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이어령 라이브러리

가방을 뒤지다 보니까 그제 날짜 한국일보가 나온다. 나중에 읽으려고 넣어둔 것인데, 그 '나중 읽기'의 대상이 이어령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였다. 이번에 문학사상사에서 '이어령 라이브러리' 30권이 완간되었고, 또 1956년 한국일보 지면으로 등단한 바 문필활동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열린다고 한다. 200여권의 저작 중에서 내가 읽은 이어령은 몇 권 되지 않지만(30권으로 줄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저항의 문학>을 읽었던 기억은 생생한 만큼 관련 기사들과 함께 몇 마디 군말을 덧붙여두도록 한다.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한 것은 <저항의 문학>의 서문을 말미에서 읽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읽을 건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사들이다.

한국일보(06. 10. 25)  문필활동 50년 전집으로 정리한 이어령

누군가 재미 삼아 세어보니 직함이 무려 15개였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신문 칼럼니스트, 문화부 장관, 문명비평가, 에세이스트…. 그 앞에 서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호칭을 사용해 그를 불러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오롯이 글 쓰는 사람으로 규정할 뿐이다. 00

문학과 정치, 문화와 문명을 가로지르며 쉼 없이 창조의 질주를 계속해온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72). 그의 50년 문필활동을 정리한 전집 <이어령 라이브러리>(문학사상사)가 이 달 30권으로 완간됐다. 1956년 5월6일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지 꼭 50년. 그 반세기 동안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저자로 달고 나온 200여권의 책 중 대표 작품들을 골라 묶어낸 전집이다.

-선생님의 다산의 창조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난 어릴 때부터 ‘한 우물을 파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갈증이 나니까 우물을 파는 건데, 해갈이 되면 그만 파고 다른 데로 가야지 왜 계속 팝니까. 창조에 대한 갈증으로 50년간 이 우물 저 우물 파온 거고, 그 속타는 갈증이 날 여기까지 오게 한 거죠. 그러다 보니 직함도 많아졌고.”

-그래도 타고난 성정이 아니면 책을 200권이나 쓰는 열정적 삶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복된 것, 편저나 공저 등을 빼면 순수한 내 작품은 총 50권 정도인 것 같아요. 문단에 나온 지 50년이 됐으니 1년에 평균 한 권씩 쓴 셈인데, 글 쓰는 사람이 그 정도는 써야죠. 지금까지 <한국문학>에 <나신과 의상>을 연재하다 몸이 아파 그만두고 6개월 쉰 걸 빼면 글쓰기를 쉬어본 적이 없어요. 직업적으로 글 쓰는 게 몸에 밴 거죠.”

-선생님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말의 천재’인데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수필가와 달변이에요. 수필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엄연히 수필과 평론이 구분되고, 난 평론으로 문단에 나왔는데 장르를 바꿔버리니 싫은 겁니다. 달변이라는 말은 ‘내용은 없어도 청산유수’라는 말인데, 참 모욕적이에요. 강연 후에 누가 ‘청산유수시네요’하면 할 말이 없어요. 아무리 눌변이라도 말할 값어치가 있는 말을 해야지. 그래서 말의 천재라는 말이 참 싫어요. 내가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만큼 손해 보는 부분인데, 그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몰라요.”

-‘달변의 수필가’라고 했다간 큰 일 나겠군요.

“큰 일 나지.(웃음) 대외활동이 많다 보니 선입견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과대포장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참 안타깝죠. 학계에서는 내 ‘공간기호론’ 같은 것은 정말 독창적이라며 오히려 내가 과소평가됐다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내가 달변가, 수필가로 안 알려졌더라면 평가 받았을 저작들인데….”

-선생님의 50년 글쓰기가 갖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 50년 글쓰기에는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지성사, 글쓰기의 역사와 담론이 담겨 있습니다. 채집문명에서 농업문명, 산업문명, 정보문명, 이 네 가지를, 즉 인류의 1만5,000년 역사를 한 몸에 축약해 치러냈으니까요. 외국 지성에 비해 내 수준이 떨어질지 모르나 4개 문명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나를 따르지 못할 겁니다. 이건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한 인간이 50년간 글을 쓰면서 네 문명의 체험을 담아내는 건 체험의 밀도 면에서 아주 희귀한 거예요. 자화자찬이 아니라 70대 중반에 이른 내 동료들을 대변해 그 가치를 얘기하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만드신 <문학사상>이나 <이상문학상>이 우리 문단의 중요한 제도로 자리매김했는데도 선생님에겐 문학 권력의 이미지가 없습니다.

“나는 50년간 글쓰기를 해왔지만 내 패가 없어요. 이런 저런 문학파들이 많지만, 어디에도 ‘문학사상파’라는 것은 없죠. 정치, 경제, 사회 다 패를 이루어 하는 것이지만, 문학만은 외롭게 혼자 하는 것입니다. 문인은 구석기 사람이에요. 제 손으로 도끼를 만들어 저 혼자 토끼를 잡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문단이 아니라 ‘문당’(文黨)이죠.”

-아직 더 파야 할 우물이 있습니까.

“억울하게도 나는 소설을 써도 평론가가 여가로 쓴 소설이라고 폄하됐어요. 사실 시를 쓰고 싶었는데, 왜 진짜 하고 싶은 건 아까워서 못 하잖수. 서정주의 <시론>이라는 시에 ‘바다속에서 전복 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 좋은 건 님오시는 날 따다주려고/ 물 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는 게 있잖아요. 내게 시는 그 숨겨진 전복이에요. 50년 글쓰기의 대단원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포에지(시가 가지는 정취), 시가 될 겁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집 한 권 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아끼는 거니까 자비 출판을 해서라도 장정부터 다 내 손으로 한 권 만들고 싶습니다. 그 시집을 읽고 나면 이어령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 그 50년을 단번에 설명해 줄 그런 시집 말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선생님처럼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흔치 않은데요.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까.

나는 한평생 오해를 받아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거만이 뭔지 몰라요. 끝없이 바닥에 있다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죠. 그걸 언어로 위장하고, 때로는 폭로하고 한 겁니다. 너무 약하고 열등해서 언어라는 갑충의 껍데기를 가지려고 한 겁니다. 나를 찌르는 불행의 화살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구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참 재밌는 게 나와요. 모차르트에겐 모든 창조하려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끝없는 존재의 열등감, 어린아이 같은 나이브함, 사회성이 없는 데서 오는 외로움.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글쓰기가 안돼요. 성경 <욥기>에 보면 욥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이 고통을 반석에 새길 수만 있다면’이잖아요. 이게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 불행에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특권, 그게 글쓰기죠.”

-글쓰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습니까.

“정치, 이념이죠. 내게는 끝없는 딜레마였습니다. 정치에 말려들어 이념의 언어에 구속되면 창조적 글쓰기는 안 된다, 신분증 언어밖에 못 쓴다, 다짐하며 그걸 안 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문학에서는 하지 말자, 1960년대에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마치 구석기를 살고 있는 것처럼, 시공에 얽매이지 않은 문학을 하자 했죠. 대신 현실과 관계 맺는 정치ㆍ사회적 발언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같은 문화, 문명론으로 쓴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해를 받아 순수ㆍ참여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참 외로운 거죠. 정략적 눈길처럼 나를 상처주는 것은 없어요. 나는 고독한 창조자로 있고 싶었는데, 인위적으로 패거리 속에 나를 넣어서 보니까 그때처럼 외로운 게 없습디다.”

 

 

 

 

-글쓰기 50년을 돌이켜보면 어떤 소회가 드십니까.

끝없는 오해와 자기모순의 50년이에요. 감사하는 건 내 이름의 프리미엄으로 모든 작품이 무대에 오르고 영화화했다는 겁니다. 외적 환경은 감사하지만, 콘텐츠를 놓고 보면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외로운 50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외화내빈의 50년. 그게 내 50년의 아이러니죠. 글은 쓰는 순간 내다 버리는 쓰레기입니다. 이건 겸손이 아니에요. 내 글에 만족하면 또 쓰겠소. 전집 30권을 한데 묶어놓고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희열보다 멋쩍음을 느껴요. 숨기고 싶고 꼭 속옷 보여주는 것 같아 창피해요. ‘이게 전부냐? 네가 50년간 쏟아부은 게 이게 다냐’ 싶어 헛헛한 기분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전에는 하기 싫은 일은 절대 안 하고 남들 부탁도 매정하게 거절하고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저 사람이 언제 또 나한테 부탁을 하랴 싶어 거절을 못해요. 그러다 보니 강연이다, 주례다, 인사말이다 스케줄이 너무 많아요. 초조한 게, 내 활동기간은 짧아지는데, 전복을 따야 하는데 잠수할 시간이 없어요. 막상 들어가면 숨이 차고.(웃음) 내년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저런 위원장, 고문 직함 다 정리하고 1년간 들어앉아 전복을 딸 겁니다. 시집 꼭 낼 겁니다. 또 대학에서 강연한 것들 묶고, 학술논문들도 정리해서 전집도 40권, 50권까지 이어가야죠. 글쓰기엔 정년도 고령화도 없으니까요.”(박선영기자)

한국일보(06. 10. 25) 이어령 "등단 글 <우상의 파괴>는 젊은 피울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출판기념회에서 고성을 질러가며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비판한 어느 당돌한 청년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한 서울대 학생이 서정주, 김규동, 조연현, 백철 등을 두고 그게 시냐고, 문학이냐고 목소리를 높여 짓뭉갰다는 것이다.

