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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록: 어느 세계적 경험
성기완
들어가며
나는 이 글에서 남한의 록음악에 관해 말하려고 한다. 전반부는 남한에서 록을 받아들이던 때의 이야기가, 후반부에서는 특히 1990년대 이후 한국 인디 록(indie rock)1)의 경험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다. 전체적으로 이 글은 다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일종의 문화사적인 기술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후반부는) 내가 겪은 개인적인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적이면서 동시에 객관적인 역사적 관점을 취한다는 이 모순은 상당부분 그 동안 내가 취해온 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별로 훌륭하지는 않지만 직접 ‘3호선 버터플라이’라는 인디 밴드의 멤버(기타리스트)로 참여하고 있는 뮤지션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음악에 관해 글을 쓰는 이른바 ‘대중음악 평론가’이기도 하다. 나는 1999년 이후 거의 매 달 홍대 부근의 클럽에서 공연을 해왔고 그와 동시에 1997년 이후 거의 매주 새로운 음반(특히 록과 OST 분야)을 리뷰해왔으며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한국의 록음악계를 바라보고 그에 관해 글을 쓰는 생활을 해오고 있다. 어쩌면 불편한 지위일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자리 덕택에 나는 속에 들어 있으면서 그 속을 바깥에서 바라봐야 하는 모순된 창작/비평 행위를 계속해올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은 우선적으로 이와 같은 나 자신의 처지와 경험에 의해 조건지워져 있다. ‘세계음악’이라는 개념을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을 총칭하는 개념쯤으로 이해한다면 이와 같은 나의 글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음악’을 지금 전 세계의 각 문화집단 내에서 생성, 소멸되고 변화하는 현재형의 음악 전반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이 글이 그러한 범주 안에 존재하는 ‘세계음악’의 한 사례가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것 역시 약간은 개인적일 수도 있는데, 원래 우리 자신이 태어난 곳의 전통적인 음악적 문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록음악이 왜,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와 어떻게 우리와 반응하면서 내면화되었는지를 보는 것이다.
록의 특수성: 랑그 내부의 파롤
록큰롤 rock'n'roll의 준말인 ‘록 rock’은 1950년대 이후 영미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된 팝 음악을 총칭하는 개념이다2). 록은 오늘날 전 세계의 대중음악을 규정하는 가장 지배적인 음악언어이다. 잘 알려진 언어학 개념을 빌자면, 록은 전 세계의 비교적 산업화가 진행된 모든 곳에서 만들어지는 대중음악의 랑그(langue) 노릇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랑그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조차 가장 소외된 소수집단의 ‘파롤(parole)’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록의 기원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것은 역시 블루스(blues)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변방에 있고 소외된 상태에 있던 소수집단의 하나인 미국 남부 흑인 떠돌이들의 음악적 자기 표현 수단이 바로 블루스이다. 블루스를 노예해방 이후의 청년 흑인 세대가 갖는 세대적 불안의 표현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물론 모든 랑그의 기원에는 특정한 소수집단의 파롤이 숨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록처럼 랑그로서 기능하게 된 이후에도 여전히 문화적으로 소수인 사람들의 언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의 대중음악을 지배하게 된 블루스의 전 세계적 여행과 음악적 만남은 20세기의 가장 극적인 문화적 모험담의 하나일 것이다.
