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알랭 바디우의 철학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주저 중 한 권인 <조건들>(새물결, 2006)이 번역돼 나왔다. 또다른 주저인 <존재와 사건>과 함께 번역돼 나올 거라는 얘기는 몇 년전부터 있었지만 잊고 있던 차에 뜻밖의(?) 책이 나온 것이다. 그간에 출간되었던 몇 권의 책이 (反들뢰즈주의자로서) '들뢰즈 이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바디우의 전모를 드러내기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졌더랬는데, 이번엔 불식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미권에서 활발하게 번역/연구되고 있는 철학자이지만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의 영역본이 작년에서야 나왔고 <조건들>의 영역본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스페인어본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러니 <조건들>의 국역본 출간은 얼마간 '사건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역자는 <윤리학>을 우리말로 옮긴 이종영씨이다(역시나 <윤리학> 번역에서의 불만을 말끔히 씻어주기를 기대한다).   

지젝의 적극적인 지지와 찬양에 고무되어 개인적으로 바디우의 책들은 (<존재와 사건>를 비롯하여) 저서와 연구서들을 다수 갖고 있지만 그의 철학을 일람할 기회도 없었도 따라서 몇 마디 덧붙일 만한 능력도 현재로선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길잡이가 될 만한 글 하나를 옮겨놓는 걸로 일단은 소개를 대신해두고자 한다. 바디우 전공자인 서용순 박사의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이란 글인데, 지난 2003년 '동국대 대학원신문'(5월호)에 게재됐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었고 바디우의 주저들을 번역중이라고 했다. 이후 바디우의 지도하에 학위논문을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강의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든 철학은 시대의 징후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리스 공화정 말기의 혼란과 더불어 민주정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20세기라는 역사적 시점의 지배적인 동력이었던 기술과 그 기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은 모두 시대의 징후로 읽어 내려가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는 하이데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요컨대 수십년 이래로 우리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인간 이성으로 수립된 모든 프로젝트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간주된 과학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를, 나아가서는 세계를 지배했던 큰 흐름인 합리주의는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철학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이래로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일찍이 리요따르는 건축술로서의 철학, 즉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을 선고하였고, 많은 철학자들이 플라톤 이래 철학에서 배제된 시학(詩學, poetique)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이른바 거대 담론은 해체되었고, 전통적인 철학의 영역이었던 진리의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철학은 이제 시학을 비롯한 예술에 자신의 지위를 양도한 채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려 한다. 철학사는 부정되었고 이제는 플라톤에 의해 추방되었던 시인들이 그 자리를 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철학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철학의 시학으로의 투항에 저항하는 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이다. 그의 철학적 여정은 아주 거센 굴곡을 보여준다. 싸르트르에게 감화를 받고 있던 그의 청년 시절, 알튀세와의 만남은 그를 과학적 이론의 추종자로 만들었지만 68년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68혁명의 대립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알튀세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와 결별한다. 그리고는 실뱅 라자뤼스, 나타샤 미셸, 프랑수와 발메 등과 마오주의 그룹인 예난(Yenan)그룹을 결성해 프랑스 공산당에 맞서 투쟁한다.

이후 80년대에 들어 유럽에 지적 반동의 시기가 도래하자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다른 혁명적 대안을 마련하는 시도를 행하게 되고, 그 결실은 1988년『존재와 사건』의 출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는 수학적 존재론의 구축을 통해 철학을 복권시키고, 새로운 해방적 프로젝트를 그 존재론에 담아낸다. 오늘날 그는 흔히 포스트모던 철학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프랑스 철학의 중심을 흔드는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주요한 무기인 집합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론을 구성해내고, 이를 통해 만신창이가 된 철학에 그 자리를 되돌려준다.

종말을 부정하기

우선 그의 철학을 가로지르는 큰 흐름을 살펴보자. 바디우는 모든 현대 철학의 지배적 경향인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이라는 페이소스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종말이라는 테마는 철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거대 담론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대담론' 만큼이나 거창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철학은 존재할 수 있고 우리 시대에 그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물론 철학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 근원적인 위기에 처했던 시대 역시 분명히 있었다. 철학은 항상 불연속적이었고,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철학과 그 조건들이 가지는 관계에 놓여진 불변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이다. 진리라는 테마만이 철학과 그 조건이 되는 여러 사유를 관계짓는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조건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공정, procedure)로서만 철학의 조건이 된다. 말하자면 이 조건들은 각자의 개별적 특성에 기반하여 진리를 생산해내고, 진리를 생산해내는 한에서만 철학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진리 생산의 사유는 철학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만, 조건들이 생산한 진리를 개입(intervention)을 통해 명명(nomination)해낼 뿐이다. 바디우는 철학의 조건을 이루는 진리 산출의 유적1) 절차(공정, procedures generiques des verites)를 네 가지 정도로 분리해낸다. 정치, 과학(그 중에서도 수학), 사랑, 예술(시학(詩學))이 그것이다.

철학 - 봉합에서 공가능성으로

철학의 조건으로서의 네 가지 진리의 공정이 서로를 배제하거나 종속시키지 않고, 그 조건들이 모두 공존가능하다는 점을 사유하는 것이 바로 바디우가 정의하는 철학의 작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네가지 공정이 모두 진리를 생산하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바디우는 이 점을 아주 중요시하여 봉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 동안의 철학은 이러한 공가능성(compossibilite, 여러 가지 조건이 각자의 영역에서 모두 진리를 생산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동안의 철학은 다른 조건들이 가지는 진리 생산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 중 하나, 혹은 일부에 대해서만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진리 생산의 다양한 가능 영역은 부정되고 진리는 어느 하나의 영역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것을 바디우는 철학의 봉합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다양한 봉합의 실례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철학이 과학적 실증주의에 봉합된 시기였고, 영미권의 아카데미적 철학은 아직도 이 봉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정치와 과학에 동시에 봉합시켰다. 이러한 이중의 봉합의 복잡한 구조를 스탈린은 철학,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되어버린 과학에 반대하여 철학을 시학에 가두어버린 것으로 간주된다. 실증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많은 비판을 통하여 화석화된 봉합일 뿐이고, 이제는 제도적이거나 아카데미적인 봉합이지만, 하이데거를 그 축으로 하는 시학(예술)에의 봉합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봉합 형태이고, 전혀 검토된 적이 없는 봉합이다.

철학이 과학과 정치에 봉합되어 있을 당시, 시학은 철학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마침내 시인의 시대는 열린다. 그러나 여기서 바디우가 말하는 시학은 모든 시와 시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는 횔더린(Holderlin)에서 파울 첼란(Paul Celan)에 이르는 시기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진정한 사유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인과 시일 뿐이다.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시학이 행한 것은 시에 의한 존재의 문제에의 접근이었다. 시인들의 공헌은 대상의 범주를 해체함으로써 탈객관화(주지하듯이 객관화는 과학의 미덕이다)를 실현해낸 데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객관성(대상성, l'objectivite)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객관적 철학의 시학적 해체를 결합시켜냄으로써 엄청난 강점을 획득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수학과 시학의 이율배반을 지식과 진리의 대립, 혹은 '주체/대상'과 '존재(Etre)'의 대립으로 엮어냄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랭보, 혹은 로트레아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학은 항상 수학과 사유를 공유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시인들은 수학에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상의 범주를 해체하고 첼란에 이르러 시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철학이 완전한 탈봉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시인의 시대가 끝남과 더불어 열리게 된다.

진리의 사건들

우리는 이제 진리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진리는 진리 생산의 네 가지 절차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절차가 항상 진리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요컨대 진리의 네 가지 공정은 진리의 생산이 가능한 영역일 뿐이다. 진리는 사건에 의존적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사건의 진리인 것이고, 만일 이 네 가지 영역 속에 사건이 없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런 진리도 발견해낼 수 없다. 이 사건의 진리야말로 바디우 철학의 핵심이다. 우리는 각각의 절차에서 드러난 상이한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정치에서의 사건은 언제나 상이한 형태(18세기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형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로 나타났다. 우리 시대에 국한시켜 보자면 정치적 사건은 68년에서 80년에 이르는 역사적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예로는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과 중국의 문화 혁명, 이란 혁명, 그리고 폴란드 연대 노조에 의해 주도된 노동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사건들은 새로운 명명이 필요한 사건들이다. 폴란드의 노동 운동을 제외하면 그들 정치적 사건은 그 내용의 새로움과는 유리된 낡은 사상 체계에 의해 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이란 혁명은 이슬람으로의 복귀, 즉 옛 것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사건을 명명하는 철학적 개입(intervention)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 정치적 사건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지식 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기에 사건이고, 진리를 생산할 수 있지만, 그것의 명명은 아직 철학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칸토르에서 폴 코헨까지의 현대 집합 이론은 수학에서의 사건이다. 이 집합 이론은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multiplicite indiscernable)에 대한 개념을 수립해낸다. 이로써 집합 이론은 존재-로서의-존재(Etre-en-tant-qu'etre)에 대한 합리적 사유와 언어 사이의 문제를 해결한다.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기존의 지식 체계를 규정하는 언어 체계를 벗어난, 즉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바로 진리가 이러한 존재 형태를 갖는다고 바디우는 역설한다.

진리는 지식에 구멍을 내는 것이며, 따라서 진리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단지 생산될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유적(類的, 산출적, generique)이며, 기존 언어를 통한 지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기존 언어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은 언어로 결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기존의 언어에 비추어 초과분(exces)이 된다. 우리는 그것의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다. 바디우는『존재와 사건』에서 집합 이론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증명해내는데 이는 '방황하는 초과분'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것이고 그 자체로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된다.

시인의 시대를 통틀어 볼 때, 시에서의 사건은 파울 첼란의 작품이다. 데리다나 가다머 혹은 라꾸-라바르뜨(이들은 바디우의 철학적 대화 상대자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요한 논적이다)와 달리 바디우는 첼란의 시에서 시는 그 자체로 충분치 않다는 고백을 읽어낸다. 그의 시는 봉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시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진 철학을 원한다. 말하자면, 첼란은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시대의 개념적 전유를 다른 영역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첼란의 공헌은 시를 철학이 그 시대에 행해온 사변적 기생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시를 진리의 나머지 절차들과 공존하게 함으로써 시에게 자신의 자리를 돌려주는 데 있다. 이것이 첼란이 행한 시의 사건의 핵심적 내용이다.