소문을 들은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운사씨가 그 청년에게 그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제안했다. 청년은 끓어오르는 비분강개를 “설마 신문에 실릴까”싶은 마음으로 썼고, 그것이 <우상의 파괴>라는 제목으로 1956년 5월6일자 한국일보의 한 면에 전재됐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의 등장이었다.

“당시엔 추천이나 신춘문예가 아니면 제도 문학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하지만 나는 기성문단의 동의나 결재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내 힘으로 작가가 되겠다, 신춘문예나 추천, 투고 등을 통해 너희들로부터 승인받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처럼 글 안 쓴다 하는 선언이었죠.”

그 글은 단지 문단의 우상들을 대상으로만 씌어진 글은 아니었다. “내가 유명해지려고 선배들을 짓뭉갰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우상엔 이승만 대통령 등 젊은이들을 짓누르는 기성의 모든 억압이 포함돼 있었죠. 한 마디로 한국전쟁 이후 정신적으로 말살되는 젊음을, 한 번밖에 없는 내 젊음을 당신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젊은 사람 살려’ 하는 절규였어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맨발로 쓴 젊은이의 피울음, 젊은이들의 첫소리였죠.”

그로부터 50년. 우상을 파괴하며 등장한 이 ‘앙팡 테리블’이 한국 지성사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 거름이 된 50년의 글쓰기를 기념해 31일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이어령 교수의 글쓰기 50년>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회가 열린다.(박선영 기자)


중앙일보(06. 10. 27) 시대의 지성 이어령 등단 50년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72.중앙일보사 고문) 선생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란 글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글쓰기 인생이 어느새 반세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직업은 본래 문학평론가다. 그러나 뭇 사람은 88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한, 그래서 굴렁쇠의 추억을 우리에게 안긴 문화기획자로 그를 떠올린다. 다른 이는 한국 헌정사 최초의 문화부 장관(90~91년)으로, 또 다른 이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등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그를 기억한다.

그래서 오늘은, 오히려 일반인에겐 생소할 수도 있는 문학평론가로서의 이어령을 조명한다. 전후문학 시대 젊은 문학의 기수로서, 60년대 참여-순수 논쟁을 이끈 평론가로서 이어령은 한국 문학사에 또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 50년의 세월을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증언한다. 선생의 육성은 30일 '월요 인터뷰'에서 전달할 예정이다.

선생의 등단 50주년을 맞아 '이어령 라이브러리'의 30번째 권인 '나, 너 그리고 나눔'(문학사상)이 최근 발간됐고, 31일 오후 3시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특별 강연회가 열린다. 다음달 2일 정오엔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중.일 비교문화상징사전 발간 기념 강연회도 열린다.(손민호 기자)

중앙일보(06. 10. 27) 권영민 교수가 말하는 문학평론가 이어령

이어령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는 1956년 시작된다. 선생은 반세기를 지내오는 동안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고, 문화 예술의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문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원로이면서도 선생은 언제나 현역 비평가를 자임한다. 칠순을 훨씬 넘긴 지금도 그 놀라운 지적 통찰력을 통해 우리 문화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데에 앞장선다. 그러므로 이어령 선생의 글쓰기 50년은 우리 문화 예술의 정신사적 궤적에 해당한다.

이어령 선생의 첫 번째 비평집 '저항의 문학'(59년)은 우리 문학사에서 유별난 자리를 차지한다. 선생의 수많은 저서 중엔 이 책보다 훨씬 화제를 모으고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지성의 오설길''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이 있고,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추적하고 있는 '문화코드''디지로그'와 같은 최근의 화제작도 있다.

그러나 '저항의 문학'이 유별난 이유는, 이 책에서부터 비로소 우리의 문학 비평이 문학 자체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문학 비평도 문학의 한 장르라는 논리와 인식의 지평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항의 문학'은 그 유명한 '우상의 파괴'라는 비평적 명제를 처음으로 내세운 저작이다. 이 명제는 '작품 자체로 돌아가기'란 비평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상의 파괴'란 명제는 50년대 문단에서 기성 작가들의 권위에 대한 신세대의 당돌한 도전으로 오해까지 받았던 테마이다.

이어령 선생은 당시 평단의 거목이었던 백철을 공박하고 조연현을 비판하고, 시단의 주역이었던 미당 서정주를 몰아치고 소설 문단의 김동리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전후 문단의 숱한 시인과 소설가들이 아무도 선생의 비평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의 비평이 논쟁적이긴 했기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고도 간명했다. 문학 비평이 더 이상 작가의 주변을 맴돌아선 안 된다는 것, 오직 작품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령 선생은 문학의 사회 참여 문제를 저항의 문학이라는 테마로부터 새롭게 제기한 적이 있다. '작가의 현실 참여'(59년)라는 선생의 평문이 던진 이 새로운 과제는 4.19를 거치면서 문단 전체의 쟁점으로 부각된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비판하는 문학의 정신을 리얼리즘과 연결하며, 작가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참여문학론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문학의 본질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문인들이 반발하면서 쟁점은'순수-참여 논쟁'으로 확대된다.

이 논쟁의 정점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어령 선생이며, 그 상대역이 시인 김수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인 김수영은 군사 독재의 사회 문화적 통제를 우려하면서 언론의 무기력과 지식인의 퇴영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참여론을 논리화한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문화 예술 자체의 응전력과 창조력의 고양을 주장했고, 시대의 상황 변화를 무조건 추종하는 문학인의 자세를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을 내세운 이어령 선생이 순수론의 옹호자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어령 선생이 문학평론가로서 가장 힘을 기울인 연구 중 하나가 '이상 연구'이다. 이상의 문학은 언어의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이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속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통해 전체적인 통일성이 유지된다는 것이 선생의 관점이다. 이상의 작품을 신비화된 그의 삶으로부터 분리한 선생의 비평적 작업은 이상 문학의 독자적인 의미와 구조를 미적 차원에서 해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좁은 의미의 텍스트주의자는 아니다. 선생의 문학 비평은 문학의 개념과 그 범위를 규정하는 방법과 관점에 따라 문학과 문화의 관계를 좁히기도 하고 넓히기도 한다.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는 미시적인 언어 기호론에서부터 거시적인 비교문화론으로 확대된다. 이어령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 50년을 정리하고 있는 130여 종의 저작을 살펴보면, 선생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회 문화적 현상 속에서 하나의 문화적 실천으로써 자신의 글쓰기를 폭넓게 지속하여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충동을 함께 아우르는 이 끊임없는 글쓰기를 통해 한 시대의 지성이 펼쳐놓는 새로운 '문화적 시학'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독자의 자랑이다.(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사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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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한국의 록: 어느 세계적 경험-성기완

한국의 록: 어느 세계적 경험

성기완

들어가며

나는 이 글에서 남한의 록음악에 관해 말하려고 한다. 전반부는 남한에서 록을 받아들이던 때의 이야기가, 후반부에서는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 인디 록(indie rock)1)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다. 전체적으로 이 글은 다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일종의 문화사적인 기술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후반부는) 내가 겪은 개인적인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역사적 관점을 취한다는 이 모순은 상당부분 그 동안 내가 취해온 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별로 훌륭하지는 않지만 직접 ‘3호선 버터플라이’라는 인디 밴드의 멤버(기타리스트)로 참여하고 있는 뮤지션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음악에 관해 글을 쓰는 이른바 ‘대중음악 평론가’이기도 하다. 나는 1999년 이후 거의 매 달 홍대 부근의 클럽에서 공연을 해왔고 그와 동시에 1997년 이후 거의 매주 새로운 음반(특히 록과 OST 분야)을 리뷰해왔으며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한국의 록음악계를 바라보고 그에 관해 글을 쓰는 생활을 해오고 있다. 어쩌면 불편한 지위일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자리 덕택에 나는 속에 들어 있으면서 그 속을 바깥에서 바라봐야 하는 모순된 창작/비평 행위를 계속해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우선적으로 이와 같은 나 자신의 처지와 경험에 의해 조건지워져 있다. ‘세계음악’이라는 개념을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을 총칭하는 개념쯤으로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나의 글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음악’을 지금 전 세계의 각 문화집단 내에서 생성, 소멸되고 변화하는 현재형의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이 그러한 범주 안에 존재하는 ‘세계음악’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것 역시 약간은 개인적일 수도 있는데, 원래 우리 자신이 태어난 곳의 전통적인 음악적 문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록음악이 왜,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와 어떻게 우리와 반응하면서 내면화되었는지를 보는 것이다.

