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전체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토요일밤에 올겨울 들어 눈다운 눈이 처음 내렸고, 덕분에 학회 뒷풀이를 마치고 늦은 귀가길을 재촉하는 마음도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 가벼운 폭설에 대한 감상을 몇 자 적으려고 컴퓨터를 켰건만 악성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은 탓인지 인터넷이 먹통이었다. 진종일 복구하느라 애를 썼지만(물론 애를 쓴 건 집사람이고 나는 욕만 먹었다) 성과는 없어서 결국 당분간은 노트북에 연결해서 쓰기로 했다(해서, 이 페이퍼는 노트북으로 작성하는 첫 페이퍼이다).

 

 

 

 

기분도 무거운 김에 첫주제를 '전체주의'로 잡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해의 끝물은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1,2>(한길사, 2006)가 장식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테마와 관련해서는 이전에 쓰거나 옮겨온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 '두 개의 전체주의'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 등의 페이퍼들을 참조할 수 있다. 이번에 '전체주의'를 검색하다가 박노자 교수가 몇 년전에 쓴 칼럼을 발견했는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함께 아렌트의 명성을 각인시켜준 이 노작을 읽기 전에 미리 읽어봄 직하다.

한겨레21(03. 11. 06) 누가 진짜 '전체주의'인가

독일인 의사로 북한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다 북한 체제 비판으로 추방당한 뒤 최근 남한과 미국을 무대로 “북한 체제 전복” “북한 주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이색적인 행동으로 자주 스캔들을 일으키는 폴러첸(Norbert Vollertsen)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그는 북한 체제를 ‘나치 정권’과 비교하고 그 체제에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붙이곤 한다. 북한에 대한 어떠한 포용책도 히틀러에 대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영국·프랑스 등의 일관성 없는 유화정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동독의 멸망이 대량 피난으로 시작되었듯, 북한 체제 붕괴도 중국으로의 대량 피난으로 시작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폴러첸은 나치 정권·옛 동독·북한은 동질적인 ‘전체주의’이며, 자신은 ‘전체주의에 맞서는 자유의 투사’로 여기는 듯하다.

 

 

 

 

 

 

 

 

 

북한을 포함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을 송두리째 나치와 동일하게 보는 것이 폴러첸뿐인가 냉전의 발발(1946~47년)부터 오늘날까지 소련식의 체제를 ‘나치식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미국식 자유주의 사회’와 대조하는 것이 구미 보수언론들의 기본 논조다. 사회과학을 독자적으로 학습한 적이 없는 폴러첸이나 ‘악의 축’ 망발로 누명을 쓴 부시 현 대통령도 이 논조를 충실히 따를 뿐이다.

보수 신문이나 방송만으로 ‘상식’을 배우고 독서할 줄 모르는 부시와 같은 ‘지도층’으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최근의 사회과학 저서를 한번이라도 본다면-소수의 극우·우파 편향적 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전문 학자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억압성과 경직성을 인정하면서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과 나치를 동일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는 용어의 사용 자체를 자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세계의 어떤 독재의 잔혹성을 강조할 때-특히 나치 독일의 파트너이던 일제 말기 총동원 사회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아시아 개발 독재(1980년대 말 이전 남한·대만 정권)를 이야기할 때- ‘파시스트적’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리고 ‘매우 억압적인 사회’라는 의미에서 ‘전체주의적’이라는 수식어도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사회학적 범주로서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요즘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보수언론들이 반세기 넘게 이용해온 ‘전체주의’ ‘나치와 소련 사회주의 동질론’등의 담론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학술적인 입장에서 어떤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지가 밝혀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기 때문이다.

냉전 초기인 1940년대 말~50년대 초, 당시 미국 사회과학 학계에선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나타났다. 미국 학계에 새로운 역동성을 가져온 독일계의 자유주의적 망명 지식인들은 그들의 고향 독일이 왜 파시즘과 전쟁을 맞이하는가에 대해 뼈저리게 고민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소련과 중국이라는 생소한 ‘미지의 세계’들이 미국의 주적이 됐기에 관(官) 주도의 ‘지역 연구’가 붐을 이루었다. 안보기관과 각종 재벌기금의 전례 없는 지원과 미 중앙정보국(CIA)과 국무성의 끈질긴 ‘지도’ 아래 1946년 콜롬비아대학의 러시아연구소, 1947년 하버드 대학의 러시아연구센터 등이 각각 설립됐다.

학생 시절부터 안보기관의 연구비를 받고 소련이나 중국을 인류의 숙적으로 알고 있던 ‘지역 연구기관’ 출신의 관 학자들에게는 공산주의의 본질적 악질성을 증명하는 이론이 필요했는데, ‘최고의 자유 지성’으로 인정받던 독일 계통의 망명 학자들로 인해 그 이론을 제공할 수 있었다. 비극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지성인들의 고뇌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공산주의의 악마화에 ‘황금의 기회’를 준 것은 독일계 유대인 여성 철학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75)가 발표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이었다. 그 후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이론적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정통 자유주의자 아렌트는, 자신을 망명객으로 만든 독일 파시즘을 ‘전체주의’의 모범으로 파악했다. 소련을 ‘전체주의 국가’의 명단에 넣었던 그녀는 1968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재판(再版)할 때 “소련은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로 불리면 안 된다”고 명시하는 등 애써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체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핵화(核化)돼 무기력해져 천편일률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기 꺾인 개인’ 등을 삼았는데, 이는 1950년대 초 소련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웃 공동체가 아직 해체되지 않고 향촌 사회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완벽하지 않았던 당시의 소련과, 전통 공동체의 관계가 그대로 잔존하는 오늘의 북한에 ‘개인의 완전한 고립’과 같은 테제를 적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녀에게 이 책은 주로 독일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가졌음에도 미국의 수많은 관학자들은 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판 삼아 현실 사회주의에 악마의 얼굴을 씌우기 시작했다.

 

 

 

 

이 일에 가장 앞장선 자는, 미국중앙정보국과 국방분석연구부(IDA)의 지원으로 운영되던 대표적인 ‘지역연구’ 기관인 콜롬비아대학교 부속 공산권문제연구소 소장이던 브레진스키(Zbigniew Brezezinski, 1928년생,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이 됨)였다. 그의 <전체주의적 독재와 전제(專制) 정치>(1965)에 따르면 소련 정권은 나치와 동질적이고, 무차별적 공포정치, 언론 완전 장악, 무력 수단, 국가의 철저한 경제 통제 등의 특징을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 북한과 같은 ‘약소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의 실리주의적 대외정책, 스탈린 죽음(1953년) 이후 대사회적 억압은 지속돼도 ‘무차별적 공포정치’가 거의 종언을 고한 점 그리고 정부의 무기·경제·통신수단에의 관여 내지 부분적 통제가 대다수 근대국가들의 특징이라는 점 등은 철저히 무시됐다.

브레진스키류의 관 학자들에 의해 왜곡돼버린 아렌트의 ‘전체주의 이론’은 극우들에게 전가의 보도처럼 됐지만, 1960년대 말 좌파는 물론 실사구시적 접근법을 고수하려는 수많은 자유주의적 학자들은 노골적인 편향과 현실에 대한 무지로 점철한 ‘전체주의 담론’의 허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파시즘 연구자인 캘리포니아대학의 사우어(Wolfgang Sauer) 교수는, 자본주의의 선진화 과정에서 신분을 상실한 소시민적 낙오자를 중심으로 한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라는 극우운동이 후진 지역의 선진화를 목적으로 하는 ‘좌파적 극단적 개발주의’인 볼셰비즘과 정반대 위치에 섰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학계에서 주류가 된 이 주장을 이론화한 학자는 폴란드 출신으로 현실 사회주의를 체험한 영국 리즈대학교의 바우먼(Zygmunt Bauman) 교수였다. 그에 따르면 선진 지역의 ‘천민 극우 근대주의자’인 파시스트들이 식민지에서 대량학살 경험을 유럽에 이식시켜 홀로코스트 등을 저질렀고, 후발 근대화 지역의 볼셰비키 등의 ‘좌파적 근대주의자’들은 대중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전통적 기제들(조국사랑, 지도자의 가부장적 이미지 조작, 간부층과 노동자층의 대가족적 관계 강조 등)을 이용해 상당히 공고한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독재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 학자들의 북한 사회 이해 역시 ‘전통주의적 기제들과 일부의 일제 시대의 통제 메커니즘을 이용하고 근대 주권국가 건설·방위를 강조하는 개발주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북한 사회가 일제 말기의 총동원 사회로부터 이어받은 일부분의 파시스트 연한 요소(육탄정신 찬양, 천황제를 이은 듯한 수령제의 종교화 등)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소수 우파 학자를 제외한 대다수는 역사적 형성 과정과 정통성 부여 방식, 대외정책 방향이 이질적인 나치 독일과 북한을 전면적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을 학술로 보지 않는다. 문제는 구미 지역의 주요 보수언론들이 극우의 구시대적 견해를 십분 활용하면서 ‘전체주의’와 같은 수사적 어휘를 마치 학술용어인 듯 구사하는 데 있다. 결국 40~50년 전 미국중앙정보국 지원으로 만들어져 언론자본에 의해서 계속 재생산되는 전체주의의 담론이 지금 폴러첸의 모험주의적 대북 행동과 부시의 세계적 횡포를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주의 담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접근은 무엇인가 북한 사회의 구성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해석, 규명해 북한 사회의 성격에 대한 객관적 정론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북한 사회를 이끄는 ‘극단적인 좌파적 근대주의’의 기원이 규명되는 동시에, 북한식 ‘합의 독재’와 ‘위로부터의 근대화’의 어두운 면도 과감하게 밝혀져야만 한다. 전체주의 담론을 붙잡는 극우들이 북한 인권 문제를 비방의 도구로 이용하지만, 남북의 민중 모두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 20세기 근대주의에 대한 남북의 경계를 초월하는 해부·해체 작업이야말로 ‘민중을 위한 21세기’를 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다.(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06. 12. 18.

P.S.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리뷰들이 뜨지 않고 있다. 알라딘의 '새로나온 책'에서 발견했을 뿐 나도 아직 실물로는 보지 못했다(대신에 나는 하코트에서 나온 원서를 갖고 있다). 한편, 박노자 교수의 글을 읽다가 새삼 생각난 건 폴란드 태생의 걸출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1925- )의 주저들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물론 두어 권의 책은 소개돼 있다). 가령,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 같은 책. 더불어 포스트모더니티에 관한 그의 몇몇 책들. 나도 고작 몇 권을 갖고 있을 따름이지만, 내년에는 바우만의 책들이 적어도 아렌트만큼은 소개되었으면 한다. 해가 가고 오는 게 다른 의미를 갖는 게 아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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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하드디스크 공간 늘리기

하드디스크는 창고와 같이 많은 프로그램과 데이터들을 저장하는 곳이다. 이 하드디스크의 공간이 부족하면 컴퓨터 속도도 떨어지는등 컴퓨터 사용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맨 처음 컴퓨터를 구입했을 경우는 하드디스크에 많은 공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사용기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그 많던 하드디스크 공간은 만원버스마냥 꽉 차 버리는 경우가 있죠.

용량이 큰 하드디스크로 교체하면 되지만 추가 비용이 들어가므로 필요 없는 파일들을 삭제하여 약간이나마 하드디스크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생각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도 있다.

삭제해도 되는 파일들의 확장자

  • old ▶ 윈도우를 여러번 설치할 경우 시스템에서 발견되는 이전 버전의 파일들
  • chk ▶ 하드 디스크 검사후 발생한 오류를 저장한 파일
  • tmp ▶ 잘 아시다시피 임시파일입니다.
  • hlp ▶ 도움말 파일
  • gid ▶ 도움말 파일인 *.hlp 파일을 열면 생기는 인덱스 파일
  • --- ▶ 윈도우 재설치 생기는 백업(back up)파일
  • bak ▶ 알다시피 back up 파일(위의 백업파일과는 약간 다르죠)
  • fts/ftg ▶ 도움말 파일(*.hlp)과 관련된 파일로 도움말에 내장된 색인 파일


위에 나열된 파일들은 삭제를 해도 무관한 파일들입니다.
삭제 방법은 '
F3' 키나 '윈도우 키'+'F' 키를 누르면 '찾기'창이 나온다.
(또는
'시작'→'찾기'→'파일 또는 폴더'를 클릭)

거기에서 '이름'에다가 삭제하고픈 파일들의 확장자를 적고 '지금찾기'를 클릭 한다.
예를 들어 확장자가 .hlp 파일을 삭제할려면 이름란에다가
*.hlp 라고 적으시고 찾으시면 확장자가 .hlp 인 파일들이 나타날 거예요. 그럼 삭제!

