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먼슬리 리뷰] 미국 여성운동 40년 (3)

성공한 여성들과 밀려난 여성들 
  [먼슬리 리뷰] 미국 여성운동 40년 (3) 
 
  2006-08-13 오후 2:08:13    
 
 
 
 
 
  어떤 것은 극적으로 변한 반면에 어떤 것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누가 수혜자이고 누가 비수혜자인지를 면밀히 조사하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가령 최근에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여성들은 전문직이나 관리직에 종사하게 된 이들이다.
 
  그러나 요한나 브레너(Johanna Brenner)가 지적한 바대로 전문직이나 관리직에 진출한 여성들이 성공하게 된 것은 노동시장에서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투쟁과 같은 '개별화된 해법' 덕분이었다.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입학문호 확대를 요구해 왔고, 노동시장에 대한 보다 넓은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에서 법적 수단을 동원하거나 소송을 활용해 왔다. 이들의 성공은 남녀 간 임금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해 왔고, 직업상의 남녀 구분 및 차별의 철폐에도 부분적으로 기여해 왔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개별화된 해법의 혜택은 대부분 백인여성이나 이미 그러한 해법을 이용할 능력이 있는 여성들에게 돌아갔다.
 
  유급노동시장에 진입했다고 계급이동된 건 아니다
 
  여성 문제에서 인종과 계급도 중요한 요소임을 우리는 통계수치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런 지적은 참신하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성들 사이에 나타나는 최근의 추세는 인종 간 격차가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는 1990년대에 백인여성과 흑인여성 사이에 나타난 직업상 차별의 증가와 최근에 젊은 백인여성과 젊은 흑인여성 사이에 나타난 고용률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유급노동시장에 진입한 여성들 대부분은 계급의 변화는 이루지 못했다. 미국의 계급 이동성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최근의 연구는 계급 이동성이 점점 낮아져 왔음을 보여준다.
 
  자녀가 있다는 것 또한 문제가 된다. 자녀를 둔 여성 모두가 노동시장에서 열악한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빈곤가정의 75%가 18세 미만의 자녀를 둔 가정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가 있는가 여부는 여성이 노동시장에 얼마나 잘 진입할 수 있을지를 알려주는 예고지표로 여전히 활용된다. 남편이나 보조부모(second parent)가 있을 경우에는 자녀의 유무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사이의 관련성이 낮아지지만, 그런 경우에도 아이를 기르는 일차적인 책임은 여전히 여성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만으로는 앞에서 논의한 여성 관련 추세들을 다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앞에서 논의한 추세들이 노동계급의 여성이나 유색인종 여성이 엘리트 여성이나 백인 여성에 비해 권력이나 개인적 자원을 적게 가졌기 때문이라거나 자녀를 두었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거나 임금을 많이 받는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추가로 조직화 또한 중요한 요소로 꼽을 수 있다. 노동계급 여성을 포함해 모든 여성들은 자신들이 지닌 힘을 발휘하기 위한 개별적이고 집합적인 시도를 해왔다. 그리고 여성들의 힘이 행사되는 구체적인 방식은 권력이나 자원이 분배되는 방식이나 사회적 재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에 의존했다.
 
  권리를 어떤 방식으로 주장하는지에 따라 투쟁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넬슨 리히텐슈타인(Nelson Lichtenstein)은 미국 노동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노동계급을 포괄적이고 집합적으로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미국 노동운동은 예컨대 보편적 보건의료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투쟁하기보다는 개별 기업별로 보건의료 보장을 얻어내거나, 모든 노동자를 위해 노동조건이나 고용기회를 개선하는 투쟁을 하기보다 노조 조합원의 이익을 앞세우는 투쟁을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들 대부분은 노조운동의 바깥으로 밀려났고, 노조는 보건의료 체계나 퇴직 후 생활 보장과 같은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입법적 성과도 개별적 소송을 통해야 실현돼
 
  2차 세계대전 직후 전개된 미국 노동운동의 과정에서 특히 주변화된 집단은 여성과 유색인종이었다. 그들은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뭔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인종이나 성별 등에 따른 고용차별을 금지하고 동일 노동을 수행하는 남성과 여성에 대해 동일 임금을 지급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의 기념비적인 법안의 통과를 추구한 1960년대의 시민권 운동은 그러한 대안 모색의 한 가지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민권 운동에 의해 확보된 권리는 입법적 승리의 결과였기에 그 행사는 기본적으로 개별적인 소송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점은 오늘날의 여성단체들이 채택하고 있는 관점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식의 접근법이 그동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여성단체들은 노동계급 여성을 위한 개별화된 전략을 꾸준히 강조한다. 이들은 직업상의 차별에 맞서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직종에 여성이 취업할 수 있도록 해줄 직업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남녀 간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여성의 대학 진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늘려줄 것을 요구하거나 남녀 간에 동일한 임금 지급을 의무화하는 법의 제정을 요구한다.
 
  이런 식의 개별화된 해결책도 물론 중요하다.하지만 노동계급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은 현실적으로 이런 방법을 이용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물론 '베티 듀크스 대 월마트 사건(Betty Dukes v. Wal-Mart, 월마트의 여성 직원인 베티 듀크스가 사측의 성차별적 인사정책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2000년에 제기한 소송으로, 월마트의 전현직 여성 직원 등 160만 명을 원고로 하는 집단소송으로 발전했다-역주)'을 비롯해 노동계급 여성의 권익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소송사건이 다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소송은 문제 해결에 수 년이 걸릴 수 있는데, 노동계급 여성들 대부분은 이런 소송에 나설 시간도 없거니와 소송을 진행하는 데 요구되는 자원도 갖고 있지 않다. 노동계급 여성들로서는 법적인 방법을 비롯한 개별화된 해결책을 활용할 수 없다. 게다가 노조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집단행동 수단도 위축돼 가는 상황이다. 이로 인해 자신들을 위한 규모 있는 조직을 갖고 있지 못한 노동계급 여성들은 대부분 방치된 상태에 놓여 있다.
 