이처럼 소수자의 언어가 중심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더라도 록은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너무나 지배적이고 강대하다.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의 가장 일반적인 음악적 표현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록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한풀이 음악에 속하는 ‘블루스’에서 시작되었지만, 어느새 그것이 의미화되는 과정에서 ‘백인적인’ 것으로 변질, 포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일종의 ‘하이브리드,’ 즉 문화적 잡종의 탄생과정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백인들의 문화적 전략 속에 편입된 소수문화의 거짓 의미화로 바라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록은 지배적 언어로서의 랑그와 그 내부의 개별적 쓰임의 상태인 파롤이 서로를 밀쳐내면서 동시에 서로를 지탱해온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의붓아버지의 변증법: 수용기
록음악이 전세계적으로 전파되기 쉬웠던 것은 첫째로는 ‘음반’이라는 매체 때문이다. 잠재적으로는 무한한 복제가 가능한 음반의 전파력이 없었다면 록이 그토록 전세계적으로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반의 힘은 그대로 미국의 힘이다. 표준화와 자동화를 이룬 미국의 대량생산/소비 체제가 가지는 힘은 미국의 전세계적 정치적 지배력의 물질적인 기반이다. 더구나 미국은 전세계에 그 거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미군부대’이다.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흘러 다니는 미국의 대중문화는 그 물량만으로도 주변의 문화를 물들인다. 1960년대 독일의 함부르크가 록음악의 ‘변방의 중심’ 역할을 했던 것 역시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만을 가지고 록의 전파력을 이해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미국의 문화가, 예를 들어 햄버거가 전세계에 퍼지는 것을 순전히 미국의 지배적인 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 쪽을 뜯어볼 필요가 있는 것인데, 록이 그 해답의 중요한 열쇠를 제공한다. 록의 전파력 내부에는 앞서 말한 ‘랑그 내부의 소수자의 파롤’이라는 것이 있다. 지배자의 문화적 선물로 포장된 록의 포장을 뜯어보면, 그 안에는 그 지배자의 본토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들의 ‘파롤’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 파롤은 다시, 지배당하는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전파된다. 파롤이 파롤을 만나 공감을 형성한다. 사람들이 지배자의 언어로 받아들이는 순간에조차 그 언어는 피지배자의 파롤이라는 특수한 사정이 록의 힘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록큰롤이 남한에 상륙한 것 역시 1950년대 후반, 1960년대 초반의 일이다. 몇 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음반의 전파력 덕분에 록은 거의 동시대적으로 전세계에 유포된다. 그래서 급속도로 록 언어의 ‘당대성’이 전세계적으로 생긴다. 남한이라는, 세계문화지도상에서 극단적으로 변방에 위치한 땅에조차 록은 그 중심부의 모습이 거의 동시대적으로 공개된다. 록이 남한 땅에 들어올 때 남한의 대중음악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거칠게 말하여 ‘뽕짝’이었다. 뽕짝에는 한국이 한국이라는 땅의 호적에서 지워야만 하는 너무도 미운 의붓아버지, 일본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 그 의붓아버지의 문화적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전통가요라는 우스운 개념 속에 살아 있다. 어쨌든 1960년대 초, 당시의 젊은 대중음악인들은 새로운 의붓아버지의 힘으로 옛날 의붓아버지를 지우는 시도를 했는데, 그게 바로 한국적인 록큰롤의 첫 발자국이다. 의붓아버지로 의붓아버지를 지양하는 이러한 변증법이 의식적으로 시도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새 의붓아버지의 노도와 같은 힘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음악을 하려면 미 8군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는 신중현 씨나 심지어 강태환 씨 같은 음악가들의 술회는 우리에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선배들처럼 악극단에서 뽕짝이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는 것 자체가, 록이나 재즈 같은 미국의 음악적 언어가 남한 땅에서 수행한 문화적 역할의 일부를 말해준다. 즉 그것은 일종의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이기도 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반에 남한에 들어온 록은 젊은 뮤지션들의 모방기, 수련기를 거쳐 1960년대 후반에 가면 본격적으로 자기화된다. 그 ‘자기화’의 단초는 신중현이라는 뮤지션에 의해 마련된다. 그의 노래인 <꽃잎>을 보면 II도의 마이너를 쓸 자리에 메이저를 쓴 대목이 있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바로 ‘못 견디겠네’의 대목에서 사용된, C키의 노래에서 그가 쓴 II도의 메이저, 즉 D 메이저는 새 의붓아버지가 예전의 의붓아버지를 지운 극적인 순간을 표시한다. 이 메이저 진행은 1960년대 미국의 싸이키델릭 록에서 온 것이다.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의 <화이트 래비트>(White Rabbit) 같은 곡에서 두드러지는데, 순전히 메이저 코드로만 이루어진 이 노래에서의 상승진행은 사이키델릭 특유의 환각적인 고양감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메이저 진행은 F를 쓸 자리에서 F#을 쓰는 아이리쉬적 모드를 떠올리게 한다. 신중현의 기타 프레이즈 역시 F#을 짚는 믹소리디언적인 모드를 한국 가요에 도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도입은 허구헌 날 II도의 마이너를 쓰는 뽕짝의 일반적 진행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지우고 싶은, 그러나 운지법이나 흥얼거림 속에 판에 박은 듯 박혀 있어서 도저히 지우기 힘들었던, 옛날 의붓아버지의 그림자가 지워지는 순간이다.
