경에 있을지 모를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들을 생각해보는 게 문제 해결의 올바른 순서가 아닐까.

다섯살 때 하루는 동네 형에게 얻어맞고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아버님의 동정을 살 요량으로 울어보았지만, 아버님은 오히려 내게 다시 가서 그 형을 때리고 오든지 아니면 당신한테 한 대 더 맞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게 아닌가. 물론 나는 몽둥이를 숨기고 그 형을 불러내 한대 때리고 줄행랑을 쳤다. 그 형의 몸집이 아버님의 절반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전혀 다른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아무리 오랫동안 한국에서 살아도 한국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에릭 함슨 / 명지대 교수·영문학)

한겨레(07. 05. 07) 김승연 회장은 곧 잊혀진다

“당신들의 생명이 소중하듯이 내 생명도 소중합니다. 나는 살고 싶습니다. 제발, 제발 …” 참수를 당하기 전 화면에 비쳐진 고 김선일의 절규 앞에서 전율을 느꼈었다. 온나라가 아니 온세계가 다 그러했을 것이다. 연쇄 살인범 유영철 사건은 또 어땠을까. 희대의 줄기세포 사건, 황우석 교수 얘기는?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겠다. 바로 얼마 전, 눈동자 너머로 깊은 우물이 패어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줬던 총기 난사범 조승희의 동영상을 보던 심정은 어떠했던가.

사건·사고라는 이름으로 세론에 떠오르는 온갖 ‘세상의 일들’은 언제나 늘 그렇게 터지고 그렇게 잊혀져가는 것일까. 김승연 사건, 정확한 명칭으로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부자의 보복폭행 의혹사건’이 휩쓰는 세상 속에서는 버지니아의 조승희도 서귀포의 양지승 어린이도 벌써 까마득한 옛일 같기만 하다. 냄비근성에 대한 탄식 못지않게 인간사가 본래 그렇지 뭐, 하는 체념이 앞서기도 한다. 날마다 일정 분량의 음식물을 섭취해야 하듯이 사람은 늘 일정한 감정 격발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감정’ 문제다. 더 정확히 속내를 드러내자면 감정‘만’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가 하는 자기반성이 그것이다.

김승연 회장 사건을 언론에서 처음 접했던 순간에는 자동반응처럼 특권층의 초법적 행동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 정도 갖춘 사람이 그런 수준의 보복행동으로 대응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깊은 경멸감이 일었다. 그 와중에 택시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기자의 목소리는 차갑고 매섭고 날카로웠다. 그는 사건의 내역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그 내역을 빌미로 해서 자신의 분노를 토로하는 듯이 느껴졌다.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보세요! 저 악질 기업가가 정말 나쁜 일을 저질렀어요!’쯤을 외치는 듯이 전달되어 왔다. 보도라는 공적수단을 통해 한 인격체가 저렇게 매도되어도 되는 것일까. 더욱이 수사가 확정되기도 전에. 기자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폭력을 휘둘렀다는 ‘회장님’에 대한 동정이 치미는 기분은 참 미묘했다.

김수영의 시 ‘풀잎’에서 풀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묘사된다. 학교시절에 그 풀은 민초를 뜻한다고 배웠다. 과연 민초가 그러한가. 한국의 언론보도가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고 더 먼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하긴 언론의 선정주의는 말하기도 지겹다. 과당경쟁 상황에서 이해가 가는 면도 없지 않다. 그렇게 과잉되게 ‘울고불고’ 해야 반응이 오는 사회심리에 더 큰 탓이 있는 것도 같다.

쉽게 타오르고 쉽게 꺼지는 불의 연료는 감정이다. 감정이 사건을 지배하는 한 그 사안에 종횡으로 연루된 복합적 성격은 규명되지 않으며, 은폐된 본질이 미처 토론의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건이란 끊임이 없는 법이어서 새 사건이 이전 사건의 파장을 금세 뒤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흥분 곧 감정격발의 연쇄상태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이다. 사회문제 관심 주기는 상상할 수 없이 짧다.

법 위에 올라서서 쇠파이프를 휘두른 당사자들은 시간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금방 잊혀질 테니까. 선행폭력을 휘두른 이른바 술집 종업원(?)들은 희희낙락하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불쌍한 희생자로 둔갑했으니까. 기자들은 슬슬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을 것이다. 이미 식상한 사안이 돼 버렸으니까. 그리고 국민은? 물론 또다른 사건으로 흥분할 준비를 하고 있겠지. 늘 그래왔지 않은가.(김갑수 문화평론가)

07. 05. 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지식인과 현실참여

내일 아침 조간에 실리는 칼럼을 미리 읽어보았다. 경향신문의 기획연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에 기고된 김우창 교수의 글이다. 김교수는 같은 지면에 고정칼럼을 연재하고 있는지라 '지식인 현실참여'의 의미를 짚어보고 있는 기고문을 이 기획기사와 관련하여 읽을 수 있는 건 낯설지 않다. 돌이켜보면, 지난 30여년간 한국사회에서 문학평론가로선 아마도 백낙청 교수 다음으로 영향력을 발휘해온 분이지 않나 싶다. 그는 아래의 글에서 지식인의 현실참여, 지식과 정치의 결합이 갖는 본질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되새겨보고 있다.

경향신문(07. 05. 07)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Ⅱ-1. 지식인 현실참여, 그 복합적 의미