  물론 모든 단체들이 개별화된 해결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임금과 일자리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집합적 접근방식으로서 노조 결성의 혜택을 입은 노동계급 여성들도 있다. 미국에는 여성을 조직화하는 노조들이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노조들의 그런 노력이 극적으로 확대되며 성과를 거둔 것은 최근 몇 십 년 사이의 일이다.
 
  가령 교사나 간호사로 일하는 여성들은 노조를 결성하는 것을 통해 임금 상승과 사회보장 혜택의 개선을 이루었다. 1973년에 설립되어 지금은 미국 본토의 50개 주 모두에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9시에서 5시까지(9to5) 같은 노동계급 여성단체는 1991년의 시민권리법을 비롯해 육아휴가 및 의료휴가법, 국가보건안전법, 주별 생활임금조례 등의 통과를 촉진하기 위해 조직됐다.
 
  여성들은 어디에서 힘을 찾아내야 하나
 
  이같은 집단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조직화를 하는 과정에서 힘의 원천을 찾아내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스티브 젠킨스(Steve Jenkins)는 '노동자센터 운동'의 역동성을 분석하면서 노동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두 가지 힘의 원천을 제시하고 그 특징을 구분해 설명했다. 첫 번째는 '사회적 힘'이다. 이는 생산이나 회사운영을 방해하고 중단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두 번째는 '지지 유도력'이다. 이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변호사, 로비스트, 유권자를 비롯한 여러 지지자들을 확보해내는 능력을 가리킨다.
 
  여성노동자들은 이 두 가지 힘을 어느 정도나 갖고 있는가? 과거 몇 십년 간 직업시장에서 상대적으로 훌륭하게 적응해 온 여성들은 희소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다. 특히 학사학위나 그 이상의 학력을 갖고 관리직이나 전문직으로 진출한 여성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여성들은 보다 나은 직업에 진출하고 보다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개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거나 때로는 집합적 협상력에도 의존할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임금과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각자의 기능과 교육수준을 노조를 통한 집단행동에 결합시킨 여성노동자들도 있다. 여성이 많이 종사하는 20개 직업을 목록화한 <표>를 보면 이런 부류의 여성노동자들이 어떤 이들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여성노동자 중 43%가 이 표에 열거된 20개 직업에 종사한다. 공인간호사와 초등학교 교사는 주급이 각각 930달러와 813달러로 전체 여성노동자의 평균 주급 585달러에 비해 상당히 높고, 이들의 노조조직률 또한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더 많은 교육을 받고 희소한 기능을 습득하거나 노조원이 되는 것만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가령 보조교사나 보육원 및 유치원 교사들의 노조조직률은 평균보다 높은 편이지만 이들의 주급은 전체 평균보다 낮다. 이런 현상을 설명해주는 것 중 하나는 보살핌 관련 직업에 종사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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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먼슬리 리뷰] 미국 여성운동 40년 (2)

무엇이 여성을 빈곤에 붙잡아두는가? 
  [먼슬리 리뷰] 미국 여성운동 40년 (2) 
 
  2006-08-11 오전 8:57:01
    
 
 
 
 
 
  2005년 현재 전체 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시급의 중위값은 12.5달러였다. 두 명의 자녀를 혼자 키우는 어머니가 전일제 일자리를 가졌을 경우 그 가정의 소득은 연방정부에서 정한 3인가정 빈곤선의 160% 정도가 된다. 전체 흑인여성의 60%, 전체 라틴계 여성의 67%가 이 액수에 못 미치는 시급만 받는다.
 
  대학생 중에서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하지만 여성 전체로 보았을 때는 소수에 불과하다. 2004년 현재 25세에서 64세 사이의 여성 중 23%만이 학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연령대의 흑인여성의 경우 학사 이상 학위를 가진 여성은 14%, 히스패닉계 여성의 경우는 이 비율이 9%에 불과했다.
 
  학력의 차이는 직업 관련 통계수치가 인종별로 다른 이유를 설명해준다. 2004년에 전체 백인여성의 39%와 전체 아시아 여성의 44%가 관리직과 전문직 및 관련 직종에 종사한 것으로 나타난 반면, 흑인여성과 히스패닉계 여성의 경우 이 비율이 각각 31%와 22%에 지나지 않았다. 전문직과 관리직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는 전체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인종별로 큰 차이가 있다.
 
  성별 임금격차 축소는 여성의 임금상승 때문이 아니다
 
  성별 임금격차는 차츰 좁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여성의 평균임금이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최근 몇 년 간 여성의 소득증가율은 인플레이션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남녀 간 소득격차가 꾸준히 좁혀지는 이유는 남성의 임금하락이 여성의 임금하락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집단의 여성들이 평균 이상의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됐지만, 아이를 양육하는 기간 동안 소득이 상당히 줄어드는 경향은 여전하다.
 
  여성정책연구소(Institute for Women's Policy Research)가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26세에서 59세 사이의 여성이 15년 간 벌어들인 소득은 1999년의 달러화 가치 기준으로 27만3592달러인 데 비해 같은 연령대의 남성이 같은 기간에 벌어들인 소득은 72만2693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동안 남녀 간 시급 비율은 77%까지 높아졌지만 평생의 임금을 비교해보면 성별 격차가 아직 상당히 크며, 위 여성정책연구소의 연구사례에서는 이 비율이 38%에 불과하다.
 