사랑의 사건은 라깡의 저작이다. 사랑에 대한 라깡의 이론은 하나(l'Un, the One)의 지배를 파괴하고 둘(le Deux, the Two)의 문제를 사고했다는 점에서 사건이다. 라깡은 성에서의 둘을 논리적으로 연역해낸다. 이로써 남성(손상된 전체(Tout)의 벡터)과 여성(비-전체(pas-toute))은 서로 전혀 다른 둘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두 개의 성은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만남이라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둘은 일자(하나, l'Un)의 법칙을 초과하는(넘어서는) 끝없고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을 꾸며낸다. 이것을 바디우는 성차에 대한 진리,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의 지식에서 벗어나 있는 진리가, 이름없는 혹은 유적인 다수성으로서 도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사랑이란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인 것이다.

그렇게 사건을 계기로 생산되어 잠시 나타난(presenter)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적(事後的)으로 표상될(representer) 뿐이다. 이때 진리를 생산해 낸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 그것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고유한 활동에 전념할 뿐, 진리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그 절차들은 진리를 모른다. 그 진리의 명명작업을 해내는 것, 그렇게 다른 곳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의 작업이다. 예컨대, 철학은 이미 다른 지점에서 생산된 진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인 것이다. 이제 철학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네가지 유적 절차들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고 명명함으로써 바디우가 원하는 철학적 행동(acte philosophique)은 이제 가능해진 것이다.

주체의 이론

위의 예에서 보았듯 사건은 진리를 생산해냄으로써 지식(savoir)의 망을 교란시키고(구멍을 내는 것이다), 곧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진리의 흔적은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sujets fideles)를 통해서 밖에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주체는 진리의 담지자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주체인 것은 아니듯, 주체는 그 충실성을 잃고 배반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의 많은 주체들은 그 사건이 생산해낸 진리에의 충실성을 잃고 그 진리를 배반하였고, 중국의 문화 혁명도 같은 길을 걸었다. 때로는 환영(simulacre)을 사건으로 착각하여 그 환영에 충실하기도 하는데, 파시즘의 예가 그 좋은 예이다.) 진리에 의해 호출된 그들은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이다. 그 진리에 충실함으로써만 그들은 주체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주체들은 진리의 담지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디우의 윤리학이 드러난다.

바디우는 구조주의에 의해 부정된 주체를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객관주의를 벗어나 비로소 주체적 정치(politique subjective)를 가능하게 한다. 구조주의에 의해 단지 구조의 담지자로만 파악되었던 인간은 바디우의 손에서 다시 주체가 된다. 물론 이 주체는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선험적인 주체는 아니다. 자신의 이해(intert)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 동물(l'animal humain, 영장류 동물로서의 인간)은 진리의 사건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이해에서 벗어난 이해(intert-desinteresse)를 추구하는 주체가 되어 자신의 진리에 충실하게 된다. 이렇게 사건을 통하여 동물이었던 인간은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마침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존재방식을 바디우는 충실성(fidelite)이라고 부른다.

이 주체의 충실성이야말로 진리의 과정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원칙이다. 진리는 사건과 동시에 나타나 지식 체계에 파열구를 만든 후 즉시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진리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의 객관성이 아닌 진리가 만들어내는 주체성, 바디우에 의해 충실성으로 표현된 그 주체성의 발현을 통해서일 뿐이다. 주체의 충실성은 진리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미디어와 정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유포된 '인권'과 같은 세론(世論)은 결코 윤리학의 지표가 될 수 없다(우리는 이 '인권'이 미국의 주요한 공갈 협박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로지 진리의 변전만이 윤리학의 재구성을 위한 기준일 것이다. 그 윤리학의 금언은 "계속하자!(continuer!)"라고 말한다. 즉 진리에 계속 충실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이른바 진리의 윤리학의 함의가 있다. 다시 말해 바디우의 윤리학은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인 '주체의 충실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바디우의 이론에서 주체는 지식의 영역인 객관성의 범주에 포섭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견지해왔던 주체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문제틀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이라는 객관적인 개념을 통해, 혁명적 주체성을 지녔다고 전제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성을 지닌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다. 계급은 이로써 주체성과 객관성을 아우르는 순환적인 개념이 된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주체는 객관적인 수준으로 포섭될 수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파악된 인간, 대상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은 그저 인간 동물일 뿐이고, 주체는 이 인간 동물에 '무엇'인가가 추가된(supplemente) 것이다. 그 '무엇'은 진리에 다름 아니고, 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 동물은 주체가 된다. 주체는 결코 선험적으로 설정될 수 없고, 인간이 사건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진리를 만나지 못한다면, 주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바디우의 철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우리는 앞서 바디우에게 진리는 기존의 지식망을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존의 지식 체계는 객관성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할 때, 진리는 객관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객관적인 것은 지식 체계일 뿐이다. 물론 진리는 오직 한 순간 빛을 발하고 지식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진리의 사건은 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롭게 열리는 진리의 지평

지금까지 살펴본 바디우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그가 진리의 문제에 천착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알고있던 진리와는 사뭇 그 모습이 다르다. 그것은 다수의 진리로서 전혀 다른 진리의 지평을 인정하는, 결코 폭압적이지 않은 열려있는 진리이다. 진리의 공가능성(compossibilite)은 전제적인 일자(一者, l'Un)의 모습을 부정하고 진리의 다수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바디우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복수의 진리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사고하게 하며, 잃어버렸던 주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게 한다. 바디우와 더불어 합리적 사유는 마침내 가능해지고, 그것이 포함하는 혁명적 사유는 마침내 펼쳐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 젖히는, 진리의 옹호자인 셈이다. 바디우와 더불어 서로를 인정하는 다수의 진리라는 관념이 수립되고, 진리라는 관념이 편협한 사고로 우리를 인도할 가능성은 제거된다. 마침내 열려진 지평 위에서 진리를 사고하는 일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서용순/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주1) 유적(類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generique라는 말은 논리학적으로 비결정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개별 원소가 '유적'일 때 우리는 그 원소가 어떠한 구분에 속하는 것인가만을 알 뿐 동일한 구분에 속해있는 다른 개별 원소와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개별 원소는 항상 개별적이면서 일반적인 가치를 갖는다. 진리의 서로 다른 절차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동일한 구분에 속해 있지만 서로의 관계는 규정지어지지 않는다. 그 절차들은 각각의 진리를 생산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적이다.

06. 10. 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진행중)

필요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자료들을 좀 읽게 되었다고 했는데, 인터넷상에 떠있는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이란 글도 마찬가지이다(바람구두님의 서재에도 옮겨져 있다). 출처는 <녹색평론>(1995년 5-6월호)라고 하니까 10년도 더 전의 글이다. 역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여기 소개하는 것은 '영화에 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영화론의 영어판 <시간속의 조각(Sculpting in Time)>(1989년 개정판)의 결론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같은책의 독어판(1985년)으로부터 김창우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 <봉인된 시간>이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된 바 있다"란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봉인된 시간>(1991)의 맺음말(273-284쪽)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데, 굳이 옮겨놓는 것은 각각 독역본과 영역본에서 중역한 것이라는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문체상의 차이 이상의 여러 불일치점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역본에서 옮긴 글조차도 일부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타르코프스키의 진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교정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이래저래 밀린 일들이 많아서 교정은 다소 시일이 걸릴 예정이다).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은 텍사스대학출판부에서 나온 2003년판이다. 참고로 영역본은 독어본에서 옮겨진 것인데, 1986년에 처음 출간됐고 교정본이 이듬해 출간됐다(1987년판과 2003년판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걸로 안다).

덧붙여서 내가 참고하는 책은 올가 수르코바의 <타르코프스키와 나>(엑스모, 2002) 등이다. 수르코바는 <봉인된 시간>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영화평론가인데,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서문의 말미에서 이렇게 언급해놓고 있다: "보충해서 언급할 것은 이 책이 나 자신의 일기책과 같은 양식, 강연, 영화평론가 올가 수르코바와의 대담을 기초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수르코바는 이미 <안드레이 루블료프> 촬영 당시에 학생 신분으로 참관했으며, 그녀가 추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면서도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바 있다.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내게 많은 도움을 준 그녀에게 감사드린다."(16쪽) 타르코프스키와 가장 가깝게 교우했던 바로 그 수르코바이며, 그녀는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타르코프스키에 대하여>(라두가출판사, 2005)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Тарковский и я. Дневник пионеркиС Тарковским и о Тарковском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

오늘날 예술일반이나 또는 특별히 영화의 기능에 관해 얘기하는 것보다는 삶 자체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삶의 의미에 대하여 의식이 없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언어속에서 아무런 조리있는 발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부딪치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간단한 성찰로써 이 책을 마무리지으려고 결정하였다. 그 문제들은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 우리의 생존에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비단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과제를 규정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문명이 처한 일반적인 상태와 역사속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의 개인적인 책임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시대는 한 전체적인 역사적 순환의 마지막 정점인 듯이 보인다. 사회를 좀더〈정의롭고〉 합리적으로 조직하겠다는 의도를 가진〈대심문관〉, 지도자,〈뛰어난 인물〉들이 그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왔다. 그들은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아, 새로운 이념적 사회적 사상을 주입하고, 대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삶의 구조를 개편할 것을 요구하였다. 도스토에프스키는 타인들의 행복을 위해 책임을 떠맡고자 하는〈대심문관들〉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이미 경고를 한 바 있다. 인류의 이익과 보편적 복지를 들먹이며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내세우는 결과가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무참하게 침해하는지, 그리고〈역사적 필연〉에 뿌리를 둔 그〈객관적〉〈과학적〉 힘으로써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민중의 삶의 기본현실을 왜곡하는지, 우리 자신이 보아왔던 것이다.