위의 *.hlp라는 말은 확장자가 .hlp인 파일을 말합니다.
확장자가 .bak파일을 삭제할려면 *.bak 라고 적으시면 되겠죠

특히 tmp 파일은 c:\windows\temp에 많이 쌓이는데 탐색기에서 직접 이동하여 전체 삭제하여도 된다. 혹 실행중인 파일일 경우 안 지워지므로 실행중인 프로그램을 모두 종료하고 삭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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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

아이를 데리러 피아노학원에 가기 전에 잠시 포털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란 라디오 대담 녹취록을 읽어보았다. 김어준과 강유원의 30분짜리('배수의 진'이란 코너) '수다'를 녹취한 것인데 예전에 읽어본 '데리다를 안 읽어도 되는 이유'에 이어지는 것인 듯싶다(굳이 따지자면 '인생을 굳이 안 살아도 되는 이유' 같은 게 먼저 다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세상에 굳이 해야만 할일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더불어, 데리다 대신에 헤겔을 읽어야 한다면 독자의 부담이 덜어지는 것인가?).

그러니까 시기적으론 2004년 이맘때인 듯싶다. 방송의 성격상 '웃자고 하는 얘기'의 성격이 강하지만(대담의 타겟은 '세계문학'에 대한 부르주아적 규준과 그에 대한 조롱이다. 더불어, 속물적인 무지의 정당화에 대한 아이러니이다) 프랑코 모레티의 책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워밍업 삼아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녹취록의 문단들은 조정했지만 오자들은 따로 수정하지 않았다).   

김어준/강유원 대담: "세계문학을 안 읽어도 되는 이유"

김어준 : 코드 마음에 드십니까?

강유원 : 예, 마음에 듭니다.

김 : 예 지난주엔 저희가 삶의 모두스 비벤디(피식)에 대해 얘기하면서 철학을 삼십분에 쫙 정리해버렸는데,

강 : 아 그렇죠.

김 : 이번 주는 어떤 주제입니까?



강 : 혹시라도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데요, 철학 책을 사서 읽는다거나 하지 마십시오. 불필요합니다. 이번 주에는 세계의 문학. 이거 스트레스 받습니다. 고전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얼마나 두꺼운지. 재미도 없어요. 사람 이름도 외우기가 힘들어요. 가령 러시아 작가들은 작가 이름도 어렵고 안에 들어가 있는 주인공들 이름도 어려워요. 특히 그런 주인공들 이름얘기하면서 마치 당연히 알지 이런 식으로 말 걸 때 당혹스럽죠. 뭐냐 가령 너 라스콜리니코프적이야 이렇게 말하면, 주인공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데다가(김어준 폭소) 그녀석이 어쨌다는 건지 난감한데, 그러면 그게 뭔데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김 : 당연히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얘기를 해야 하잖아요.

강 : 일단 세계문학 주제가 되잖아요, 그럼 아무 소리도 말고 가만있어야 합니다.

김 : 가장 좋은 방법은 가만히 있는다.

강 : 가만히 살살 웃다가 가끔 한번씩 호탕하게 웃어줘야 돼요. 한번씩 호탕하게. 그러면 사람들이 뭐가 있는 줄 알거거든요.

김 : 그렇죠.

 

 

 



강 : 세계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들어가면, 일단 문학에 대해서는 아주 기본적으로 청취자 여러분께서 아시고 계셔야 되는 게, 문학 이전에 책, 책에 대해 편견을 버리셔야 돼요. 책을 많이 읽으면 유식해진다거나 책 많이 읽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거나(하하하) 혹은 책이 사람을 만든다거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이런 표현 있죠? 이거 일단 버리셔야 돼요.

김 : 책을 많이 읽으면 유식해진다.

강 : 예.

김 : 책을 안 읽으면 무식해진다 이런 생각 버려야한다?

강 : 예. 안 버리면 영 괴롭습니다. 그게 어렸을 때부터 사실 그러거든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한번.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구가 한 육십억 쯤 되죠. 그 인구 육십억 책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일억도 안 되죠.

김: 아, 그래요?

강: 그렇죠, 1억도 안 되죠. 지금 우리 주변에 책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꼽아보면 몇 명도 안돼요. 제가 직접 책을 읽고 쓰고 하니까, 제 형제들이 있는데 남동생만 둘이 있거든요, 제 형제들이 다 열심히 책 읽는 것 같지만 아니에요. 제가 작년 가을에 무슨 책을 하나 냈는데 책 표지가 노랬습니다. 제 동생이 와서 하는 말이 ‘어 형 책 냈네? 책표지 노랗고 이쁜데?’ 그러고 가더라고요. (김어준 폭소)



김 : 하하하. 책 표지 노랗고 이쁜데.

강 : 네. 이 정도니까 제가 제 동생을 비난할 수 없어요. 훌륭함의 정도는 저보다 제 동생이 나을 수가 있거든요. 일단 책 얘기가 나오면 이 대사를 알려드리자면, 우선 책의 본질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나 이렇게.

김 : (아하하) 세계문학을 논하기 이전에 책의 본질에 대해 알아봐야 하지 않나. 세계문학에 대해서 얘기가 나온다면.

강 : 예.

김 : 여기서 우선 기선제압용 맨트를.

강 : 네. 세계문학 하면 사람들이 하아~. 이번에 오스트리아에서 무슨 노벨문학상 받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스트리아에서 누가 있는지 알게 뭐에요. (훗훗훗)모르죠. 모르죠. 모르니까 우리 오스트리아 하면 아는게 모차르트밖에 없어요. 모차르트는 알고 있을 만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것만 우선 생각하시면 돼요. 책의 본질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나.

김 : (배경음 깔리듯)기선제압용 맨트 나왔습니다, 책의 본질부터 따져봐야 하지 않나.

강 :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던 거 있죠?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중 책 읽는 사람 몇 안돼. 이러면 사람들 다 숙연해집니다(아하하). 50억 넘는 인간 중에 책 읽는 사람 1억인데 우리가 나머지 49억에 속한다고 해서
인생살이 괴로운 거 아니다. 거기다 덧붙이면, 인류가 생겨난 이래 책 읽은 사람이 몇 명이겠냐. (와하하) 숫자로 확 밀어붙이면요, 세계문학은 커녕 아무 책도 읽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런 판단이 딱 깔리고 들어갑니다. 일단 이렇게 최저의 경계선을 밑으로 낮추어야 돼요. 낮추면은 사람들이 어 하거든요. 이때 세계문학을 얘기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나도 책 좀 들여다 봤지만, (조그맣게) 열 권도 안 될지라도, 책 좀 들여다 봤지만 하면 본 것 같아요.

김 : 리드가 들어갔으니까,

강 : 끄트머리에 만으로 끝나는 문장 있죠, 이게 상대방에게 기죽이기 아주 좋아요. 가령, 이거는 직장생활하는 약간의 팁으로 말씀드리자면, 직장 상사가 어이 강유원 씨 왜 이따위로밖에 못해 이러면, 열심히 했습니다만... 하고 계속 이렇게 만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말이 끝난 것 같기도 하면서 끝나지 않은 것도 같기도 하면서 계속 그러거든요. (하하하) 그럼 왜 이따위로밖에 못해 이러면, 계속 잘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만... 이렇게. 가령 메신저로 채팅을 할 때도, 되나 안 되나 테스트 한번 해보세요. 무슨 얘기하다가 알고 있습니다만, 만... 하면서 마침표 치지 않고 있으면, 상대방이 말을 안 해요. (아하하하) 그러니까 책에 대해서 말을 할 때도, 책을 좀 들여다봤습니다만, 이러면 사람들이 조용하거든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있으면 돼요. (대폭소) 그럼 저쪽에서 무슨 말로 상대해야 할지 굉장히 아리까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할 때 이제 세계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김 : 책의 본질에 대해선 아까 얘기했으니까, 나도 책 좀 읽어봤습니다만.

강 : 세계문학이라는 건 사실은, 이때 단어 중요한 거 나옵니다, 이데올로기 이거 외우세요. (웃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이거 외우셔야 됩니다. 스펠링 모르셔도 돼요. 굳이 말한다고 해도, 우리말로 다섯 글자 세 글자니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세계문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김 : (웃음) 키 문장 나왔습니다. 기선제압 문장 나왔고, 리드 문장, 책을 들여다봤지만, 핵심 문장, 세계문학이라는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강 : 네 그렇죠. 지금 우리가 이제 흔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죠 그렇게 하면요, 약 1분 정도 분석을 해줘야 하거든요. 지금 세계문학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죄다 잘산다는 나라의 문학 아니야, 이렇게 하면은 이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이라는 게 바로 서포팅 돼요.

김 : 혹시 간혹 가다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들한테는.

강 : 또 이렇게 하죠. 세상을 사는 기본 단어가 안 들어있네. 이데올로기, 몰라? 허위의식. 딱 이렇게 하고, 헤게모니, 주도권. 단어 뜻 많이 알고 있으면 안 됩니다. 외우는 사람도 힘드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이 많으면요, 상대방이 이 사람이 아는 게 적어서 변명이 많다 이런 식으로 알거든요. 딱 잘라서 단정적으로 얘기할 필요가 있어요, 이런 핵심단어들은. 세계문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이데올로기라는 게 뭡니까, 이러면 이 사람, 쯧쯧쯧 이렇게 나가면서, 헤게모니라는 단어 알고 있어? 이렇게. 그 두 개의 단어를 갔다가 상대를 누르면은, 그게 중요하거든요.

김 : 자, 핵심 문장 하나 나왔고요.

강 : 그렇게 해서 내가 보기에는 세계문학 그래도 읽어야 한다면 말이지.

김 : 아 그 다음은.

강 : 그래도 읽어야 한다면 말이지, 이렇게,

김 : 네.

강 : 주요 강대국들의 작품이 빤하긴 하지만, (아하하) 그 동안 거론됐던 세계문학 많거든요. 보봐리 부인이니 그런 것들 많은데, 그런 건 사람들 다 알아요. 그런데 우리 읽을 필요 없거든요. 읽어봐야 되게 재미없습니다. 그리고 읽다보면 짜증이나요. 우리가 그 분야에 불어불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다니는 사람 아니니까, 세익스피어의 햄릿같은게 세계문학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오델로 멕베스 이런거, 그런데 읽어보면 오바된 문장이 많아요. 그 시대하고 우리하고 다르기 때문에. 읽다보면 짜증이 나는데 이런 문장 읽을 필요가 없거든요. 도움도 안 되는데, 그런 걸 거론하면요 대화 상대방중에 분명히 아는 사람이 있거든요. 상세하게 분석 들어가면 우리, 우리 수준에서는, 그렇죠 우리 수준에서는 안 되는거지. 이럴 필요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택도 없다고 생각할 만하지만 누구나 다 읽었을법하지만 나도 한번 읽었을 것들. 미국의 세계문학 작품, 톰 소여의 모험. 톰 소여의 모험. 네 이거 훌륭한 작품입니다. 이거 애들 동화책 아니에요. 동화책이 이게 원래 동화책이 아냐. 이게 사실 따지고 보면 등장하는 톰 소여라던가 허클베리 핀이라던가. 그 다음에 페인트칠하는 장면들 흑인들 이런게 나오니까, 이게 미국사회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준 작품이기 때문에, 톰 소여의 모험, 이 정도만 읽어도 세계문학입니다. 톰 소여의 모험. 네. 이거 하나면 됩니다. 마크 트웨인.

김 : 마크 트웨인.

강 : 톰 소여의 모험.

김 : 톰 소여의 모험.

강 : 이거 하나만 기억하시면 돼요. 그리고 미국이란 나라가 역사가 짧기 때문에요, 문학이라는 게 없어요,
짜잘한 나라거든요 사실. (아하하) 인류의 역사에서 세계적으로 볼 때 미국이 세계사에 편입되기 시작한 게 몇 년 안 되거든요.

김 : 그렇죠.