록의 특수성: 랑그 내부의 파롤

록큰롤 rock'n'roll의 준말인 ‘록 rock’은 1950년대 이후 영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된 팝 음악을 총칭하는 개념이다2). 록은 오늘날 전 세계의 대중음악을 규정하는 가장 지배적인 음악언어이다. 잘 알려진 언어학 개념을 빌자면, 록은 전 세계의 비교적 산업화가 진행된 모든 곳에서 만들어지는 대중음악의 랑그(langue) 노릇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랑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조차 가장 소외된 소수집단의 ‘파롤(parole)’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록의 기원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것은 역시 블루스(blues)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변방에 있고 소외된 상태에 있던 소수집단의 하나인 미국 남부 흑인 떠돌이들의 음악적 자기 표현 수단이 바로 블루스이다. 블루스를 노예해방 이후의 청년 흑인 세대가 갖는 세대적 불안의 표현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모든 랑그의 기원에는 특정한 소수집단의 파롤이 숨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록처럼 랑그로서 기능하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문화적으로 소수인 사람들의 언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의 대중음악을 지배하게 된 블루스의 전 세계적 여행과 음악적 만남은 20세기의 가장 극적인 문화적 모험담의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소수자의 언어가 중심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더라도 록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너무나 지배적이고 강대하다.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의 가장 일반적인 음악적 표현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록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한풀이 음악에 속하는 ‘블루스’에서 시작되었지만, 어느새 그것이 의미화되는 과정에서 ‘백인적인’ 것으로 변질, 포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일종의 ‘하이브리드,’ 즉 문화적 잡종의 탄생과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백인들의 문화적 전략 속에 편입된 소수문화의 거짓 의미화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록은 지배적 언어로서의 랑그와 그 내부의 개별적 쓰임의 상태인 파롤이 서로를 밀쳐내면서 동시에 서로를 지탱해온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의붓아버지의 변증법: 수용기

록음악이 전세계적으로 전파되기 쉬웠던 것은 첫째로는 ‘음반’이라는 매체 때문이다. 잠재적으로는 무한한 복제가 가능한 음반의 전파력이 없었다면 록이 그토록 전세계적으로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반의 힘은 그대로 미국의 힘이다. 표준화와 자동화를 이룬 미국의 대량생산/소비 체제가 가지는 힘은 미국의 전세계적 정치적 지배력의 물질적인 기반이다. 더구나 미국은 전세계에 그 거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미군부대’이다.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흘러 다니는 미국의 대중문화는 그 물량만으로도 주변의 문화를 물들인다. 1960년대 독일의 함부르크가 록음악의 ‘변방의 중심’ 역할을 했던 것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만을 가지고 록의 전파력을 이해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미국의 문화가, 예를 들어 햄버거가 전세계에 퍼지는 것을 순전히 미국의 지배적인 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 쪽을 뜯어볼 필요가 있는 것인데, 록이 그 해답의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록의 전파력 내부에는 앞서 말한 ‘랑그 내부의 소수자의 파롤’이라는 것이 있다. 지배자의 문화적 선물로 포장된 록의 포장을 뜯어보면, 그 안에는 그 지배자의 본토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의 ‘파롤’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 파롤은 다시, 지배당하는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전파된다. 파롤이 파롤을 만나 공감을 형성한다. 사람들이 지배자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순간에조차 그 언어는 피지배자의 파롤이라는 특수한 사정이 록의 힘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록큰롤이 남한에 상륙한 것 역시 1950년대 후반, 1960년대 초반의 일이다. 몇 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음반의 전파력 덕분에 록은 거의 동시대적으로 전세계에 유포된다. 그래서 급속도로 록 언어의 ‘당대성’이 전세계적으로 생긴다. 남한이라는, 세계문화지도상에서 극단적으로 변방에 위치한 땅에조차 록은 그 중심부의 모습이 거의 동시대적으로 공개된다. 록이 남한 땅에 들어올 때 남한의 대중음악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거칠게 말하여 ‘뽕짝’이었다. 뽕짝에는 한국이 한국이라는 땅의 호적에서 지워야만 하는 너무도 미운 의붓아버지, 일본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 그 의붓아버지의 문화적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통가요라는 우스운 개념 속에 살아 있다. 어쨌든 1960년대 초, 당시의 젊은 대중음악인들은 새로운 의붓아버지의 힘으로 옛날 의붓아버지를 지우는 시도를 했는데, 그게 바로 한국적인 록큰롤의 첫 발자국이다. 의붓아버지로 의붓아버지를 지양하는 이러한 변증법이 의식적으로 시도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새 의붓아버지의 노도와 같은 힘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음악을 하려면 미 8군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는 신중현 씨나 심지어 강태환 씨 같은 음악가들의 술회는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선배들처럼 악극단에서 뽕짝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 자체가, 록이나 재즈 같은 미국의 음악적 언어가 남한 땅에서 수행한 문화적 역할의 일부를 말해준다. 즉 그것은 일종의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이기도 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반에 남한에 들어온 록은 젊은 뮤지션들의 모방기, 수련기를 거쳐 1960년대 후반에 가면 본격적으로 자기화된다. 그 ‘자기화’의 단초는 신중현이라는 뮤지션에 의해 마련된다. 그의 노래인 <꽃잎>을 보면 II도의 마이너를 쓸 자리에 메이저를 쓴 대목이 있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바로 ‘못 견디겠네’의 대목에서 사용된, C키의 노래에서 그가 쓴 II도의 메이저, 즉 D 메이저는 새 의붓아버지가 예전의 의붓아버지를 지운 극적인 순간을 표시한다. 이 메이저 진행은 1960년대 미국의 싸이키델릭 록에서 온 것이다.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의 <화이트 래비트>(White Rabbit) 같은 곡에서 두드러지는데, 순전히 메이저 코드로만 이루어진 이 노래에서의 상승진행은 사이키델릭 특유의 환각적인 고양감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메이저 진행은 F를 쓸 자리에서 F#을 쓰는 아이리쉬적 모드를 떠올리게 한다. 신중현의 기타 프레이즈 역시 F#을 짚는 믹소리디언적인 모드를 한국 가요에 도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도입은 허구헌 날 II도의 마이너를 쓰는 뽕짝의 일반적 진행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지우고 싶은, 그러나 운지법이나 흥얼거림 속에 판에 박은 듯 박혀 있어서 도저히 지우기 힘들었던, 옛날 의붓아버지의 그림자가 지워지는 순간이다.

너무나도 큰 습관의 바위를 깨기 시작한 첫 정 소리를 그가 쓴 II도의 메이저에서 들을 수 있다. 그에 의해 본격적으로 자기화되기 시작한 록은 1970년대에 이르면 ‘퇴폐’라는 명목으로 박정희 독재의 억압의 대상이 된다. 1960년대의 히피들이 하던 록 내부에 숨어 있는 자유의 정신을 박정희는 두려워했다.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실험은 1975년 대마초 사건과 함께 갑작스럽게 중단되고 만다.

그러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록의 언어는 ‘일상화’된다. 이 일상화는 산울림의 노래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부른 <아니 벌써>라는 노래가 직접적으로 산업화의 바쁜 와중에 있는 당대(1970년대 후반)의 일상인의 모습을 그린 노래이긴 하지만 그 보다 덜 직접적이면서 언어적인 차원에서는 더 중요한 다른 사례들이 산울림의 노래들에서 많이 발견된다. 가령 그들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라는 노래는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이렇게 시작하는데, 이 노래의 첫 대목인 ‘꼭 그렇진 않았지만’이라는 가사의 일상성을 한 번 주목해 보자. 중얼거리는 것 비슷한 멜로디에 실려 노래되는 이 일상어는 그 이전까지의 한국 록에서 별로 찾아보기 힘든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 가사는 한 떨기 꽃의 모습처럼 선명하게 이미지를 제공해야 하는 기존의 가사 관행을 뒤짚는다. 이 가사는,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우는 듯한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별로 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이러한 일상어를 통해 노래 전체의 리얼리티가 좌우된다. 서정적인 언어들 앞에 도입되어 노래 전체의 서정성을 오히려 이끌어가는 이 일상어는 1970년대 후반의 불안하고 불확실한 젊은이의 문화적 조건을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하면서 록의 문법이 우리의 입, 우리의 흥얼거림 속으로 완전히 일상화된 순간을 표시하기도 한다.