문명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역사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구원과 인간의 개선을 위하여 이데올로그와 정치가들의 마음속에서 구상되어, 민중에게 제시된〈올바른〉 길 ― 매번 좀더 나은 ― 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재편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그때마다〈소수〉는 자기들 자신의 사고방식을 취소하고, 제안된 행동지침에 자신들의 행동을 맞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래와 인류를 구원할〈진보〉를 위한 역동적인 활동에 그렇게 참여하면서, 개인은 자신의 본질과 개성과 독특성을 망각해버렸다. 일반적인 것 속에 갇혀버린 채 그는 자기자신의 정신적 본질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갈수록 화해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이익에 골몰하여, 그 어느 누구도〈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참뜻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우선 자기자신을 사랑하여 자기자신속에 있는 초개인적이며 신적(神的)인 원리를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이 원리를 따를진대 나는 탐욕과 이기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고 오히려 아무런 계산이나 군말없이 나 자신을 바치고, 남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한 감각이 있어야 된다. 지구위에서의 내 삶의 중심에 있는〈나〉 ― 자기본위의 욕망이 있을 수 없는 완성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영적으로 성장을 하는 ― 의 객관적 가치와 의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자기자신에 대한 충실성은 끊임없는 일편단심의 노력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의 좁고 기회주의적인 동기에서 조금이라도 초월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진실하게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비상히 힘들다. 그러나〈인간 영혼의 낚시꾼〉들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은 대단히 쉽다. 이른바 좀 더 높고 일반적인 목표를 추구한답시고 자기자신의 유일무이한 소명을 포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자기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적 관계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느끼지 않으면서 타인과 인류 전체의 책임을 묻기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어왔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겸손과 자기희생과 사회건설에 있어서의 역할 수용을 기대하면서도 그들 자신은 그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며 세상사에 대한 아무런 개인적 책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비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더 고결한 목표때문에 자신들의 편협하게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수많은 구실이 발견될 수 있다. 냉정하게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과 영혼에 대한 책임은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함께〉라는 전제위에서, 다른 말로 하면 인류는 어떤 종류의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 있다는 전제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인적인 부담을 회피하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모든 책임을 타인들에게 전가한다. 그 결과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은 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되고, 개인과 인류간의 소외의 벽은 갈수록 높아진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특정인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의〈합치된〉 노력으로 이루어진 사회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은 이념과 야심의 도구로 되든지 아니면 그 자신이 타인의 보스가 되어 개개인들의 권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타인들의 에너지를 이용한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사라져버리고, 잘못 정의(定義)된〈공공선〉― 그 때문이라면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 을 위해 희생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우리 자신의 문제의 해결을 우리가 타인들에게 맡겨버린 순간부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균열은 확대되어왔다. 우리는 타인들이 발전시켜온 사상의 지배를 받는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의 잣대에 순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로부터 소외되어 대립되든지 해야 한다 ― 갈수록 가망없는 처지인 것이다. 기괴하고 음울한 상황이다.

나는 이 갈등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참된 균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일반적인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 사이의 비극적 충돌을 표시하는가? 사회의 장래를 위한 한 인간의 책임감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내적 확신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가 사회발전에 있어서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주입시키면서 남들의 삶을 지도하고, 이용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다면, 그때 개인과 사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쓰디쓴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란 우리가 남들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을 평가할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 선악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양심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의식을 통해 발전되어온 개념들이 모두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양심은 역사적 발전과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의 능력이자 개념으로서 양심은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잘못 구상된 문명에서 나온 사회의 토대 자체를 흔든다. 양심은 이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다. 양심의 표현은 종종 인류라는 종(種)의 이익 ― 또는 심지어 종의 생존 ― 과 어긋난다. 생물학적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양심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어떤 까닭에서인지 양심은 엄연히 존재하며, 인간의 생존과 발전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따라다녔다.

인간의 물질적 확장과 정신적 진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의 물질적 성과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데 우리가 치명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 분명한 시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인류절멸의 위협을 가하는 문명을 만들어내었다.

전지구적 규모의 재난에 직면하여 한가지 제기되어야 할 문제는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느냐, 그리고 기꺼이 희생을 할 용의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책임과 희생에 대한 용의가 없다면 인간은 참다운 의미에서 정신적, 영적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희생의 정신은 외부적으로 강요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있는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 인간생존의 유일하게 적법(適法)한 형태로서 자연스럽게 갖추어진 ― 남들에 대한 자발적인 봉사속에 표현되어 있는 희생정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인간의 관계는 너무나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탐욕스럽게 지키려는 만큼 옆 사람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빼앗아 오려는 충동에 지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의 역설은 우리가 동료 인간들에게 모욕을 주면 줄수록 우리의 만족감은 약화되고 우리의 고립감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진해서 인간적 성취의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온마음과 의지로써 받아들인 우리의 죄값이다.

지금 우리는 정신적인 것은 쇠퇴하고 있는 반면에 물질적인 것이 이미 오래전에 그 나름의 혈관을 가진 유기체로 발전하여, 동맥경화로 마비된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었음을 보고 있다. 물질적 진보 그 자체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치광이처럼 물질적〈성과〉를 올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안내인〉이 말하는 것처럼 현재가 미래와 뒤섞여버린 지경에까지 우리는 도달하였다. 즉, 임박한 재난의 모든 전제조건들이 지금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인간의 행동과 운명 사이의 연관은 파괴되어버렸다. 이러한 비극적인 균열로 말미암아 인간은 현대세계속에서 안정감을 상실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한 인간이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신에게 달려있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체험은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에 오래 젖어온 탓에 그는 자기자신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스스로 아무런 역할도 할 것이 없다는 그릇된, 치명적인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개인과 사회를 맺어주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버린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보다 다시 자신의 영혼을 믿고, 영혼이 겪는 고통을 느껴야 하며, 자신의 행동을 양심에 결합시켜야 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한 양심이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영혼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일에 대한 결정적 책임은 ― 우리 자신이 아니라 ―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라고 하는 안이한 공식을 통한 자기정당화는 사전에 배제될 것이다. 나는 세계에 조화를 회복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오직 개인적 책임감의 재생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란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현존하는 여러 대안 중에서 가장 나쁜 대안을 선택한다고 어디에선가 말하고 있다. 우리의 물질적 생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너무나 맞는 진실이다. 그들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역사가 이상주의의 마지막 남은 몇방울마저 다 짜버리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역사적 과정에서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된 때였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관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원인을 분석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여, 인간은 자신의 영성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역사가 하나의 영혼없는 소외된 기계로 전환되자마자, 인간 생활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봉사하는 나사가 되기를 강요받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동물로서 간주되어왔다. (문제는 사회적 쓸모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활동의 사회적 쓸모를 강조하는 나머지 그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데까지 갈 때,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 비극의 전제조건을 만들어낸다.

자유의 문제는 체험과 교육의 문제를 제기한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현대인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권리가 개인에게 허용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뜻의 개인적 해방은 망상이다. 만일 인간이 그러한 자유를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오직 환멸뿐일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무척이나 길고 힘든 노력이 개개인에게 필요하다. 교육은 자기기율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새롭게 획득된 자유를 오직 속된 소비주의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능력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의 상황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오늘날 서구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민주적 자유가 만끽되고 있는 한편에 그〈자유로운〉 시민들은 기괴스럽고 명백한 정신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개인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여기서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이처럼 심각하게 존재하는가?

내 생각에 서구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유란 결코 ― 단 한푼도 비용이 들지 않는 샘물처럼, 아무런 도덕적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자유를 자신의 삶의 향상을 위해 쓸 수 없다. 자유는 인간의 삶속에 단 한번으로 통합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노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와의 관련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만일 그가 자유의 행사에 필요한 용기와 결심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내면적〉 경험이〈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진실로 자유로운 인간의 자유는 이기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일 수 없다. 개인적 자유도 단순한 집단적 노력의 결과일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의 비용을 ―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남들의 노역과 남들의 고통으로써 지불하는 데 익숙해졌다. 우리는〈이 세계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고려하기를 거부한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유의지와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우연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자유의지를 천명할 기회는 남들의 의지 때문에 제약받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원인은 언제나 내적인 비겁성과 수동성이라는 것, 그리하여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단호하게 천명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에서 사람들은〈인간이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은 새가 비상(飛翔)을 위해 태어난 것과 같다〉라는 코롤렌코(Vladmir Korolenko, 1853 - 1921,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중단편 소설들을 쓴 작가 ― 역자)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내게는 이 말처럼 인간생존의 기초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로서는〈행복〉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만족을 의미하는가? 조화를? 그러나 사람에게는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궁극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특정한 목표물이 아니라 무한 그 자체에 닿아있기 때문이다.〈교회〉도〈절대〉를 향한 인간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조직하는 사회기구들을 모방하거나 심지어 희화화하는 일종의 부속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쪽으로 너무나 무겁게 기울어져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지금까지〈교회〉가 정신적 깨달음에 대한 호소를 통하여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전혀 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가능성의 절대적 자유를 표현하도록 요청받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내 생각에 예술은 언제나 인간정신을 삼켜버리려고 위협하는 물질적인 것들에 맞서는 인간의 무기였다. 거의 2천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예술이 오랫동안 종교적 이념과 목표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의 존재 자체로 말미암아 불협화(不協和)의 인간속에 조화의 이념이 살아남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이상을 육화(肉化)한다. 그것은 도덕적 원리와 물질적 요소 사이에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진 예를 보여준다. 그러한 균형이 이념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실제 현실의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술은 조화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표현하고, 인간이 자신이 갈망하는 균형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자신과 기꺼이 투쟁할 용의가 되어있는 자세를 표현하였다.

예술이 이상적인 것을 표현하고, 인간의 무한성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고 할 때, 소비주의적 목적을 위하여 예술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예술의 본성을 크게 침해하는 것이다. 이상(理想)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관계하지만, 우리의 정신의 세계에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예술작품은 이러한 이상에 주어진 형식이다. 그 이상은 미래에는 마땅히 인류전체에 속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수 ―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에 육화된 이상의 인간적 의미를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간파할 수 있었던 천재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본래 귀족적이다. 예술은 잠재능력의 수준을 구별해주며, 그렇게함으로써 정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개개인에게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으로의 진보를 보증해주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귀족적〉이라는 단어를 쓸 때 거기에는 아무런 계급적 함축이 들어있지 않다. 실은 그 반대이다. 영혼이 도덕적 정당화와 생존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그 추구 과정에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한, 모든 사람은 동등한 처지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두 정신적 엘리트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본질적인 차이는 이러한 가능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예술형식속에 육화된 이상의 빛속에서 자기자신과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도록 초대한다.