너무나도 큰 습관의 바위를 깨기 시작한 첫 정 소리를 그가 쓴 II도의 메이저에서 들을 수 있다. 그에 의해 본격적으로 자기화되기 시작한 록은 1970년대에 이르면 ‘퇴폐’라는 명목으로 박정희 독재의 억압의 대상이 된다. 1960년대의 히피들이 하던 록 내부에 숨어 있는 자유의 정신을 박정희는 두려워했다. 신중현의 사이키델릭 실험은 1975년 대마초 사건과 함께 갑작스럽게 중단되고 만다.
그러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록의 언어는 ‘일상화’된다. 이 일상화는 산울림의 노래들에서 가장 두드러진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부른 <아니 벌써>라는 노래가 직접적으로 산업화의 바쁜 와중에 있는 당대(1970년대 후반)의 일상인의 모습을 그린 노래이긴 하지만 그 보다 덜 직접적이면서 언어적인 차원에서는 더 중요한 다른 사례들이 산울림의 노래들에서 많이 발견된다. 가령 그들의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라는 노래는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이렇게 시작하는데, 이 노래의 첫 대목인 ‘꼭 그렇진 않았지만’이라는 가사의 일상성을 한 번 주목해 보자. 중얼거리는 것 비슷한 멜로디에 실려 노래되는 이 일상어는 그 이전까지의 한국 록에서 별로 찾아보기 힘든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 가사는 한 떨기 꽃의 모습처럼 선명하게 이미지를 제공해야 하는 기존의 가사 관행을 뒤짚는다. 이 가사는, 의미를 명확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우는 듯한 모호성을 지니고 있다. 별로 할 필요도 없어 보이는 이러한 일상어를 통해 노래 전체의 리얼리티가 좌우된다. 서정적인 언어들 앞에 도입되어 노래 전체의 서정성을 오히려 이끌어가는 이 일상어는 1970년대 후반의 불안하고 불확실한 젊은이의 문화적 조건을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하면서 록의 문법이 우리의 입, 우리의 흥얼거림 속으로 완전히 일상화된 순간을 표시하기도 한다.
대안으로 재인식된 록: 1990년대 이후의 모습
80년대는 7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하였다. 늙은 군인이 잡고 있던 권력이 젊은 군인에게 넘어간다고 바뀐 것은 없었다. 관제 행사는 더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대중음악계는 점차 체계적으로 상업화되어 갔다. 그 분위기 속에서 보다 정제된 사운드와 보컬 실력을 가진 조용필이 등장했다. 불세출의 목소리를 지닌 그가 80년대에 구사한 사운드는 그 동안 한국 록에서 잘 듣기 힘들던 세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조용필이 십대 소녀를 휘어잡을 무렵, 많은 것들이 ‘언더그라운드’로 숨어들었다. 대학가의 민중가요는 포크의 전통을 이어 독자적인 영역과 미학을 구축해 나갔고 여러 뮤지션들이 까다로운 검열의 횡포에 지친 상태에서 독자적인 음악적 자의식을 만족시킬만한 언더그라운드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하여 ‘해바라기’나 ‘들국화’ 같은 밴드들이 탄생하였다. 신촌, 이태원 등지의 클럽에서 음악적 허기를 달래던 그들은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외쳤다. 그 ‘내 세상’은 상처받고 억압당한 젊은이들의 내적인 공허 속에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반향은 한국 록의 정통성을 언더그라운드로 끌어 붙이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언더그라운드에는 좀더 젊은 세대의 ‘헤비 메탈’에 대한 요구 역시 포함되었다. 시나위, H20, 부활 등의 밴드들이 이전 세대와는 다른 연주 패턴과 강력한 사운드를 가지고 한 무리의 록 매니아들을 이끌었다. 앞의 것은 이른바 ‘소극장 문화’의 모태가 되었고, 뒤의 것은 90년대 록의 음악적 기초를 닦았다.
폭압적이던 80년대가 끝나면서 록음악 역시 새 국면을 맞게 되었다. 대중음악계는 88올림픽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공중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중음악은 공중파 방송을 중심으로 상업화되고 체계화되면서 보다 규모도 커졌다. 거기에는 이른바 ‘X세대’라 불리우는 신세대의 세대적 감수성 역시 크게 작용했다. 신세대는 ‘난 너와 달라’하고 이야기하는 개성세대이기도 하고 이른바 ‘십대 상품’의 주요 소비자들이기도 했다. 그 양면성을 가장 잘 보여준 밴드는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그들은 80년대의 헤비 메탈과 새롭게 등장하던 장르인 힙합을 혼합하여 춤과 노래, 랩이 동반된 새로운 록 스타일을 선보였고,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대규모의 상업적 홍보와 물량공급, 신속한 대중적 인지가 성공의 열쇠였다. 그 성공을 거둔 가수들은 이른바 ‘메이저’ 가요판에서 가수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 메이저에 관심이 없거나 메이저의 행태를 경멸하는 젊은이들은 다른 곳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의 반항적인 그런지록 밴드 '너바나'의 음악을 알고 있던 일군의 젊은이들은 따로 모였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인디 록 씬이 시작되었다.