대안으로 재인식된 록: 1990년대 이후의 모습

80년대는 7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하였다. 늙은 군인이 잡고 있던 권력이 젊은 군인에게 넘어간다고 바뀐 것은 없었다. 관제 행사는 더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대중음악계는 점차 체계적으로 상업화되어 갔다. 그 분위기 속에서 보다 정제된 사운드와 보컬 실력을 가진 조용필이 등장했다. 불세출의 목소리를 지닌 그가 80년대에 구사한 사운드는 그 동안 한국 록에서 잘 듣기 힘들던 세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용필이 십대 소녀를 휘어잡을 무렵, 많은 것들이 ‘언더그라운드’로 숨어들었다. 대학가의 민중가요는 포크의 전통을 이어 독자적인 영역과 미학을 구축해 나갔고 여러 뮤지션들이 까다로운 검열의 횡포에 지친 상태에서 독자적인 음악적 자의식을 만족시킬만한 언더그라운드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하여 ‘해바라기’나 ‘들국화’ 같은 밴드들이 탄생하였다. 신촌, 이태원 등지의 클럽에서 음악적 허기를 달래던 그들은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외쳤다. 그 ‘내 세상’은 상처받고 억압당한 젊은이들의 내적인 공허 속에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반향은 한국 록의 정통성을 언더그라운드로 끌어 붙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언더그라운드에는 좀더 젊은 세대의 ‘헤비 메탈’에 대한 요구 역시 포함되었다. 시나위, H20, 부활 등의 밴드들이 이전 세대와는 다른 연주 패턴과 강력한 사운드를 가지고 한 무리의 록 매니아들을 이끌었다. 앞의 것은 이른바 ‘소극장 문화’의 모태가 되었고, 뒤의 것은 90년대 록의 음악적 기초를 닦았다.

폭압적이던 80년대가 끝나면서 록음악 역시 새 국면을 맞게 되었다. 대중음악계는 88올림픽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공중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중음악은 공중파 방송을 중심으로 상업화되고 체계화되면서 보다 규모도 커졌다. 거기에는 이른바 ‘X세대’라 불리우는 신세대의 세대적 감수성 역시 크게 작용했다. 신세대는 ‘난 너와 달라’하고 이야기하는 개성세대이기도 하고 이른바 ‘십대 상품’의 주요 소비자들이기도 했다. 그 양면성을 가장 잘 보여준 밴드는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그들은 80년대의 헤비 메탈과 새롭게 등장하던 장르인 힙합을 혼합하여 춤과 노래, 랩이 동반된 새로운 록 스타일을 선보였고,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대규모의 상업적 홍보와 물량공급, 신속한 대중적 인지가 성공의 열쇠였다. 그 성공을 거둔 가수들은 이른바 ‘메이저’ 가요판에서 가수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 메이저에 관심이 없거나 메이저의 행태를 경멸하는 젊은이들은 다른 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반항적인 그런지록 밴드 '너바나'의 음악을 알고 있던 일군의 젊은이들은 따로 모였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인디 록 씬이 시작되었다.

인디 씬은 기본적으로는 소비적 자본주의의 심화와 관계가 많다. 마치 1960년대의 히피즘이 미국 소비자본주의의 자식이면서 동시에 그 대립항(카운터컬쳐)인 것처럼, 한국의 인디씬 역시 한국적 천민자본주의의 산물이자 대립항이다. 소비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각자의 ‘방’을 선물했다. 그 방안에는 컴퓨터가 있고 컴퓨터는 통신으로 바깥과 연결되어 있다. 자기만의 문화공간이 확보되는 동시에 어른들 드나드는 현관을 통하지 않고 그것을 소통할 수 있는 창이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상업적인 주류문화의 대립항이 생길 조건을 심화시킨다.

한국에서 십대들에게 그러한 조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 대략 올림픽 이후, 1990년대 초반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마침 미국의 X세대들이 1980년대 내내 닦아왔던 언더그라운드 인디 씬이 물 위로 솟아 대중화된 이른바 ‘그런지 록’의 시기와 겹친다. 그런지를 발견한 이후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몇 갈래의 록음악들이 줄줄이 발견되었다.

인디 록은 또한 한국에서는 1990년대의 특수한 문화적 상황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앞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디 록은 하나의 문화 현상인데, ‘대안’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진 인디는 하나의 문화운동이기도 했다. 나 자신도 1990년대 후반,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인디 록을 바라보았다. 다음과 같은 글이 그 때 쓴 것인데, 지금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시각화되어 있던 시기를 보여준다.

카프카가 ‘길은 없다. 다만 망설임만이 있을 뿐이고 그게 길이다’ 뭐 이런 것 비슷한 말을 했을 때, 그 망설임은 계속 가겠다는 의지의 유혹의 다른 이름이다. 기능하는 척 하면서 뒷다마까고, 튀고, 또 ‘니들 뭐야?’하면 기능하는 척 하고, 반칙해놓고 심판에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빈 두 손을 내미는 레슬링 선수처럼, 심판이 돌아서면 다시 호박을 병따개로 조지고 마는, 그 사기빨 어린 생존의 본능을 갈고 갈아 끝까지 좆같이 굴면서 살아남겠다는 것이다. 고상한 놈 : 장사아치의 이분법이 누구한테 유리하냐면, 결국은 크게 장사해쳐 먹는 놈들한테 유리하다. 고상한 놈하고 큰 장사꾼 놈들하고가 다 한 통속 아닌가. 저열한 장사아치가 되면서 고상한 놈들의 메뉴를 솔솔 뺏어먹는, 인디꾼은 공룡 틈에서 노는 쥐이다(인디레이블에 관한 보고서, 성기완, 1999).

이처럼 문화운동적인 발상으로 인디 록을 대했던 시기의 성과를 논하는 것과는 별도로, 인디 록의 발생 배경에는 이와 같은 비주류적 태도가 표명된 상태든 아니든, 어떤 방식으로든 들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인디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디 록을 이끄는 장르는 아마도 펑크(punk)일 것이다. 직접적인 외침의 성격이 강한 펑크는 커뮤니티 형성에도 다른 어떤 장르보다 직접적이다. 아무렇게나 몸을 움직이는 슬램 댄스(slam dance)를 통해 청중과 뮤지션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한국에서 펑크적 감수성을 가장 처음, 그리고 자연스럽게 표현한 밴드는 크라잉 넛이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펑크 밴드라 할 그들에게서 1970년대 펑크의 대표라 할 섹스피스톨즈 같은 자기 파괴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이 차이가 우리 펑크의 특수성을 잘 말해준다.

크라잉넛은 자기를 파괴할 이유가 없다. 미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집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서울의 중산층 아파트에서 잘 먹고 잘 큰 아이들이다. 왜 그렇게 키가 안 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 하나만 빼놓고 그들의 몸이나 정신은 매우 건강하고 건전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펑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제대로 잘 키운 중산층의 체제 자체가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 고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1980년대 젊은이들처럼 주먹을 높이 치켜세우고 심각하게 고발하지 않는다. 특유의 장난스러운 제스츄어와 쇼맨쉽으로 비꼬고 웃기는 가운데에서 넌지시 고발한다. 자신들의 삶과 함께 해온 미디어에서 본 것들을 흉내내기도 하고 따오기도 하면서, ‘서커스 매직’을 하면서 세상을 부정한다. 그러니 그 고발은 때로는 장난이다. ‘심심함’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그들의 노래 곳곳에서 TV가 발견된다. 그들은 미디어와 함께 자랐고 스스로도 그 안에 있다. 그들은 주인공들을 보며 자라서 나중에는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사는 미디어 키드들이기도 하다.

펑크처럼 시끄럽고 나대기 좋아하는 아이들의 장르가 있는가 하면 조용하고 내면적인 방식으로 호소하는 록도 있다. 일반적으로 ‘모던 록’이라는 장르로 대표되는 이런 부류의 음악을 하는 대표적 밴드로 ‘델리 스파이스’와 ‘언니네 이발관’ 같은 밴드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밴드는 모두 1990년대 초중반의 이른바 ‘컴퓨터 통신’ 세대가 결성한 밴드이다. 통신은 외부와 표면적으로는 단절되어 있지만 내면들끼리는 공감을 나누는 독특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1990년대의 인디 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바깥으로 돌기를 꺼려하고 혼자 시간보내는 일을 즐겨하는 부류의 감수성을 교류해주는 통로 역할을 함으로써 그와 같은 부류의 음악을 서로 나누려는 사람들에게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 이외에 인디 록 씬 안에서 활동하는 또 하나의 부류가 의식적 전위주의적 추구의 일환으로 록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다. 그들은 고상한 것과 키취(kitsch)적인 것, 전위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들 사이의 경계를 지우면서 새로운 미학적 플랜을 세우는 일을 인디 록 씬 안에서 수해한다. 대표적인 뮤지션으로는 '어어부 프로젝트'와 '황신혜 밴드'를 들 수 있다.