플라톤의 이상국은 지식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이다. 근대 서구의 정치 변화에서 지식인은 중요한 선동자 또는 매개자가 되었고, 공산주의 정권에서는-정권의 관점에서 저울질하여-바른 지식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통치자 그리고 정치의 수임자가 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특히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에서, 바른 도덕의 정치는 정치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이상의 수호는 학문하는 자의 주요 사명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의 위치는 이러한 유학 전통의 학자, 서구의 정치 변화에서의 참여 지식인, 그리고 현대사의 민족의 수난에 대처한 애국지사들의 모델로서 정의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델은 본질적으로 플라톤이나 공자가 생각한 것이면서 거기에 저항적이고 비판적 기능이 첨가된 것이다. 현대국가는 이외에도 성격을 조금 달리하는 전문지식의 보유자-정책과 행정 연구자, 전문 관료, 그리고 기업 경영인, 근래에 와서 첨단과학기술의 전문가들을 필요로 한다. 전문적 지식인의 필요는 날로 더 절실한 것이 되어 간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하는 지식인을 말할 때, 그것은 대체로 이러한 전문적 지식인이 아니라 그 필요의 테두리에 영향을 미치는 더욱 전통적인 의미의 참여 지식인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참여 지식인의 역할이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문적 지식에서 온다. 이들 지식인은 자신의 역할을 어떤 전문지식에 의해서라기보다 특별한 정치 이상과의 관계에 의하여 정의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정치에 일정한 방향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상을 분명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또 어떤 이상이 하필이면 특별한 지적 노력의 소산인가? 정치이상은 정치적 삶 일체를 하나로 통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사회의 현대적 발전의 한 의미는 바로 사회공간에서 삶의 통괄을 위한 이상이나 목적의 영역을 줄이고 삶의 수단의 신장을 위한 활동의 폭을 넓힌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목적 부재의 사회에서 이러한 일반적 지식인의 기능은 모호하다. 목적의 부재는 사회적 아노미 그리고 사회의 불균형 발전의 원인이 된다. 이것이 지식인을 사회참여로 끌어낸다. 또 많은 사회에서, 수단-주로 경제적인 관점에서 파악되는 삶의 수단을 에워싼 갈등은 분배의 정의를 강력한 사회적 쟁점이 되게 한다. 정의는 전통 사회에서도 그 자체로 목적의 성격을 가졌었지만,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상에 이끌리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람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동기의 하나는 억제할 수 없게 솟구쳐 나오는 원천적 정열로 보인다. 이 정열은 정치질서의 구성에 중요한 동력을 제공한다. 모든 에너지는 명암을 가지고 있다. 정열의 인간은 강한 성격의 인간이다. 정치적 정열은 외고집, 독선, 그리고 전체주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이 정열에서 나오는 정치 참여욕이 가장 세속적으로 표현된 것이 정치적 야망이다.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누가 대장부라 할 것인가”하는 남이(南怡)의 시 구절은 정치적 야망으로 인생을 규정한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것이다.

조선조에서 도덕적 이상은 정치참여의 명분이었지만, 벼슬은 그 자체로 많은 학자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목표였다. “동문에 출세한 사람도 많은데, /나 홀로 춥고 가난한 가운데 떨어져 /나이 서른에 관직도 없는 나그네로, /동서를 헤매는 사람”-이규보(李奎報)는 유교가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기 전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관직 없는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쓴 일이 있다. 이러한 정치적 야망은 조선에서 벼슬 욕심으로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크고 작은 야망은 너무나 인간적이면서도 간과할 수 없는 정치참여의 위험 요소를 나타낸다. 물론 이 위험은 다른 긍정적 업적을 위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대가라 할 수도 있다.



개인적인 야망을 떠나서도, 현실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 불투명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는 것을 말한다. 현실 참여는 현실의 논리에 가담하고 그것을 이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정복하기 위해서 복종한다”는 말로 간략하게 설명한 일이 있지만, 이것은 사회를 정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현실을 개조하려는 이상은 알게 모르게 현실에 휘말린다.

역사에서 우리는 가장 이상주의적인 정치가 가장 권모술수의 활용을 서슴지 않는 마키아벨리즘의 권화가 되는 것을 본다.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상은 현실과 대결하면서 그 스스로 이상 실현을 가장 천박하고 야만적인 전술을 위한 구실로 삼을 수 있다. 현실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언제나 현실정치에 의한 간섭이 될 가능성이 많다. 중국의 유학과 정치의 역사에서 “정치를 인간화하려 한 유학자들의 의도”는 “도덕적 상징들을 정치화하여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통제”를 편리하게 해주는 결과를 가져왔다-어떤 연구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이상주의적 전통의 경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경계한다고 하여도, 지식과 정치의 결합에는 본질적인 어려움이 있다. 사회 현실에 작용하려면, 그것에 대한 이해와 분석 그리고 개입의 전략이 필요하다. 이것을 체계화하는 데 능한 것이 지식인이다. 그러나 사회는 그들의 힘을 넘어가는 독자적인 힘과 무게를 가지고 있다. 마르크스는 현실의 진상으로부터 괴리된 아이디어의 체계를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자신의 사회이론은 삶의 현실에 기초한 과학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만이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면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나아가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도 이데올로기일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해결 없는 패러독스가 된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진실 허무주의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대하여 힘을 발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체계적 이데올로기는 기존질서의 옹호로서 또 정치혁명의 수단으로서 효과를 발휘한다. 근대 세계사에서나, 우리 역사에서나 정치혁명은 늘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이데올로기는 사회구조 전체를 한 관점에서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부정의 관점은 긍정의 관점보다도 더 쉽게 전체를 드러내 보여준다. 구조의 긍정적 효과들은 작은 것들이 총계로서만 파악되는 데 대하여 부정적 측면은 쉽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연결된다.

사회의 복합성은 부정에 의하여 단순화된다. 이것은 삶이 끝없는 세말사인 데 대하여 죽음은 하나의 사건인 점에 유사하다. 혁명적 전복의 시기에 사람이 필요로 하는 도덕도 정의(正義) 하나로 단순화된다. (정의는 다른 덕성에 비하여, 가령 인(仁)에 비하여 부정의 덕성이다.) 부정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역사적 과업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은 어떤 역사적 순간에만 그리고 파괴의 작업에만 현실적 의의를 갖는다.

노무현 정부의 문제도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정부를 움직여 온 것은 일정한 진보적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전의 민주혁명의 이념들을 계승한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추상화된, 그러니까 더욱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해진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도 혁명적 전복의 대상으로서의 현실이 약화됨에 따라 그만큼 현실 충격의 힘이 줄어들게 된 결과일 것이다.

거대 계획 중심의 정책 발상, 파당성을 강조하는 언어와 인사 정책, 움직이는 현재보다도 과거에 주의를 응고시킨 과거사 바로잡기 등-이 정부의 정책 발상들은 그 사고의 이데올로기적 추상성에 깊이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의 문제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합리적 사고력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다. 빈부격차나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 계속되는 자가당착적인 정책들은 현실에 즉하여 그리고 긴 숨결로 끈질기게 사고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긴 하나, 현실참여의 과실에는 궁극적 불확실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사회현실은 간단한 이념의 도면에 따라 또는 몇 개의 손잡이로 움직여지는 기계가 아니라 무수한 자유변수들의 종합으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 그것은 근년의 과학에서 말하는 바, 단선적 사고로 포착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이성적 연산(演算)을 넘어가는 것은 아닌, 복합체계에 비슷하다.