인디 씬은 기본적으로는 소비적 자본주의의 심화와 관계가 많다. 마치 1960년대의 히피즘이 미국 소비자본주의의 자식이면서 동시에 그 대립항(카운터컬쳐)인 것처럼, 한국의 인디씬 역시 한국적 천민자본주의의 산물이자 대립항이다. 소비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각자의 ‘방’을 선물했다. 그 방안에는 컴퓨터가 있고 컴퓨터는 통신으로 바깥과 연결되어 있다. 자기만의 문화공간이 확보되는 동시에 어른들 드나드는 현관을 통하지 않고 그것을 소통할 수 있는 창이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상업적인 주류문화의 대립항이 생길 조건을 심화시킨다.
한국에서 십대들에게 그러한 조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 대략 올림픽 이후, 1990년대 초반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마침 미국의 X세대들이 1980년대 내내 닦아왔던 언더그라운드 인디 씬이 물 위로 솟아 대중화된 이른바 ‘그런지 록’의 시기와 겹친다. 그런지를 발견한 이후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몇 갈래의 록음악들이 줄줄이 발견되었다.
인디 록은 또한 한국에서는 1990년대의 특수한 문화적 상황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앞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디 록은 하나의 문화 현상인데, ‘대안’의 관점에서 받아들여진 인디는 하나의 문화운동이기도 했다. 나 자신도 1990년대 후반,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인디 록을 바라보았다. 다음과 같은 글이 그 때 쓴 것인데, 지금보다 훨씬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시각화되어 있던 시기를 보여준다.
카프카가 ‘길은 없다. 다만 망설임만이 있을 뿐이고 그게 길이다’ 뭐 이런 것 비슷한 말을 했을 때, 그 망설임은 계속 가겠다는 의지의 유혹의 다른 이름이다. 기능하는 척 하면서 뒷다마까고, 튀고, 또 ‘니들 뭐야?’하면 기능하는 척 하고, 반칙해놓고 심판에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빈 두 손을 내미는 레슬링 선수처럼, 심판이 돌아서면 다시 호박을 병따개로 조지고 마는, 그 사기빨 어린 생존의 본능을 갈고 갈아 끝까지 좆같이 굴면서 살아남겠다는 것이다. 고상한 놈 : 장사아치의 이분법이 누구한테 유리하냐면, 결국은 크게 장사해쳐 먹는 놈들한테 유리하다. 고상한 놈하고 큰 장사꾼 놈들하고가 다 한 통속 아닌가. 저열한 장사아치가 되면서 고상한 놈들의 메뉴를 솔솔 뺏어먹는, 인디꾼은 공룡 틈에서 노는 쥐이다(인디레이블에 관한 보고서, 성기완, 1999).
이처럼 문화운동적인 발상으로 인디 록을 대했던 시기의 성과를 논하는 것과는 별도로, 인디 록의 발생 배경에는 이와 같은 비주류적 태도가 표명된 상태든 아니든, 어떤 방식으로든 들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인디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디 록을 이끄는 장르는 아마도 펑크(punk)일 것이다. 직접적인 외침의 성격이 강한 펑크는 커뮤니티 형성에도 다른 어떤 장르보다 직접적이다. 아무렇게나 몸을 움직이는 슬램 댄스(slam dance)를 통해 청중과 뮤지션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한국에서 펑크적 감수성을 가장 처음, 그리고 자연스럽게 표현한 밴드는 크라잉 넛이다. 그러나 한국을 대표하는 펑크 밴드라 할 그들에게서 1970년대 펑크의 대표라 할 섹스피스톨즈 같은 자기 파괴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이 차이가 우리 펑크의 특수성을 잘 말해준다.