'어어부'의 3집 <21c 뉴 헤어>를 들으면, 이미 새롭다는 건 진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진부한 것을 하겠다고 나서며 다시 ‘뽕짝’을 취한다. 이 때 진부함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진부함은 일상이고 일상은 미친 것들을 질식시키고 있는, 겨우 겨우 억눌러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는 비니루다. '어어부'가 차용하는 뽕짝은 그 비니루의 다른 이름이다. 이번에는 뽕짝도 뽕짝이고 어딘지 곡마단 음악 풍의 곡들이 좀 있다. 곡마단은 재주꾼들의 집단이 아니라 ‘비정상’, ‘뜨내기’의 집단이다. 난쟁이, 고아, 거인, 건달, 불돌리는 신사; 미래는 없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노래한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덮어두고 있는 언어, 금기의 언어들이다. 금기의 언어는 아이의 언어. 그래서 멜로디는 동요다. 장형규의 편곡은 싸구려 브라스와 감상적인 베이스와 드라이브감 있는 기타를 잘 버무린다. 그는 또 악기를 도입하는 감각이 뛰어나다. 새롭고 개성있는 사운드로 느껴지도록, 그러나 자연스럽게 새 악기들을 도입한다. 거기에 백현진의 엽기적인 노래말과 목소리가 덧입혀진다. 오버액션, 과다 노출, 울부짖음, 그리고 침묵. 제목들 좀 봐라. 초현실 엄마, 레이다 이마, 종점 보관소, 밭가는 돼지, 살이 많은 거구. 이런 종류의 음악은 무엇보다도 상황적이다. 하이퍼 리얼한 오버 액션 상차림인 이 상황들 속에서, 전위적이고 엽기적인 것들은 때로 대중적인 맥락을 지니게 된다. 맥락들은 거꾸로 음악 자체에서 이해되기 힘들었던 것들을 이해되도록 만들어 준다.

'황신혜 밴드'의 음악은 '어어부'보다 더 직접적으로 키취적이다. 현재는 김형태의 '원맨 밴드'가 된 이 밴드의 최근 앨범을 들어보면, 음악적인 전개 방향이 전자음악 쪽인 것을 알 수 있다. <병아리 감별사 김씨의 좁쌀 로맨스>는 '황밴드'의 기념비적인 새 출발을 알리는 앨범이다. 앨범의 제목은 '황밴드'의 전매특허인 ‘일상을 코믹하게 비비꼬기’를 연상시키면서 '황밴드'의 원래 기조를 유지하는 듯 하지만 음악을 들어보면 오히려 그 너무 '황밴드' 다운 앨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새롭다. 그의 음악을 ‘뽕 라운지’라 부르면 어떨까. 이박사식의 뽕짝 테크노적인 요소들을 하우스에 접목시킨 사례는 많았지만 그것을 ‘라운지’적인 요소와 접목시킨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 아닌가 싶다. 이러한 ‘라운지’적인 측면은 김형태가 그 동안 각종 전시회, 연극 등에서 특유의 ‘뽕라운지’를 위탁, 제조해왔던 것과 관계가 깊다. 실제로 몇 개의 트랙은 쌈지스페이스 같은 갤러리에서 들었던 음악이기도 하다. 이 라운지적인 기분은 리듬의 특수성에서 오기도 하다. 그의 리듬은 8비트, 16비트처럼 딱딱 떨어지는 박자들을 많이 배제하고 있다. 그는 드러머가 아니다. 또 어려서부터 드러머의 그 박자들에 훈련된 록 뮤지션이 아니다. 그의 리듬은 중심이 없이 흩어져 있는데, 중심이 없는 그 리듬들은 그의 음악을 일종의 라운지로 만들고 있다. 뽕짝에서 강태환의 프리 색소폰 선율까지 모든 것이 한데 샘플되어 버무려져 있는 이 앨범은 결국은 모든 음악을 키취의 선상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그 안에서는 위도 아래도 없고 주인도 없다. 그런데 키취적인 접근법 특유의 코믹한 내러티브를 얹은, 그래서 어쩔수 없이 코믹하게 들어야 하는 노래들에서조차 고독한 그림자들이 떠다닌다.

그 밖에 달파란 같은 뮤지션들은 기존의 록 음악의 언어를 답습하기를 거부하고 테크노 쪽에서 새로운 추구를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뮤지션들도 인디 록 씬을 이루는 또 하나의 중심적 부류로 볼 수 있다. 훈련된 음악인이면서 동시에 인디 록적인 태도를 갖는 이 뮤지션들은 인디 록의 문법 자체를 세련된 것으로 다듬고 새로운 사운드를 제시한다. 달파란이 1990년대 후반에 낸 <휘파람 별>은 테크노이긴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인디 록 씬에서 배출된 기념비적인 음반으로 취급할 수 있다. 록 밴드 '시나위'와 '삐삐롱스타킹'에서 활약한 바 있는 명 베이시스트 달파란(강기영)의 이 앨범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앨범의 서술자는 우주여행을 하다가 휘파람 혹성에 도착하는데, 거기에는 ‘비닐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단순한 논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닐의 삶이 우리의 삶이다. 비닐의 삶은 생명감이 박탈된 삶이다. 비닐은 하루 하루를 공허하게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산다. 테크노는 그 리듬을, 어쩌면 극단적으로 그 리듬만을 음악적으로 재현한다. 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가령 ‘이파리의 삶’과는 다르다. 휘파람은 비닐이 하는 음악의 다른 이름이다. “휘파람을 불며 언덕을 넘을 때에는 오직 기쁨만이 존재한다.” 이 음악은 거창한 ‘의미있음’을 거부한다. 음악은 리듬의 전면적인 지배 속에서 그저 흐를 뿐이다.

달파란은 비닐의 삶의 여러 구석을 조금씩 다른 스타일의 리듬을 도입시키면서 보여준다. 휘바람 도시, 휘파람 뉴스, 휘파람 코믹 댄스 파티 등등...여행의 코스마다 하우스, 드럼 앤드 베이스, 트랜스, 그리고 신바람 이박사가 스타일화시킨 2박자 패턴의 한국적 테크노(뿅뿅거리는 사운드) 등 다양한 테크노의 장르들이 소개된다. 그가 구사하는 리듬들은 그의 베이스 플레이를 연상케 한다. 이 리듬들은 필요한 자리를 찾아 간결하고 적절하게 ‘꽂힌다’. 그는 “휘파람 혹성을 떠나며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난다”고 말한다. 끝없는 모색의, 모험의 길이다.

나오며: 통로로서의 록

지금까지 간략하게 우리나라에서 수용된 록의 여러 측면을 수용기와 일상화되는 시기(1960년대-1970년대, 대안으로 재인식되는 시기, 1990년대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록이 우리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세계적인 문화적 과정의 소수집단 내부로의 내면화 과정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 몸담고 있던 문화의 점차적인 망각화, 소외화 과정과도 겹친다. 개인적으로도 참여한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은, 이게 과연 누구의 것이냐는 것이었다. 나의 아이덴티티는 사실 혼란스럽고 중심이 없다. 국악은 뼈 속에 들어 있어 내 심금을 울리지만 그 문법을 나는 모른다. 아마도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나와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이런 때, 과연 나의 것은 어디 있으며 내가 하고 있는 인디 록은 누구의 것인가. 이것이 내 것인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 우리가 겪은 인디 록의 경험을 기술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록 음악은 그저 수용되었다기 보다는 우리의 삶 자체의 변화와 자연스레 맞물리며 우리에게 내면화된 장르다. 사실 산업화 과정에서 유럽의 많은 나라 젊은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은 바 있다. 가령 스웨덴에서 나온 어느 록 연구서의 서두에 이런 말이 나와 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웨덴의 록 음악은 별로 독창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영미의 모델을 모방하는데 그쳤었다. 그러나 1970년을 기점으로 매우 힘있고 잘 조직된 청년 음악 운동이 발흥하여 많은 밴드, 클럽, 음반사, 배급사 등이 생겨났고 사실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가사를 동반한 자국 내 록음악이 소통될 대안적인 씬과 채널이 형성되었다(In Garageland, Johan Fornäs Ulf Lindberg, Ove Sernhede 공저, 1995, New York, preface 중에서).

물론 20년 가까운 시간차가 있고 우리만의 지역적 특수성이 있지만, 이 책은 우리의 록 음악을 연구하는데에도 참고해볼만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결국 전 세계의 산업화된 로컬에서 록 음악은 일정하게 작용했고 지역의 문화 속에서 변형되며 새롭게 생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록음악은 누구의 것인가. 나의 잠정적 결론은, 우리 고유의 음악적 언어가 아니지만 사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우리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지금까지 봐왔듯이, 록음악은 미국 사회의 문화적 주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흑인 방랑객들의 타령, 다시 말해 ‘블루스’로부터 비롯한 음악이고, 따라서 어느 미국 백인을 붙들어 세워놓고 ‘이게 엄밀히 당신 것이오?’라고 물어 본다 쳤을 때, 만일 그가 분별력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분별력이 없는 백인은 ‘물론 이게 내 거요’이라고 대답할 것이 뻔하지만), ‘그 모든 문화적 가능성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관대하게 봐주는 것이 미국 문화의 핵심이라면 바로 그런 aus에서 우리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라 해도 쉽사리 ‘이것이 내 것’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그렇다고 미국의 흑인들도 ‘이게 내 것’이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만일 ‘힙합’의 경우라면 조금 사정이 다르다. 분명히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분리거주지역(게토)에서 출현한 문화적 스타일인 힙합은 흑인들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록’의 경우는 그 보다는 많이 보편화되어 있을뿐더러 백인적인 방식으로 ‘포장’도 많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미국의 흑인이라도 그리 편하게 ‘이게 바로 내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비틀즈를 배출한 영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틀즈는 분명히 영국 사람들이고 그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은 뭐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들이 한 음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이것은 바로 영국의 것’이라고 아무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영국의 60년대 록큰롤 뮤지션들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북부 액센트를 쓰는 푸른 눈의 블루스 가수’라는 표현은 이 음악이 얼마나 복잡한 문화적 뒤섞임을 겪고야 태어난 음악인지 극적으로 말해준다.