  최근 성별 임금 비율이 젊은 노동자들의 경우 84%에 이르는 등 남녀 간 차이가 더욱 줄어들고 있지만, 이것이 세대 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대와 무관한 생애주기에 따른 소득변화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남편의 가사 일 분담 몫은 아내의 절반
 
  아이를 기르고 가정을 돌보는 일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여전히 여성이 지고 있다. 비록 남성 1인이 가장인 가정의 수가 증가해 왔고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는 경우도 전반적으로 많이 늘어났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아이를 기르는 데 할애하는 평균 시간에는 여전히 큰 차이가 있다. 젊은 아버지들 가운데 다수가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떠나고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3세 미만의 자녀를 둔 아버지들 가운데 직장을 다니는 사람의 비중은 95%에 이르며 이는 다른 어느 집단보다도 높은 수치다.
 
  심지어 부모 모두가 가정 밖의 일터에서 일하면서 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는 일을 분담하는 경우에도 어머니는 필요하면 빠져나와 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가거나 아이가 아플 때 휴가를 낼 수 있도록 근무시간이 신축적인 일자리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어린 자녀를 둔 여성 노동자는 배우자보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 하루에 두 배 이상의 시간을 할애한다. 남편이 떠맡는 가사 일이 약간 더 많아지긴 했지만 평균적으로 볼 때 남편들이 수행하는 가사 일의 양은 여전히 아내들이 수행하는 가사 일의 절반 수준이다.
 
  유급노동시장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갈수록 더 많아지면서 가사노동에서 남성이 담당하는 몫도 증가해 왔다. 하지만 가사 일 부담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이가 줄어든 일차적인 이유는 여성이 가사 일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전체적으로 줄어든 데 있다. 오늘날 보다 많은 회사들이 육아휴가를 주지만, 자료를 통해 확인해보면 육아휴가를 사용하는 노동자는 경제적인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전문직 여성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런 현상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부들이 주로 다른 여성이 제공하는 도우미 서비스에 가사 일을 맡기는 경우가 늘어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빈곤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경향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존속하고 있다 이 세 번째 경향은 여성의 낮은 임금과 여성이 주로 부담하는 아이 돌보기의 무거운 책임과 관련이 있다. 이와 관련해 많은 학자들이 연방정부가 정한 빈곤선이 너무 낮은 수준이며 오늘날의 생활비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여성의 3분의 1은 연방정부에서 정한 빈곤선의 200% 이하의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 여성이 가장인 가정의 빈곤율은 과거 몇 십 년 간에 걸쳐 감소해 왔지만, 아직도 그 수치는 모든 인종집단에서 전체 가정의 빈곤율에 비해 두 배에 이른다.
 
  게다가 2001년 이후 여성이 가장인 가정 중 빈곤한 생활을 하는 가정의 비율이 높아져 왔다. 오늘날에는 백인여성이 가장인 가정들 중에서는 20% 이상, 그밖의 각 인종별로 여성이 가장인 가정들 중에서는 약 3분의 1이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흑인과 히스패닉인 여성이 가장인 가정들 중에서는 약 40%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조차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
 
  남녀 간 직종구분이 상존하는 현실
 
  무엇이 여성을 빈곤에 붙들어 두는가?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받는 낮은 임금이 하나의 중요한 이유다. 주로 여성이 일하는 직업의 평균임금은 아주 낮고, 바버라 에렌라이히(Barbara Ehrenreich)가 저서 《빈곤의 경제(Nickel and Dime)》에서 지적했듯이 적어도 너무 적다. 그러나 임금이 더 높은 직업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여성이 학사학위가 필요 없는 직업을 구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실질적인 장벽에 부닥친다.
 
  가령 여성이 전통적인 여성의 직업이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들이 여럿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 수준이 보다 높은 건설이나 제조업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은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여성이 이런 분야의 직업을 갖게 되더라도 일터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립되기 일쑤이며, 결국 대부분은 그 직업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직업상의 남녀 차별은 제조업이나 건설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티븐 로즈(Stephen Rose)와 하이디 하트먼(Heidi Hartmann)의 연구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으로 서열화된 직업군을 보면 낮은 임금을 받는 직군에는 여전히 여성들이 주로 포진하고 있다. 오늘날 종사자가 대부분이 여성노동자인 직업의 종류는 194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간호사, 간호조무사, 타자수, 비서 같은 일들이다.
 
  이렌 패더빅(Irene Padavic)과 바버라 레스킨(Barbara Reskin)의 연구도 여성들이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직업상의 차별대우를 변화시키면서 진일보했지만 1990년대에는 이런 측면에서 정체됐다고 지적한다. 인종 간의 직업상 차별 또는 직업 간 구분도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해소되며 통합되는 것이 추세였지만, 이런 추세도 1990년대에 역전됐다.
 