크라잉넛은 자기를 파괴할 이유가 없다. 미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집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서울의 중산층 아파트에서 잘 먹고 잘 큰 아이들이다. 왜 그렇게 키가 안 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 하나만 빼놓고 그들의 몸이나 정신은 매우 건강하고 건전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펑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제대로 잘 키운 중산층의 체제 자체가 자신을 억압하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 고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1980년대 젊은이들처럼 주먹을 높이 치켜세우고 심각하게 고발하지 않는다. 특유의 장난스러운 제스츄어와 쇼맨쉽으로 비꼬고 웃기는 가운데에서 넌지시 고발한다. 자신들의 삶과 함께 해온 미디어에서 본 것들을 흉내내기도 하고 따오기도 하면서, ‘서커스 매직’을 하면서 세상을 부정한다. 그러니 그 고발은 때로는 장난이다. ‘심심함’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그들의 노래 곳곳에서 TV가 발견된다. 그들은 미디어와 함께 자랐고 스스로도 그 안에 있다. 그들은 주인공들을 보며 자라서 나중에는 주인공의 환상 속에서 사는 미디어 키드들이기도 하다.
펑크처럼 시끄럽고 나대기 좋아하는 아이들의 장르가 있는가 하면 조용하고 내면적인 방식으로 호소하는 록도 있다. 일반적으로 ‘모던 록’이라는 장르로 대표되는 이런 부류의 음악을 하는 대표적 밴드로 ‘델리 스파이스’와 ‘언니네 이발관’ 같은 밴드를 꼽을 수 있다. 이들 밴드는 모두 1990년대 초중반의 이른바 ‘컴퓨터 통신’ 세대가 결성한 밴드이다. 통신은 외부와 표면적으로는 단절되어 있지만 내면들끼리는 공감을 나누는 독특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1990년대의 인디 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바깥으로 돌기를 꺼려하고 혼자 시간보내는 일을 즐겨하는 부류의 감수성을 교류해주는 통로 역할을 함으로써 그와 같은 부류의 음악을 서로 나누려는 사람들에게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 이외에 인디 록 씬 안에서 활동하는 또 하나의 부류가 의식적 전위주의적 추구의 일환으로 록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다. 그들은 고상한 것과 키취(kitsch)적인 것, 전위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들 사이의 경계를 지우면서 새로운 미학적 플랜을 세우는 일을 인디 록 씬 안에서 수해한다. 대표적인 뮤지션으로는 '어어부 프로젝트'와 '황신혜 밴드'를 들 수 있다.
'어어부'의 3집 <21c 뉴 헤어>를 들으면, 이미 새롭다는 건 진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진부한 것을 하겠다고 나서며 다시 ‘뽕짝’을 취한다. 이 때 진부함은 ‘아픔’의 다른 이름이다. 진부함은 일상이고 일상은 미친 것들을 질식시키고 있는, 겨우 겨우 억눌러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는 비니루다. '어어부'가 차용하는 뽕짝은 그 비니루의 다른 이름이다. 이번에는 뽕짝도 뽕짝이고 어딘지 곡마단 음악 풍의 곡들이 좀 있다. 곡마단은 재주꾼들의 집단이 아니라 ‘비정상’, ‘뜨내기’의 집단이다. 난쟁이, 고아, 거인, 건달, 불돌리는 신사; 미래는 없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노래한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덮어두고 있는 언어, 금기의 언어들이다. 금기의 언어는 아이의 언어. 그래서 멜로디는 동요다. 장형규의 편곡은 싸구려 브라스와 감상적인 베이스와 드라이브감 있는 기타를 잘 버무린다. 그는 또 악기를 도입하는 감각이 뛰어나다. 새롭고 개성있는 사운드로 느껴지도록, 그러나 자연스럽게 새 악기들을 도입한다. 거기에 백현진의 엽기적인 노래말과 목소리가 덧입혀진다. 오버액션, 과다 노출, 울부짖음, 그리고 침묵. 제목들 좀 봐라. 초현실 엄마, 레이다 이마, 종점 보관소, 밭가는 돼지, 살이 많은 거구. 이런 종류의 음악은 무엇보다도 상황적이다. 하이퍼 리얼한 오버 액션 상차림인 이 상황들 속에서, 전위적이고 엽기적인 것들은 때로 대중적인 맥락을 지니게 된다. 맥락들은 거꾸로 음악 자체에서 이해되기 힘들었던 것들을 이해되도록 만들어 준다.