필요한 것은 하나로 있으면서 현실의 복합성에 조응하여 변화하는 유연한 이성에 이르려는 노력이다. 그에 이어진 도덕적 이상도 좁은 투쟁적 목표를 넘어 넓은 인간성 실현을 위한 윤리적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도덕적 이상은 종종 우리의 원한(ressentiment)의 한 표현일 수 있다. 이성의 사실적, 도덕적 명증성은 끊임없는 자기정화의 과정을 통하여서-야망으로부터, 사적인 정열로부터, 마키아벨리즘의 유혹으로부터, 또 독선과 오만으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함으로써만 근접된다. 이 명증성을 위한 노력은 지식인의 제1차적인 의무이지만, 지식인의 국가와 사회를 위한 봉사의 본령도 여기에 있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7. 05. 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글샘 > 4.3 사건의 진실...

제주의 구석구석을 다니다보면 만나게 되는 역사의 흔적이 있다. 4.3학살사건이다. 1948년 4월3일에 시작된 군인과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관광지, 제주도 곳곳이 비극의 공간이었던 4.3학살의 현장이다. 녹색순례 길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9일간이지만 직접 발품을 팔아 제주도 중산간을 비롯한 여러 곳을 살펴보는 일정이라 4.3학살현장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순례단 중에서 20-30대의 젊은층은 4.3이라는 역사에 대해 막연하거나 모르는 경우도 있어서 새롭게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는 계기도 되었다. 녹색순례 7일째, 본격적으로 4.3학살의 현장을 살펴보았다. 유사이래 제주도 최대의 비극이자 아픔의 현장을 살펴보는 시간이었다. 전4.3연구소 연구원이었던 제주사람 강태권씨가 생생한 안내를 해주었다.  

▲ 제주는 마을 중심에 정자목(팽나무)을 심고, 집 앞에 난을, 집 뒤편에는 대나무를 심어 키움. 영남동 등 사라진 마을 집터와 마을 중심은 이를 통해 알 수 있음. 영남동 마을을 외롭게 지키는 정자목과, 마을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지석


순례단이 아침에 만난 4.3학살의 현장은 서귀포시 인덕면 광평리였다.  제주에서 행정구역상 가장 높은 해발 고도에 위치한 마을이다. 4.3 사건 때 한림읍, 안덕면, 대정읍 등의 지역주민들이 이곳을 거쳐 한라산으로 피신하였다. 토벌대들도 이곳을 거쳐 진압에 나섰다. 광평리가 왜 주요 길목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곳의 지형을 알아야 한다. 서귀포 동쪽 지역의 지형은 초원과 같은 형태이지만 서귀포 서부지역은 완전한 밀림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이 주요 길목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곳 광평리도 4.3의 아픈 기억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 광평리, 이곳을 통해 한림, 대정, 안덕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녹색순례 구간마다 4.3 사건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순례 3일째 지나간 성산일출봉 옆 너른바위를 관치기라 부른다. 4.3 사건 때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학살을 당했고, 그래서 무수한 관을 그곳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성산 일출봉 옆 너른바위(일명 관치기). 이곳은 4.3 사건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이곳 성산읍에서 무수한 관을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순례 4일째 지난 성읍민속마을 바로 아래인 표선면 가시리의 지미왓 인근의 새가름마을도 그러한 곳이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새가름마을은 가시천 동쪽에 형성되어 신설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320년 전 오씨가 중심이 되어 만든 마을이다. 20여 가구에 100여명이 조, 메일, 콩 등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던 마을이었다. 1948년 11월 15일 마을 전체를 군인들이 불질러 없애고 주민들을 표선국민학교에 수용시켰다. 그중 마을 주민 17명이 속칭 버들못 근처에서 처형당하는 등 마을 주민 25명 4.3사건으로 희생당했다. 49년 2월 가시리 현재 마을사무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주민들이 돌아와서 새로이 마을을 일으켰다. 새가름에도 2가구가 들어와 옛마을에 생기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으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마을을 떠나면서, 새가름 마을은 영원히 사라졌다. 가시리에 인접한 동백마을 신흥리는 더 큰 피해가 있었다. 4.3학살 때 마을 주민 140여명이 사망하였다.

▲ 4.3 사건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학살당해 마을의 흔적만 남고 사람이 살지 않은 남제주군 표선면 새가름


순례 6일째, 한라산 남쪽을 관통하는 산록도로 근처에도 곳곳이 4.3의 피해현장이다. 탐라대학교와도 그리 멀지 않은 서귀포시 영남마을이 대표적이다. 화전마을이었던 영남마을은 메밀, 조, 콩, 밭벼 등을 심어서 먹고사는, 법 없이도 살아가던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일제 때부터 애국심도 뛰어나 1918년 마을 주민들이 법정사항일운동에 참여하여 6명이 구속되었고 이중 김두삼(당시 25세)은 옥사하였으며, 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마을도 4.3학살을 피해가지 못했다. 48년 11월 20일 마을주민 60명 가량이 군인에게 학살당했다. 한집안 14명이 몰살을 당하기도 했고, 10세 미만의 어린아이도 18명이 죽었다. 4.3은 양민학살이었기 때문에 노인과 부녀자, 심지어 어린이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인구비례로 가장 피해가 큰 마을이었던 영남동은 법정 지명만 남은 채, 행정으로는 이미 그 의미가 사라졌다. 이곳도 사라져버린 마을이 된 것이다. 이외에도 4.3의 현장은 제주도 전역에 널려 있다. 관광객들이 무심코 지나가는 현장도 예외는 아니다. 제주공항도 정방폭포도 학살의 현장이었다.

▲ 서귀포시 영남동 마을, 4.3 이전 마을 사람들이 우물로 사용하던 자리. 이제는 연못으로 변해버렸다.