행복에 대한 권리로서 인간생존의 의미를 보는 코롤렌코의 해석은 내게〈욥기〉를 상기시켜준다. 거기에서는 정반대의 견해가 표명되어 있다.〈인간이 재난속으로 태어난 것은 불꽃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다른 말로 하여, 고통은 우리의 생존에 고유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만으로부터, 그때그때 우리가 처한 지점과 이상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행복〉에 대한 감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 선악의 균형된 관계가 유지되고, 악의 창궐이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 참된 의미에 있어서 신성한 자유를 위한 투쟁속에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는 일이다.

예술은 희망, 믿음, 사랑, 아름다움, 기도 등 ― 인간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 모두를 긍정한다. 인간이 꿈꾸는 것, 인간이 품고있는 희망.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그의 몸은 살아나기 위한 동작을 시작한다. 예술가도 일종의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예술은 정신적 의미에서 인류를 익사시키지 않으려는 본능으로서 존재한다. 예술작품은 영원하고, 초월적이며, 신성한 것을 향한 인간의 탐구를 ― 흔히 예술가 자신의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 가능하게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것인가 악마의 것인가? 인간의 강점으로부터 오는가 약점으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사회적 조화의 이미지인가? 그러한 것이 예술의 기능인가? 우리가 서로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식의 확인으로서의 사랑의 고백. 참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무의식적 행동 ― 사랑과 희생. 그러한 것이 예술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되돌아 볼 때 인간역사의 도정은 파국과 재앙으로 점철되어왔다. 어째서 이런가? 이들 문명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째서 그들은 숨이 차고, 사랑의 의지를 상실하고, 도덕적 힘을 잃어버렸는가? 이 모든 것이 단지 물질적 결핍 때문에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다. 그러한 발상은 내게 기괴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이제 우리는 역사 과정의 영성적 측면을 고려하는 데 실패한 결과로 또하나의 문명을 바야흐로 파괴하려 하고 있다. 지금 우리를 짓누르는 많은 불운한 일이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게 범죄적으로, 가망없이 물질 본위로 된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과학의 주인공들로 행세하면서, 과학적 객관성을 좀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하기 위하여 우리는 나눌 수 없는 본래 하나인 인간과정을 쪼개고, 그렇게함으로써 거기서 만물의 제1원인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어, 그것을 과거의 잘못을 설명하는 데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청사진으로 이용한다. 아마도 문명들의 붕괴가 뜻하는 것은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역사〉가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지 모른다. 역사가 더이상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지 않고, 그래서 다음번에는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그동안 이루어져온 모든 잘못된 시도를 역사 자신의 족보에서 지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역사는 기다리는지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고, 역사가 무엇을 해왔는지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널리 퍼져있는 견해에는 일리가 있다.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파국적 재난은 분명히 문제의 문명이 잘못 구상되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정신적 영적 완성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예술은 완성된 과정, 완결의 이미지이다. 예술은 역사의 기나긴 ― 아마도 끝없는 ― 길을 뛰어넘어 획득된 절대적 진실(오직 이미지만이지만)의 소유를 모방하는 일이다.

우리는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모든 것을 자기자신과 함께 어떤 총체적인 세계관 ― 예컨대〈베다〉와 같은 ― 에 넘겨주고 싶은 순간이 있다. 동양은 서양보다 진리에 더 접근해 있었다. 그러나 물질본위의 서구문명이 동양을 삼켜버렸다.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을 비교해보라. 서양은 끊임없이 소리친다.〈나야! 나를 보라구! 내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사랑하는지 들어보라구! 얼마나 난 불행한가! 얼마나 행복한가! 내것이야! 나라구!〉 동양의 전통에서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사람은 신과 자연과 시간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있다. 모든 것 속에 자신이 있으며, 자기자신 속에 모든 것이 있다. 도가(道家)의 음악을 생각해보라. 그리스도 이전 600년전의 중국.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최고의 사상이 승리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그것은 몰락해버렸는가? 어째서 그러한 토대위에서 성장한 문명이 역사 과정에서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했는가?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물질주의 세계와 충돌했는가? 개인이 사회와 충돌하는 것처럼 그 문명도 다른 문명과 충돌하였다. 그런 이유로만 그 문명이 붕괴한 것은 아니다. 또다른 이유는 그것이 충돌한 것이〈진보〉와 기술로 이루어진 물질주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 문명은 진정한 지식의 마지막 정점, 이 지구의 소금중의 소금이었다. 동양사상의 논리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갈등은 모두 본질적으로 죄악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상상하고 창조한 대로의 세계속에 산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대신에 그 결함의 희생물이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 실은 간절하게 털어놓는 말이지만 ― 인간이 일찍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창조해온 유일한 것은 예술적 이미지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인간적 활동의 궁극적 의미는 예술적 의식 ― 일정한 목적이 없고 사심(私心)이 없는 창조적 행동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창조능력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일 것이다.

 

커버 아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인터뷰>(미시시피대학출판부, 20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진행중)

필요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자료들을 좀 읽게 되었다고 했는데, 인터넷상에 떠있는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이란 글도 마찬가지이다(바람구두님의 서재에도 옮겨져 있다). 출처는 <녹색평론>(1995년 5-6월호)라고 하니까 10년도 더 전의 글이다. 역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여기 소개하는 것은 '영화에 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영화론의 영어판 <시간속의 조각(Sculpting in Time)>(1989년 개정판)의 결론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같은책의 독어판(1985년)으로부터 김창우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 <봉인된 시간>이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된 바 있다"란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봉인된 시간>(1991)의 맺음말(273-284쪽)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데, 굳이 옮겨놓는 것은 각각 독역본과 영역본에서 중역한 것이라는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문체상의 차이 이상의 여러 불일치점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역본에서 옮긴 글조차도 일부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타르코프스키의 진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교정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이래저래 밀린 일들이 많아서 교정은 다소 시일이 걸릴 예정이다).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은 텍사스대학출판부에서 나온 2003년판이다. 참고로 영역본은 독어본에서 옮겨진 것인데, 1986년에 처음 출간됐고 교정본이 이듬해 출간됐다(1987년판과 2003년판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걸로 안다).

덧붙여서 내가 참고하는 책은 올가 수르코바의 <타르코프스키와 나>(엑스모, 2002) 등이다. 수르코바는 <봉인된 시간>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영화평론가인데,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서문의 말미에서 이렇게 언급해놓고 있다: "보충해서 언급할 것은 이 책이 나 자신의 일기책과 같은 양식, 강연, 영화평론가 올가 수르코바와의 대담을 기초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수르코바는 이미 <안드레이 루블료프> 촬영 당시에 학생 신분으로 참관했으며, 그녀가 추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면서도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바 있다.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내게 많은 도움을 준 그녀에게 감사드린다."(16쪽) 타르코프스키와 가장 가깝게 교우했던 바로 그 수르코바이며, 그녀는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타르코프스키에 대하여>(라두가출판사, 2005)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Тарковский и я. Дневник пионеркиС Тарковским и о Тарковском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

오늘날 예술일반이나 또는 특별히 영화의 기능에 관해 얘기하는 것보다는 삶 자체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삶의 의미에 대하여 의식이 없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언어속에서 아무런 조리있는 발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부딪치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간단한 성찰로써 이 책을 마무리지으려고 결정하였다. 그 문제들은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 우리의 생존에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비단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과제를 규정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문명이 처한 일반적인 상태와 역사속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의 개인적인 책임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시대는 한 전체적인 역사적 순환의 마지막 정점인 듯이 보인다. 사회를 좀더〈정의롭고〉 합리적으로 조직하겠다는 의도를 가진〈대심문관〉, 지도자,〈뛰어난 인물〉들이 그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왔다. 그들은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아, 새로운 이념적 사회적 사상을 주입하고, 대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삶의 구조를 개편할 것을 요구하였다. 도스토에프스키는 타인들의 행복을 위해 책임을 떠맡고자 하는〈대심문관들〉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이미 경고를 한 바 있다. 인류의 이익과 보편적 복지를 들먹이며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내세우는 결과가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무참하게 침해하는지, 그리고〈역사적 필연〉에 뿌리를 둔 그〈객관적〉〈과학적〉 힘으로써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민중의 삶의 기본현실을 왜곡하는지, 우리 자신이 보아왔던 것이다.

문명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역사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구원과 인간의 개선을 위하여 이데올로그와 정치가들의 마음속에서 구상되어, 민중에게 제시된〈올바른〉 길 ― 매번 좀더 나은 ― 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재편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그때마다〈소수〉는 자기들 자신의 사고방식을 취소하고, 제안된 행동지침에 자신들의 행동을 맞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래와 인류를 구원할〈진보〉를 위한 역동적인 활동에 그렇게 참여하면서, 개인은 자신의 본질과 개성과 독특성을 망각해버렸다. 일반적인 것 속에 갇혀버린 채 그는 자기자신의 정신적 본질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갈수록 화해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이익에 골몰하여, 그 어느 누구도〈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참뜻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우선 자기자신을 사랑하여 자기자신속에 있는 초개인적이며 신적(神的)인 원리를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이 원리를 따를진대 나는 탐욕과 이기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고 오히려 아무런 계산이나 군말없이 나 자신을 바치고, 남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한 감각이 있어야 된다. 지구위에서의 내 삶의 중심에 있는〈나〉 ― 자기본위의 욕망이 있을 수 없는 완성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영적으로 성장을 하는 ― 의 객관적 가치와 의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자기자신에 대한 충실성은 끊임없는 일편단심의 노력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의 좁고 기회주의적인 동기에서 조금이라도 초월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진실하게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비상히 힘들다. 그러나〈인간 영혼의 낚시꾼〉들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은 대단히 쉽다. 이른바 좀 더 높고 일반적인 목표를 추구한답시고 자기자신의 유일무이한 소명을 포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자기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적 관계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느끼지 않으면서 타인과 인류 전체의 책임을 묻기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어왔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겸손과 자기희생과 사회건설에 있어서의 역할 수용을 기대하면서도 그들 자신은 그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며 세상사에 대한 아무런 개인적 책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비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더 고결한 목표때문에 자신들의 편협하게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수많은 구실이 발견될 수 있다. 냉정하게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과 영혼에 대한 책임은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함께〉라는 전제위에서, 다른 말로 하면 인류는 어떤 종류의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 있다는 전제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인적인 부담을 회피하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모든 책임을 타인들에게 전가한다. 그 결과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은 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되고, 개인과 인류간의 소외의 벽은 갈수록 높아진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특정인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의〈합치된〉 노력으로 이루어진 사회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은 이념과 야심의 도구로 되든지 아니면 그 자신이 타인의 보스가 되어 개개인들의 권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타인들의 에너지를 이용한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사라져버리고, 잘못 정의(定義)된〈공공선〉― 그 때문이라면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 을 위해 희생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우리 자신의 문제의 해결을 우리가 타인들에게 맡겨버린 순간부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균열은 확대되어왔다. 우리는 타인들이 발전시켜온 사상의 지배를 받는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의 잣대에 순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로부터 소외되어 대립되든지 해야 한다 ― 갈수록 가망없는 처지인 것이다. 기괴하고 음울한 상황이다.