강 : 2,300년밖에 안된 나라에 무슨 문학이야? 미국이라는 나라의 영어라는 게 네이티브 언어가 아니거든요. 고유 언어가 아니잖습니까. 미국, 마크 트웨인, 톰 소여의 모험. 이거 하나 딱 기억해주시고요. 영국, 그럼 찰스 디킨스 아닙니까, 올리버 트위스트 다 읽었죠! 이거 세계문학입니다. (조용히 김어준이 ‘나는 안 읽었다’고 언급한 듯한 분위기에서)이게 세계문학인가 하면서 올리버 트위스트 안 읽어본 사람 있으면, 안 읽어도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 외우시면 돼요. 영국, 영국 하면 우리가 먼저 떠올리는 게 산업혁명이죠. 산업혁명기에 사회 계급적 문제를 드러낸 작품이거든요, 올리버 트위스트가. 이렇게 외우시면 돼요. 산업혁명 계급문제 올리버 트위스트. 그렇죠. 이건 중학교 때 배우거든요. 영국 산업혁명 계급문제 올리버 트위스트. 이제 됐습니다. 그런데 3대 강국에 또 프랑스가 있잖아요. 프랑스 이거 까탈스럽습니다.

김 : 까탈스럽다(궁시렁)...

강 : 프랑스 이것저것 많이 건드리거든요. 이게 또 나름대로 문학의 나라라. 딱 그러면요,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프랑스 문학 작품 하면 알베르 까뮈 뭐 이방인 이러잖아요. 이방인 까뮈의 상표를 딴 꼬냑 있죠.

김 : 그렇습니까?

강 : 있습니다. 그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됩니다.

김 : 아, 까뮈 꼬냑.

강 : 네. 까뮈라는 이름의 꼬냑이 있어요. 프랑스 문학은 계속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좋은 건지 저게 좋은 건지 어렵습니다. 프랑스 문학은 좀 따분하고 하니까, 글쎄 프랑스 문학은 워낙 변화가 심해서, 이렇게 하고 둘러대고 넘어가면 됩니다. (아하하) 같은 세계문학에 넣어주기가 어렵습니다. (아하하하 계속) 정체성 찾기가 어렵단 말야, 이러면서 넘어가면 됩니다. 거기까지 기억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정도야 저도, 누구나 기억할 수 있죠, 마크 트웨인 톰 소여, 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미국 실상 그대로 영국 산업혁명, 다 외웠습니다. 흑인 나오거든요, 톰 소여 보면.

독일, 프랑스, 워낙 까탈스러워서, 아직도 정체성이 확실치 않아, 변화가 심해. 독일 그러면 헤르만 헷세 그런 게 나오거든요. 헤르만 헷세 그러면 이제 젊은 베르트르의 슬픔인지 뭐 그런 거 나오는데, 헤르만 헷세 하면 유리알 유희라고 머리에 쥐나게 생긴 소설 있어요. 고거 읽었다는 사람 있거든요. 그거 읽었다는 사람 나오면은, 과감하게, 독일도 외울 필요 없어요, 헷세가 있긴 하지만, 독일 작품은 워낙 형이상학적이라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쫙 찔립니다.(와하하하) 독일 문학이라는 게 워낙 관념적이거든요. 칸트 헤겔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다섯 명 중에 두 명인데, 대단히 철학적이거든요. 독일사람 두 명, 그리스 사람 두 명. 독일 문학이 워낙 철학적이라.

김 : (끼어들며)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디 사람인가요?

강 : 아, 그 당시 중세는 어느 나라에 속했다고 말하기 어려운데, 이태리 사람이라고 보면 되죠. 네 그런데, 독일 문학은 워낙 철학적이라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김 : (중얼거리듯 따라하며)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강 : 이렇게 하면은 이제 외워야 하는 작품 두개밖에 안되죠. (아하하하) 톰 소여의 모험과 올리버 트위스트.
그리고 프랑스는, 하긴 이 나라들이 지금까지 세계문학을 주도해 왔으니까, 지금까지 걔들이 세계라고 했잖아요. 그 다음에 이제 러시아 문학이 많이, 러시아가 남았는데 아 이거 괴롭거든요. 프랑스 워낙 변화가 심해서 독일 워낙 철학적이어서. 그런데 러시아 문학 남았거든요. 아, 러시아 문학, 이거 괴롭거든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라스콜리니코프.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러시아 문학. 일단 이름이 외우기 어렵습니다. 러시아 문학에 보면 라스콜리니코프가 죄와 벌의 주인공인데, 그 이름 외우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적 인간 그러면 그 인간이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알게 뭡니까. 러시아는 좀 더 지켜보자고! (대폭소) 딱 이래버리면은 작품 두개 외우고, 그 다음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다섯 개 국가, 딱 잡힙니다.

김 : 러시아는 좀 더 지켜보자고.

강 : 아, 좀 더 지켜보자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작가 이름을 외우기도 어렵거니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이 워낙 꼬여있어요. 악령이라던가 그런 작품들 읽고 감동받았다는 그런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런 감동스러울 정도로 어려우니까 읽지 마시고, 그 다음에 주변부 국가들이 있는데 아르헨티나라던가 보르헤스라던가 이런 요즘 작품들이 있거든요. 이런 작품들이 거론되면 지난시간에 제가 알려드린거 있죠? 문학의 역사가 워낙 기니까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신생아들이라고 하는겁니다, 역시. 아, 그런다음 우리가 국내에서 얘기할 때는 이렇게.

김 : 국제적 대처방안도?

강 : 국제적 대처방안도 있죠. 국제적 대처 이거 굉장히 중요한데요, 외국인들이 혹시 외국인하고 얘기를 하게 됐다, 아, 외국인과 얘기하는 경우라면 확실하게 물건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령 프랑스에 갔다, 그럼 프랑스 사람들이 영어를 잘 못하니까 영어로 합니다.(푸훗) 서로가 외국어기 때문에 기죽을 필요 없거든요, 프랑스 사람들이 프랑스 문학에 대해서 막 얘기를 하면서 자기네 문학의 성취라던가 플로베르라던가 알렉상드로 뒤마라던가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그럼 아 그런 작품들이 있었군요, 하면서 일단 띄워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언제적 사람들이냐, 1800년대 사람들이거든요. 1800년대 사람들이면 아 그러냐 해요. 한국에서 세계문학이라고 내놓을만한 게 있느냐, 그러면 사실 문학이라는 게 어떤 게 우월하고 어떤게 우월하지 않느냐 하고 평가할만한 기준이, 객관적 기준이 없어요. 그죠? 그럴땐 우리가 딱 객관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있다 한국에도. 한국에도 박경리의 토지가 변억되었다 그런 거 다 쓸데없는 짓이에요. (폭소) 읽지도 않아요. 그 두꺼운 책을, 아이고, 할 일이 없어요? 읽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한국에 아주 오래된 문학이 있다. 서기 700년 무렵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향가가 있다. 그럼 서기 700년에 너네 뭐했냐, 그럼 한 일이 없거든요. 걔들. 아스테릭스 시대에요 그때가.(둘 다 큭큭거림) 그럴 때 이제 제망매가 같은 거 외우기 쉽거든요. 토지 같은 거 읽기도 어렵고 스토리 요약도 어려운데, 열 줄밖에 안 되니까 외우기 쉬워요. 딱 한 마디 읊어줍니다. 우리나라 한국에는 서기 700년경 이런 문학이 나왔다. 니네 서기 700년에 뭐했냐.

김 : 영어공부부터 먼저 해야겠네요, 저같은 경우는. 영어로 얘기를 하는 상황이니까.

강 : 다 그럴 필요 없죠. 제망매가 안 외웠으니까 모르거든요. 제망매가 딱 한 구절만 제가 소개해드릴게요. 이른 가을에 (김어준 한 마디씩 따라함, 이른 가을에) 흩어지는 낙엽처럼 (흩어지는 낙엽처럼) 한 가지에 나서도 (한 가지에 나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구나.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구나) 누이동생을 갖다가 안타까워하면서, 죽은 누이동생을 안타까워하면서 부른 노래거든요. 그런 구절은 어디서나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핵심은 뭐냐, 서기700년에 이미 한국에는 문학이 있었다. 요거만 딱 하시면 됩니다.

김 : 저희가 벌써 시간이 다 됐는데, 미국은 마크 트웨인 톰소여의 모험, 영국은 찰스 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프랑스는 워낙 변화가 심해서, 독일은 워낙 형이상학적이라서, 러시아는 좀 더 지켜보자고, 세계문학은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닐까, 키 문장 나왔고요, 마지막으로 이런 거 어떻습니까. 노벨문학상을 거론하는 사람들, 노벨문학상 수상작 제목들 거론하면서,

강 : 아, 그거 중요하죠. 노벨은 화학 공학자인데 웬 문학. 이러면 딱 얘기 끝납니다. (웃음) 화학 공학자거든요, 노벨이 엄밀한 의미에선. 노벨 문학상은 노벨의 참뜻에 어긋나는 상이야. 간단하시죠?

김 : 알겠습니다. 기선 제압용으로는 책의 본질, 그때 허허허 한번 웃어주시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기선제압용으로 책의 본질에 대해서 아나, 하고, 가만히 있다가 얘기를 시작할 때 나도 책 좀 들여다 봤지만, 하고 뜸 1분 가량 들인 다음에, 사람들이 쳐다보면 세계문학이라는 게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의 산물 아닌가. 하고 또 뜸 좀 들이겠죠? 그리고 미국은 마크 트웨인 톰 소여 대모험, 실상.

강 : 흑인이 나옵니다,

김 : 네 흑인, 그리고 올리버 트위트스, 산업혁명, 계급,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각각 변화가 심해서 철학적이라서 좀 더 지켜보자, 이렇게 해서 저희가 세계문학의 주제가 등장했을 경우 어떻게 그 상황에서 얼굴을 세울 수 있나, 당황하지 않고, 외워주시기 바랍니다.

강 : 감사합니다.

김 : 고맙습니다.

06. 11. 16.

 

 

 

 

P.S. 해서 결론적으로 읽어야 할 세계문학은 <톰 소여의 모험>과 <올리버 트위스트> 두 권으로 압축된다. 나머지는 너무 까탈스럽거나 너무 철학적이고, 또 좀 기다려봐야 한다로 정리된다는 것. 예전에 '최근에 나온 책들'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소개하면서 한번 인용한 적이 있는데, 영국시인 오든오든(W. H. Auden)의 흥미로운 평문 '허크와 올리버'에는 이런 내용이 지적돼 있다. 한번 더 간추린다.

오든은 두 작품, 즉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현대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명하면서 두 주인공 허크와 올리버를 비교한다. 그는 자연에 대한 태도, 현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시간과 돈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이들을 대조하는데, 가령 유럽(영국)인에게서 자연이 어머니의 품 같다면, 미국에서의 자연은 야성적이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인들이 읽기에 <헉핀>은 매우 슬픈 소설이라고 말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끝장면에서 올리버가 사랑이 있는 가정에 입양되면서 그의 꿈을 실현하는데 반해서 유사한 모험들을 겪게 되지만 허크는 그의 친구 짐과 결국엔 헤어질 것이며 다시는 못나게 되리라는 걸 독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사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요소를 보지 못하는 반면에(사건들은 '반복'으로 의미화된다) 미국인들은 반복의 요소를 보지 못한다(사건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지각된다. 이런 경우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돈의 경우도 대비되는데, "올리버의 경우, 그것은 법적 상속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허크의 경우에는 그것이 순전히 행운일 뿐이다." 오든은 거기서 조금 더 나간다: "미국에서 돈은, 자연이라는 용(龍)과의 전투를 통해 빼내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곧 성인의 표증을 상징한다. 미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다... 유럽의 단점은 탐욕과 인색이며, 미국의 단점은 이 양적인 돈이 성인의 표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디에서 중단해야 될는지 알기 어려운 데서 기인하는 근심이다... 사실 미국인들은 물질에 대해서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것은 미국의 소비일 뿐이다. 마치 유럽의 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 유럽의 탐욕이듯이." 음미해볼 만한 견해이다.(프랑코 모레티의 책 얘기는 분량상을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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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자기계발의 심리학

자기계발서 붐과 심리학 열풍이 최근 가장 눈에 띄는 출판 트렌드로 자리잡은 게 아닌가 싶다(그러니까 이건 2006년 출판사회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한해를 정리하기엔 조금 이른 감도 있지만, 이러한 트렌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시류와 무관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일단은 참고자료가 될 만한 기사들을 모아놓는다.