'황신혜 밴드'의 음악은 '어어부'보다 더 직접적으로 키취적이다. 현재는 김형태의 '원맨 밴드'가 된 이 밴드의 최근 앨범을 들어보면, 음악적인 전개 방향이 전자음악 쪽인 것을 알 수 있다. <병아리 감별사 김씨의 좁쌀 로맨스>는 '황밴드'의 기념비적인 새 출발을 알리는 앨범이다. 앨범의 제목은 '황밴드'의 전매특허인 ‘일상을 코믹하게 비비꼬기’를 연상시키면서 '황밴드'의 원래 기조를 유지하는 듯 하지만 음악을 들어보면 오히려 그 너무 '황밴드' 다운 앨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새롭다. 그의 음악을 ‘뽕 라운지’라 부르면 어떨까. 이박사식의 뽕짝 테크노적인 요소들을 하우스에 접목시킨 사례는 많았지만 그것을 ‘라운지’적인 요소와 접목시킨 케이스는 이번이 처음 아닌가 싶다. 이러한 ‘라운지’적인 측면은 김형태가 그 동안 각종 전시회, 연극 등에서 특유의 ‘뽕라운지’를 위탁, 제조해왔던 것과 관계가 깊다. 실제로 몇 개의 트랙은 쌈지스페이스 같은 갤러리에서 들었던 음악이기도 하다. 이 라운지적인 기분은 리듬의 특수성에서 오기도 하다. 그의 리듬은 8비트, 16비트처럼 딱딱 떨어지는 박자들을 많이 배제하고 있다. 그는 드러머가 아니다. 또 어려서부터 드러머의 그 박자들에 훈련된 록 뮤지션이 아니다. 그의 리듬은 중심이 없이 흩어져 있는데, 중심이 없는 그 리듬들은 그의 음악을 일종의 라운지로 만들고 있다. 뽕짝에서 강태환의 프리 색소폰 선율까지 모든 것이 한데 샘플되어 버무려져 있는 이 앨범은 결국은 모든 음악을 키취의 선상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그 안에서는 위도 아래도 없고 주인도 없다. 그런데 키취적인 접근법 특유의 코믹한 내러티브를 얹은, 그래서 어쩔수 없이 코믹하게 들어야 하는 노래들에서조차 고독한 그림자들이 떠다닌다.
그 밖에 달파란 같은 뮤지션들은 기존의 록 음악의 언어를 답습하기를 거부하고 테크노 쪽에서 새로운 추구를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뮤지션들도 인디 록 씬을 이루는 또 하나의 중심적 부류로 볼 수 있다. 훈련된 음악인이면서 동시에 인디 록적인 태도를 갖는 이 뮤지션들은 인디 록의 문법 자체를 세련된 것으로 다듬고 새로운 사운드를 제시한다. 달파란이 1990년대 후반에 낸 <휘파람 별>은 테크노이긴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 인디 록 씬에서 배출된 기념비적인 음반으로 취급할 수 있다. 록 밴드 '시나위'와 '삐삐롱스타킹'에서 활약한 바 있는 명 베이시스트 달파란(강기영)의 이 앨범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앨범의 서술자는 우주여행을 하다가 휘파람 혹성에 도착하는데, 거기에는 ‘비닐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단순한 논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닐의 삶이 우리의 삶이다. 비닐의 삶은 생명감이 박탈된 삶이다. 비닐은 하루 하루를 공허하게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산다. 테크노는 그 리듬을, 어쩌면 극단적으로 그 리듬만을 음악적으로 재현한다. 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가령 ‘이파리의 삶’과는 다르다. 휘파람은 비닐이 하는 음악의 다른 이름이다. “휘파람을 불며 언덕을 넘을 때에는 오직 기쁨만이 존재한다.” 이 음악은 거창한 ‘의미있음’을 거부한다. 음악은 리듬의 전면적인 지배 속에서 그저 흐를 뿐이다.
달파란은 비닐의 삶의 여러 구석을 조금씩 다른 스타일의 리듬을 도입시키면서 보여준다. 휘바람 도시, 휘파람 뉴스, 휘파람 코믹 댄스 파티 등등...여행의 코스마다 하우스, 드럼 앤드 베이스, 트랜스, 그리고 신바람 이박사가 스타일화시킨 2박자 패턴의 한국적 테크노(뿅뿅거리는 사운드) 등 다양한 테크노의 장르들이 소개된다. 그가 구사하는 리듬들은 그의 베이스 플레이를 연상케 한다. 이 리듬들은 필요한 자리를 찾아 간결하고 적절하게 ‘꽂힌다’. 그는 “휘파람 혹성을 떠나며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난다”고 말한다. 끝없는 모색의, 모험의 길이다.