그렇게 따지면 이 지구상의 누구도 록음악에 관하여 ‘이게 내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대신 그 누구도 자연스레 록의 어법에 접근할 수 있다. 서울에서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아프리카에서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12 마디 블루스의 코드 진행을 가지고 잼을 할 수 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도 그 진행을 통해 서로의 느낌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록음악은 서로의 문화적 가능성이 만나는 자리이다. 일종의 알파벳인 것이다. 알파벳을 가지고 ‘이게 누구 거냐’를 따지는 일이 별무소득인 일인 거나 마찬가지로, 록음악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도 특별히 똘똘한 짓은 아니다. 그 통로를 통해 우리도 조금은 편하게 나다닐 수 있다는 것이 문화적으로는 더 중요해 보인다. 지금은 어차피 ‘탈당대적’인 시대이다. ‘지금-여기’라는 개념 자체가 탈 ‘지금-여기’를 품고 있다.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공간적으로 여기와 저기를 뒤섞고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시대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얼굴을 지운 수많은 익명의 문화적 흔적들이 들어 있다. 그것들이 아주 손쉽게 섞이고 또 새롭게 조직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록음악이 ‘훌륭한’ 문화적 통로라고 말하지도 말자. 그저 록음악은 그런 시대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가장 ‘흔한’ 통로이다. 흔하디 흔한 그런 길 말이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지우고 너는 너를 지우고 우리는 우리를 지우며 오히려 더 큰 자아를 얻는다. 이건 일종의 벗어남일 텐데, 록음악은 그런 ‘벗어남’을 실천하는 하나의 흔한 장치가 될 수 있다.


검색어: 록음악, 인디록, 세계음악, 대중음악, 블루스, Rock, Blues,    Worldmusic, Popular Music,

<Abstract>

Rock in Korea: Certain World Experience

Ki-Wan Sung

I would like to talk in this paper about the rock music of South Korea. In its former part, I discuss it in the period of its acceptance and settlement into Korea, and in its latter part, its further offshoots as Korean independent rock groups began to immerge in the 1990s,  The discussion reflects in overall not only an object viewpoint from a sort of cultural history, but also an my own personal views from my experiences as a performer and/or critic.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why and how the rock music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our tradition and culture, had came to our life, react with us and finally internalized in us. The Korean rock music is one of our world experience.


 


 1) 인디 록은 independent rock의 준말이다. 이 때 indepenent, 혹은 indie라는 단어는 복합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데, 대체로 뮤지션들이 취하는 삶의 태도, 생성유통과정, 대중적 인지도, 음악의 성격 자체 등에서 주류 팝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비주류적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면 될 듯하다. 인디 록이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 정초된 개념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남한 땅에서 통용되는 개념인 것만은 확실하다. 인디 록 자체도 주류 팝 시장의 좌판에서는 그 구색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르의 하나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럴 때조차도 앞서 말한 비주류적 ‘거리’는 유지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인디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정확한 음악적 가늠자는 사실상 없다. 예를 들어 윤도현 밴드의 음악은 인디 록이 아니고 크라잉 넛의 음악은 인디 록이다. 아무리 한 무대에서 이들이 비슷한 음악을 해도 그 구별은 청중들에게, 뮤지션 자신에게, 그리고 평론가들에게 유효하다. 이러한 구분은 일종의 습관일 수도 있고 팝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자기규정일 수도 있다. 앞으로 내가 ‘인디 록’이라 부르는 록음악들은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정확히 인디 록의 범주에 드는 음악들이라기 보다는 그 동안 나의 경험상 인디록 씬에서 활동해온 것으로 여겨지는 록음악들을 칭하는 개념이 될 것이다.

 2) rock 이라는 장르에 관한 개념 규정도 수많은 방식이 있다. 좁게는 전기 기타와 드럼을 중심으로 한 밴드 음악(비틀즈 이후)에 한정시킬 수도 있고 넓게는 테크노까지를 포함하여 1950년대 미국의 록큰롤 혁명과 그 이전 흑인들의 리듬 앤 블루스(rhythm & blues), 그리고 60년대 영미의 발전으로부터 직간접으로 영향받은 전세계의 모든 음악을 포괄하는 개념일 수도 있다. 록큰롤을 ‘록’으로 줄여 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60년대 중반쯤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록 음악의 미학적 플랜이 완성되던 때와 맞물린다. 이 글에서 나는 비교적 넓은 의미에서 록이라는 개념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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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프레이야 > [퍼온글] 만레이특별전 및 세계사진역사전

만레이특별전 및 세계사진역사전



* 전시일정 : 2006.11.04.토~2006.12.16.토
* 전시장소 :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
* 참여작가

만레이 (Man Ray) 헨리 빅터 루루(Henri-Victor Reqnault), 나다르(Nadar), 으젠느 앗제(Euge Atget), 에드워드 머이브릿지(Eadweard Muybridge), 자끄-앙리 라르띠끄(Jacquse-Henri Lartique), 에티엔느 쥬르 마레(Etienne Jules Marey), 조엘 스턴펠드(Joel sternfeld), 바바라 카스턴(Barbara kasten), 안드레 케르테츠(Andre kertesz), 로베르 드와노(Robert Doisneau), 브랏사이(Brassai), 빌 브란트(Bill brandt) 윌리암 클라인(Williamklein), 로버트 프랭크(Robertfrank), 베르나르드 포콩(Bernard faucon), 안셀 아담스(Ansel adams), 조엘 메이어로위츠(Joel meyerowitz), 장 글로버(Jan groover),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헨리 캬라한(Harry callahan), 아론 시스킨드(Aaron siskind), 로버트 메이플소프(Robert mapplethorpe), 리처드 아베돈(Richard avedon), 브루스 데이비드슨(Bruce davidson), 게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 리 프리들랜더(Lee friedlander),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 유진 스미스(W. eugene smith), 로버트 카파(Robert Capa) 등



만레이 사진전 및 세계사진역사전이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1층 1, 2관 전관에서 11월 3일부터 12월16일까지 대규모로 열립니다.

1관 : 추상주의사진의 대가 -만레이의 사진전-(1920년대-1930년대)를 중심으로
2관 : 세계사진역사전 -나다르에서 브레송까지-(1850년부터 2000년까지)- 근대 사진을 중심으로 동시에 2개의 전시를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만레이 사진전과 세계사진역사전등 총 350점은 대부분이 빈티지 프린트로 전시될 예정이며, 이러한 사진전은 세계 어느 미술관에서도 볼 수 없는 대규모 사진전으로 지금 한국에서 한창 사진의 붐을 조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주 좋은 전시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만레이는 추상주의 리더격인 앙드레 브르통과 뒤샹등과 교우하며 추상주의가 한창 무르익을 때인 1920-30년대에 촬영한 대표적인 사진을 중심으로 보여줄 예정입니다.

만레이는 1890년 필라델피아 태생으로 부르클린에서 자랐으며, 1912년 가족과 함께 이름을 만레이라고 개명하였습니다. 만 레이는 1915년 마르셀 뒤샹을 처음 만나 같은 해, 첫 개인전의 카다로그를 복사하기 위해 카메라를 처음 접하면서 매우 실험적인 작업을 펼쳤으며, 뒤샹과 함께 [뉴욕, 다다]라는 잡지를 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1921년에 미국을 떠나 파리에 머물면서 다다, 쉬르레알리즘의 중요한 작가인 프란시스 피카비아의 부인으로부터 그 당시 프랑스 패션계를 주름 잡던 폴 푸아레를 소개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패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1936년부터 37년을 기점으로 패션 잡지 [하퍼스 바자]에 사진을 제공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개성 넘치는 사진들은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모델 키키, 조수이자 연인이었던 리 밀러, 쉬르레알리즘의 기수 메렛 오펜하임, 아이디어의 원천이었던 부인 쥴리엣 등은 그의 모험에 가득 찬 작업들의 훌륭한 모델들이었습니다.