5.10단선을 반대해서 일어난 4.3 학살의 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4.3이 일어난 48년 4월에서 약 6개월이 더 지난 그해 초겨울부터다. 1948년 11월 15일부터 이듬해 1949년 3월까지 중산간지대 마을은 초토화 되었다. 전체 4.3사건의 사망자 중 약 80%가 이 시기에 죽었으며, 70여 개 중산간 마을 중 성읍, 애월읍 정도가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4.3학살은 제주도민들에게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제주의 정체성속에 한의 정서로 뚜렷하게 남아 있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속으로 흐르는 정서가 더 뚜렷한지도 모른다. 곳자왈 아래 숨골을 따라 흐르는 지하수처럼 제주의 가슴에 잊혀질 수 없는 정서가 되었다. 4.3의 가장 큰 상처는 저항할 능력이 없는 무고한 양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점이다. 대부분의 제주도 사람들에게 4.3은 비슷하게 인식된다. 국가에 의해서 그것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서 참혹하게 학살당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육지에서는 이념의 잣대로 다르게 해석할지 몰라도, 적어도 제주도에선 4.3에 대한 1차적인 사건의 규정은 끝났다. 4.3은 이념의 대립이 빚은 결과가 아니다. 육지에서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지만, 적어도 제주에서 4.3은 군인과 경찰이라는 공권력에 의한 무자비하게 진행된 양민학살이었다. 죽어간 자들의 죄라고는 중산간지대의 마을에 살았다는 단 한가지 그 이유뿐이다.

▲ 서귀포시 영남동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한 장소 전경


순례단이 오후에 방문한 곳은 동광육거리다. 여섯갈래의 길이 교차하는 제주 서부의 길목이자 교통의 요지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지방도를 비롯한 주요도로가 지나는 곳이라 파출소도 있고, 주요소와 식당, 식료품점 등이 있다. 이곳에 4.3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작은 공동묘지가. 그때 학살당한 주민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가족들이 그 한이라도 풀기 위해 시체가 없는 묘소를 조성한 한 것이다. 4.3학살의 희생자들의 영혼을 쉬게 하는 헛묘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807번지-4에 자리 잡고 있다. 동광리 헛묘는 7기는(2기는 합장묘) 동광리 출신 임문숙일가 9명의 영혼을 수습한 묘지다. 헛묘는 시신을 찾지 못하였을 때, 생전에 입던 옷이나 유품 등을 넣어 만든 분묘이다.



▲ 동광리 마을 초입에 만들어진 4.3 유적지 ‘헛묘’에는 당시 처형당한 동광리 주민 임문숙씨 일가 9명의 영혼을 수습한 7기(2기는 합장묘)의 묘가 있다.  


동광리는 초토화작전이 전개되던 48년 11월 21일 국방경비대 제 9연대에 의해 온 마을이 불태워졌다.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근 큰널궤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곳도 발각되어 또 다시 도주하였으나, 눈에 남긴 발자국때문에 한라산 영실기암 인근에서 볼레오름에 체포되었으며, 서귀포의 수용소에 옮겨져 49년 1월 22일 정방폭포에서 학살되었다. 그 때 동광리 주민들도 40여명 학살되었다. 유족들은 군인들이 무서워 시신을 수습할 엄두를 못내다가 몇 년후에야 비로소 정방폭포에서 죽은 영혼을 달래고 이곳 동광리 초입에 헛묘를 조성한 것이다. 억울한 원혼을 위로하는 듯 헛묘의 비석과 봉분 주변에는 보라색 고깔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순례단은  동광리일대의 4.3유적지 곳곳을 샅샅이 살펴보면서 4.3이 제주의 마을공동체와 주민들을 삶을 얼마나 모질게 유린했는가를 생생히 확인했다. 동광리 비극의 정점인 큰널궤라는 굴속으로 직접 기어들어가, 주민들이 군인들의 학살을 피해서 어둠속에서 숨죽였던 현장을 체험하였다.  

▲ 4.3 당시 마을 사람들이 토벌대의 학살을 피해 피난 생활을 했다는 동광리에서 서북쪽으로 2.5km 정도 떨어진 도너리 오름 근처에 위치해있는 큰넓궤(궤:작은 천연동굴).



▲ 4.3 당시의 피난민들의 고난을 체험하기 위해 동광 큰넓궤로 들어서는 순례단원들.




▲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나기도 힘든 비좁은 동굴 내부에서 순례단은 피난민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힘들었을 당시 상황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꼈다.


4.3의 현장은 이제 역사의 현장이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인 재평가도 진행 중이며, 정부에 의한 명예회복도 진행 중이다. 제주4.3사건특별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4.3문제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2008년에는 정부가 지원하고 제주도청이 주관하여 4.3평화공원이 조성된다. 600억 원 가량의 예산을 들여, 죽어간 양민의 영령을 위로하고 4.3학살의 역사적 의미를 인권의 차원에서 정립하자는 취지다.

▲ 4.3 사건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동광리 마을 사람들의 서글픈 사연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비


4.3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온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 인프라가 세계최고인 나라답게 4.3에 관한 현장과 주민들의 아픔을 제대로 정리하는 것이 절실하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누구라도 인터넷으로 4.3사건의 전말과 학살의 현장, 관련 유적, 기념추모시설과 추모비, 관련자의 증언 등을 접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4.3평화공원이 중심이 되어서 추진해야 할 일들이다. 항쟁과 폭동이라는 시각도 존재하는 현실이만, 분명한 사실의 기록은 어떤 논리와 이유에서도 미룰 수 없다. 그것을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것은 죽어간 제주양민들에 대한 또 한번의 역사적 학살이자, 4.3의 진실을 가리려는 시도다. 이것은 민족에게 역사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 4.3 사건 당시 토벌대 주둔소로 쓰였던 돌성이 있는 녹하지 오름(알 오름)을 오르는 순례단.

▲ 녹하지 오름(알 오름)에 올라 순례단에게 4.3 사건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설명해주는 강태권(제주도민)씨


해방과 건국의 과정에서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대결과 아픔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무수한 양민들이 사라져갔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제주도 4.3학살의 피해자들이다. 해방 이후 역사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이다. 하지만 4.3사건처럼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양민 학살이 집단으로 자행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정부는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를 냉정히 기록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역사의 기록을 위해 청춘을 바친 제주사람 강태권씨  

20년 가까운 세월을 4.3의 아픔과 상처를 두 눈으로 응시한 제주사람이 있다. 작년까지 제주4.3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강태권씨다. 대학 졸업 이후 88년부터 지금까지 4.3의 학살과 피해 현장을 찾아서 답사하며 증언을 채록하고 현장을 기록하였다. 강씨는 중산간을 비롯하여 제주도 전역을 다니면서 피해자들이나 목격자들을 찾아서 이야기를 확인하고 학살의 현장을 발굴하는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 강전연구원은 4.3사건이 제주도 전역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웬만한 중산간 마을은 죄다 다녀본 셈이라한다. 88년에 제주도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제주4.3학살에 대한 역사적 진실 규명과 재평가에 대한 요구가 모아지면서, 제주 4.3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초기에는 교사, 향토역사연구자 등이 중심되어 연구소가 운영되었다고 한다. 국민의정부 이전까지 어려운 재정 상황 속에도 제주의 한을 끌어안고 역사적 기록으로 후대에게 정확히 남기자는 의지와 소신들이 연구소의 동력으로 이어졌다. 제주 사람 누구에게나 피해갈 수 없는 4.3에 대한 현장의 발굴과 기록이라는 어려운 일들을 지난 20년 묵묵히 수행했고 그 대표적 일꾼 중 한 사람이 강태권 전연구원이다.  