나오며: 통로로서의 록
지금까지 간략하게 우리나라에서 수용된 록의 여러 측면을 수용기와 일상화되는 시기(1960년대-1970년대, 대안으로 재인식되는 시기, 1990년대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록이 우리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세계적인 문화적 과정의 소수집단 내부로의 내면화 과정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이 몸담고 있던 문화의 점차적인 망각화, 소외화 과정과도 겹친다. 개인적으로도 참여한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은, 이게 과연 누구의 것이냐는 것이었다. 나의 아이덴티티는 사실 혼란스럽고 중심이 없다. 국악은 뼈 속에 들어 있어 내 심금을 울리지만 그 문법을 나는 모른다. 아마도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나와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이런 때, 과연 나의 것은 어디 있으며 내가 하고 있는 인디 록은 누구의 것인가. 이것이 내 것인가?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1990년대 이후 우리가 겪은 인디 록의 경험을 기술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록 음악은 그저 수용되었다기 보다는 우리의 삶 자체의 변화와 자연스레 맞물리며 우리에게 내면화된 장르다. 사실 산업화 과정에서 유럽의 많은 나라 젊은이들도 이와 같은 현상을 겪은 바 있다. 가령 스웨덴에서 나온 어느 록 연구서의 서두에 이런 말이 나와 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웨덴의 록 음악은 별로 독창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영미의 모델을 모방하는데 그쳤었다. 그러나 1970년을 기점으로 매우 힘있고 잘 조직된 청년 음악 운동이 발흥하여 많은 밴드, 클럽, 음반사, 배급사 등이 생겨났고 사실주의적이고 진보적인 가사를 동반한 자국 내 록음악이 소통될 대안적인 씬과 채널이 형성되었다(In Garageland, Johan Fornäs Ulf Lindberg, Ove Sernhede 공저, 1995, New York, preface 중에서).
물론 20년 가까운 시간차가 있고 우리만의 지역적 특수성이 있지만, 이 책은 우리의 록 음악을 연구하는데에도 참고해볼만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결국 전 세계의 산업화된 로컬에서 록 음악은 일정하게 작용했고 지역의 문화 속에서 변형되며 새롭게 생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록음악은 누구의 것인가. 나의 잠정적 결론은, 우리 고유의 음악적 언어가 아니지만 사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우리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지금까지 봐왔듯이, 록음악은 미국 사회의 문화적 주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흑인 방랑객들의 타령, 다시 말해 ‘블루스’로부터 비롯한 음악이고, 따라서 어느 미국 백인을 붙들어 세워놓고 ‘이게 엄밀히 당신 것이오?’라고 물어 본다 쳤을 때, 만일 그가 분별력이 조금 있는 사람이라면(분별력이 없는 백인은 ‘물론 이게 내 거요’이라고 대답할 것이 뻔하지만), ‘그 모든 문화적 가능성들이 교차하는 지점을 관대하게 봐주는 것이 미국 문화의 핵심이라면 바로 그런 aus에서 우리 것’이라 대답할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라 해도 쉽사리 ‘이것이 내 것’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그렇다고 미국의 흑인들도 ‘이게 내 것’이라고 편하게 말할 수 있냐하면 그렇지도 않다. 만일 ‘힙합’의 경우라면 조금 사정이 다르다. 분명히 미국에 사는 흑인들의 분리거주지역(게토)에서 출현한 문화적 스타일인 힙합은 흑인들의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록’의 경우는 그 보다는 많이 보편화되어 있을뿐더러 백인적인 방식으로 ‘포장’도 많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미국의 흑인이라도 그리 편하게 ‘이게 바로 내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다. 비틀즈를 배출한 영국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틀즈는 분명히 영국 사람들이고 그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은 뭐 당연한 일이겠으나 그들이 한 음악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이것은 바로 영국의 것’이라고 아무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영국의 60년대 록큰롤 뮤지션들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북부 액센트를 쓰는 푸른 눈의 블루스 가수’라는 표현은 이 음악이 얼마나 복잡한 문화적 뒤섞임을 겪고야 태어난 음악인지 극적으로 말해준다.