나는 이 갈등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참된 균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일반적인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 사이의 비극적 충돌을 표시하는가? 사회의 장래를 위한 한 인간의 책임감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내적 확신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가 사회발전에 있어서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주입시키면서 남들의 삶을 지도하고, 이용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다면, 그때 개인과 사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쓰디쓴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란 우리가 남들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을 평가할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 선악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양심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의식을 통해 발전되어온 개념들이 모두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양심은 역사적 발전과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의 능력이자 개념으로서 양심은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잘못 구상된 문명에서 나온 사회의 토대 자체를 흔든다. 양심은 이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다. 양심의 표현은 종종 인류라는 종(種)의 이익 ― 또는 심지어 종의 생존 ― 과 어긋난다. 생물학적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양심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어떤 까닭에서인지 양심은 엄연히 존재하며, 인간의 생존과 발전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따라다녔다.

인간의 물질적 확장과 정신적 진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의 물질적 성과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데 우리가 치명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 분명한 시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인류절멸의 위협을 가하는 문명을 만들어내었다.

전지구적 규모의 재난에 직면하여 한가지 제기되어야 할 문제는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느냐, 그리고 기꺼이 희생을 할 용의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책임과 희생에 대한 용의가 없다면 인간은 참다운 의미에서 정신적, 영적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희생의 정신은 외부적으로 강요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있는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 인간생존의 유일하게 적법(適法)한 형태로서 자연스럽게 갖추어진 ― 남들에 대한 자발적인 봉사속에 표현되어 있는 희생정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인간의 관계는 너무나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탐욕스럽게 지키려는 만큼 옆 사람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빼앗아 오려는 충동에 지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의 역설은 우리가 동료 인간들에게 모욕을 주면 줄수록 우리의 만족감은 약화되고 우리의 고립감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진해서 인간적 성취의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온마음과 의지로써 받아들인 우리의 죄값이다.

지금 우리는 정신적인 것은 쇠퇴하고 있는 반면에 물질적인 것이 이미 오래전에 그 나름의 혈관을 가진 유기체로 발전하여, 동맥경화로 마비된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었음을 보고 있다. 물질적 진보 그 자체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치광이처럼 물질적〈성과〉를 올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안내인〉이 말하는 것처럼 현재가 미래와 뒤섞여버린 지경에까지 우리는 도달하였다. 즉, 임박한 재난의 모든 전제조건들이 지금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인간의 행동과 운명 사이의 연관은 파괴되어버렸다. 이러한 비극적인 균열로 말미암아 인간은 현대세계속에서 안정감을 상실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한 인간이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신에게 달려있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체험은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에 오래 젖어온 탓에 그는 자기자신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스스로 아무런 역할도 할 것이 없다는 그릇된, 치명적인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개인과 사회를 맺어주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버린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보다 다시 자신의 영혼을 믿고, 영혼이 겪는 고통을 느껴야 하며, 자신의 행동을 양심에 결합시켜야 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한 양심이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영혼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일에 대한 결정적 책임은 ― 우리 자신이 아니라 ―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라고 하는 안이한 공식을 통한 자기정당화는 사전에 배제될 것이다. 나는 세계에 조화를 회복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오직 개인적 책임감의 재생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란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현존하는 여러 대안 중에서 가장 나쁜 대안을 선택한다고 어디에선가 말하고 있다. 우리의 물질적 생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너무나 맞는 진실이다. 그들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역사가 이상주의의 마지막 남은 몇방울마저 다 짜버리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역사적 과정에서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된 때였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관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원인을 분석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여, 인간은 자신의 영성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역사가 하나의 영혼없는 소외된 기계로 전환되자마자, 인간 생활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봉사하는 나사가 되기를 강요받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동물로서 간주되어왔다. (문제는 사회적 쓸모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활동의 사회적 쓸모를 강조하는 나머지 그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데까지 갈 때,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 비극의 전제조건을 만들어낸다.

자유의 문제는 체험과 교육의 문제를 제기한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현대인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권리가 개인에게 허용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뜻의 개인적 해방은 망상이다. 만일 인간이 그러한 자유를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오직 환멸뿐일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무척이나 길고 힘든 노력이 개개인에게 필요하다. 교육은 자기기율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새롭게 획득된 자유를 오직 속된 소비주의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능력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의 상황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오늘날 서구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민주적 자유가 만끽되고 있는 한편에 그〈자유로운〉 시민들은 기괴스럽고 명백한 정신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개인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여기서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이처럼 심각하게 존재하는가?

내 생각에 서구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유란 결코 ― 단 한푼도 비용이 들지 않는 샘물처럼, 아무런 도덕적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자유를 자신의 삶의 향상을 위해 쓸 수 없다. 자유는 인간의 삶속에 단 한번으로 통합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노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와의 관련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만일 그가 자유의 행사에 필요한 용기와 결심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내면적〉 경험이〈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진실로 자유로운 인간의 자유는 이기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일 수 없다. 개인적 자유도 단순한 집단적 노력의 결과일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의 비용을 ―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남들의 노역과 남들의 고통으로써 지불하는 데 익숙해졌다. 우리는〈이 세계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고려하기를 거부한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유의지와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우연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자유의지를 천명할 기회는 남들의 의지 때문에 제약받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원인은 언제나 내적인 비겁성과 수동성이라는 것, 그리하여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단호하게 천명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에서 사람들은〈인간이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은 새가 비상(飛翔)을 위해 태어난 것과 같다〉라는 코롤렌코(Vladmir Korolenko, 1853 - 1921,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중단편 소설들을 쓴 작가 ― 역자)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내게는 이 말처럼 인간생존의 기초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로서는〈행복〉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만족을 의미하는가? 조화를? 그러나 사람에게는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궁극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특정한 목표물이 아니라 무한 그 자체에 닿아있기 때문이다.〈교회〉도〈절대〉를 향한 인간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조직하는 사회기구들을 모방하거나 심지어 희화화하는 일종의 부속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쪽으로 너무나 무겁게 기울어져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지금까지〈교회〉가 정신적 깨달음에 대한 호소를 통하여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전혀 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가능성의 절대적 자유를 표현하도록 요청받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내 생각에 예술은 언제나 인간정신을 삼켜버리려고 위협하는 물질적인 것들에 맞서는 인간의 무기였다. 거의 2천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예술이 오랫동안 종교적 이념과 목표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의 존재 자체로 말미암아 불협화(不協和)의 인간속에 조화의 이념이 살아남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이상을 육화(肉化)한다. 그것은 도덕적 원리와 물질적 요소 사이에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진 예를 보여준다. 그러한 균형이 이념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실제 현실의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술은 조화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표현하고, 인간이 자신이 갈망하는 균형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자신과 기꺼이 투쟁할 용의가 되어있는 자세를 표현하였다.

예술이 이상적인 것을 표현하고, 인간의 무한성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고 할 때, 소비주의적 목적을 위하여 예술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예술의 본성을 크게 침해하는 것이다. 이상(理想)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관계하지만, 우리의 정신의 세계에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예술작품은 이러한 이상에 주어진 형식이다. 그 이상은 미래에는 마땅히 인류전체에 속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수 ―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에 육화된 이상의 인간적 의미를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간파할 수 있었던 천재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본래 귀족적이다. 예술은 잠재능력의 수준을 구별해주며, 그렇게함으로써 정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개개인에게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으로의 진보를 보증해주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귀족적〉이라는 단어를 쓸 때 거기에는 아무런 계급적 함축이 들어있지 않다. 실은 그 반대이다. 영혼이 도덕적 정당화와 생존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그 추구 과정에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한, 모든 사람은 동등한 처지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두 정신적 엘리트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본질적인 차이는 이러한 가능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예술형식속에 육화된 이상의 빛속에서 자기자신과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도록 초대한다.

행복에 대한 권리로서 인간생존의 의미를 보는 코롤렌코의 해석은 내게〈욥기〉를 상기시켜준다. 거기에서는 정반대의 견해가 표명되어 있다.〈인간이 재난속으로 태어난 것은 불꽃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다른 말로 하여, 고통은 우리의 생존에 고유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만으로부터, 그때그때 우리가 처한 지점과 이상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행복〉에 대한 감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 선악의 균형된 관계가 유지되고, 악의 창궐이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 참된 의미에 있어서 신성한 자유를 위한 투쟁속에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는 일이다.

예술은 희망, 믿음, 사랑, 아름다움, 기도 등 ― 인간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 모두를 긍정한다. 인간이 꿈꾸는 것, 인간이 품고있는 희망.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그의 몸은 살아나기 위한 동작을 시작한다. 예술가도 일종의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예술은 정신적 의미에서 인류를 익사시키지 않으려는 본능으로서 존재한다. 예술작품은 영원하고, 초월적이며, 신성한 것을 향한 인간의 탐구를 ― 흔히 예술가 자신의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 가능하게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것인가 악마의 것인가? 인간의 강점으로부터 오는가 약점으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사회적 조화의 이미지인가? 그러한 것이 예술의 기능인가? 우리가 서로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식의 확인으로서의 사랑의 고백. 참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무의식적 행동 ― 사랑과 희생. 그러한 것이 예술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되돌아 볼 때 인간역사의 도정은 파국과 재앙으로 점철되어왔다. 어째서 이런가? 이들 문명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째서 그들은 숨이 차고, 사랑의 의지를 상실하고, 도덕적 힘을 잃어버렸는가? 이 모든 것이 단지 물질적 결핍 때문에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다. 그러한 발상은 내게 기괴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이제 우리는 역사 과정의 영성적 측면을 고려하는 데 실패한 결과로 또하나의 문명을 바야흐로 파괴하려 하고 있다. 지금 우리를 짓누르는 많은 불운한 일이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게 범죄적으로, 가망없이 물질 본위로 된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과학의 주인공들로 행세하면서, 과학적 객관성을 좀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하기 위하여 우리는 나눌 수 없는 본래 하나인 인간과정을 쪼개고, 그렇게함으로써 거기서 만물의 제1원인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어, 그것을 과거의 잘못을 설명하는 데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청사진으로 이용한다. 아마도 문명들의 붕괴가 뜻하는 것은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역사〉가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지 모른다. 역사가 더이상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지 않고, 그래서 다음번에는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그동안 이루어져온 모든 잘못된 시도를 역사 자신의 족보에서 지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역사는 기다리는지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고, 역사가 무엇을 해왔는지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널리 퍼져있는 견해에는 일리가 있다.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파국적 재난은 분명히 문제의 문명이 잘못 구상되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정신적 영적 완성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예술은 완성된 과정, 완결의 이미지이다. 예술은 역사의 기나긴 ― 아마도 끝없는 ― 길을 뛰어넘어 획득된 절대적 진실(오직 이미지만이지만)의 소유를 모방하는 일이다.