▲ 4.3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청춘을 바친 강태권씨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가장 어려웠을 때가 언제냐는 물음에 “처음에는 말문을 열지 않았다.가슴의 응어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언젠가 중산간 마을에서 한 촌로를 만난자리에서 ‘알랑, 뭣헐띠’라는 말을 들었다. 지금도 그 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면서 사연을 전해 주었다. 이 말은 제주방언으로 ‘당신이 알아서 뭐하겠느냐?’라는 의미로 달리 표현하면, ‘알고는 있지만 말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한다. 강연구원은 “그 말이 바로 4.3살을 직접 겪은 분들의 응어리이자 맺힌 한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강태권씨는 지금도 제주의 4.3현장을 방문하거나 답사하는 이들과 함께 4.3역사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43현장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책이나 자료를 넘어 직접 현장을 발굴하고 피해자들과 만나서 기록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기에 그와 4.3의 현장을 답사하는 것은 4.3의 실체를 단박에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

강태권씨는 “4.3은 학살의 역사이자. 공권력의 무자비한 주민학살에 대한 항쟁의 역사였다. 역사적 재평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4.3이 온전히 평가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4.3은 통일이 되어야 온전히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라며 4.3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 모두의 숙제라고 이야기 했다. 4.3학살은 한국전쟁 다음으로 우리 현대사에 새겨진 가장 큰 상처다. 강태권씨는 그 역사를 그 어떤 학자보다 정면으로 끌어안고 20대에서 40대까지 이어왔다. 역사에 대해 후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 아팠던 역사를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역사를 알리기 위해 제주도 전역을 걷고 또 걷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바람구두 >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삶과 작품세계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삶과 작품세계

목숨을 걸고 낙하산에 몸을 실었던 무모한 저널리스트. 잉그리드 버그만을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을 스쳐 지난 세기의 로맨티스트. 사진가 그룹 매그넘(Magnum)을 창립하고 투철한 기자정신을 의미하는 용어 ‘카파이즘’(Capaism)을 탄생시킨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작품들이 한국에 온다. 3월29일부터 5월26일까지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개최되는 <포토저널리즘의 신화 로버트 카파展>에서는 떨리는 손으로 전장을 증언한 오마하 상륙 사진을 비롯해 모두 140점에 달하는 카파의 걸작들이 역사를 증언할 예정이다. 20세기 역사의 현장에 언제나 자그마한 카메라를 쥐고 숨어들었던 헝가리 출신의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극적인 삶을 반추한다.

“종군기자란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앞에 드러내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영화감독이고, 로버트 카파에 대한 전기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연배우로는 앤디 가르시아를 기용하고 싶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에 선악을 판별하기 어려운 눈빛, 일자에 가까운 윗입술과 달리 도톰한 아랫입술에 머금은 미소는 보는 시선에 따라 짓궂은 장난기를 숨기거나, 뭔가 교활한 의도를 가장한 듯 보인다. 이것은 로버트 카파의 외면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1913년 10월22일 앙드레 프리드먼(Andre Friedman, 카파의 본명)은 노름과 거짓말을 즐겁게 오가는 재능을 지닌,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 데죄 프리드만과 독실한 유대교 신자인 어머니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처 펴지지 않은 그의 한손은 육손이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길 바랐지만, 소망과 달리 아들은 아버지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그녀의 아들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평생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어느 여인과도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전쟁터에서 죽었다. 로버트 카파를 다른 종군기자들과 다르게 만든 것은 그가 평생을 두고 늘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동유럽에 몰아닥친 빈곤과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탄압은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인 카파에게 마르크시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좌파 이념에 심정적으로나마 동조하게 만들었다. 좌우익간의 유혈테러가 빈발하던 헝가리에서 그는 종종 좌익혁명가들과 어울렸고, 그 결과 17살의 나이로 망명도생(亡命圖生)의 길을 떠나야 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프리드먼은 신생 바이마르공화국의 수도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정치학을 공부하고, 브레히트의 연극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이었고, 조국에서 쫓겨난 가난한 젊은이였다. 그는 하숙집 주인의 개먹이를 훔쳐 먹어야 할 만큼 가난했으므로 어떻게든 생계 수단을 찾아야 했다. 그는 카메라를 택했고,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의 첫 번째 촬영대상은 스탈린에게 생명을 위협당하며 쫓기고 있던 트로츠키였다. 망명자가 촬영한 망명자의 모습엔 죽음의 그림자가 맴도는 듯했고, 카파, 아니 아직 프리드먼이었던 그는 자신의 사진을 <슈피겔>에 게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도 그의 안식처가 될 수는 없었다. 거리엔 어느새 갈색셔츠를 입은 무리들이 떼를 지어 활보했고, 1933년 2월 독일제국의회가 불타자 반란자로 의심되는 이들에게 린치가 가해졌다. 더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파리로 흘러든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의 평생 연인 게르다 타로를 만난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타로 역시 파시즘을 피해 파리에 온 망명자였다. 그녀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무렵엔 이미 공산당 조직의 열성 당원이었다. 파리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었던 그는 타로에게 2주 만에 카메라 조작법을 가르쳤고, 타로는 아직 거칠기만 했던 젊은 프리드먼에게 사랑을 가르쳤다. 프리드먼에게 타로는 피터팬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꿰매준 웬디 같은 존재였다. 타로 덕분에 프리두먼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났다. 무명의 이방인 사진가였던 그를 프랑스를 방문 중인 돈 많고 유명한 미국 출신 사진가 로버트 카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일반 가격의 세배를 받고 사진을 팔아치웠다.