만레이는 미의 모험자이며, 미의 실험자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작품을 제작한 멀티아티스트였습니다. 그 쟝르의 폭은 사진을 중심으로 회화, 설치, 수채, 소묘, 조각 뿐만 아니라 실험적인 영화 제작에까지 이르렀으며, 특히 사진에 있어서는 최초로 솔라리제이션, 레이오그램이라 불리는 독특한 기법을 활용하여 전위적인 사진을 제작 하였습니다.

- 세계사진역사전 -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학사원에서 파리의 천문대장인 프랑소와 아라고가 다게르가 발명한 다게레오타입를 공표하여 정식으로 사진술 발명 되었을 때, 이 과학과 예술이 융합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기계는 당시의 교통의 확대와 정보망의 침투에 의해서 급속도로 세계로 전해져 갔습니다.

사진이 공표 된 이후, 167년이 지났습니다. 이번 전시는 1850년 부터 2000년까지 150년간의 사진을 프랑스 ,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세계 최고의 사진가로 사진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20세기 사진역사에서 빼놓을수 없는 작가들입니다.

이번 사진전은 파리라는 구도시와 뉴욕이라는 신도시의 사진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며, 사진의 역사가 다게레오타입의 시대와 신흥사진의 시대의 황금시대를 거쳐, 21세기 디지털의 보급과 함께 많은 사진인구가 급속히 팽창한 가운데, 사진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시점에서 세계사진역사전을 개최한다는데 큰 역사적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이들 작품은 대부분이 빈티지 프린트로 초기의 1850년대 작품은 한점에 1억원대의 사진들이며 전체 가격만 하더라도 50-80억대의 고가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홈페이지 발췌 http://www.gallery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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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유럽센트럴

다시 노벨상의 계절이다. 노벨상의 꽃으로도 불리는 문학상은 관례대로라면 내주 목요일쯤 발표될 예정인 걸로 아는데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후보들이 매번 쓴잔을 마셨던 '관행'을 고려하면 이번에도 의외의 다크호스가 등장하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노벨문학상 얘기를 꺼내자고 한 건 아니다.  '북데일리'의 '세계의 책' 코너를 오랜만에 훑어보다가(한동안 활발하게 기사가 올라오던 이 코너는 현재 '개점휴업중'이다) 작년도 전미도서상 픽션부문을 수상한 <유럽센트럴>에 다시 눈길이 갔다.

연휴의 막간에 잠시 수다를 늘어놓자면, 작년 12월쯤인가 우연히 기사를 읽고서 나로선 생소한 작가 (하지만 '젊은 거장'이라는) 윌리엄 폴만(1959- )의 책들을 두어 권 아마존에서 구입한 기억이 있다. 물론 <유럽센트럴>을 포함해서. 부담스런 분량 때문에 국역본이 곧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미국내에서는 가장 권위있는 상의 하나인 전미도서상도 아직까지 한국의 독자나 시장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란 사실만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혹 관심있는 분들이 있을까 하여 거의 1년 전 기사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북데일리(05. 11. 21) 소설 '유럽센트럴' 전미도서상 수상

미국 현대문학의 다크호스로 알려진 윌리엄 T. 폴만(46)의 소설 <유럽센트럴>(바이킹. 2005)이 올 전미도서대상 픽션부문 대상에 선정됐다. '내셔널 북 기금'이 주관하는 전미도서대상은 미국에서 매년 픽션, 논픽션, 시, 아동문학 4부문에서 매년 뛰어난 문학작품을 저술한 작가들에게 주는 문학상으로 퓰리처상과 함께 미국의 가장 큰 문학상 가운데 하나다.

폴만은 픽션과 저널리즘의 서술 기법을 차용해 작품의 독창성과 대담한 묘사로 독자와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어 왔다. 추리소설을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쓰거나 창세기의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폴만은 "예술을 위해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적인 장르에서 영혼을 불러내는 작품을 쓸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유럽센트럴>의 37개 에피소드는 2차대전을 전후한 당시 나치와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광신적인 유럽 통치체제를 그리면서 이에 대항했던 알져지지 않은 저항사를 복원시키고 있다. 폴만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소설은 인상깊은 스토리라인을 특징으로 하면서 각 에피소드는 연대순으로 나열돼 소설의 구성을 완성시키고 있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 정치체제부터 독일의 급부상, 동쪽으로는 러시아의 반격 그리고 동서체제로 나뉜 베를린의 냉전으로 끝을 맺는다.

20세기 소련과 독일의 호전적인 권위주의 정치문화에 눈을 돌린 폴만은 전쟁이 가져다 준 비극에 대한 인간의 행위와 저항에 초점을 맞춘다. 유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한 다양한 등장인물을 통해,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내려야만 했던 윤리적인 판단과 목숨을 건 결단을 비교하고 대조시킨다.

특히 시인과 미술가 등 예술가들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도 눈길을 끈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소련 작곡가 드리트리 쇼스타코비치, 그와 그의 작품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공격했던 스탈린주의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쇼스타코비치와 엘레나 콘스탄티노프스카야, 영화감독 로만 카르멘 사이의 삼각관계도 다루었다.

나치친위대 SS장교인 쿠르트 게르슈타인의 생은 보다 극적이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을 모집했던 임무를 맡았지만 게르슈타인은 전세계에 나치포로수용소의 위험성 경고했다. 케테 콜비츠(독일 여성판화가), 안나 아흐마또바 (러시아 여류시인), 마리나 쯔베따예바(러시아 여류시인), 반 클리번(미국 피아니스트) 등 당시 예술가에 얽힌 에피소드 담아냈다.

소설의 중심적인 배경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을 알리는 바르바로사 작전,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퇴 과정이다. 전쟁의 역사 속에서 상처와 고통을 입은 수백만명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폴만은 자신만의 독특한 목소리로 전쟁의 역사 속에 묻힌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북데일리 노수진 기자)

06. 10. 06.

 

 

 

 

P.S. 대략적인 줄거리만으로 '이거다!' 싶은 소설이었다. 문학의 죽음이나 종언론 따위가 엄살이라는 보여주려면 이 정도의 스펙타클은 써줘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소설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일컬어지는 '제1세계'에서 아직까지 이런 문학의 씌어진다는 사실이 (좁은 견문에) 다소 의외였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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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세기의 이론서 21권

지난 월요일 교보에 잠시 들렀다가 발견한 의외의 책은 <테오리아 - 20세기를 대표하는 21권의 책>(개마고원, 2006)이었다. '이론(theory)'이란 말의 그리스 어원인 '테오리아'를 국역본의 제목으로 삼았는데, 독어본의 원제는 '세기의 책'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세기가 지난 세기이므로 '20세기의 책'이라 해야겠고, 그 책들이 모두 분류상 '이론서'들 그러니까 테오리아의 어원적 의미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들을 대표하는 책 21권에 대한 평설집이라고 해야겠다. '20세기의 이론서 21권'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유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독일에서 개최된 ‘세기의 책-20세기의 이론들’이라는 기획 강의를 바탕으로 했다. 크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의 사유전통과 학문분야가 20세기에 거두었거나 적어도 거두려고 애쓴 성과는 무엇인가?”와, “그 학문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시대에 관여했고, 구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위대한 이론은 무엇인가?”의 두 가지 문제 제기를 통해 산출된 결과물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론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지속적인 시사성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정한 프로이트에서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21명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책, 이론들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각의 독특한 접근방법과 깊이를 가지고 밀도 있게 소개했다."

국내에서도 쏟아지고 있는 고전해제서들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문제는 그 해제/평설의 수준이겠다. "난해한 이론서들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해당 이론서들을 직접 읽어보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해줄" 수 있는 수준 말이다. 그리고 물론 그것이 적절하고 정확하게 우리말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21권의 이론서를 다루고 있는 만큼 600쪽 이상의 분량을 자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일단은 관심이 가는 책을 다루는 장들만 골라서 읽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 시간조차 낼 수 없다면, 20세기를 '이론적으로' 관조하는 일에는 마음을 접고 눈길을 떼는 게 옳다. 그리고는 21세기만을 한눈팔지 않고 질주하는 게. 굿바이!

남은 자들끼리 누리는 호사가적 관심거리는 과연 21권을 고른 주최측의 안목(편견 혹은 혜안)을 음미해보는 것이겠다. 대략 '상식적인' 리스트인지라 모험적이라고 할 만한 책을 그닥 눈에 띄지 않지만 몇 권 정도는 '독일'쪽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한데, 이 21권 가운데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 '아르바이트' 중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세어보도록 한다.

1.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 레나테 슐레지어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저작 <꿈의 해석>은 주지하다시피 여러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다. 비록 번역서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찜찜하다는 의견이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생각의나무, 2006)에서 제기된 바 있지만.