 

북데일리(06. 11. 16) 자기계발서를 위한 변명

우리는 흔히 문학을 경외의 대상으로 본다. 그리고 인문학은 어렵고 실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대체로 외면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 도서들이 베스트셀러 수위에 오르는 것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충분히 공감 가는 말이다. 기초학문의 기반 없이 응용학문의 발전이 있을 수 없듯이 인문학의 토대 없이 수준 높은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문학과 인문학 서적들이 외면 받지는 않듯이 모든 자기계발 도서들이 각광 받지는 않는다.

기초적인 교양이 부족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바뀌고, 자기관리를 통해 자신을 수양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주고, 동기 부여를 하게 하는 '자기계발' 도서에 대해 너무 인색한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닌가. 자기계발 도서로 분류되는 책들은 비슷비슷한 내용들을 이리저리 다른 색깔로 편집하고, 누가 말하느냐 등의 차이만 있을 수도 있다. 제목만 다를 뿐 얘기하는 것들은 다들 별 차이가 없는 '말들의 향연'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독자들이 그런 책을 찾는 이유는 제도권 교육에서 배우지 못한 삶에 대한 태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경영 등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에 비해 삶의 지혜를 얻는 것에 무지한 경우가 많다. 현대사회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들은 소위 '가정교육'을 통해 부모로부터, 대가족 생활을 통해 습득하고, '고전'들을 통해서 배웠지만 이제 그 역할을 '자기계발' 도서가 대신하는 것은 아닐까?

늘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전통과 고전도 꼭 필요하지만, 지금 현재의 현실을 다룬 실용서들도 필요하다. 실용서적에 대한 천대는 조선시대에 경학(유교 경전)만 중시하고, 실학(잡학)을 천시하던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또 현대사회는 복잡한 생활만큼이나 챙겨야 하고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들 투성이다.

학문의 근간인 인문학의 중흥 못지 않게 실용서적에 대한 정당한 권리 찾기도 중요하다. 더이상 '처세서'라는 부정적인 인식으로 자기계발, 실용서적에 대한 서자 취급은 그래서 온당하지 않은 처사다. 개인적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삶을 살아라>(시대의 창. 2004)는 책을 보고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지, 행복한 일을 하는 건 죄의식을 가질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행복한 이기주의자>(21세기북스. 2006)는 이런 나의 마음을 더 튼튼하게 굳히게 하고, 더 큰 용기를 준 책이다. 이 책은 비슷한 내용을 말하지만, 말하는 방식이나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또 다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듯이 자신에게 맞는 상품을 고르면 된다.

책도 이미지 상품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는 제품 중에 디자인을 고려하지 않는 제품이 있는가? TV나 MP3, 문구, 어느 회사 제품이든 성능의 차이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지식상품인 책도 결코 다르지 않다. 예술영화만 영화가 아니듯 같은 메시지라도 어떻게 풀어가고, 설득하고 표현해 내느냐에 따라 A급 영화가 되기도 하고, B급 영화가 되기도 한다. 어떤 상품을 만드는 회사가 소비자가 자신들의 물건을 구매하지 않는다고 소비자를 비난하는가? 소비자가 원하는 책, 독자들이 찾는 책에 대한 고민은 진정으로 했던가?

책도 이젠 어렵고 난해한 책은 좋은 것이고,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책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거두어야 한다. 인문학이 더 낮게, 더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가야 그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지식와 학문의 성채를 높이 쌓아 위세를 보일 게 아니라, 함께 논의하고 즐길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 빵을 먹는 사람들에게도 수준이 있다. 앙코 있는 빵이 맛있다는 사람은 빵에 관한 한 초보자고, 앙코 없이 달지도 않고, 그윽한 뒷맛을 아는 사람이 고급 빵을 먹을 줄 아는 소비자이듯이 독서에도 수준이 있다. 스토리는 별 상관도 없는 액션영화를 좋아하면서 영화 보는 재미를 붙이듯이 처음엔 다들 그렇게 시작한다. 그렇게 차츰차츰 영화 보는 눈이 생겨 내용이 심오한 영화로 넘어가듯이 독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사부'를 만난다는 건 정말 삶에 있어서 한 줄기 '태양'이다. 역할 모델을 가진다는 건 내게 있어 확고한 가치관을 갖는 것 이상이다. 책은 그런 점에서 나를 수양하게 하는 전범이기도 하지만, 늘 나를 게으르지 않게 하고, 깨어 있게 하는 활력소다. 그리고 그런 책들 중에서 자기계발 도서로 분류되는 책들이 나에겐 수위를 차지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급 인문학을 즐기지 못하는 질 낮은 독자라는 혐의를 씌워도 어쩔 수 없다.(신기수 시민기자)

한겨레(06. 11. 03) 행복찾는 언니들의 ‘눈칫밥’ 해결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행복만 찾는다면 이기주의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21세기북스에서 낸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의 불안을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간 책이다.

이른바 ‘자기계발서’는 미국 시장과 국내 시장이 짧은 시차를 두고 연동하는 분야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거의 즉각 한국에서도 번역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예외에 속한다. 미국에서 출간된 지 20년이나 된 이 분야의 고전이기 때문이다. 20년이면 자기계발서 분야에선 거의 선사시대에 속한다고 할 터인데, 2000년대 한국에서 싱싱한 현재형으로 통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 책은 전 세계에서 1500만부 가까이 팔렸다고 한다. 국내에서 지난 4월 말에 출간돼 15만부 넘게 독자 손에 들어갔다. 초대형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독자의 마음을 잔잔히 그리고 단단히 사로잡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의 호소력을 제쳐 놓으면 이 책은 우선 디자인이 눈에 띈다. 형광빛이 도는 짙은 분홍으로 표지를 덮은 것은 이전의 자기계발서에서는 흔치 않은 시도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서평을 올린 한 독자(아이디 do8633)는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훌륭한 편집 디자인”이라고 평가했다. 캘리그래퍼 강병인씨가 손으로 쓴 제목 글씨도 독자의 시선을 자극한다. 강병인씨는 전통술 ‘산사춘’의 글씨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21세기북스에서 그의 글씨를 채택한 것이 선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도 시원시원한 필선이 이 책이 전하려는 행복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 듯하다. 이 책의 출간 이후로 여러 종의 책에서 강병인씨의 글씨가 제목으로 등장했다. 디자인의 흐름을 주도한 책이 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사회생활에서 좌우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젊은 세대의 고민을 풀어준다. 특히 사회적 약자의 처지에 놓여 자신의 소망이나 욕망을 차압당하기 쉬운 젊은 여성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한다. 책을 기획한 21세기북스 류혜정씨는 “독자의 70% 정도가 여성이고, 그 중에서도 20~30대 여성이 주요 독자층을 이룬다”고 밝혔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복을 찾아 누리고 싶은데, 그렇게 살면 욕먹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덜어주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 웨인 다이어는 심리학자로서 임상심리를 통해 터득한 ‘행복 비법’을 독자에게 털어놓는다. 그가 강조하는 요점은 ‘합리적 개인주의자’인데, 그것은 ‘저밖에 모르는 에고이스트’와는 다른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자기답게 삶으로써 자신의 행복도 얻고 주위에 그 행복을 나누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행복 쟁취 전략은 이렇다. 1.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라. 2. 자신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를 떼라. 3. 자책도 걱정도 하지 말라. 4. 미지의 세계를 즐겨라. 5. 의무에 끌려다니지 말라. 6.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 7. 화에 휩쓸리지 말라.

지은이의 조언 가운데 특히 이채로운 것이 ‘정의의 덫을 피하라’이다. 지은이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한다. 정의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받은 부당함이나 불공평에 대한 분노로 괴로워하기보다는 내 마음을 다잡음으로써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다. 행복한 이기주의자의 전형적인 태도를 지은이는 이렇게 요약한다.

나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검증될 수 없다. 내가 소중한 이유는 내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의 가치를 구하려 든다면 그건 다른 사람의 가치가 될 뿐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연연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너무도 열심히 살아가는 나머지 주위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아차릴 여유가 없다.”

한겨레(06. 11. 10) 심리학 '빅뱅'

“무엇에 기대 살아야 하는지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세상이 됐습니다. 이제는 삶의 근거를 저마다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합니다. 자기의 삶, 자기의 사랑의 서사를 스스로 써야 하는 때가 된 거죠. 자기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데 심리학만큼 좋은 길잡이가 있을까요?”

심리치료에 관심이 많은 작가 ㄱ씨는 심리학에 보통사람들의 흥미가 커지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연인관계, 부부 관계, 부모-자식 관계를 비롯한 수많은 인간관계의 숲 속에 외로운 나그네처럼 떨어져 있는 상황인데, 날은 어두워지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각자 나그네가 된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갈팡질팡한다. 이럴 때 심리학이 등불 구실을 해준다는 것이다.

심리학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터넷서점 ‘예스24’ 검색창에서 ‘심리학’으로 검색하면 무려 900종 가까운 책이 뜬다. 행복·공감·욕망·만족·성격 따위 수많은 주제어 뒤에 ‘심리학’이 따라붙은 책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출간된다. 가히 심리학의 시대다. 심리학 책들이 출판 시장의 흐름을 형성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1990년대에 한 차례 출간됐고 2002년 개정판이 나온 <설득의 심리학>(로버트 치알디니 지음, 21세기북스 펴냄)은 지금까지 수십만 부가 팔렸다. 그러나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영업 기술을 알려주는 책에 가깝다. 타인 혹은 고객의 심리를 정확히 읽어냄으로써 판매 목표를 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용서인 셈이다.

심리학 책의 최근 흐름에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관심의 방향이 ‘나’로 돌아섰다는 데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엿보는 눈치의 심리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자기 분석 심리학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나’를 주목한 전환점 <사람 풍경>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을 펴낸 교양인 출판사의 이승희 편집집은 “책을 읽은 사람들이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을 읽어보니 대다수가 ‘나를 알고 싶어 이 책을 샀다’고 쓴 게 의외였다”고 말했다. 타인의 심리가 아니라 자기의 심리가 1차적 관심사인 셈이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를 낸 사이 출판사 권선희 대표도 같은 말을 한다.

“책을 내기 전에 시장조사를 했는데, 대형서점 심리학 코너를 찾는 독자들이 하나같이 책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봍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호기심 차원을 넘어 나를 제대로 알아봐야겠다는 진지한 태도가 잡히더라고요. ‘이거 내 얘긴데’ 느낄 때 책을 사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나’를 넣어 책 제목을 지었습니다.”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는 지난 7월에 나와 지금까지 7천부 정도가 팔렸다. 가볍지 않은 내용인 걸 감안하면 만만찮은 부수다. 심리학 책 흐름을 ‘자기’로 돌린 상징적 계기가 된 책으로 소설가 김형경씨의 <사람 풍경>(예담 펴냄)을 꼽는 이들이 많다. ‘심리 여행 에세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지은이가 자기 자신의 심리를 알아가는 과정을 홀로 떠난 세계 여행과 겹쳐놓음으로써 설득력 있게 읽힌다. 여행중에 만난 사람들의 풍경이 곧 자기 안에 펼쳐진 내면의 풍경임을 이 책은 알려준다. 2004년 12월에 초판 발간 후 5만부 남짓 나간 이 책은 지난달 출판사를 바꾸고 책표지도 재단장해 새로 나온 뒤 1만4천부 정도가 더 나갔다.

최근에 나온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씨가 쓴 <관계의 재구성>(궁리 펴냄)도 ‘관계의 가시에 찔려 휘청거리는 내 마음’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사람 풍경>과 비슷한 노선에 서 있다. 다만 <사람 풍경>이 여행을 소재로 했다면, 이 책은 영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이 다르다.

심리학에 관한 관심이 진지해지면서 처세서의 심리 실용서와는 무게가 다른 책들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지난해 7월 나온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로렌 슬레이터 지음, 에코의서재 펴냄)는 미국에서 발달한 실험심리학 속으로 직진해 들어간다. 행동주의 심리학 창시자 버러스 프레데릭 스키너의 심리학을 비롯해 10가지 심리 실험을 흥미로운 이야기체로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4만부나 팔렸다. 비슷한 시기에 북폴리오 출판사에서 나온 <유혹의 심리학>(파트리크 르무안 지음)도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다. 그런데도 1만5천부 가량 팔렸다. 내용만 좋으면 사서 읽는다는 독자군이 형성된 셈이다.