  일부 직업들에서는 여전히 성별에 따른 심한 차별이 존재하며, 이런 직업군의 남녀 간 임금격차는 다른 직업들에 비해 여전히 크다. 가령 2004년에 주로 남성의 직업인 수위의 평균 시급은 10달러였지만, 수위와 비슷한 수준의 훈련과 기술이 요구되는 청소원이나 가정부의 시급은 8.67달러에 그쳤다. 기계정비사와 간호조무사도 서로 비슷한 수준의 훈련을 받지만, 2004년의 시급을 보면 기계정비사는 16.64달러였던 데 비해 간호조무사는 10.53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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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먼슬리 리뷰] 미국 여성운동 40년 (1)

여성들은 여전히 '저임금 비정규직'  
[먼슬리 리뷰] 미국 여성운동 40년 (1)
 
 
  2006-08-10 오전 9:50:26    
 

  최근 정부가 여성의 삶의 조건에 큰 영향을 미치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것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여성 문제와 여성운동의 방향에 관한 논의가 새삼 활성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40년 간 미국에서 전개된 여성의 삶과 여성운동의 궤적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해보는 글이 미국 잡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최근호에 실려 눈길을 끈다.
 
  이 글에서 필자인 스테파니 루스(Stephanie Luce) 매사추세츠-암허스트 대학 노동센터 강사와 마크 브레너(Mark Brenner) 노동전문 잡지 <레이버 노츠> 공동대표는 여성의 유급노동시장 진출기회를 확대하는 데 치중하는 여성운동만으로는 자본주의 체제가 여성에게 부과하는 구조적 제약을 극복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런 근본적인 관점에서 두 필자는 '계급을 등지는 방식' 아닌 '계급을 아우르는 방식'의 여성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먼슬리 리뷰> 측의 허락을 얻어 이 글의 전문을 번역해 4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원제는 '여성과 계급: 지난 40년 간 무슨 일이 일어났나?(Women and Class: What Has Happened in Forty Years?)이며, 영어 원문은
www.monthlyreview.org/0706lucebrenner.htm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40년 전 여름에 한 무리의 여성과 남성들이 모여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an; NOW)를 결성했다. 전미여성기구는 교육과 법적 소송을 통한 성평등 쟁취를 소임으로 삼았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투쟁하는 기존 단체들이 여럿 있었지만 전미여성기구는 곧 가장 널리 알려지면서 가장 거대한 단체 중 하나로 부상했다.
 
  오늘날 전미여성기구는 미국 전역에서 50만 명이 넘는 회원과 500여 개의 지부를 거느리고 있다. 전미여성기구가 설립됐을 때는 유급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여성들이 증가하던 시기였다. 전미여성기구에 대한 비판도 많다. 전미여성기구가 인종이나 계급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남녀평등을 위한 헌법 수정안의 통과 같은 일에 매진하는 등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의 법률전략에 너무 치중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성노조연대(Coalition of Labor Union Women), 9시에서 5시까지(9to5), 노동하는 여성의 전국기구(National Organization of Working Women), 콤바히강 집단(Combahee River Collective) 등 노동계급 여성과 유색인종 여성을 대표하는 여러 다른 단체들도 성장했다. 이들은 무수히 많은 다른 단체들과 함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여성운동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법률적 장벽은 제거됐으나…
 
  여성을 직접 조직화하거나 여성을 위한 법률 개정을 위해 이들이 기울인 노력이 여성운동의 성공에 얼마만큼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는지를 꼭 집어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노동하는 여성들의 지위에 주요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성별을 보고 고용하거나 성별에 따라 급료에 차별을 두는 법적 장벽이 제거됐다.
 
  1970년 전후에는 성에 따른 직업 구분이 금세기 들어 최초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1964년에는 남성이 시급 1달러를 받을 때 여성은 59센트를 받았지만 2004년에는 여성의 시급이 77센트로 오르면서 성별 임금격차가 줄어들었다. 학사학위를 가진 노동인력 중 여성의 비율은 1970년 11.2%에서 2004년 32.6%로 높아져, 여성의 고학력자 증가율이 남성의 두 배에 이르렀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여성은 여전히 가사노동과 아동양육을 비롯한 여러 가지 종류의 보살핌 노동을 수행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그리고 남성보다는 여성이 빈곤한 생활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에는 남녀 간 직업적 차별이 개선되던 부문에서조차 그 개선의 지체 또는 반전이 시작되는 양상을 보였다. 1990년대에는 백인여성과 흑인여성 사이에 직업적 차별이 확대됐고,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여성과 그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 사이에 임금 불평등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때 젊은 백인여성과 흑인여성 사이의 고용격차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추세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우리는 이런 추세 중 일부는 서비스 부문의 확대 및 제조업 부문 공장의 해외이전 같은 경제적 변화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 대부분은 이 시기의 사회운동의 영향으로 설명된다고 본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여성운동은 시민권 운동과 함께 노동계급 내의 일부 집단에 의미심장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가져다줄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운동이 텅 빈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운동을 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어떻게 구체화해 제시할 것인지를 놓고 내적 불화를 겪었다. 그리고 역습과 역류에도 대처해야만 했다.
 
일부 여성들이 얻은 것과 여성 간 계급격차 확대
 
  이로써 얻은 것이 많은 여성들도 있지만, 그밖의 다른 여성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1950년대의 여성들과 1960년대의 여성들 사이에도 차이가 존재했지만, 오늘날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 비하면 당시의 여성들 사이에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여성운동이 시작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에는 일부 여성들이 그동안 획득한 것들이 여성노동자들 사이에 더 큰 계급격차를 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 여러 계급을 아우르는 여성운동을 형성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를 검토하게 했다.
 
  노동하는 여성들이 오늘날 처해 있는 조건들을 이해하고 새로운 여성운동의 가능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난 40년 동안 진정으로 변한 것은 무엇이며, 그러한 변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난 40년 동안 일어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노동시장 전체에서 여성의 참여가 상당히 증가했으며 특히 결혼한 여성과 어린 자녀를 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는 주목할 만하다는 것이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에 따르면 1950년에는 유급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는 여성이 전체 여성 인구의 3분의 1에 불과했지만 2004년에는 이 비율이 약 60%에 이른다. 같은 기간에 결혼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24%에서 61%로 상승했다. 1975년에는 6세 미만의 자녀를 둔 여성의 39%가 노동인구였지만, 2004년에는 이 비율이 62%로 올라갔다.
 