우리는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모든 것을 자기자신과 함께 어떤 총체적인 세계관 ― 예컨대〈베다〉와 같은 ― 에 넘겨주고 싶은 순간이 있다. 동양은 서양보다 진리에 더 접근해 있었다. 그러나 물질본위의 서구문명이 동양을 삼켜버렸다.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을 비교해보라. 서양은 끊임없이 소리친다.〈나야! 나를 보라구! 내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사랑하는지 들어보라구! 얼마나 난 불행한가! 얼마나 행복한가! 내것이야! 나라구!〉 동양의 전통에서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사람은 신과 자연과 시간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있다. 모든 것 속에 자신이 있으며, 자기자신 속에 모든 것이 있다. 도가(道家)의 음악을 생각해보라. 그리스도 이전 600년전의 중국.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최고의 사상이 승리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그것은 몰락해버렸는가? 어째서 그러한 토대위에서 성장한 문명이 역사 과정에서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했는가?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물질주의 세계와 충돌했는가? 개인이 사회와 충돌하는 것처럼 그 문명도 다른 문명과 충돌하였다. 그런 이유로만 그 문명이 붕괴한 것은 아니다. 또다른 이유는 그것이 충돌한 것이〈진보〉와 기술로 이루어진 물질주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 문명은 진정한 지식의 마지막 정점, 이 지구의 소금중의 소금이었다. 동양사상의 논리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갈등은 모두 본질적으로 죄악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상상하고 창조한 대로의 세계속에 산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대신에 그 결함의 희생물이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 실은 간절하게 털어놓는 말이지만 ― 인간이 일찍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창조해온 유일한 것은 예술적 이미지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인간적 활동의 궁극적 의미는 예술적 의식 ― 일정한 목적이 없고 사심(私心)이 없는 창조적 행동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창조능력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일 것이다.

 

커버 아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인터뷰>(미시시피대학출판부, 20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진행중)

필요 때문에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자료들을 좀 읽게 되었다고 했는데, 인터넷상에 떠있는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이란 글도 마찬가지이다(바람구두님의 서재에도 옮겨져 있다). 출처는 <녹색평론>(1995년 5-6월호)라고 하니까 10년도 더 전의 글이다. 역자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여기 소개하는 것은 '영화에 관한 성찰'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영화론의 영어판 <시간속의 조각(Sculpting in Time)>(1989년 개정판)의 결론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같은책의 독어판(1985년)으로부터 김창우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 <봉인된 시간>이 분도출판사에서 출판된 바 있다"란 설명이 붙어 있다. 그러니까 <봉인된 시간>(1991)의 맺음말(273-284쪽)이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한데, 굳이 옮겨놓는 것은 각각 독역본과 영역본에서 중역한 것이라는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문체상의 차이 이상의 여러 불일치점들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역본에서 옮긴 글조차도 일부 오역을 포함하고 있어서 타르코프스키의 진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교정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이래저래 밀린 일들이 많아서 교정은 다소 시일이 걸릴 예정이다). 내가 갖고 있는 영역본은 텍사스대학출판부에서 나온 2003년판이다. 참고로 영역본은 독어본에서 옮겨진 것인데, 1986년에 처음 출간됐고 교정본이 이듬해 출간됐다(1987년판과 2003년판 사이에는 차이가 없는 걸로 안다).

덧붙여서 내가 참고하는 책은 올가 수르코바의 <타르코프스키와 나>(엑스모, 2002) 등이다. 수르코바는 <봉인된 시간>의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영화평론가인데,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서문의 말미에서 이렇게 언급해놓고 있다: "보충해서 언급할 것은 이 책이 나 자신의 일기책과 같은 양식, 강연, 영화평론가 올가 수르코바와의 대담을 기초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수르코바는 이미 <안드레이 루블료프> 촬영 당시에 학생 신분으로 참관했으며, 그녀가 추후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면서도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바 있다.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내게 많은 도움을 준 그녀에게 감사드린다."(16쪽) 타르코프스키와 가장 가깝게 교우했던 바로 그 수르코바이며, 그녀는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타르코프스키에 대하여>(라두가출판사, 2005)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Тарковский и я. Дневник пионеркиС Тарковским и о Тарковском

삶에 대한 책임과 예술

오늘날 예술일반이나 또는 특별히 영화의 기능에 관해 얘기하는 것보다는 삶 자체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삶의 의미에 대하여 의식이 없는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언어속에서 아무런 조리있는 발언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부딪치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한 간단한 성찰로써 이 책을 마무리지으려고 결정하였다. 그 문제들은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 우리의 생존에 근원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나에게는 보인다.

비단 예술가로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과제를 규정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문명이 처한 일반적인 상태와 역사속에 참여하는 모든 개인의 개인적인 책임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시대는 한 전체적인 역사적 순환의 마지막 정점인 듯이 보인다. 사회를 좀더〈정의롭고〉 합리적으로 조직하겠다는 의도를 가진〈대심문관〉, 지도자,〈뛰어난 인물〉들이 그동안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왔다. 그들은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아, 새로운 이념적 사회적 사상을 주입하고, 대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삶의 구조를 개편할 것을 요구하였다. 도스토에프스키는 타인들의 행복을 위해 책임을 떠맡고자 하는〈대심문관들〉에 관하여 우리들에게 이미 경고를 한 바 있다. 인류의 이익과 보편적 복지를 들먹이며 계급이나 집단의 이익을 내세우는 결과가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무참하게 침해하는지, 그리고〈역사적 필연〉에 뿌리를 둔 그〈객관적〉〈과학적〉 힘으로써 이러한 과정이 어떻게 민중의 삶의 기본현실을 왜곡하는지, 우리 자신이 보아왔던 것이다.

문명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역사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구원과 인간의 개선을 위하여 이데올로그와 정치가들의 마음속에서 구상되어, 민중에게 제시된〈올바른〉 길 ― 매번 좀더 나은 ― 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재편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하여 그때마다〈소수〉는 자기들 자신의 사고방식을 취소하고, 제안된 행동지침에 자신들의 행동을 맞추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래와 인류를 구원할〈진보〉를 위한 역동적인 활동에 그렇게 참여하면서, 개인은 자신의 본질과 개성과 독특성을 망각해버렸다. 일반적인 것 속에 갇혀버린 채 그는 자기자신의 정신적 본질이 갖는 의미를 과소평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갈수록 화해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이익에 골몰하여, 그 어느 누구도〈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참뜻을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우선 자기자신을 사랑하여 자기자신속에 있는 초개인적이며 신적(神的)인 원리를 존경해야 한다. 그리고 이 원리를 따를진대 나는 탐욕과 이기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고 오히려 아무런 계산이나 군말없이 나 자신을 바치고, 남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한 감각이 있어야 된다. 지구위에서의 내 삶의 중심에 있는〈나〉 ― 자기본위의 욕망이 있을 수 없는 완성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면서 영적으로 성장을 하는 ― 의 객관적 가치와 의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자기자신에 대한 충실성은 끊임없는 일편단심의 노력을 요구한다. 자기 자신의 좁고 기회주의적인 동기에서 조금이라도 초월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진실하게 정신적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비상히 힘들다. 그러나〈인간 영혼의 낚시꾼〉들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은 대단히 쉽다. 이른바 좀 더 높고 일반적인 목표를 추구한답시고 자기자신의 유일무이한 소명을 포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자기자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적 관계는 사람들이 자기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런 도덕적 의무도 느끼지 않으면서 타인과 인류 전체의 책임을 묻기만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형성되어왔다. 사람들은 타인들의 겸손과 자기희생과 사회건설에 있어서의 역할 수용을 기대하면서도 그들 자신은 그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며 세상사에 대한 아무런 개인적 책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비참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좀더 고결한 목표때문에 자신들의 편협하게 이기적인 이해관계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수많은 구실이 발견될 수 있다. 냉정하게 자기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과 영혼에 대한 책임은 바로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함께〉라는 전제위에서, 다른 말로 하면 인류는 어떤 종류의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 있다는 전제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인적인 부담을 회피하고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새 모든 책임을 타인들에게 전가한다. 그 결과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은 갈수록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되고, 개인과 인류간의 소외의 벽은 갈수록 높아진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특정인의 노력이 아니라 우리의〈합치된〉 노력으로 이루어진 사회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은 이념과 야심의 도구로 되든지 아니면 그 자신이 타인의 보스가 되어 개개인들의 권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고려도 없이 타인들의 에너지를 이용한다. 누구나 자기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사라져버리고, 잘못 정의(定義)된〈공공선〉― 그 때문이라면 아무도 책임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 을 위해 희생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우리 자신의 문제의 해결을 우리가 타인들에게 맡겨버린 순간부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균열은 확대되어왔다. 우리는 타인들이 발전시켜온 사상의 지배를 받는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의 잣대에 순응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로부터 소외되어 대립되든지 해야 한다 ― 갈수록 가망없는 처지인 것이다. 기괴하고 음울한 상황이다.