2. 후설의 <논리 연구> - 미하엘 아스트로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저작들이 제법 소개되었고 연구서/논문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지만, 특이하게도 그의 초기 대표작인 <논리연구>는 번역돼 있지 않다. 분량의 방대함이 이유인지 내용의 난해함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고전'의 네임밸류에 걸맞는 번역본이 조만간 나오기를 기대해본다(여담으로 덧붙이자면, 후설의 책은 왜 <논리적 탐구>가 아니라 <논리연구>인가, 혹은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왜 <철학연구>가 아니라 <철학적 탐구>일까?).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헤르베르트 야우만

 

 

 

 

지난 1995년에 범우사판으로 나와 있는 <서구의 몰락>이 유일한 완역본이 아닌가 한다. 대학원 시절에 필요 때문에 1권만 사서 부분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세기의 책'에 꼽힐 만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책이지만, 프랑스에서 21권을 꼽았다면 들어갈 수 있었을까? 

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 한스 위르겐 헤링어

 

 

 

 

올해 책세상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새로운 전집이 나오고 있고, <논리철학논고>는 그 전집의 첫권이었다. 두툼한 <철학적 탐구>보다 얇은 <논고>가 선정된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 <탐구>를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약간을 덜어주니까 말이다. <논고>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해설서로는 박영식 교수의 <비트겐슈타인 연구>(현암사, 1998)가 있다.

5. 베버의 <경제와 사회> - 볼프강 슐룩흐터

국역본은 <경제와 사회 1>(문학과지성사, 2003)으로 출간되었다. 소장도서가 아니어서 당장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완역본은 아니고 더 출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뜨지 않아 대신에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6.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 위르겐 미텔슈트라스

 

 

 

 

두말할 것도 없는 책. 5권의 파이날(결선)을 꼽더라도 당연히 들어가야 할 책이다. 국역본으로는 이기상(까치글방, 1998), 소광희(경문사, 1995) 두 분의 번역본과 해설서를 각각 참조할 수 있다.  

7.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 - 헬무트 레텐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의 저작들은 비교적 많이 소개돼 있는 편이고 거기엔 물론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도 포함된다. 하지만 당장 서점에서 구해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짐작에 21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얇은 책이지 않을까 싶다. <논리철학논고>보다는 얇은 듯하니까. 이미지는 역시나 영역본의 것을 옮겨놓는다.

8. 겔렌의 <인간> - 카를-지크베르트 레베르크

 

 

 

 

아르놀트 겔렌은 '철학적 인간학'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보다 잘 알려진 철학적 인간학자로는 막스 셸러가 있지만(국내에도 더 많이 소개돼 있다), 독일에서는 겔렌의 <인간>이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히는 모양이다. 겔렌이 책으론 <인간학적 탐구>(이문출판사, 1998)이 유일하게 번역돼 있는 책이지만, <인간>은 그보다 좀더 두툼한 책이다.

 

9.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 페터 뷔르거

 

 

 

 

사르트르에 대해서는 굳이 군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고(<존재와 무>도 새 번역본이 나올 수 있을까?), 다만 해설을 쓴 '페터 뷔르거'란 이름이 반갑다. <해설자들 가운데 내가 아는 두엇 중의 한명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론으로 유명한 문예이론가 뷔르거의 책은 <전위예술의 새로운 이해>(심설당, 1986)를 필두로 하여 현재 네 권 가량이 번역/소개돼 있다.

10.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 게르하르트 쉬베펜호이저

 

 

 

 

이 또한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이겠다. 또한 <계몽의 변증법>이 확실한 고전인 것은 완독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어쨌든 국역본의 역자가 전면 개정판을 내야했을 만큼 '난해한' 책이기도 해서 적절한 안내서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다(영역본의 경우도 몇년 전 전면개역판이 나왔다). 아도르노를 술술 읽는 사람들이 나는 부럽고 미심쩍다.

11. 보부아르의 <제2의 성> - 크리스타 뷔르거

 

 

 

 

사르트르 커플의 책들이 나란히 선정된 것도 눈길을 끈다. 이젠 여성학의 '고전'이라고 해야할 책(크리스타 뷔르거는 혹 페터 뷔르거의 부인일까?). 보부아르와 관한 특이사항이 그녀가 국내에서는 철학자로서는 거의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주로 출간되는 건 '사랑밖엔 난 몰라' 수준의 보부아르이다(그런 그녀가 여성학의 대모이다!).

12. 바흐친의 '변증법적 사유와 수사학' - 레나테 라흐만

 

 

 

 

특이한 일이지만 21권의 책이라고 해놓고 유일하게 구체적인 대표작이 명시돼 있지 않은 사상가가 바흐친이다. 일단은 국역본 <말의 미학>(길, 2006)을 대표작으로 꼽아둔다. 그리고 걸출한 연구서 <바흐친의 산문학>(책세상, 2006)은 나의 추천서이다. 해설자인 레나테 라흐만은 독일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이자 바흐친 학자이다. 역시나 아는 이름이어서 반갑다.

13. 레비스트로스의 <친족의 기본 구조> - 발터 에어하르트

 

 

 

 

물론 <친족의 기본구조>는 국역본이 나와 있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인데, <구조주의 인류학>이나 <신화학>보다 중요한 업적으로 간주하는 데에는 이 책이 구조주의 인류학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의 프로그램 자체를 가장 잘 보여준다는 판단이 전제돼 있지 않나 싶다. 회고 대담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에서 뒷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고, 책의 보다 구체적인 내용 해설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을 참조할 수 있다.

14. 루카치의 <이성의 파괴> - 라이너 로젠베르크

 

 

 

 

흔히 루카치의 범작으로 평가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세기의 책'으로 꼽혀 있어서 놀랐다. 미완의 번역본까지 치면 세 종류의 국역본이 나와 있기도 한 책. 데카당스(반합리주의) 철학 비판서 정도로 나는 알고 있다. 보통 루카치의 주저로는 <역사와 계급의식>을 꼽는 게 일반적인데, 해설을 읽어보고 소장여부를 판단해봐야겠다.

15.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 기젤라 페벨

 

 

 

 

두말하면 잔소리인 책. 하지만, 국역본은 분량상 아직 1/3밖에 나오지 않은 책. 그 사이에 영역본은 개역본이 나왔다. <논리연구>가 한국현상학회의 아킬레스건이라면 <진리와 방법>은 한국해석학회의 '굴욕'이라 할 만하다. 고전 번역에 단합해야 하실 분들이 담합하고 계신 건 아니신지?

16.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프란츠 폰 쿠체라

 

 

 

 

<과학혁명의 구조>는 국내에 2종의 번역이 있다. 까치글방본과 이화여대출판부본이 그것인데, 교수신문의 번역비평에 따르면 일장일단이 있지만 원저 자체의 난해함을 해소시켜주지는 못한다고. 학부 2학년 때 읽으면서 고전했던 기억이 새롭다(반면에 해설서들은 얼마나 단순명쾌한 것인지!).  

17. 푸코의 <말과 사물> - 우르줄라 링크-헤르

 

 

 

 

바케트빵처럼 팔려나갔다는 푸코의 이 주저 <말과 사물>(민음사, 1986)이 국내에선 절판중이다. 새 번역본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지만 '언제'라는 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우리의 빵집들이 고급 바케트를 내놓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제빵공은 있나?). 이미지로 대신 올려놓은 것은 개리 거팅의 <미셸 푸꼬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이다. <광기의 역사>부터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자세한 해설을 담고 있는 책이다.

18.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 베르너 슈테크마이어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도 절판된 민음사판까지 포함하면 2종의 번역이 나와 있다. 초기 데리다의 간판격이 책이지만 역시나 읽은 사람 몇 되지 않는다(나도 완독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국역본들 외에 영어, 불어, 러시아어본까지 갖고 있어서 언젠가는 마스터해줄 책으로 꼽고는 있다. 조만간 해설서들도 나올 듯하고. 현재까지는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 이론 읽기>(한신문화사, 1999)의 해설이 요긴하다.

19. 부르디외의 <실천이론 연구> - 에곤 프레이크

 

 

 

 

부르디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물론 <구별짓기>이지만, '이론서'로 꼽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나 보다. 한데, <실천이론 연구>가 정확히 어느 책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다. <실천이성>도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짐작엔 'The Logic of Practice'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역본의 제목이 그렇고, 불어본의 제목은 <실천의 의미> 정도이다. 러시아어본도 출간돼 있는 책.

20.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 - 콘라트 오트

 

 

 

 

올해 가장 번듯한 번역본이 나온 책. 역시나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21. 루만의 <사회의 사회> - 위르겐 포르만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 사회학을 양분하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책들은 국내에 좀 얄팍한 책들만 세권쯤 출간돼 있다. 거기에 입문서 한두 권. 그의 방대한 저작 <사회체계>가 구내에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 <사회의 사회>가 그 사회체계론의 일부인지 독립된 저작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해서 결론적으로 21권의 책들 가운데 5-6권 정도가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하다.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저작들의 지명도를 생각하면 3-4권은 더 번역돼 있어야 했다. 21권의 책들 가운데 독어권의 책이 13권이니까 과반수가 넘는다. 불어 6권, 영어 1권, 러시아어 1권 순이다. 한편, 우리가 자랑할 만한 '세기의 책'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06.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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