1990년대 들어서는 추세가 역전 또는 정체

 
  1950년부터 1990년 사이에 주요 변화들이 일어났고, 그 후에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큰 변화 없이 안정적인 양상을 보였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는 결혼해 어린 아이를 둔 백인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약간 하락했지만, 이런 현상의 일차적 원인은 경기후퇴와 일자리 찾기의 어려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추세가 인종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바로 지적해낼 것이다. 흑인여성은 백인여성보다 노동시장 참여율이 항상 높았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인생의 일부를 할애하는 경향을 보이는 백인여성들에 비해 흑인여성들이 평생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시장 참여율이 상승해 온 일반적인 추세는 백인여성과 흑인여성 모두에 적용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시아 여성이나 라틴계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을 알게 해주는 당시의 적절한 자료는 확보하지 못했다.
 
  노동시장 참여율의 상승과 더불어 특정 직업들에서 성별 구성비가 두드러진 변화를 보였다. 2004년 현재 여성은 관리직과 전문직 및 관련 직업군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직업군에서 상대적 및 절대적으로 여성의 진출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런 변화로 혜택을 입은 여성들은 누구인가? 학계나 정책수립자들은 학사학위를 가진 여성들이 받은 사회보장 혜택에 주목해 왔다. 여성들 가운데 학사학위를 가진 집단이 막대한 이득을 얻어 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학사학위를 가진 여성들은 1973년에 평균적으로 시간당 15.45달러(2003년 달러화 가치 기준)를 받은 데 비해 2003년에는 시간당 20.19달러를 받아 임금이 31%나 올랐다. 이는 같은 기간에 학사학위를 가진 남성의 임금 증가율 17%보다 훨씬 높고, 학사 이상의 학위를 가진 여성들의 평균 시급이 24% 증가한 사실과도 비교된다.
 
  학사학위를 가진 여성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독립했고, 경제적 독립은 결혼 시기를 늦추거나 결혼 자체를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성들은 예전에는 진출할 수 없었던 직업들에 진출해 경력상의 지위와 권위를 획득할 수 있게 됐다.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와 레이철 드와이어(Rachel Dwyer)의 연구는 새로 창출된 일자리를 통해 누가 얼마나 이익을 보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1960년대에는 성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1990년대에는 인종이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었다.
 
성공스토리에 가려진 여성의 삶
 
  교육을 많이 받은 백인 여성노동자들의 상향이동은 지난 40년 간 일어난 주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이며 그동안 고학력 여성들이 획득한 것들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그것은 첫째, 많은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승진상한선(유리천장)' 같은 커다란 장벽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차별이 노동시장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과 가정 모두에서 잘 해내려고 노력하는 전문직 여성의 경우에는 이런 측면에서 별로 변한 것이 없는 직업세계에서 불이익을 받는 고통을 겪는다. 둘째, 성공한 전문직 여성들의 이야기에서는 계급과 인종이라는 핵심적 요소가 생략된다. 노동하는 여성들 대다수는 여전히 저임금의 비정규직이다. 그들의 직업은 내세울 만한 것도 아니고 안정적이지도 않으며 사회보장 혜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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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퍼온글] 매창의 관한 시조 및 자료

 

 

 

 

 

그리고 '매창시선' 평민사 허경진편역 한 책을 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자료는 2006.10. 7 부터 2006. 10. 16까지 모은 자료입니다.

 

  [名技 梅窓(매창)의 관한 관련자료]


역사에 대한 많은 관심은 없어지는 시기에 역사에 대한 관심과 바로 역사를 파악하자는 趣旨(취지)에서 이렇게 자료를 조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김탁환 선생님께서 『나, 황진이』라는 소설을 다시 개정판으로 내놓으시게 된 것은, 황진이의 시조와 그 당시 그녀가 읊조린 시조를 알리기 위한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황진이가 그 당시 읊조린 시는 자작시도 있었지만, 황진이 전에 살다간 아주 뛰어난 문인들이나 역사적 인물들이 지은 시조를 기초로 하여 읊조린 것이라 말을 하고 있다. 옛문인들의 작품들을 만나다 보면 그 당시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지 않을까 해서 이러한 조사를 한 것이다. 그럼 많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며 이만 여기서 조사자의 말은 마치려고 한다. 그럼 매창의 관한 작품세계에 한번 들어 가보자. 


[순서]


Ⅰ. 역사스페셜에서 방영된 매창에 관한 자료

   - 공영방송 KBS ‘역사스페셜’에서 자료인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 인터넷 방송으로 보면 더욱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Ⅱ. 매창의 관한 약력

   - 그녀의 관한 신상명세서라 생각을 하시면 좋을 것이다.

 

Ⅲ. 매창이 지은 시조와 그녀와 관련된 시조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 매창, 그녀는 왜 유희경을 택했나?

제 목: 매창이 사랑한 남자, 천민 유희경


■ 주요내용


천민시인 유희경!

그는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나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인으로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현재 창덕궁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침류대는 유희경의 거주지로써 당시 사대부들과 문학활동을 벌인 최고의 문화공간이었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유희경은 어떻게 사대부들과 교류할 수 있었을까? 사대부들과의 교류에 매개체가 된 글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이 모든 궁금증은 그가 천민이라는데에서 출발한다.