나는 이 갈등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참된 균형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일반적인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 사이의 비극적 충돌을 표시하는가? 사회의 장래를 위한 한 인간의 책임감이 자신의 역할에 대한 내적 확신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가 사회발전에 있어서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주입시키면서 남들의 삶을 지도하고, 이용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낀다면, 그때 개인과 사회 사이의 불화는 더욱 쓰디쓴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란 우리가 남들과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을 평가할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 선악 사이의 자유로운 선택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는 양심과 분리될 수 없다. 사회의식을 통해 발전되어온 개념들이 모두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양심은 역사적 발전과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의 능력이자 개념으로서 양심은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내재하는 것이며, 우리의 잘못 구상된 문명에서 나온 사회의 토대 자체를 흔든다. 양심은 이 사회의 안정을 위협한다. 양심의 표현은 종종 인류라는 종(種)의 이익 ― 또는 심지어 종의 생존 ― 과 어긋난다. 생물학적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양심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어떤 까닭에서인지 양심은 엄연히 존재하며, 인간의 생존과 발전 전체를 통하여 인간을 따라다녔다.

인간의 물질적 확장과 정신적 진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우리의 물질적 성과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데 우리가 치명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이 분명한 시점에 이르렀다. 우리는 인류절멸의 위협을 가하는 문명을 만들어내었다.

전지구적 규모의 재난에 직면하여 한가지 제기되어야 할 문제는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느냐, 그리고 기꺼이 희생을 할 용의가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한 책임과 희생에 대한 용의가 없다면 인간은 참다운 의미에서 정신적, 영적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희생의 정신은 외부적으로 강요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잠재적으로 있는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 인간생존의 유일하게 적법(適法)한 형태로서 자연스럽게 갖추어진 ― 남들에 대한 자발적인 봉사속에 표현되어 있는 희생정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개인간의 관계는 너무나 흔히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탐욕스럽게 지키려는 만큼 옆 사람으로부터 가능한 한 많이 빼앗아 오려는 충동에 지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의 역설은 우리가 동료 인간들에게 모욕을 주면 줄수록 우리의 만족감은 약화되고 우리의 고립감은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진해서 인간적 성취의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온마음과 의지로써 받아들인 우리의 죄값이다.

지금 우리는 정신적인 것은 쇠퇴하고 있는 반면에 물질적인 것이 이미 오래전에 그 나름의 혈관을 가진 유기체로 발전하여, 동맥경화로 마비된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었음을 보고 있다. 물질적 진보 그 자체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치광이처럼 물질적〈성과〉를 올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안내인〉이 말하는 것처럼 현재가 미래와 뒤섞여버린 지경에까지 우리는 도달하였다. 즉, 임박한 재난의 모든 전제조건들이 지금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인간의 행동과 운명 사이의 연관은 파괴되어버렸다. 이러한 비극적인 균열로 말미암아 인간은 현대세계속에서 안정감을 상실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한 인간이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은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신에게 달려있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체험은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생각에 오래 젖어온 탓에 그는 자기자신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스스로 아무런 역할도 할 것이 없다는 그릇된, 치명적인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개인과 사회를 맺어주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버린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을 회복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무엇보다 다시 자신의 영혼을 믿고, 영혼이 겪는 고통을 느껴야 하며, 자신의 행동을 양심에 결합시켜야 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한 양심이 편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영혼의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일에 대한 결정적 책임은 ― 우리 자신이 아니라 ―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라고 하는 안이한 공식을 통한 자기정당화는 사전에 배제될 것이다. 나는 세계에 조화를 회복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오직 개인적 책임감의 재생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란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현존하는 여러 대안 중에서 가장 나쁜 대안을 선택한다고 어디에선가 말하고 있다. 우리의 물질적 생존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너무나 맞는 진실이다. 그들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역사가 이상주의의 마지막 남은 몇방울마저 다 짜버리고,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역사적 과정에서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된 때였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관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원인을 분석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하여, 인간은 자신의 영성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역사가 하나의 영혼없는 소외된 기계로 전환되자마자, 인간 생활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봉사하는 나사가 되기를 강요받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동물로서 간주되어왔다. (문제는 사회적 쓸모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활동의 사회적 쓸모를 강조하는 나머지 그 개인의 권리를 무시하는 데까지 갈 때, 우리는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 비극의 전제조건을 만들어낸다.

자유의 문제는 체험과 교육의 문제를 제기한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현대인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권리가 개인에게 허용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뜻의 개인적 해방은 망상이다. 만일 인간이 그러한 자유를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오직 환멸뿐일 것이다.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무척이나 길고 힘든 노력이 개개인에게 필요하다. 교육은 자기기율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새롭게 획득된 자유를 오직 속된 소비주의의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능력밖에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구의 상황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오늘날 서구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민주적 자유가 만끽되고 있는 한편에 그〈자유로운〉 시민들은 기괴스럽고 명백한 정신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개인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여기서 개인과 사회간의 갈등이 이처럼 심각하게 존재하는가?

내 생각에 서구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유란 결코 ― 단 한푼도 비용이 들지 않는 샘물처럼, 아무런 도덕적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 것으로서 ―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자유를 자신의 삶의 향상을 위해 쓸 수 없다. 자유는 인간의 삶속에 단 한번으로 통합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노력을 통하여 끊임없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와의 관련에서, 인간은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만일 그가 자유의 행사에 필요한 용기와 결심을 가질 수 있고, 자신의〈내면적〉 경험이〈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이다.

진실로 자유로운 인간의 자유는 이기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일 수 없다. 개인적 자유도 단순한 집단적 노력의 결과일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의 비용을 ―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남들의 노역과 남들의 고통으로써 지불하는 데 익숙해졌다. 우리는〈이 세계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고려하기를 거부한다. 우리에게는 선과 악을 선택하는 자유의지와 권리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우연적인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자유의지를 천명할 기회는 남들의 의지 때문에 제약받는다.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원인은 언제나 내적인 비겁성과 수동성이라는 것, 그리하여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신의 의지를 단호하게 천명하지 못하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러시아에서 사람들은〈인간이 행복을 위해 태어난 것은 새가 비상(飛翔)을 위해 태어난 것과 같다〉라는 코롤렌코(Vladmir Korolenko, 1853 - 1921,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중단편 소설들을 쓴 작가 ― 역자)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내게는 이 말처럼 인간생존의 기초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로서는〈행복〉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만족을 의미하는가? 조화를? 그러나 사람에게는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은 궁극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특정한 목표물이 아니라 무한 그 자체에 닿아있기 때문이다.〈교회〉도〈절대〉를 향한 인간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교회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조직하는 사회기구들을 모방하거나 심지어 희화화하는 일종의 부속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것과 기술적인 것쪽으로 너무나 무겁게 기울어져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지금까지〈교회〉가 정신적 깨달음에 대한 호소를 통하여 균형을 바로잡을 수 있는 능력을 전혀 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 가능성의 절대적 자유를 표현하도록 요청받는 것으로 내게는 보인다. 내 생각에 예술은 언제나 인간정신을 삼켜버리려고 위협하는 물질적인 것들에 맞서는 인간의 무기였다. 거의 2천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예술이 오랫동안 종교적 이념과 목표라는 맥락속에서 발전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의 존재 자체로 말미암아 불협화(不協和)의 인간속에 조화의 이념이 살아남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이상을 육화(肉化)한다. 그것은 도덕적 원리와 물질적 요소 사이에 완전한 균형이 이루어진 예를 보여준다. 그러한 균형이 이념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실제 현실의 차원에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술은 조화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표현하고, 인간이 자신이 갈망하는 균형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부에서 자기자신과 기꺼이 투쟁할 용의가 되어있는 자세를 표현하였다.

예술이 이상적인 것을 표현하고, 인간의 무한성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고 할 때, 소비주의적 목적을 위하여 예술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예술의 본성을 크게 침해하는 것이다. 이상(理想)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관계하지만, 우리의 정신의 세계에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예술작품은 이러한 이상에 주어진 형식이다. 그 이상은 미래에는 마땅히 인류전체에 속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소수 ― 무엇보다도 자신의 예술에 육화된 이상의 인간적 의미를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간파할 수 있었던 천재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은 본래 귀족적이다. 예술은 잠재능력의 수준을 구별해주며, 그렇게함으로써 정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개개인에게 낮은 곳으로부터 높은 곳으로의 진보를 보증해주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귀족적〉이라는 단어를 쓸 때 거기에는 아무런 계급적 함축이 들어있지 않다. 실은 그 반대이다. 영혼이 도덕적 정당화와 생존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그 추구 과정에서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한, 모든 사람은 동등한 처지에 있으며 마찬가지로 모두 정신적 엘리트가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본질적인 차이는 이러한 가능성을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이것을 무시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예술은 언제나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예술형식속에 육화된 이상의 빛속에서 자기자신과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도록 초대한다.

행복에 대한 권리로서 인간생존의 의미를 보는 코롤렌코의 해석은 내게〈욥기〉를 상기시켜준다. 거기에서는 정반대의 견해가 표명되어 있다.〈인간이 재난속으로 태어난 것은 불꽃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과 같다.〉 다른 말로 하여, 고통은 우리의 생존에 고유한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겠는가? 고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만으로부터, 그때그때 우리가 처한 지점과 이상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행복〉에 대한 감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 선악의 균형된 관계가 유지되고, 악의 창궐이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 참된 의미에 있어서 신성한 자유를 위한 투쟁속에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확인하는 일이다.