검열과 금기에 도전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정점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타로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오늘날 로버트 카파란 이름은 포토저널리스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뜨거운 피, 언제나 현장에 가장 근접하고 싶어했던 열정이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 민중과 역사가 가장 극렬하게 부딪치는 현장을 찾아가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1936년 스페인에서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었다. 이 사진을 계기로 그는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이토록 놀라운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우연도 작용했다. 돌격 중에 총에 맞는 병사를 촬영하여 오랫동안 조작 여부로 뜨거웠던 이 작품은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때마침 창간된 <라이프>에 게재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미군과 전쟁고아, 영국 런던, 1943년

로버트 카파는 41년의 짧은 생애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전쟁을 겪었고,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언제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전장을 누비며 그가 밝혀내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언제나 전쟁의 진실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전하고자 했다. 우리가 흔히 전쟁 사진이라 통칭하여 부르지만 전쟁 사진에는 언제나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진실을 전하는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선전하는 사진이다. 사진의 발명 이래 전쟁은 언제나 매스미디어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왔다. 대중은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자신이 죽을 염려만 없다면 인간의 의지가 극한까지 시험받는 전장의 이야기에 매료되어왔다. 지배계급은 이런 대중의 기호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대중을 좀더 효과적으로 통제하여 국가의 전쟁의지에 동원하기 위해 전쟁을 즐겨 영웅담으로 변조해냈다. 호기심과 동원이라는 양자의 이익이 절묘하게 결합된 전쟁 사진은 언제나 많은 수요가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촬영에 오랜 시간이 걸렸던 초기 사진술의 발전 이후에도 전사한 병사, 참혹한 부상병 사진은 게재될 수 없었다.

전투 현장과 야전병원에는 숱한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들이 넘쳐나는 순간에도 언론에 보도되는 사진들은 승리를 찬양하고, 후방에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노동자와 민간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전쟁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잔혹 행위나 죽은 이들의 비참한 모습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이 같은 검열과 금기에 도전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정점에 서 있던 이가 바로 로버트 카파였다. 그가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 게재된 뒤 많은 이들이 전쟁의 진실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터를 누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의 품에서 불려나와 이름 모를 언덕과 골짜기에서 숨져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연인이었던 타로마저 작전 중 급하게 후진해온 아군 전차에 깔려 숨지고 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이후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것은 영원히 전쟁터를 떠돌게 될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마하 해변 전투에서 탄생한 최고의 걸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더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었다. 나치를 피해 건너간 미국에선 헝가리 국적으로 인해 도리어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되었고, 카메라조차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를 구한 것도 전쟁이었다. 그는 <콜리어즈>에 채용되면서 전선으로 복귀하는 극적인 행운을 만난다. 카파는 영국을 거쳐 아프리카, 이탈리아를 전전하며 취재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유부녀 핑키와 밀애를 즐겼다.

종군기자는 병사들과 함께 목숨을 걸지만 취재를 마치면 후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글 수도 있었고, 원치 않으면 취재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2만에서 3만명이 전사할 것이란 예측이 나오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로버트 카파는 다시 한번 전선으로 향하는 패에 모든 것을 걸었다. 평소 도박을 즐겨하던 그였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재현되었던 것처럼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마하 해변에서 카파는 죽음의 공포로 떨리는 손을 거머쥐고 35mm 필름을 이용해 전투장면을 촬영했다. 35mm 필름 네통에 담긴 전투장면이었지만 흥분한 조수가 실수하는 바람에 인화할 수 있었던 사진은 고작 11프레임에 불과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기관총 사격과 포격 속에서 촬영된 사진은 흔들렸고, 핀트도 맞지 않았지만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된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오명>에 출연한 잉그리드 버그만, 미국 할리우드, 1946년

이때 그의 사진을 인화하며 실수로 필름을 녹여버렸던 조수는, 훗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로버트 카파상을 1963년과 65년에 연거푸 수상한 베트남전 종군사진기자 래리 버로즈다. 그 역시 베트남전 취재 중 헬기 추락으로 로버트 카파의 뒤를 따랐다. 로버트 카파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사진 중 하나는 종전이 임박했던 1945년 4월18일 라이프치히에서 촬영된 병사의 죽음이었다. 이 무렵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친구 중 하나였던 종군기자 어니 파일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제 막 평화가 찾아온 유럽에 당시 <카사블랑카>와 <가스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날아왔다. 이 무렵 그녀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카파는 런던으로부터 핑키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만나는 즉시 강하게 끌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배우는 여전히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지만, 종군기자였던 카파에겐 촬영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카파는 할리우드까지 날아가 그녀를 촬영했지만 결코 결혼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잡지사와 사진기자들 사이에 있었던 불평등한 관계를 바로잡고자 했다.

진실을 드러내는 행동주의 ‘카파이즘’

카파는 전쟁 사진을 단순히 관찰하는 입장 대신 전쟁을 통해 인간이 처한 극한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말하고자 했다. 비록 자신은 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지만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 대신에 전쟁의 실상과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그는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곤 했다. 로버트 카파는 객관적인 관찰자이기보다는 언제나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참여자로 행동했고, 그 같은 신념에 따라 사진작가는 자신이 촬영한 작품의 영혼까지 소유해야 했다. 카파는 오랜 동료였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1947년 사진작가들의 협동조합인 ‘매그넘’(Magnum)을 결성한다. 포토저널리즘의 주도권을 잡지사에서 작가들의 자유로운 창작과 주체성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후 로버트 카파는 작가 스타인 벡과 함께 전후의 소련을 방문해 취재했지만 촬영한 사진들 중 상당수는 검열 때문에 되찾을 수 없었다.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취재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행위에 실망한 나머지 “이렇게 옹졸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기록하지 않겠다”며 매그넘의 다른 사진가들과 함께 취재를 포기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까지 근접해 들어가, 검열과 맞서 싸우며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카파의 행동주의는 훗날 카파이즘(Capaism)이라 불리게 되지만 정작 그는 한국전쟁에 대한 취재를 거절했다. 그 까닭에 대해 카파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자신은 전쟁을 혐오하며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렸기 때문에 다시 전쟁터로 가야 한다면 권총으로 자살해버릴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머지않은 미래에 베트남전쟁이라 불리게 될 인도차이나 전쟁에 종군한 까닭은 무엇일까.