뿐만아니라 유희경은 조선 후기 중인문학의 터전을 여는 풍월향도의 주축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유희경은 어떻게 중인문학의 선구자적 위치에 설 수 있었을까? 이번 주 역사스페셜에서는 조선 최대의 문화공간, 침류대를 중심으로 최고의 문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나누고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 매창과 사랑을 나눈 유희경의 삶을 들여다본다.


■ 세부내용


1) 유희경,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 매창의 마음 사로잡다.


매창은 부안 출생의 기생으로 시와 거문고에 능했으며 여느 기생과는 달리 절개가 곧았다. 그러한 매창이 한눈에 반해 정을 준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민 시인 유희경. 경남 용문사에 전해지는 유희경의 <촌은집>을 보면 그들의 만남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남국의 계량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서 참 모습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 하여라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유희경과 매창이 만날 당시 매창은 이미 유명한 기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름을 떨친 정도는 유희경도 마찬가지로 유희경도 당시 시인으로 큰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그들은 천민과 기생이라는 사회적 신분에 대한 동병상련을 느끼고 시를 통해 사랑에 깊이를 더해간다. 하지만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의병으로 나선 유희경은 매창과 기약 없는 작별을 한다.


2) 천민 유희경, 어떻게 한성부윤까지 올랐나?


허균의 <성소부부고>를 보면 유희경이 천민임을 밝혀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촌은집>에 따르면 유희경이 살아생전 종2품에 해당하는 가의대부를 지냈고, 사후에는 한성부윤까지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유몽인 전>에는 그가 시작 기량이 뛰어났다는 내용도 있다.


어떻게 천민인 그가 시를 지을 수 있었으며 나아가 벼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그 연유는 유희경이 그의 아버지 3년 상을 치른 것에서 비롯된다. 천민에 불과한 유희경이 3년상을 치른 것은 당대 최고의 학자 남언경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남언경은 유희경이야말로 효자라고 생각하고 제자로 받아들여 朱子家禮(가례주자)를 가르친다. 남언경으로부터 주자가례를 배운 유희경은 장례를 주도하는 경사를 업으로 살아간다. 그 무렵 유희경은 또 한명의 대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시의 대가 박순이다. 유희경은 독서당을 드나들면서 박순과 인연을 맺게되는데 박순은 유희경의 재능을 알아보고 크게 칭찬하고 이를 계기로 시를 가르친다.


3) 침류대의 주인은 천민시인 유희경.




 

 

 

 

 

 

 

 

 

 

 

 

 

 

 

 

 

유몽인의 <유희경전>이나 이수광의 <침류대기>를 보면 하나같이 침류대를 무릉도원에 비교하며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묘사하고 있다.


많은 사대부들이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꼽으며 즐겨 찾았던 침류대는 대체 어떤 곳일까?


침류대는 바로 유희경의 거처로 그가 자신의 집을 스스로 침류대라 부른 것이다. 유희경의 뛰어난 시작 기량과 더불어 그가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세운 공으로 면천한 것을 계기로 많은 문인들이 침류대로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개방적인 성향의 문화교류는 침류대를 최대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이는 남언경과 박순이 유희경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언경과 박순은 화담 서경덕의 문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스승의 개방적이고 실리적인 성향을 이어받아 천민인 유희경을 제자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4) 조선 중인문학의 터전을 연 풍월향도.


풍월향도란 유희경과 백대붕을 중심으로 글을 알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기는 천민들의 문학모임이다. 유희경은 그의 젊은 시절을 풍월향도에서 보낸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유희경이 면천하게 되면서 풍월향도는 쇠퇴기를 맞는다. 그 이후 시를 즐기는 천민들의 모임은 유희경의 제자격인 최기남을 중심으로 한 삼청시사가 그 맥을 유지한다.


이렇게 양반이하 계층의 문학인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이들을 통칭해 위항문학인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풍월향도와 삼청시사에서 시작된 위항문학인들의 활동은 인왕산을 중심으로 그 활동이 활발해진다. 그 중 가장 큰 두각을 보인 것은 千壽慶(천수경)이 이끈 옥계시사이다. 위항문학인들의 모임은 그 활동이 점차 확대되면서 순수한 문학활동을 즐기기 위한 것에서 신분상승운동의 한 흐름으로까지 이어진다.


5) 이별 그리고 15년만의 재회


임진왜란을 맞아 이별했던 매창과 유희경.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이다.

이들은 무슨 연유로 15년이란 기나긴 공백을 가져야 했던 것일까? 뒤늦게 부안을 찾은 유희경은 열흘간 머물며 시를 논하자던 매창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노라 말할 뿐이다. 그리곤 잠시 머물다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서울 로 돌아간다.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나 침류대의 주인으로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지냈던 유희경. 그리고 그 곁에는 평생 그를 사랑한 당대 최고의 여류시인 매창이 있었다.




Ⅱ. 매창의 관한 약력

 


   매창의 묘

매창(梅窓)

1573(선조 6)∼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 《가곡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잡01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 惺所覆#부41稿》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 秋思〉·〈춘원 春怨〉·〈견회 遣懷〉·〈증취객 贈醉客〉·〈부안회고 扶安懷古〉·〈자한 自恨〉 등이 유명하며, 가무·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부안의 묘에 비석이 전하며,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Ⅲ. 매창이 지은 시조나 그녀와 관련된 시조 및 편지를 소개한다.

    - 대표적 작품만 소개합니다.