예술은 희망, 믿음, 사랑, 아름다움, 기도 등 ― 인간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 모두를 긍정한다. 인간이 꿈꾸는 것, 인간이 품고있는 희망. 헤엄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그의 몸은 살아나기 위한 동작을 시작한다. 예술가도 일종의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예술은 정신적 의미에서 인류를 익사시키지 않으려는 본능으로서 존재한다. 예술작품은 영원하고, 초월적이며, 신성한 것을 향한 인간의 탐구를 ― 흔히 예술가 자신의 죄많음에도 불구하고 ― 가능하게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의 것인가 악마의 것인가? 인간의 강점으로부터 오는가 약점으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사회적 조화의 이미지인가? 그러한 것이 예술의 기능인가? 우리가 서로서로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의식의 확인으로서의 사랑의 고백. 참회.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자기도 모르게 드러내는 무의식적 행동 ― 사랑과 희생. 그러한 것이 예술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되돌아 볼 때 인간역사의 도정은 파국과 재앙으로 점철되어왔다. 어째서 이런가? 이들 문명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어째서 그들은 숨이 차고, 사랑의 의지를 상실하고, 도덕적 힘을 잃어버렸는가? 이 모든 것이 단지 물질적 결핍 때문에 일어났다고는 믿을 수 없다. 그러한 발상은 내게 기괴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이제 우리는 역사 과정의 영성적 측면을 고려하는 데 실패한 결과로 또하나의 문명을 바야흐로 파괴하려 하고 있다. 지금 우리를 짓누르는 많은 불운한 일이 우리가 용서받기 어렵게 범죄적으로, 가망없이 물질 본위로 된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과학의 주인공들로 행세하면서, 과학적 객관성을 좀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하기 위하여 우리는 나눌 수 없는 본래 하나인 인간과정을 쪼개고, 그렇게함으로써 거기서 만물의 제1원인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어, 그것을 과거의 잘못을 설명하는 데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청사진으로 이용한다. 아마도 문명들의 붕괴가 뜻하는 것은 인간이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역사〉가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인지 모른다. 역사가 더이상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지 않고, 그래서 다음번에는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그동안 이루어져온 모든 잘못된 시도를 역사 자신의 족보에서 지우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역사는 기다리는지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고, 역사가 무엇을 해왔는지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는 널리 퍼져있는 견해에는 일리가 있다.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파국적 재난은 분명히 문제의 문명이 잘못 구상되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정신적 영적 완성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예술은 완성된 과정, 완결의 이미지이다. 예술은 역사의 기나긴 ― 아마도 끝없는 ― 길을 뛰어넘어 획득된 절대적 진실(오직 이미지만이지만)의 소유를 모방하는 일이다.

우리는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모든 것을 자기자신과 함께 어떤 총체적인 세계관 ― 예컨대〈베다〉와 같은 ― 에 넘겨주고 싶은 순간이 있다. 동양은 서양보다 진리에 더 접근해 있었다. 그러나 물질본위의 서구문명이 동양을 삼켜버렸다.

동양음악과 서양음악을 비교해보라. 서양은 끊임없이 소리친다.〈나야! 나를 보라구! 내가 얼마나 고통받는지, 사랑하는지 들어보라구! 얼마나 난 불행한가! 얼마나 행복한가! 내것이야! 나라구!〉 동양의 전통에서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사람은 신과 자연과 시간속에 완전히 흡수되어 있다. 모든 것 속에 자신이 있으며, 자기자신 속에 모든 것이 있다. 도가(道家)의 음악을 생각해보라. 그리스도 이전 600년전의 중국.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최고의 사상이 승리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그것은 몰락해버렸는가? 어째서 그러한 토대위에서 성장한 문명이 역사 과정에서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전달되지 못했는가? 그들은 그들을 둘러싼 물질주의 세계와 충돌했는가? 개인이 사회와 충돌하는 것처럼 그 문명도 다른 문명과 충돌하였다. 그런 이유로만 그 문명이 붕괴한 것은 아니다. 또다른 이유는 그것이 충돌한 것이〈진보〉와 기술로 이루어진 물질주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그 문명은 진정한 지식의 마지막 정점, 이 지구의 소금중의 소금이었다. 동양사상의 논리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갈등은 모두 본질적으로 죄악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상상하고 창조한 대로의 세계속에 산다. 그런데 우리는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대신에 그 결함의 희생물이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독자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 실은 간절하게 털어놓는 말이지만 ― 인간이 일찍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창조해온 유일한 것은 예술적 이미지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인간적 활동의 궁극적 의미는 예술적 의식 ― 일정한 목적이 없고 사심(私心)이 없는 창조적 행동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창조능력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증거일 것이다.

 

커버 아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인터뷰>(미시시피대학출판부, 20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인문학자의 딸들을 위하여

피로회복제를 먹고 허리에 파스를 붙인 다음에야 기력을 좀 차리고 인터넷에서 이런저런 기사들을 둘러보는데(정작 해야 할일은 이런 게 아니지만), 딱 내 얘기다 싶은 기사가 눈에 띈다. 문학평론가 권성우 교수의 '문화비평'이 그것인데, 제목이 얄궂게도 '책을 처분하면서'이다. 제목에 잠시 '놀라실' 분들도 있을까봐('반가워할' 분들일까?) '인문학자의 딸들을 위하여'로 바꾸었다(인용문의 문단들도 다시 조정했다).

실상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겪고 있는 '고초' 또한 '책을 처분하면서'의 소회와 진배없다. 때문에 아래의 '비평'은 '딸아이를 위해서' 지난 겨울 한 차례 책을 처분하고(정확하게는 '위탁하고') 이번에 또 한번 책정리를 하느라 허리에 파스 한 통을 다 붙여가고 있는 처지에서 십분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해서 옮겨온 글이지만 '방주'가 아닌 '창고'에 넣어둔다.   

교수신문(06. 09. 30) 책을 처분하면서

대개의 인문학자들에게 이사는 그 동안 엄청나게 늘어난 책을 어떻게 배치하느냐는 고민을 동반할 것이다. 늘 그렇듯이 공간은 협소한데, 책은 많다. 8년 여만에 이사를 하기로 결정하면서(*나도 내년이면 8년을 채우게 되지만 이사를 꿈꾸기는 어렵다!) 고민의 화두로 등장한 것은 역시 책 보관문제였다. 지금 집에 있는 세 개의 방 중에서 두 개의 방은 그야말로 책 보관소였다(*내 말이 그말이다). 이 방들의 거의 모든 책꽂이는 이미 책이 가득 꽂혀진 공간에 다시 세로로 포개서 보관하는 방식으로 책이 이중으로 배치되어 있다. 한마디로 책 수용의 임계에 도달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할 집의 크기는 같은데 그 중의 방 하나를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사정에 있다(*아으, 인문학자의 딸들이여!). 연구실 역시 책으로 완전히 포화상태이니, 결론은 현재 집에 있는 책의 약 30% 정도를 그게 기부가 되었건 양도가 되었건 어떤 방식으로든지 처분해야 한다는 쪽으로 날 수밖에 없었다(*아래는 나이가 턱에 차서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는 우리집 딸내미이다). 

요 며칠 동안 바로 그 30%에 해당하는 책을 따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책들을 판별하는 기준은 앞으로 내가 평생 동안 볼 가능성의 여부와 그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는가의 여부였다(*기준은 대개 비슷한 듯하다. '쉽게 구할 수 있는가'란 기준은 나의 경우에 '도서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가'이다). 그러다 보니, 우선적으로 철지난 잡지와 문예지가 그 30%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상당수의 소설책과 시집도 이러한 운명을 비켜가지 못했다(그 책의 저자들에게 마음 깊이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고민했던 것은 인문사회과학의 전성시대였던 1980년대에 출판된 무수한 인문사회과학도서였다. 여러 가지 형태의 철학서, 사회과학이론 책들, 사회구성체 논쟁을 다룬 책들, 리얼리즘 관계 이론서들 등등.

아마도 이 책들의 상당수는 내 평생에 다시 볼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게(?) 어떤 방식이로든지 이 책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이런 책들을 나는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는 않지만, 갖고 있더라고 권교수와는 다르게 바로 '처분'했을 것이다. 대학 도서관들에서 쉽게 대출할 수 있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을 가능케 한 것이 그 책들에 내 젊음의 방황과 모색이 진하게 배여 있다는 실존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보다 현실적으로 이제 그 책들을 커다란 도서관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는 정황이 이러한 선택을 유도한 결정적인 계기였다가령 당시 비평가로서의 삶을 모색하고 있던 내 문학 공부에 많은 지침과 암시를 주기도 했던 파킨슨의 <게오르그 루카치> (현준만 역, 이삭, 1984) 같은 책은 이제 고서점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다(*내 주변의 도서관은 '커다란 도서관'에 속하는 듯하다. 파킨슨의 <게오르그 루카치> 등도 원서와 함께 소장돼 있다). 

물론 80년대에 출간된 여러 가지 진보적 사회과학 도서들이 지금 현재도 유효한가라는 물음 앞에서는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겠다. 철지난 급진이론이라는 생각도 가능하겠고, 여전히 우리 현실을 읽는데 소중한 참조가 된다는 관점도 존재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 여하를 떠나 내가 이 에세이에서 제기하고 싶은 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책들을 불과 20여년 후에 구하기 힘든 우리의 경박한 인문적 풍토에 있다.

두루 알다시피 80년대는 혁명과 정치의 시대였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시대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무수한 영세출판사에서 의욕적으로 출간된 다양한 인문사회과학도서들을 생각해 본다. 그 책들은 각각이 지닌 세계관의 한계까지도 포함해서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주었다. 가끔은 그 시절이 한국현대사에서 인문학의 진정한 전성시대가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 책들을 모두 양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점은 그 책들을 구하기가 너무나도 힘든 이 시대의 현실이 반인문학적이라는 사실이다.

 

 

 

 

인문학을 살리는 길은 거창한 선언이나 ‘인문학 주간’ 같은 일회성 행사로 결코 가능할 수 없다. 한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기억하는가의 문제,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소중한 책들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의 확보가 인문학을 위해서 더욱 필요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러니까 굳이 '개인 도서관'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공공도서관이 장서수나 편의성에서 획기적으로 개선된다면 딸아이의 방을 만들어주기 위해 책들을 처분해야 하는 '서민' 인문학자들의 비애는 재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딸에게 방을 따로 내주고도 책 보관을 위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권성우/ 숙명여대·국문학)

06. 10. 15.

P.S. 대학교수의 처지에서도 그런 고민을 한다면 무슨 '통뼈'가 아닌 강사들의 처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아래는 지난봄 엄마 생일때 딸아이가 내게 전달해달라고 했던(그러니까 아빠는 '우체국아저씨'였다) 축하편지인데, 지난 여름 내 생일 때 아이는 달랑 '아빠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라고만 쓴 쪽지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언어학의 기본 상식을 갖고 있다면 이 두 메시지의 차이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를 담고 있는 형식(여기서는 '분량')이다. 딸아이의 '아빠사랑'은 '엄마사랑'의 발치 정도인 것.

다음주면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고가로 구입한 가구들이 딸아이방에 들어오고 우리는 작은 파티를 해줄 예정이다. 그럼 지난 두달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것. 여하튼 책들을 '고아원'에 '처분'하고 또 정리하면서 내가 갖는 바람은 다른 게 아니다. 고작해야 내년엔 좀더 긴 편지를 딸아이에게 받는 것 정도. "아빠가 없으면 저도 없겠죠." 정도의 구절은 포함된 편지로 말이다(요즘 세상에 누가 '인문학자'를 따로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