북폴리오는 <유혹의 심리학> 성공에 힘입어 아예 ‘마인드북스’라는 심리 시리즈를 세우고 <욕망의 심리학> <마음의 치유>를 잇따라 펴냈다. 이 시리즈의 하나로 최근에 나온 책이 <여자의 심리학>이다. 나르시시즘 문제 가운데 특히 ‘여성의 나르시시즘’에 초점을 맞춘 이 책은 화려함과 초라함, 자주성과 의존성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자기애적 인격장애’ 여성들의 자기 진단과 자기 치유를 돕는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립과 의존이라는 두 개의 대조적인 행동양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 딜레마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즉 자기 정체성을 상실할 정도로 남에게 의존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일절 거부하면서 지나치게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라는 식의 이런 해결방식은 이들의 삶 전체를 관통한다.”

사회과학의 시대 가니 심리학이…

이 책은 나르시시스트 여성들의 고통과 극복을 보여줌으로써 같은 장애로 힘들어하는 여성들에게 ‘마음의 길찾기’ 를 함께 해보자고 권유한다. 책의 부제도 그래서 ‘자신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당신을 위한 심리분석’이다.

박미라(한겨레문화센터 ‘치유 글쓰기’ 진행자·전 <이프> 편집장)씨는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다보니 사람들이 심리적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 세대는 ‘가족 부양’이라는 지상과제 앞에서 목숨 걸고 돈만 벌었는데, 그 거친 삶이 자식 세대의 내면에 상처를 안겼고, 그 결과로 자기 마음을 알고 다스리는 데 관심이 커졌다는 것이다.

지난 시대가 사회과학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심리학은 시대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고통의 원인을 구조적 불합리에서 찾았던 것인데, 이제는 내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구조적 고통은 그것대로 극복해야 하지만, 그 구조를 바꾸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죠. 저마다 마음이 평화로워지면 그만큼 세상을 개선하는 일도 잘 할 수 있겠죠.”(고명섭 기자)

06.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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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박원순 - 나치전범 사냥의 역사

나치전범 사냥의 역사

                                                                                               변호사  박원순

 

1.서론

2.세계로 스며든 나치 전범

3.나치전범을 향한 끝없는 추적

(1) 추적의 경과

①추적의 개시 / ②숨바꼭질/ ③ 동서냉전과 나치범죄자 / ④ 5-60년대의 안식 , 70년대의 추적 / ⑤파일을 닫을 날

(2) 세기의 나치재판들

① 아이히만 사건 / ② 바르비사건 / ③ 뎀얀유크 사건 / ④ 안드레야 아르트코빅 사건 / ⑤ 멘텐 사건 / ⑤슈밤베르크 사건

(3) 추적을 피한 사람들

① 추적과 입증의 곤란 / ② 죠셉 멩겔레(Joseph Mengele)/ ③ 마틴 보르만(Martin Bormann) / ④ 하인리히 뮐러(Heinrich Muller) / ⑤ 범죄자를 보호하는 범죄자

4.세계 각국의 나치전범 색출과 처단 노력

(1)이스라엘과 유태인

(2)독일

(3)캐나다

(4)오스트레일리아

(5)미국

5.결론

 


1.서론

- 지연된 정의


"이 처단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이 범죄자들의 몸이 먼지로 변한 이후에도 이 세상에 드리울 사악한 영향 때문이다. 그들은 인종적 증오, 테러리즘과 폭력, 권력의 오만과 잔혹성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그들은 또한 유럽의 세대와 세대를 이어 인간성을 말살하고 주거를 파괴하고 생활을 궁핍으로 몰아넣은 열렬한 민족주의와 군사주의, 전쟁 음모의 상징이다. 우리가 단호하게 처리하지 못하면다시 등장하게 되고 말 이러한 사회적 세력과 문명은 타협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노인이 되었거나 병이 든 나치전범들을 추적하거나 체포된 범죄자를 법정에 세울 때마다 유럽의 각국에서는 왜 50년도 더 지난 일을 이제 와서 이토록 집요하게 다루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일부에서 따랐다. 진실로 이들 범죄자들은 전쟁이 끝난 뒤 곧바로 법정에 세워졌어야 마땅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요란하던 전범처단의 구호는 냉전의 전개와 더불어 여러나라에서 잊혀진 주제가 되었다. 나치 관련자들에 대한 탈나치화정책은 곧 수그러들었고 처벌은 완화되거나 다시 원직에 복귀하였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공산주의자와의 싸움 때문에 그 나라들의 턱밑으로 숨어든 나치전범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지연된 정의는 정의의 부정에 다름아니다. 오랜 세월은 범죄자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소멸시키며 증인은 죽고 기억은 흐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지연이 면책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잔혹한 범죄는 세월의 흐름이 면책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류는 확인해 왔다. 공소시효라는 방패막이를 제거하면서 적어도 나치범죄자들에 관한 한 영원히 피난처를 마련해 주지 않겠다는 규범의 정립과 그 구체적인 적용을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 또는 개별국가 차원에서 확보해 온 것이다. 이 범죄자들을 지구의 끝까지라도 쫓아가 법정에 세우는 일은 그들로 인하여 학살당하거나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희생자들의 정의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금과 미래의 세대에 대하여 대량학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범죄자들이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고 만다는 사실을 교육시키는 것이 된다. 나치의 깃발아래 살인의 범죄를 저질렀던 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신나치의 위험과 싸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치전범의 추적과 처단은 복수(revenge)와는 다르다. 복수란 개인적 감정에서 희생자의 친구와 친척에 의해 선택된 대상에 대해 이루어지는 보복행위이다. 정의란 국가에 의해 공평하게 가해지는 응보이다. 그것은 공정한 재판절차와 불복의 기회를 보장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처벌이다. 따라서 단순히 유태인들만의 문제라고 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근본적 인권의 문제이며 인류 전체의 관심사이다. 사실 수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그 가운데 1백만명의 어린이들이 포함되어 있는 상황에서 나치의 범죄는 이미 "지상의 정의"(earthly justice)에 의해서는 처단할 길이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떤 엄중한 형벌로도 그 죄악을 벌할 길이 없는 것이다. 세월의 흐름이 희생자들이 겪은 참혹한 기억을 지우고 인류의 양심이 지닌 정의감을 빛바래게 할 수는 없었다. 범죄자를 잊고 용서한다는 것은 곧바로 그 희생자들과 그들의 고통을 망각하는 길이 된다. 범죄자의 처벌은 희생자의 어깨로부터 역사적 기록을 확립해야 한다는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된다.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서 법정에서 증명된 사실은 단순한 희생자들의 증언보다 훨씬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온 세계에서 일어나는 국제법위반과 인권침해를 다루는 세계법정을 설치하는 것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지금까지 인류의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그러나 어느 국가도 이러한 법정의 설치에 의해 양보하게 될 주권의 상실을 원치 않음으로써 그 소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치전범을 처벌할 수 있는 국제적 권위를 가진 법정은 뉴른베르크재판 이후 각국에 내맡겨졌다. 비록 세계법정은 아니더라도 국제여론은 나치범죄자들의 우산을 그대로 내버려 두도록 만들지는 않았다. 빗발치는 여론에 따라 여러나라들은 각국에서 나치처벌법을 만들어 직접 처벌하기도 하고 때로는 관련국에 송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나치의 추적과 처단이 가능했던 것은 정의를 추구한 개인과 단체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나치 헌터'(나치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치밀한 계획과 지속적인 감시, 행동이야말로 전세계로 흩어져 사는 나치범죄자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체포하며, 마침내 법정에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정의는 저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구체적이고도 집요한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이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켜 주고 있는 살아 있는 교훈이다.


2.세계로 스며든 나치 전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에는 수백만명의 피난민이 생겨났다. 대부분은 나치의 희생자, 강제수용소의 생존자, 노예노동자, 전쟁포로, 나치에 의해 이주를 강요당한 자들이었다. 비교적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누리고 있었던 서유럽,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등에 의해 이들을 수용해 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유엔의 주도에 의해 설치된 국제난민조직(IRO, International Refugee Organization)에 의하여 지원을 받은 난민들은 거의 1백만명에 이르렀고 이들 가운데 70%가량은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영국등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들 속에는 대량학살과 처단을 시행했던 나치 관리들과 이들을 자발적으로 지원한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신분과 전쟁중의 활동을 은폐하여 나치와 공산권으로부터의 피난민임을 가장하였다. 이들은 자신의 나라가 공산화되면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서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등으로 이주의 길을 가게 되었다. 서방의 여러 국가에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피난처를 갖은 사람들 가운데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발트3국, 폴란드등 동구권국가들의 독일계 주민들이 적지 않았고 이들은 나치전쟁수행기관들에게 적극적인 지원과 동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세계각지로 피신처로 숨어든 나치전범과 비인도적 범죄자들은 그 정확한 숫자조차 확인하기 쉽지 않을 정도이다. 나치헌팅조직과 서독, 미국정부의 관리들에 따르면 제2차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전에 벌어진 비인도적 범죄행위에 책임이 있는 독일인들이 15만명에서부터 2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종전후 미국등 연합국에 의해 기소되어 처단된 나치 범죄자는 3만5천여명에 이르렀으나 이것은 전체 범죄자 가운데 20%에 불과하였고 나머지는 은신처를 찾아 세계로 흩어진 것이다.

당시 일반 난민과 뒤섞인 이들을 분류해 내어 배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엔의 IRO 조차 그 지원을 받는 난민에 대한 신원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이들의 신원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허술한 분류, 심사작업을 통해 나치범죄자들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무사히 새로운 나라에서 피난처를 구할 수가 있었다. 이들은 전혀 새로운 세상에서 평화스럽게 보통의 이웃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평안과 자유를 누리기에는 지은 죄가 너무도 컸다. 이들을 쫓는 발걸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3.나치전범을 향한 끝없는 추적


(1) 추적의 경과


①추적의 개시


영국의 외무장관 안소니 에덴은 나치전범의 추적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간사냥"이라고 묘사하였다. 나치전범에 대한 추적은 연합국이 전범재판에 세우기 위해 이루어지거나, 그 희생자와 그 가족, 지역주민들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945년 7월 연합국은 7만명에 이르는 <전범 및 용의자 리스트>를 작성하였다. 이 리스트에 속한 사람들은 연합국 점령지역 안에서 언제나 체포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막상 전후의 혼란과 독일의 분할점령, 다수의 피난민 속에서 그 리스트에 속한 다수의 주요 나치전범들조차 유유히 도주할 수 있었다. 한때 연합국에 의해 구금되었다가도 신원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아 다시 풀려나거나, 난민들 속에 섞여 제3국으로 안전한 이민을 가기도 하였다.

1947년말이 되면서 거의 모든 연합국이 나치 사냥을 거의 포기해 버렸다. 냉전이 시작되면서 관심은 새로운 위협으로 옮아간 것이다. 아이히만, 마틴 보르만, 죠셉 멩겔레, 하인리히 뮐러등 악명높은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여론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추적이 각국의 정책적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었다. 심지어 일부 서방 정보기관들은 바르비 사건에서와 같이 SS대원들이 소련과의 경쟁에서 유용한 존재들이라고 믿고 이들을 보호하기까지 한 것이다.

처음부터 나치범죄자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은 각국 정부의 정보기구 요원들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의 경우만 하더라도 1946년 팔레스타인에 소재한 한 은밀한 조직이었던 '하가나'(Haganah)에서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오스트리아에 5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아이히만의 처가 거주하는 집의 하인으로 요원을 들여보내는데까지 성공하였으나 아이히만의 소재를 파악하는데는 실패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에 따라 이들은 철수하여 다른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몇몇 요원들은 계속하여 아이히만의 소재 탐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이 아이히만의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단체였다.


②숨바꼭질


"드디어 연합군이 리용 성문을 통과하였다. '인간백정'을 쫓는 일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 일은 40년이나 걸릴 것이다. 바르비는 여러번 잡힐 뻔하였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해서 '쥐새끼'처럼 체포를 피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해바라지족'족의 변신, '야누스의 두얼굴'을 가지고 처음에는 미국첩보기관의 첩자로, 그 이후에는 볼리비아의 '더러운 군사정권'의 협조자로 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르비는 리용시의 주민, 프랑스 국민들에게 영원히 갚지 못할 '빚'을 진 채 숨바꼭질을 시작한 것이다."


추적자와 도망자의 숨바꼭질. 그 기나긴 긴장과 인내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연합국과 피해자들의 추적 노력과 더불어 나치 범죄자들 역시 필사적인 탈출과 잠적, 도피의 길을 찾았다. 이들은 대체로 고국을 등지거나 제3국을 찾아 새로운 생활의 터전을 닦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은폐하였다. 때로는 자신의 고국에서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중산층으로 자리를 잡아 "평범한 시민" 또는 "조용한 이웃"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또한 이들은 거의 경찰 신세를 지지 않도록 조심하였을 뿐만아니라 대체로 미국의 친나치조직, 반유태인운동, 극우적 정치조직 등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 가운데 몇 명은 반공조직의 회원이기는 하였으나 정치활동에는 무관심한 것이 명백하였다. 분명한 것은 익명으로 남기를 바랬고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사실이었다.