 

 


   개암사 - 시를 즐겼던 곳(한국의 산천에서 이미지 제공함, www.koreasan.com)

→ ‘지봉 이수광’은 매창의 이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계랑은 부안의 천한 기생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었다. 언젠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의 소문을 듣고는, 시를 지어서 집적대었다. 계랑이 곧 그 운을 받아서 응답하였다.


平生 學食東家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었지)

時人不識幽閑意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 매창 시비에 적힌 시조


   석비에 적힌 매창의 시조


   매창의 시비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 ‘贈醉客’(취한 손님에게 드림)

 


    선계폭포상단(사진 : 한국의 산천 www.koreasan.com제공)

 醉客執羅衫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羅衫隨手裂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라)

 不惜一羅衫 (명주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게 없지만)

 但恐恩情絶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졌을까 그게 두려워라)

                                             - 허경진 역 -


→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선계폭포하단 (사진 : 한국의 산천 www.koreasan.com제공)

 曾聞南國癸娘名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詩韻歌詞動洛城 (글 재주 노래 솜씨 서울에까지 울렸어라)

 今日相看眞面目 (오늘에사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却疑神女下三淸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하여라)

                                                    <‘贈癸娘’  허경진 역>

 

→ 매창이 유희경을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조.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自恨, 허경진 역'>

 

→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멀리보이는 울금바위(사진 : 한국의 산천 www.koreasan.com제공)

 

‘허균’은 다음과 같이 매창을 평가했다.

계생은 부안의 기생이라. 詩(시)에 밝고 글을 알고 노래와 거문고를 잘 한다. 그러나 절개가 굳어서 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고 정의가 막역하여 농을 할 정도로 서로 터놓고 얘기도 하지만 지나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오래도록 우정이 가시지 아니하였다.


→ 매창을 그리워 하는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편지이다. 


계랑에게

계랑이 달을 보면서 거문고를 뜯으며 '산자고새'의 노래를 불렀다니, 

어찌 그윽하고 한적한 곳에서 부르지 않고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들의 놀림거리가 되셨소. 

석 자 비석 앞에서 시를 더럽혔다니, 이는 낭의 잘못이오. 

그 놀림이 곧 나에게 돌아왔으니 정말 억울하외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지. 그리움이 몹시 사무칩니다.

                                      - 기유년(1609) 정월 허균


→ 이 편지는 연인으로서가 아닌 진정한 친구로서 우정을 간직한 허균의 마음을 담은 편지이다.


계랑에게

봉래산의 가을빛이 한창 짙어가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문득문득 난다오. 내가 자연으로 돌아가겠단 약속을 저버렸다고 계랑은 반드시 웃을 거외다. 우리가 처음 만난 당시에 만약 조금치라도 다른 생각이 있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찌 10년 동안이나 친하게 이어질 수 있었겠소. 이젠 진회해(秦淮海)를 아시는지. 선관(禪觀)을 지니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하다오. 언제라야 이 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으리까. 편지 종이를 대할 때마다 서글퍼진다오.                                                    - 기유년(1609) 9월 허균 



→ 매창의 죽음을 애도한 허균의 시조


 哀桂娘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妙句土甚擒錦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藥去人群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 서해의 낙조를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월명암 낙조대에도 올랐다. 그녀가 월명암에 올라 쓴 시가 있다  :  개암사(開岩寺) 


 하늘에 올라 절간을 지었기에

 풍경소리 맑게 울려 하늘을 꿰뚫네

 나그네 마음도 도솔천에나 올라온 듯

 황정경을 읽고 나서 적송자를 뵈오리라


→ 한(恨)


  봄새라 치위는 가시지 않아 / 볕드는 창가에서 옷을 깁노니

  숙인 머리에 눈물이 떨어져 / 옮기는 실귀가 말없이 넞는다 (신석정 역)


→ 산수(山水)를 찾아서


  먼 산은 사뭇 아스므라한데 / 언덕엔 버들이 안개에 묻혀

  잔 들어 시름은 풀 곳이 없고 / 고깃배 가는 곳에 살구꽃 핀다


→ 등잔불 그무러 갈 제~~


  등잔불 그무러 갈 제 창(窓) 앞 짚고 드는 님과

  오경종(五更鐘) 나리올 제 다시 안고 눕는 님을

  아무리 백골이 진토(塵土) 된들 잊을줄이 있으리


→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님 생각날 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백운사’ 이매창(10세 때 쓴 시)

  

  백운사 절에 올라와 봤어요 (步上白雲寺)

  절은 이름 그대로 흰구름 사이에 있군요 (寺在白雲間)

  스님, 흰구름을 쓸어 버리지 마세요 (百雲僧莫掃)

  내 마음이 흰구름 보면 한가로워져요. (心與白雲閑)

                                        -최 향 옮김-


→ 매창이 간지 35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이곳을 찾아온 한 시인은 그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개암사 옆길

 

※ 시조가 너무 많아서 그만 줄이겠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은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 알림사항

명기 매창이 지은 시조와 시문학은 약 57편(매창시선집)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소개한 것은 정말로 조족지혈에 불과 합니다. 매창에 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으시면 부안 문화관광과에 문의하시면 더 자세한 자료를 소개해 줄 것입니다.  ☎ 063-583-2101

- 매년 4월이 되면 매창 문화제가 열립니다. 시간이 나시면 부안에 구경갔다 오는 것도 추억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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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

이번주 신간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동아시아, 2006)이다. 지난번 <자유론>(아카넷, 2006)이 출간되었을 때 '이사야 벌린과 우파적 교양'이란 제목으로 관련 페이퍼를 적으면서 언론리뷰들을 옮겨놓은 적이 있었는데, 이사야 벌린의 1주기를 맞이하여 출간됐다는 이 책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할 리뷰가 올라와 있지 않다.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가 쓴 소개 정도가 예외적인데,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은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의 1주기에 맞추어 열린 추모 학술회의의 발표문과 토론 내용을 엮은 책이다. ‘고슴도치와 여우’ ‘다원주의’ ‘민족주의와 이스라엘’ 세 가지 주제로 나뉘어 영국과 미국 등의 저명한 학자들이 참여해 심도 높은 논의를 벌였다."