그렇게 따지면 이 지구상의 누구도 록음악에 관하여 ‘이게 내 것’이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대신 그 누구도 자연스레 록의 어법에 접근할 수 있다. 서울에서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아프리카에서 록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12 마디 블루스의 코드 진행을 가지고 잼을 할 수 있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도 그 진행을 통해 서로의 느낌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록음악은 서로의 문화적 가능성이 만나는 자리이다. 일종의 알파벳인 것이다. 알파벳을 가지고 ‘이게 누구 거냐’를 따지는 일이 별무소득인 일인 거나 마찬가지로, 록음악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도 특별히 똘똘한 짓은 아니다. 그 통로를 통해 우리도 조금은 편하게 나다닐 수 있다는 것이 문화적으로는 더 중요해 보인다. 지금은 어차피 ‘탈당대적’인 시대이다. ‘지금-여기’라는 개념 자체가 탈 ‘지금-여기’를 품고 있다.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공간적으로 여기와 저기를 뒤섞고 있는 음악이 만들어지는 시대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얼굴을 지운 수많은 익명의 문화적 흔적들이 들어 있다. 그것들이 아주 손쉽게 섞이고 또 새롭게 조직화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록음악이 ‘훌륭한’ 문화적 통로라고 말하지도 말자. 그저 록음악은 그런 시대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가장 ‘흔한’ 통로이다. 흔하디 흔한 그런 길 말이다.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지우고 너는 너를 지우고 우리는 우리를 지우며 오히려 더 큰 자아를 얻는다. 이건 일종의 벗어남일 텐데, 록음악은 그런 ‘벗어남’을 실천하는 하나의 흔한 장치가 될 수 있다.
검색어: 록음악, 인디록, 세계음악, 대중음악, 블루스, Rock, Blues, Worldmusic, Popular Music,
<Abstract>
Rock in Korea: Certain World Experience
Ki-Wan Sung
I would like to talk in this paper about the rock music of South Korea. In its former part, I discuss it in the period of its acceptance and settlement into Korea, and in its latter part, its further offshoots as Korean independent rock groups began to immerge in the 1990s, The discussion reflects in overall not only an object viewpoint from a sort of cultural history, but also an my own personal views from my experiences as a performer and/or critic.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why and how the rock music which has nothing to do with our tradition and culture, had came to our life, react with us and finally internalized in us. The Korean rock music is one of our world experience.
1) 인디 록은 independent rock의 준말이다. 이 때 indepenent, 혹은 indie라는 단어는 복합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데, 대체로 뮤지션들이 취하는 삶의 태도, 생성유통과정, 대중적 인지도, 음악의 성격 자체 등에서 주류 팝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비주류적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보면 될 듯하다. 인디 록이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 정초된 개념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남한 땅에서 통용되는 개념인 것만은 확실하다. 인디 록 자체도 주류 팝 시장의 좌판에서는 그 구색을 구성하는 수많은 장르의 하나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럴 때조차도 앞서 말한 비주류적 ‘거리’는 유지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인디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정확한 음악적 가늠자는 사실상 없다. 예를 들어 윤도현 밴드의 음악은 인디 록이 아니고 크라잉 넛의 음악은 인디 록이다. 아무리 한 무대에서 이들이 비슷한 음악을 해도 그 구별은 청중들에게, 뮤지션 자신에게, 그리고 평론가들에게 유효하다. 이러한 구분은 일종의 습관일 수도 있고 팝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자기규정일 수도 있다. 앞으로 내가 ‘인디 록’이라 부르는 록음악들은 그러므로 학문적으로 정확히 인디 록의 범주에 드는 음악들이라기 보다는 그 동안 나의 경험상 인디록 씬에서 활동해온 것으로 여겨지는 록음악들을 칭하는 개념이 될 것이다.
2) rock 이라는 장르에 관한 개념 규정도 수많은 방식이 있다. 좁게는 전기 기타와 드럼을 중심으로 한 밴드 음악(비틀즈 이후)에 한정시킬 수도 있고 넓게는 테크노까지를 포함하여 1950년대 미국의 록큰롤 혁명과 그 이전 흑인들의 리듬 앤 블루스(rhythm & blues), 그리고 60년대 영미의 발전으로부터 직간접으로 영향받은 전세계의 모든 음악을 포괄하는 개념일 수도 있다. 록큰롤을 ‘록’으로 줄여 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60년대 중반쯤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록 음악의 미학적 플랜이 완성되던 때와 맞물린다. 이 글에서 나는 비교적 넓은 의미에서 록이라는 개념을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