나치전범들과 그 협력자들의 이러한 변신과 은폐 노력은 추적의 단서를 끊어 놓곤 하였다. 더구나 정작 추적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대단히 부족하거나 불완전한 것이었다. 잘못된 정보들이 추적의 과정에서 헛탕을 치거나 더디게 만들었다. 유태인이나 점령지 주민들의 학살을 지휘하거나 조종한 중요 전범들은 게쉬타포등 정보기관 종사자로서 자신들의 신분 자체가 비밀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쉽게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피해자들의 기억을 더듬어 수집된 정보들은 엄밀성을 결하고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현상금도 늘어났다. 수배자 리스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멩겔레의 목에는 1985년 8월 그의 사망이 확인될 당시 3백4십만불의 현상금이 붙어 있었다. 아우스비츠 수용소에서 수천명의 생체실험을 감행함으로써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추적과 피신의 숨박꾹질을 거듭하다가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나치범죄자에 대한 추적은 죽음만이 중단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③ 동서냉전과 나치범죄자


1945년 4월 25일 나치독일을 해방하고 점령하기 위해 진군하던 미군과 소련군이 엘베강에서 환희의 조우를 할 때까지만 해도 공동의 적을 향해 싸웠던 연합군으로서 다시 서로 적으로 갈라서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이후 심각해진 동서간의 냉전은 나치범죄를 둘러싸고도 벌어졌다. 특히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은 서방국가가 나치범죄자들의 천국이 되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베를린이 함락된 후 1947년 11월까지 미국측은 1,292명의 전범을 프랑스에 인도하는 것을 비롯하여 다른 연합국들의 재판에 전범인도, 증인 수색 등의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된 이후에는 점차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은 서방국가들의 나치전범처벌의 의지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였다. 서방국가들은 소련이나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등이 요구하는 전범을 인도한 적이 없었다. 소련은 구데리안, 폰 뢰트비츠, 라이네파르트, 로드, 폰 포르만의 5명의 장군을 인도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미국은 그들이 뉴른베르크 재판에서 재판받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미국의 국방에 긴요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뿐만아니라 미국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대결에 이용하려는 뜻에서 다수 나치전범을 정보요원으로 충원하거나 미국으로 유입시켜 왔음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예컨대, 벨로러시아(Byelorussia)에서의 나치조직이었던 OUN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미국으로 유입되었으며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소련은 끊임없이 미국을 향해 나치전범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리투아니아도 미국에서 살고 있는 자국 출신의 전범들의 주소까지 제시하며 미국의 나치전범보호정책을 비판했다. 실제로 나치전범의 추적과 처단에 관한 한 공산권이 서방보다 열성적이었다. 1986년 동독은 720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혐의로 드레스덴의 게쉬타포 책임자였던 헨리 슈미트를 체포해 법정에 세워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비난과 경쟁에도 불구하고 나치범죄자를 추적.확인.추방.기소.재판하는 데에는 상호간의 협력이 필수불가결하였다. 범행지, 범죄자의 국적, 범죄자의 현재 거주지, 범행에 관한 각종 자료보관소들이 전쟁의 종료와 더불어 각각 달라지게 되어 관련국들의 협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특히 상호간의 이러한 필요성을 절감하여 일정한 범위안에서 협력하고 있었다. 미국의 법무장관이 소련의 대법원장을 만나 나치전범 처벌에 관한 협력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고 실제로 관련 증인과 문서의 제공등이 이루어져 나치범죄자 송환과 기소에 큰 역할을 다하기도 하였다.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과 캐나다등 서방국가로 이주한 나치범죄자들의 대부분이 동구권 출신이기 때문에 전후 동구권에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 소련의 자료가 전범의 확인에 필수불가결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이 상호 냉전상태에서 정치적 공방에 의해 불신받고 훼손되기도 하였다. 여러 사건에서 소련을 비롯한 동구측에서 제공한 증거들이 정치적 의도로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크로아티아의 나치괴뢰국의 내무 및 법무장관을 지낸 Artukovic의 국적박탈 및 추방사건에서 그의 아들은 "유고슬라비아가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담당변호사조차도 "미국 사법사에서 하나의 비극적인 에피소드"로 단정하면서 미국 법무성의 특별수사대(OSI)가 그 존재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해 만든 큰사건일 뿐이라고 동조하였던 것이다. OSI가 협력을 얻은 소련의 사법당국이라는 것은 실제 KGB이며 소련이 KGB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기실 미소대결을 국가안보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는 KGB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소련에서 제공된 증언등은 결국 미국사법절차가 보장하고 있는 제반 적법절차규정이 결핍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보는 견해도 있었다. 이러한 의문의 제기에 따라 특별수사대의 사건처리의 온당성에 관한 자체내의 조사와 소련에 의한 증거조작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미국의 법률에 의해 검증받고 있다는 내용의 법무성의 반박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동서냉전은 나치범죄자들의 완전한 처단을 불가능하게 한 가장 핵심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④ 5-60년대의 안식 , 70년대의 추적


이와같이 한때 범죄자를 처단하라는 인류 양심의 강한 목소리는 냉전의 시작, 진전과 더불어 점차 조용해 졌다. 그 사이에 유태인 학살과 나치범죄는 이미 과거의 일로 망각의 커텐 뒤로 사라졌다. 7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48건의 나치범죄자에 관한 형사사건이 서독에 계류되어 있었지만 이에 대해 서독의 언론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독은 "나치의 죄값은 이미 치르졌으며 오래전에 그 그림자는 극복되었다"는 의식이 팽배하였다.

이러한 망각의 늪으로부터 다시 나치범죄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서독 형법에 따른 공소시효 만료가 임박함에 따라 서독 내에서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공소시효 제거를 주장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나치전범에게 면책을 줄 수 없다는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언론들은 새롭게 전쟁중의 끔찍한 학살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1978년 미국의 NBC는 4일간 대학살(Holocaust)를 시리즈물로 방영하여 120만의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자아냈다.

1970년대는 다시 인류의 양심이 부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한 시대였다. 단순히 나치를 경험한 세대 뿐만 아니라 전혀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함께 나치의 범죄에 몸서리치고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함을 공유할 수 있었다. 대학살에 대한 새로운 자각, 양심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치전범을 비롯한 전범들에 대한 공소시효를 제거하는 조약이 유엔의 주선에 의해 채택되었고 공소시효를 무기한 연장하는 조치가 서독에서 취해졌다. 1972년에는 미국에서도 Hermine Braunsteiner에 대한 추방재판의 공판이 나치전범에 대한 추방조치로서는 최초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대중의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OSI가 생겨나고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나치전범들에 대한 스토리가 발굴되고 추방조치가 이루어졌다. 이 때는 독일 내에서의 나치전범 보다는 독일의 연합국이었던 발틱, 우크라이나, 크로아티아, 프랑스의 비쉬정권하에서의 나치전범에 대한 관심과 추적에 집중된 시기였다.


⑤파일을 닫을 날


나치범죄자에 대한 추적은 기본적으로 이들을 평화스럽게 죽어가도록 냅버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그 추적을 벌여온 사람들은 범죄자들이 재판에 회부됨이 없이 나이를 먹고 죽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적어도 자신의 잔혹한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 생전에 그 죄값을 치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나치전범에 대한 추적은 계속될 수는 없다. 대부분의 나치범죄자들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해 졌을 뿐만아니라 생존해 있더라도 이미 80대 내지 90대에 이르러 처단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 조차도 점점 사라져 더 이상 범죄를 증명해 줄 사람들도 없어져 갔다

나치전범 추적의 가장 일선에 섰던 "시몬 비센탈 다큐멘테이션 센타"는 관리하고 있던 나치범죄자리스트와 파일을 금세기의 경과와 더불어 폐쇄할 예정이라고 한다. 추적 작업을 중단하겠다는 의사표시이다. 이제 나치전범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그 추적의 열띈 전쟁, 가쁜 호흡에도 긴 안식이 오게 될 것이다.


(2) 세기의 나치재판들


① 아이히만 사건


"나는 의회에 잠시 전 '유태인문제에 관한 최종해결'에 대해 다른 나치지도자와 함께 책임이 있는 가장 악랄한 나치전범 중의 한사람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 - - 그는 이미 체포되어 이스라엘에 있으며 곧 나치 및 나치부역자처벌법에 따라 재판에 처해질 것입니다."


1960년 5월 23일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수상은 의회(Knesset)에 대하여 가장 악랄한 나치전범 중의 하나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했다고 알린 발표문의 일부이다. 이 발표는 즉각 이스라엘과 온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당시 아이히만은 리챠드 클레멘츠라는 가명을 쓰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의 체포는 이스라엘의 자원자 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이스라엘 정부가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정보기관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는 1960년 5월 11일 납치되어 1주일간 억류되어 심문을 받고 자의에 의해 이송된다는 각서에 날인한 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로 강제로 이송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이에 즉각 항의하여 외교문제로 비화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사과로 종결되었다. 명백한 주권침해였으나 6백만명의 동족의 목숨을 잃은 이스라엘의 도덕적 위치를 국제사회가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스라엘 경찰에 의해 조사를 받은 후 아이히만은 이미 뉴른베르크 재판에서 범죄조직으로 판정된 SS, SD, 게쉬타포의 구성원이었으며 나치의 유태인 학살 정책의 최고 결정 및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 기소되었다. 원래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자란 아이히만은 독일로 이주하여 나치에 가담한 이후 비교적 일찍부터 유태인 문제 전문가로 자리잡았다. 1934년 베를린의 SD에서 유태인 책임자로 임명된 이래 1937년 말에는 장교로 승진하였고 오스트리아의 병합과 함께 그 지역의 유태인 강제이주 책임을 맡았다. 1941년 게쉬타포의 유태인문제 담당부서인 IV B4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전쟁이 끝날때까지 그 직위를 유지하였다.

재판은 1961년 4월 11일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지방법원에는 6대주로부터 몰려든 수백명의 기자들로부터 북적거렸다. 재판이 진행된 4개월 동안 114회의 공판을 열었고 1천5백건의 문서, 120명의 증인 신문이 있었다. 아이히만의 변호인들은 그가 단지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어떠한 이니셔티브도 없이 제한된 권력을 행사하였을 뿐이라고 변명하였다. 그가 어떠한 정치적 정책결정에는 무관하며 다른 유럽 여러 지역으로부터 강제수용소로 유태인들을 이송하는 책임을 진 2차적 기관에 불과한 IV B4의 책임자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칸트의 인식 특히 '범주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을 따르도록 노력하였다고 답변하였다. 그러나 유태인문제 전문가로서 유태인학살에 '영혼과 육체를 함께 바친' 그의 역할을 부정할 도리는 없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 법정의 관할권문제, 납치에 따른 국제법 위반, 공소시효 문제등 수많은 법률적 쟁점이 떠올라 아이히만 재판은 "법률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의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아이히만에게 적용된 죄명은 이스라엘의 '나치와 그 부역자 처벌법'(Nazis and Nazi Collaborators Punishment Law, 5710 of 1950) 위반이었다. 이 법은 중요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외국에 의해 처벌된 피고인에 대해서도 이스라엘 법원에 의해 처단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아이히만 사건의 판결문을 읽는데 3일간이나 걸렸다. 당연히 예정된대로 사형판결이었다.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이루어진 항소심 판결도 같은 내용이었다. 사면 청원도 기각되었다. 1962년 5월 31일 한밤중 아이히만은 처형되었다. 그의 요구에 따라 화장된 그의 사체는 한 줌의 재로 변하여 지중해 연안에 뿌려졌다.