 

 

 

 

그 세 가지 주제를 편집한 이들이 각각 마크 릴라, 로널드 드워킨, 로버트 실버스이다. 실버스는 생소하지만(<숨겨진 과학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실버스가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크 릴라와 드워킨의 경우는 이미 다른 저서들이 소개돼 있다(특히나 로널드 드워킨은 존 롤스 이후의 가장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 이름이 높다). 이들 외에도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쩌 같은 걸출한 철학자들이 저자로 참여하고 있다.

리뷰의 내용을 마저 옮기면, "고슴도치와 여우’란 벌린의 논문에서 따온 개념으로, 거칠게 구분하자면 고슴도치와 여우는 각각 일원론과 다원주의에 해당한다. 소극적 자유의 개념을 강조한 벌린은 물론 다원론적 여우의 손을 들었다. 벌린의 생전에도 그러했지만 학술회의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다원주의를 지향한 벌린이 그 자신 유대인으로서 유대 민족주의인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대해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의 지인이기도 했던 아비샤이 마갈릿 예루살렘 헤브루대 교수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 남아야 하고, 이스라엘 내 무슬림 성지들은 무슬림 당국의 치외법권 아래 두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유엔은 무력을 통해서라도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벌린의 마지막 편지를 공개했다."

이사야 벌린의 최초의 저작이 <칼 마르크스>(1939, 1978 4판)이며, '톨스토이의 역사관에 대한 에세이'란 부제를 갖고 있는 <고슴도치와 여우>(1953)는 그의 두번째 책이다(얇은 책이다). 고슴도치와 여우가 각각 일원론과 다원론을 상징한다고 돼 있는데, 벌린이 비유하고 있는 작가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이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는 높이 평가하지만 그가 선호하는 작가는 톨스토이이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아마도 투르게네프일 것이다. 그리고 이 투르게네프와 마르크스는 생몰연대(1818-1883)가 동일하다. 그런 우연의 일치 때문만은 아니지만(사실 벌린이 <칼 마르크스>를 쓰게 된 계기도 아주 우연적이다), 나는 이사야 벌린을 이해하고자 할 때 핵심적인 키워드 두 가지는 '마르크스'와 '투르게네프'가 아닌가 싶다.

사실 러시아 태생(리가 출신이다)의 유태인이기도 하지만 벌린은 러시아 문학과 사상에 정통한 철학자이다. 그리고 그걸 확인시켜주는 저작이 <러시아 사상가들>(1978)이다(책 표지에 실린 이들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게르첸과  벨린스키, 그리고 투르게네프이다). 벌린의 지적 유산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나는 이들 작가/사상가들에 대한 그의 평가와 그가 받은 영향들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더불어 바라는 바는 이 책 또한 번역/소개되는 것이다.  

얼마전 책장을 정리하다가 브라이언 매기가 편집한 <현대철학의 쟁점들은 무엇인가: 거장들과의 대화>(심설당, 1985/1989)를 들춰볼 기회가 있었는데, 전체 15장(15명의 철학자들과의 대화)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장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바로 이사야 벌린 경과의 대화이다('아이사야 벌린 경'이라고 표기돼 있다). 철학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란 질문에 대해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신념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가정들에 대해 비판적인 검색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벌린은 몇 가지 사례를 예로 든다.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바로 일상적인 견해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진지한 노력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모든 위대한 철학자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위대한 소설이나 희곡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입센의 희곡의 주인공과 투르게네프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혹은 포스터의 <가장 긴 여행>들에 나오는 주인공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어서 보다 '철학적인' 대담이 오고가지만, 내가 주목하는 것은 벌린이 입센, 투르게네프, 포스터 등의 작품들을 거명하는 태도이다. 명망있는 철학자이지만 그는 위대한 문학에 대한 존경 또한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하니, 벌린을 읽기 위해서는 적어도 투르게네프 정도는 읽어주는 게 좋겠다. 포스터의 책은 <기나긴 여행>으로 올해 번역돼 나왔지만,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은 진작에 번역/소개돼 있잖은가. 그러한 기본적 태도가 빠지게 될 경우 <전야> 혹은 <전날밤>이라 소개돼 있는 작품 'On the Eve'를 <크리스마스 이브에>라고 엉뚱하게 옮기게 된다(영역본 제목의 'Eve'는 크리스마스와 전혀 무관하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전야>(1860)는 결과적으론 러시아 농노해방(1861)의 '전야'를 보여주게 된 작품이다). 문학에 대한 무지는 철학도의 자랑이 아니라 근심이어야 한다.    

 

벌린의 관한 자료와 이미지들을 뒤적거리다 보니까 존 그레이의 <이사야 벌린>(1996) 같은 책도 눈에 띈다. 200쪽이 안되는 분량이기에 입문서로서 유용할 듯싶은데, 영어권에서도 고작 세번째로 출간된 관련 단행본이라고 한다. 이왕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을 챙기기 시작한 바에야 이 정도는 금방이라도 소개해줄 필요가 있겠다...

06.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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