로버트 카파 최후의 사진, 인도차이나 전쟁, 1954년 5월25일

한국전쟁 이후 냉전이 극성을 부리던 1950년대 중반의 미국, 매카시즘의 광풍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카파는 FBI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었고,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았으며 계속해서 감시당했다. 엘리아 카잔 감독 같은 이들조차 반미주의자로 지목되자 주변의 동료를 밀고하여 면죄부를 받았다. 로버트 카파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고, 혐오해 마지않던 마지막 전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54년 5월25일. “전쟁의 마지막 날에도 병사들은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빨리 그 모든 것을 잊는다”고 말했던 로버트 카파는 베트남에서 사망한 최초의 미국 특파원이 되었다. 이후 60여명의 종군기자가 베트남에서 죽거나 실종되었다.

글 :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출처 : 시네21. No. 5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바람구두 >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삶과 작품세계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삶과 작품세계

목숨을 걸고 낙하산에 몸을 실었던 무모한 저널리스트. 잉그리드 버그만을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을 스쳐 지난 세기의 로맨티스트. 사진가 그룹 매그넘(Magnum)을 창립하고 투철한 기자정신을 의미하는 용어 ‘카파이즘’(Capaism)을 탄생시킨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의 작품들이 한국에 온다. 3월29일부터 5월26일까지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개최되는 <포토저널리즘의 신화 로버트 카파展>에서는 떨리는 손으로 전장을 증언한 오마하 상륙 사진을 비롯해 모두 140점에 달하는 카파의 걸작들이 역사를 증언할 예정이다. 20세기 역사의 현장에 언제나 자그마한 카메라를 쥐고 숨어들었던 헝가리 출신의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극적인 삶을 반추한다.

“종군기자란 전쟁의 내장을 세계 인류 눈앞에 드러내보이고,
지구상에서 그것을 없애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캐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영화감독이고, 로버트 카파에 대한 전기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연배우로는 앤디 가르시아를 기용하고 싶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에 선악을 판별하기 어려운 눈빛, 일자에 가까운 윗입술과 달리 도톰한 아랫입술에 머금은 미소는 보는 시선에 따라 짓궂은 장난기를 숨기거나, 뭔가 교활한 의도를 가장한 듯 보인다. 이것은 로버트 카파의 외면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1913년 10월22일 앙드레 프리드먼(Andre Friedman, 카파의 본명)은 노름과 거짓말을 즐겁게 오가는 재능을 지닌,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 데죄 프리드만과 독실한 유대교 신자인 어머니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처 펴지지 않은 그의 한손은 육손이였다. 어머니는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길 바랐지만, 소망과 달리 아들은 아버지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그녀의 아들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평생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했고, 어느 여인과도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전쟁터에서 죽었다. 로버트 카파를 다른 종군기자들과 다르게 만든 것은 그가 평생을 두고 늘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동유럽에 몰아닥친 빈곤과 파시스트들의 정치적 탄압은 가난한 유대인의 아들인 카파에게 마르크시스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좌파 이념에 심정적으로나마 동조하게 만들었다. 좌우익간의 유혈테러가 빈발하던 헝가리에서 그는 종종 좌익혁명가들과 어울렸고, 그 결과 17살의 나이로 망명도생(亡命圖生)의 길을 떠나야 했다.

1931년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프리드먼은 신생 바이마르공화국의 수도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정치학을 공부하고, 브레히트의 연극을 감상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이었고, 조국에서 쫓겨난 가난한 젊은이였다. 그는 하숙집 주인의 개먹이를 훔쳐 먹어야 할 만큼 가난했으므로 어떻게든 생계 수단을 찾아야 했다. 그는 카메라를 택했고,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의 첫 번째 촬영대상은 스탈린에게 생명을 위협당하며 쫓기고 있던 트로츠키였다. 망명자가 촬영한 망명자의 모습엔 죽음의 그림자가 맴도는 듯했고, 카파, 아니 아직 프리드먼이었던 그는 자신의 사진을 <슈피겔>에 게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도 그의 안식처가 될 수는 없었다. 거리엔 어느새 갈색셔츠를 입은 무리들이 떼를 지어 활보했고, 1933년 2월 독일제국의회가 불타자 반란자로 의심되는 이들에게 린치가 가해졌다. 더이상 베를린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파리로 흘러든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의 평생 연인 게르다 타로를 만난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타로 역시 파시즘을 피해 파리에 온 망명자였다. 그녀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무렵엔 이미 공산당 조직의 열성 당원이었다. 파리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이었던 그는 타로에게 2주 만에 카메라 조작법을 가르쳤고, 타로는 아직 거칠기만 했던 젊은 프리드먼에게 사랑을 가르쳤다. 프리드먼에게 타로는 피터팬의 잃어버린 그림자를 꿰매준 웬디 같은 존재였다. 타로 덕분에 프리두먼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났다. 무명의 이방인 사진가였던 그를 프랑스를 방문 중인 돈 많고 유명한 미국 출신 사진가 로버트 카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일반 가격의 세배를 받고 사진을 팔아치웠다.

검열과 금기에 도전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정점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타로와 함께 인민전선파에 가담한다. 오늘날 로버트 카파란 이름은 포토저널리스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가 전쟁만을 찍고 싶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뜨거운 피, 언제나 현장에 가장 근접하고 싶어했던 열정이 그로 하여금 삶과 죽음, 민중과 역사가 가장 극렬하게 부딪치는 현장을 찾아가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로버트 카파의 이름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1936년 스페인에서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었다. 이 사진을 계기로 그는 포토저널리스트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가 이토록 놀라운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우연도 작용했다. 돌격 중에 총에 맞는 병사를 촬영하여 오랫동안 조작 여부로 뜨거웠던 이 작품은 여전히 논쟁적이지만 때마침 창간된 <라이프>에 게재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미군과 전쟁고아, 영국 런던, 1943년

로버트 카파는 41년의 짧은 생애 동안 모두 다섯 차례의 전쟁을 겪었고,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언제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전장을 누비며 그가 밝혀내고 싶었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언제나 전쟁의 진실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전하고자 했다. 우리가 흔히 전쟁 사진이라 통칭하여 부르지만 전쟁 사진에는 언제나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진실을 전하는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선전하는 사진이다. 사진의 발명 이래 전쟁은 언제나 매스미디어의 극진한 사랑을 받아왔다. 대중은 전쟁을 혐오하면서도, 자신이 죽을 염려만 없다면 인간의 의지가 극한까지 시험받는 전장의 이야기에 매료되어왔다. 지배계급은 이런 대중의 기호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대중을 좀더 효과적으로 통제하여 국가의 전쟁의지에 동원하기 위해 전쟁을 즐겨 영웅담으로 변조해냈다. 호기심과 동원이라는 양자의 이익이 절묘하게 결합된 전쟁 사진은 언제나 많은 수요가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촬영에 오랜 시간이 걸렸던 초기 사진술의 발전 이후에도 전사한 병사, 참혹한 부상병 사진은 게재될 수 없었다.