② 바르비사건

- 돌아온 '리용의 도살자'


1983년 2월 24일 프랑스 리용의 검찰관 쟌 베르티에는 바르비(Barbie)에 대해 8개항목의 공소사실을 제시하였다.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비인도적 범죄사실들이었다. 비인도적범죄라는 죄목의 '발명'은 우리 시대가 이룬 성취였다. '외과수술'처럼 전쟁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 공소는 29세의 바르비가 리용에서 SD책임자로 일하면서 저지른 온갖 범죄를 저지른지 40년이 지난 후에서야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8개항목의 공소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1943년 독일 경찰관 두명에 대한 공격의 보복으로 22명의 인질 살해

2.1943년 19명의 체포 및 고문

3.리용으로부터 86명의 유태인 송출을 방조

4.1943년과 1944년 사이에 리용 주변에서 42명을 총살

5.1944년 프랑스 철도노동자의 수색과 체포를 벌여 그 가운데 몇명이 다치고 나머지는 행방불명

6.1944년 대부분이 유태인인 650명을 아우슈비츠와 라벤스브뤽 수용소에 이송

7.브론시에서 70명의 유태인, 셍 제니 라발에서 두 목사를 비롯한 유태인 총살

8.이지우 마을에서 대부분이 어린이인 55명의 유태인을 송출


그러나 바르비의 죄악은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41개의 공소사실로 늘어났다. 그는 새디스트로서 자신과 살던 스위스 여자를 싫증이 나자 총살해 버리고 유태인 어머니 품속에 있는 아기를 뺏어 아우슈비츠행 기차에 던져 버리는 인간이었다. 이러한 냉혈적 행동으로 그는 여러번의 훈장을 나치정부로부터 받는가하면, 그리고 점령하의 프랑스인들로부터 '리용의 도살자'(Butcher in Lyons)라고 낙인찍히게 된다. 클라우스 바르비라는 이름은 프랑스에서 나치 시대의 악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바르비를 그토록 원하였던 이유는 그가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정신적 지주였던 Moulin의 학살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바르비가 볼리비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1974년 이후 널리 알려져 프랑스 정부가 송환 요구를 해 왔던 상태였다. 특히 나치전문가 Klarsfeld 변호사가 바르비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왔으나 볼리비아 정부의 완강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갑작스런 바르비의 추방은 양국정부의 은밀한 거래를 추측하게 하였다. 실제 라파즈에서 리용으로 바르비를 태우고 온 비행기에는 무기와 3천톤의 밀, 그리고 5백만불이 실려 되돌아갔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프랑스는 강렬하게 바르비를 원했던 것이다.

바르비재판은 1987년 5월 11일부터 7월 4일까지 열렸다. 당시 73세의 바르비는 인정신문에서 볼리비아에서 쓰던 가명 '클라우스 알트만'이라고 밝혔으며 주소는 라파즈라고 대답하였다. 이 재판동안 리용 시민들은 40년전 자신들의 투옥과 고문과 처형을 담당했던 책임자를 대면하여 증언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바르비와 그 변호인들은 그 전쟁기간 중에 벌어졌던 모든 일의 책임을 바르비에게 돌리려 하고 있다면서 "다음에는 에펠탑을 훔쳤다고 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또한 이 재판은 프랑스의 학생들에게 하나의 좋은 역사교육이 되었고 언론은 이 기간 동안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집중적으로 보도하였다. 바르비에 대한 민사소송을 제기한 39명의 변호사들이 유태인단체, 레지스탕스그룹, 개인적 생존자등이 재판의 복잡성을 더하고 있었다. 결국 9명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유죄평결을, 3명의 리용형사법원 판사들은 무기형을 선고하였다.

바르비의 존재는 미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르비가 아직 프랑스로 송환되기 직전 미국의 CIC 요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 우연히 볼리비아 라파즈의 뉴스를 보도하던 NBC 방송을 보다가 화면에서 사업상의 문제로 구속되었다는 바르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선명히 그의 인상을 확인한 그 요원은 NBC에 접촉하여 자신이 CIC 정보원으로 고용된 바르비등을 통제하던 CIC 요원임을 밝혔다. 이 모든 보도가 NBC에 다시 나가자 미국사회는 나치전범을 정보요원으로 사용하였다는 폭로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미국이 주장해 온 전체주의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이 한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이다.


③ 뎀얀유크 사건


뎀얀유크(Demjanjuk)사건은 대단히 극적 반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뎀얀유크에게 가해진 혐의는 소련의 군인이었다가 독일의 포로가 된 후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경비병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유태인 학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었다. 미국 클리블랜드의 포드회사에서 자동차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그를 여러 생존자들이 그 수용소유태인들 사이에 악명을 떨쳤던 '공포의 이반'(Ivan the Terrible)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1986년 미국에서 이스라엘로 추방되어 살인죄로 재판받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의 그 '이반'인지에 관하여 공방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법정이 그에게 유죄를 인정하여 1988년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뎀얀유크의 변호인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그가 '이반'이 아니라는 증거를 숨기는데 공모하였다고 법정에서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 법무성이 이미 1978년 소련으로부터 그러한 증거를 입수했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그 자료들을 제시했다. KGB신문내용과 나치로부터의 노획문서들로 구성된 19가지의 자료들이었다. 이 증거들에서 그 '이반'은 뎀얀유크가 아닌 또다른 우크라이나 경비원 'Ivan Marchenko'라는 증언들이 담겨 있었다. 진짜 문제의 '이반'인 마르첸코는 9살이나 많으며 3.5인치가 더 크다는 주장도 이루어졌다. 결국 뎀얀유크는 소련의 자료가 공개된 이후 이스라엘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오랜 세월의 경과가 만들어낸 역사의 또다른 '비극적 희극'의 하나였다.


④ 안드레야 아르트코빅 사건


안드레야 아르트코빅(Andrija Artukovic)은 제2차세계대전 중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크로아티아정권의 내무장관을 역임하였다. 크로아티아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극우단체에서 활동하던 중 독일이 유고를 점령하여 크로아티아 괴뢰정권을 세우게 되자 그 정권의 내무장관으로서 크로아티아의 적대세력이었던 세르비아인, 티토의 유격대원, 집시 등을 무차별 학살하여 "발칸반도의 살인마", "죽음의 내무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치의 패배에 따라 아르트코빅은 오스트리아, 스위스, 아일랜드등지에서 머물다가 최종의 목적지를 미국으로 잡았다. 1948년 여름, Anich라는 가명으로 미국의 로스엔젤레스로 잠입한 그는 시민권을 청구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그를 전범으로 수배하고 인도를 요청하고 있음을 안 미국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자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1951년 미국 언론에 공개하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전범중의 한명이 살고 있음을 미국의 신문들이 대서특필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를 추방하기 위한 법적 절차가 시작되고 미국에 안주하려던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르트코빅은 냉전의 당사자인 미국과 유고의 갈등과 미국내 사법절차의 지연으로 30여년이나 걸리며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유고로 추방되는 운명을 맞았다. 41년만인 1985년 5월 자신의 범죄의 현장인 유고에서 재판이 열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유고법정은 그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면서 "정의의 승리"라고 밝혔다. 유고에서는 80세 이상의 고령에게 사형을 집행하지 않게 되어 있고 아르트코빅은 86세의 실명상태에 있었지만 크로아티아 정권과 나치즘의 죄악을 심판하는 의미에서 극형을 선고한 것이었다.


⑤ 멘텐 사건


멘텐(Pieter Nicolas Menten)은 1941년 SS부대원으로서 폴란드의 한 마을에서 수십명의 유태인을 살해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949년 나치부역 혐의로 8개월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1950년대 폴란드는 전쟁범죄혐의로 네들란드 암스테르담에서 40개의 방이 있는 맨션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던 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맨텐은 과거를 숨기고 미술품 수집상으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76년 나치 헌터들은 네들란드 정부에 대한 압력을 가중하여 그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였다. 맨텐은 스위스로 도망하였으나 다시 네들란드로 송환되었다.

그후 멘텐에 대한 지리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네들란드 정부로서도 소송비용이 5백만불이나 들어갈 정도였다. 일부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20명의 폴란드계 유태인의 학살사실이 유죄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네들란드 대법원은 법무부가 전후 네들란드에 대한 지원의 공로를 인정하여 1952년 면책을 주었다는 이유로 그 판결을 번복하였다가 다시 정부의 요구로 유죄가 확정되었다. 멘텐은 최종적으로 심신미약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1980년부터 복역을 시작하였다.


⑤슈밤베르크 사건


슈밤베르크는 독일점령 폴란드 지역의 강제수용소등지에서 SS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숱한 유태인 학살사건에 관계된 자였다. 1987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독일로 송환된 "폴란드의 학살자"로 알려진 그는 1945년 오스트리아에서 잠시 체포되었다가 도주하여 1949년 이래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었다. 1987년 서독정부가 50만달러의 현상금을 걸어 곧 경찰에 검거되었다.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의 퇴조와 함께 방패를 잃은 그는 알폰신 정부하에서 국적이 박탈되고 독일로 추방되었다. 그는 시몬 비센탈 센터의 10대 나치전범수배자에 포함되었던 사람이었다. 원래 그 자신이 직접 살해한 40명을 포함하여 3천여명의 유태인 학살에 관계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여러 대륙으로부터 슈트트가르트법정으로 몰려든 희생자들은 50년전의 그를 가리켜 '주인' '판사' '살인마' '신이자 악마', 그 사람이 맞다고 확인하였다. "유태인 사격이 취미"였던 그는 불타는 창고 안으로 들어간 15명의 남녀를 뒤쫓아가 불붙은 사람들을 향해 다시 총을 쏠 정도로 잔인했다고 한다. 변호인조차 그의 범행을 부인하지는 않고 다만 "시간이 진실의 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증거의 혼란과 모순만을 지적하였다. 이미 80세의 노인이 된 그는 허리가 몹시 구부정해지고 무표정하게 재판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범행사실을 부인하면서 전쟁기간 중의 기억을 부정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전쟁전의 일과 SS입대 사실은 기억하였다. 중요 나치범죄자재판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이 사건에서 11개월의 공판 끝에 슈밤베르크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 추적을 피한 사람들


① 추적과 입증의 곤란


나치 추적이나 송환이 언제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은밀한 은신처에서 피신에 성공한 나치 범죄자도 적지 않았으며 일부는 공공연하게 그 신원이 밝혀졌음에도 해당 거주지 국가들의 노골적인 보호를 받기도 하였다.

더구나 수십년전에 일어난 범죄의 범죄자를 확인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유죄를 입증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수집한다는 것은 "부담스럽고, 시간과 돈, 국제적 협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피해자들은 전후 세계 각국으로 흩어졌고 범죄자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범죄를 입증하는데 필요한 증언을 확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또한 증인의 편견, 주변적 환경에 쉽게 영향받는 증인의 민감성, 오랜 시간의 경과등은 증인에 의한 동일인 확인에 가장 큰 장애를 초래하였다. 그 대안으로 사진에 의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United States v. Walus 사건에서 미국정부는 Walus 라는 사람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관하여 이스라엘 시민들에게 그의 사진을 신문에 광고하면서 증언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범죄가 일어난 한참 후의 사진인데다가 사진의 질도 문제가 되는 판에 그 사진에 의한 증언의 유효성이 논란이 되었다. United States v. Kowalchuk 사건에서는 미국정부가 제시한 증거가 피고인이 전쟁범죄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입증하지 못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전후의 동서냉전은 나치처단에서도 곤란한 상황을 야기하였다. 특히 동구권 지역에서 벌어진 범죄에 대해서는 그곳 피해자들의 진술이 증거로 채택되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서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국적을 박탈하고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단을 함에 있어서 소련측 증거의 신뢰가 문제되었다. 많은 나치 범죄에 있어서 소련 시민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 시민을 나치범죄자로 판정받는데 대하여 국가적 이익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United States v. Kungys 사건에서 미국의 뉴저지 지방법원은 소련정부의 협력하에 취득된 증거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시민권박탈청구를 기각하였다.

그 무엇보다도 나치범죄자 처단에 가장 큰 적은 세월이었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증인들의 기억은 흐려지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을 혼동하였다.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당연히 나타나게 마련인 이러한 혼동은 증언의 신빙성을 삭감시켜 피의자의 무죄로 연결되곤 하였다.

심지어 증인이 사망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강제수용소에서 몇년을 지낸 사람들이 정상적인 기대여명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나치범죄자들이 강제수용소의 생존자들보다 오래 사는 것은 대단히 흔한 일이었다.

먼저 생존했을 가능성이 높으면서도 결코 그 신원을 확인하지 못함으로써 체포나 처벌에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끝없는 수색과 추적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인 도주와 은신으로 결국 생전의 체포를 면한 경우는 부지기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피신자들의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② 죠셉 멩겔레(Joseph Mengele)

- 죽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할 때까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무엇보다도 생체실험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수용소의 수석 의사로서 "아리안족의 특징과 푸른 눈을 가진 아이"를 인공적으로 창조하려 하였던 Joseph Mengele는 그 수용소의 의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유명하였다. 수천명의 수용자들을 개스실의 죽음으로 몰거나 갖은 생체실험을 다했던 그는 수용자들 사이에 '죽음의 천사'로 널리 알려졌다.