전투 현장과 야전병원에는 숱한 부상자와 전염병 환자들이 넘쳐나는 순간에도 언론에 보도되는 사진들은 승리를 찬양하고, 후방에서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노동자와 민간인들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전쟁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잔혹 행위나 죽은 이들의 비참한 모습은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이 같은 검열과 금기에 도전한 포토저널리스트들의 정점에 서 있던 이가 바로 로버트 카파였다. 그가 촬영한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이 게재된 뒤 많은 이들이 전쟁의 진실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터를 누볐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의 품에서 불려나와 이름 모를 언덕과 골짜기에서 숨져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연인이었던 타로마저 작전 중 급하게 후진해온 아군 전차에 깔려 숨지고 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파는 얼이 빠져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이구나.” 이후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낸 것은 영원히 전쟁터를 떠돌게 될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마하 해변 전투에서 탄생한 최고의 걸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더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었다. 나치를 피해 건너간 미국에선 헝가리 국적으로 인해 도리어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되었고, 카메라조차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를 구한 것도 전쟁이었다. 그는 <콜리어즈>에 채용되면서 전선으로 복귀하는 극적인 행운을 만난다. 카파는 영국을 거쳐 아프리카, 이탈리아를 전전하며 취재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유부녀 핑키와 밀애를 즐겼다.

종군기자는 병사들과 함께 목숨을 걸지만 취재를 마치면 후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 몸을 담글 수도 있었고, 원치 않으면 취재를 거부할 수도 있었다. 2만에서 3만명이 전사할 것이란 예측이 나오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로버트 카파는 다시 한번 전선으로 향하는 패에 모든 것을 걸었다. 평소 도박을 즐겨하던 그였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훗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재현되었던 것처럼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오마하 해변에서 카파는 죽음의 공포로 떨리는 손을 거머쥐고 35mm 필름을 이용해 전투장면을 촬영했다. 35mm 필름 네통에 담긴 전투장면이었지만 흥분한 조수가 실수하는 바람에 인화할 수 있었던 사진은 고작 11프레임에 불과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기관총 사격과 포격 속에서 촬영된 사진은 흔들렸고, 핀트도 맞지 않았지만 오히려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된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오명>에 출연한 잉그리드 버그만, 미국 할리우드, 1946년

이때 그의 사진을 인화하며 실수로 필름을 녹여버렸던 조수는, 훗날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로버트 카파상을 1963년과 65년에 연거푸 수상한 베트남전 종군사진기자 래리 버로즈다. 그 역시 베트남전 취재 중 헬기 추락으로 로버트 카파의 뒤를 따랐다. 로버트 카파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사진 중 하나는 종전이 임박했던 1945년 4월18일 라이프치히에서 촬영된 병사의 죽음이었다. 이 무렵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친구 중 하나였던 종군기자 어니 파일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제 막 평화가 찾아온 유럽에 당시 <카사블랑카>와 <가스등>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날아왔다. 이 무렵 그녀는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카파는 런던으로부터 핑키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두 사람은 만나는 즉시 강하게 끌렸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배우는 여전히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지만, 종군기자였던 카파에겐 촬영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카파는 할리우드까지 날아가 그녀를 촬영했지만 결코 결혼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잡지사와 사진기자들 사이에 있었던 불평등한 관계를 바로잡고자 했다.

진실을 드러내는 행동주의 ‘카파이즘’

카파는 전쟁 사진을 단순히 관찰하는 입장 대신 전쟁을 통해 인간이 처한 극한상황에서의 휴머니티를 말하고자 했다. 비록 자신은 늘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지만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 대신에 전쟁의 실상과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고자 했다. 그는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곤 했다. 로버트 카파는 객관적인 관찰자이기보다는 언제나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참여자로 행동했고, 그 같은 신념에 따라 사진작가는 자신이 촬영한 작품의 영혼까지 소유해야 했다. 카파는 오랜 동료였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1947년 사진작가들의 협동조합인 ‘매그넘’(Magnum)을 결성한다. 포토저널리즘의 주도권을 잡지사에서 작가들의 자유로운 창작과 주체성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후 로버트 카파는 작가 스타인 벡과 함께 전후의 소련을 방문해 취재했지만 촬영한 사진들 중 상당수는 검열 때문에 되찾을 수 없었다. 유대인으로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취재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행위에 실망한 나머지 “이렇게 옹졸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기록하지 않겠다”며 매그넘의 다른 사진가들과 함께 취재를 포기했다.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까지 근접해 들어가, 검열과 맞서 싸우며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카파의 행동주의는 훗날 카파이즘(Capaism)이라 불리게 되지만 정작 그는 한국전쟁에 대한 취재를 거절했다. 그 까닭에 대해 카파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자신은 전쟁을 혐오하며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봐버렸기 때문에 다시 전쟁터로 가야 한다면 권총으로 자살해버릴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랬던 그가 머지않은 미래에 베트남전쟁이라 불리게 될 인도차이나 전쟁에 종군한 까닭은 무엇일까.

로버트 카파 최후의 사진, 인도차이나 전쟁, 1954년 5월25일

한국전쟁 이후 냉전이 극성을 부리던 1950년대 중반의 미국, 매카시즘의 광풍은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카파는 FBI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었고,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았으며 계속해서 감시당했다. 엘리아 카잔 감독 같은 이들조차 반미주의자로 지목되자 주변의 동료를 밀고하여 면죄부를 받았다. 로버트 카파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고, 혐오해 마지않던 마지막 전장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54년 5월25일. “전쟁의 마지막 날에도 병사들은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빨리 그 모든 것을 잊는다”고 말했던 로버트 카파는 베트남에서 사망한 최초의 미국 특파원이 되었다. 이후 60여명의 종군기자가 베트남에서 죽거나 실종되었다.

글 :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출처 : 시네21. No. 59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