"1943년 티푸스가 여성 수용소에 크게 번졌다. 2만명 가운데 7천명이 앓아 누웠다. 멩겔레는 먼저 6백명이 거주하는 블록을 먼저 비워 가스실로 보냈다. 그리고 그 블록을 깨끗이 소독한 다음 옆 블록의 수용자들을 들여보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블록이 소독되었다. 그러나 무서운 일은 그 맨처음 블록의 6백명은 가스실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발한 발상에 의한 '티푸스 퇴치'로 그는 훈장을 받기도 한다. 1981년 서독 검찰이 발부한 구속영장에 의하면 "1943년 5월 25일 507명의 집시와 528명의 여자 집시를 개스실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 막상 그 자신이 집시계 외모와 혈통을 지녔으면서도 그토록 집시를 증오하고 학살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뮌헨대학에서 칸트철학을 공부하고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뒤 의사자격을 취득한 그가 가장 비인도적인 범죄자로 돌변하였다는 것은 큰 아이러니였다.

연합군의 진주와 함께 그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신원을 속여 혼란의 와중에 있던 상태에서 무사히 석방된다. 고향인 Gunzberg에 돌아온 그는 아무도 그의 전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평온한 5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체실험은 뉴른베르크 재판에서도 증언되었다. 아우슈비츠의 책임자였던 Hoess는 뉴른베르크재판의 피고인 Kaltenbrunner의 변호인 심문에서 "멩겔레에 의해 쌍둥이에 관한 생체실험이 진행되었다"고 증언하였던 것이다. 1946년 12월 미국이 23명의 SS 소속의사를 전쟁범죄, 비인도적범죄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하는 것을 보면서 멩겔레는 위협을 느꼈다.

드디어 피난민을 가장하여 1949년 아르헨티나로 도주하였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그는 본명으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였다. 그에게 서독정부가 영장을 발부한 것은 1959년 7월이었다. 영장이 발부되자 아르헨티나에서 파라구아이로, 다시 브라질로 도피행각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루살렘에서는 그에 대한 모의재판이 열려 전세계의 텔레비젼이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은 교황 바오르 2세에게 모든 카톨릭 신도들이 멩겔레의 행방을 찾는데 협조해 달라고 청원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각국 정부는 멩겔레의 체포를 위해 다각도로 협의하였다. 1985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독일, 미국, 이스라엘 세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만나 이 문제에 관해 논의했다. 그러나 바로 그 3주후 독일의 Die Welt지는 멩겔레의 시체가 브라질에서 발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논란이 일자 사웅파울루 경찰은 멩겔레의 시신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묘지에서 파내 법의학자들에 의해 검증되었다. 공식적으로 그의 주검임을 확인하였으나 일부에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죽음이 비로서 그에 대한 추적으로부터 자유를 가져왔다.

 

③ 마틴 보르만(Martin Bormann)

- "해결되지 않은 최고의 나치 미스테리"


1946년 나치독일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뉴른베르크에서 처형되었다. 그 예외는 감옥에서 자살로 처형을 피한 괴링과 제3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져버린 보르만 두사람이었다. 괴링은 뉴른베르크 재판의 과정에서 "총통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은, 특히 헤스가 없어진 이후인 1942년부터는 보르만이었다. 그것은 파멸적으로 강대한 영향력이었다"고 증언하였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그는 전쟁의 말기에는 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제2인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 보르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전후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의 정보기관들은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보르만의 소재나 심지어 죽은 흔적조차 찾지 못하였다.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는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그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1964년 11월 서독정부는 그를 체포하는데 정보를 주는 사람에 대해 10만마르크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 이전인 1961년 서독의 헤세주 검찰총장인 프리츠 바우어는 보르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에 대한 조사를 재개한다고 선언하였다. 1965년에는 하이파에 있는 나치전범문서보관소 소장 프리드만은 보르만이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이듬해 아이히만의 아들이 보르만에게 "당신의 자리에 대신 서 있는 아버지를 위해 남미의 은신처에서 나와 줄 것"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신문에 실어 관심을 끌었다. 1967년 독일 법무성은 브라질 대법원에 구금영장 및 추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보르만이 생존하고 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1973년 4월 프랑크푸르트 주검찰청은 보르만의 행방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내면서 일단 보르만이 1945년 사망한 것으로 결론 짓고 공식적인 추적을 중단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행방불명은 영원히 나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④ 하인리히 뮐러(Heinrich Muller)


뮐러는 독일 게쉬타포의 전 책임자였는데 나치헌터들은 그의 생존을 믿고 있었다. 그는 알바니아로 도주하여 동구에서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존재와 거주지는 결코 밝혀지지 않았다. 1964년 서독 관리들이 그라고 추정되는 사체를 검시하였으나 뮐러라고 단정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⑤ 범죄자를 보호하는 범죄자


한편 그 신원과 존재가 밝혀졌음에도 처단에 실패한 사례들도 있다. 남미를 비롯한 독재국가로 피신한 나치범죄자들은 '안전한 피신처'(safe heaven)를 구할 수 있었다. 나치범죄자는 전체주의 체제의 유지에 전문가들로서 제3세계의 독재자들에게 유용할 수 밖에 없었다. 스스로 권력자에게 유용하도록 적응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점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제3제국'은 종말을 고했지만 일부 나치 범죄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들 독재자들은 그들의 빈객(賓客)인 나치범죄자들을 함부로 내 주려하지 않았고 이들의 손 안에서 나치범죄자들은 안식처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남미는 이러한 나치범죄자들의 온상이었다. 전통적으로 남미는 정치적 피난처의 강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다.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추방하지 않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갑자기 다른 남미 국가의 대사관에 피신함으로써 피난처를 구하곤 하였던 것인데 나치범죄자들의 추방에 응하였다가 위험한 선례를 남길 것을 두려워하였다. 남미의 국가들은 살인자까지 거의 추방하지 않았으며 '손님'은 언제나 보호되었다. 남미는 나치 이전의 독일과도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1차세계대전 이후 다수의 독일인이 남미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각곳에 정착하여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곳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파라구아이의 경우 대통령이 되었던 스트뢰스너는 독일계였다. 이러한 이유로 나치즘과 인종차별주의는 이 사회에도 큰 영향력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나치전범들이 쉽고 자유롭게 안식처를 구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시리아에서 유태인문제에 대한 고문으로 일해 왔던 부룬너(Brunner)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아이히만의 오른팔이었던 부룬너는 10만명의 유태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자였다. 그는 시리아 정부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그 신원이 드러났음에도 송환을 거부한 시리아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기소를 면하였다. 우편물에 포장되어 있던 폭탄으로 실명하는 등 끝없는 위험 속에서도 그는 끝내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다.


4.세계 각국의 나치전범 색출과 처단 노력


나치범죄자를 찾고 이들을 법정에 세우려는 노력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국가도 나치범죄자를 공개적으로 변호하거나 이들을 보호하려고 할 수는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벌어졌던 참혹한 역사는 그러한 변호와 보호의 여지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거하는 나라들 외에도 적지 않은 나치범죄자 색출과 처단의 노력이 있었음이 분명하나 여기서는 대표적인 국가들의 예만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1)이스라엘과 유태인

① 이스라엘 정부


6백만명의 유태인 희생의 대가로 2차세계대전 직후 창설된 신생국가 이스라엘이 나치전범들의 추적에 나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먼저 이스라엘 의회(Knesset)는 1950년 '나치 및 나치협력자처벌법'을 입법하여 나치처단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 법에 따라 이스라엘 법정은 유태인에 대하여 행해진 범죄, 전쟁범죄, 비인도적 범죄에 대하여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이 법이 적용된 대표적인 케이스는 역시 아돌프 아이히만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는 정열적으로 아이히만을 찾았고 드디어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납치하여 나치처벌법의 15개 범죄사실로 법정에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재판이 시작된지 13개월만에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아이히만 재판은 납치의 위법성, 이스라엘 법률의 소급입법문제, 이스라엘의 관할권등 중요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먼저 납치문제에 관하여 이스라엘법정은 일단 법정에 선 이상 피고인은 그 법정에 서게 된 방법을 탓할 수 없다는 국제법상의 일반 이론을 원용하였다. 아이히만의 변호인들은 소급입법에 의한 처벌임을 주장하였으나 이스라엘 법정은 뉴른베르크에서 나치범죄자들을 처단하는데 사용한 '정의의 보편적 원칙'을 입법한 것에 불과한 나치처벌법이 문제될 수 없다면 그 주장을 배척하였다. 이 재판에 대해서 보편적 관할권의 적용에 관한 독일정부의 항의 외에는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판"에 대해 문제를 삼는 국가가 없었다.

② 유태인 단체와 개인


많는 나라와 정부조직 못지 않게 나치전범들의 추적에 성공을 거둔 민간인과 개인들이 있었다. 나치의 범죄를 목격한 증인들과 피해자들로 전세계에 네크워크를 구성한 이들 단체들은 비록 재정과 조직은 정부조직보다 못하였지만 불타는 정의감으로 그 난관을 극복하여 나치추적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이러한 조직의 구성원들은 대체로 한때 나치에 의해 처형대상에 올랐던 피해자들 자신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처형당하거나 고문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그것을 기억할 정도의 나이들이었다.


i)세계유태인총회(The World Jewish Congress)


1936년 제네바에서 구성된 세계유태인총회는 이미 창립시부터 나치의 위험성을 전세계에 경고하고 있었다. 전쟁중에는 나치반대와 유태인구제에 총력을 기울이던 이 단체는 종전과 더불어 난민구제, 재산복구, 배상청구 등에 대한 노력과 더불어 나치범죄자에 대한 추적.처단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였다. 뉴른베르크 재판 당시 세계유태인총회의 유태인문제위원회 위원장이던 로빈슨은 미국의 주임검사 자문역을 맡았다. 이 재판의 진행과정에서 문서와 증인의 제공역할을 다하였다.

그후 세계유태인총회는 나치전범 추적의 제일선에 나섰다. 미국에서 나치사냥을 되살린 것은 1972년 이 총회의 Karbach박사가 미국에 살고 있는 나치전범용의자 59명의 명단을 미이민국에 제출함으로써 가능했다. 1980년대를 통하여 이 총회는 전세계로부터 모여진 정보와 자료들을 제공했다. 일부는 OSI에 직접 전달되었고 또다른 자료들은 영국, 캐나다등 다른 나라 정부에도 전달되었다. 이 총회의 직원이었던 Bessy Pupko는 가장 헌신적인 나치헌터의 한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5개의 파일박스를 관리하면서 전세계의 유태인신문들을 통하여 유태인들에게 나치전범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루에도 여러시간을, 여러 언어로 세계 각지와 통화하면서 특정사건의 증인을 쫓고 자료를 확보하는 일에 매달렸다. 이 단체는 또한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쿠르트 발트하임의 나치전력을 찾아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ii) 시몬 비센탈, 그리고 개인 나치헌터들


나치의 잔혹한 범죄로 피해를 입었거나 큰 분노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전후에도 나치범죄자 추적에 나선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나치헌터들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시몬 비센탈이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나치의 손에 희생되었을 뿐만아니라 그 자신이 간신히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적이 있는 그는 나치범죄자 추적과 처단의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스스로 나치범죄자의 리스트를 확보, 유지하면서 이들을 추적하여 1천여명에 가까운 나치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우는데 성공함으로써 그의 명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확고하게 되었다.

종전 직후 미국 CIC등에 관여하면서 나치범죄자 색출에 노력하다가 1947년 이후 오스트리아의 린츠, 비엔나등에 Documentation Center를 설치, 운영하였다. 그는 가장 먼저 아직도 생생한 희생자들의 기억이 생생할 때 그것을 기록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전쟁이 끝나면서 나치강제수용소에서 약 10만명의 생존자가 있었고 이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등에 연합국이 세운 피난민센타에서 임시적으로 거주하고 있었다. 비센탈은 먼저 이들 피난민센타에 주재원을 두어 네트웍을 형성하고 이들로 하여금 강제수용소 경비원, 살인과 고문의 경험과 목격담등에 관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게 했다. 이 채록과 사진등 모든 증거자료는 나치범죄, 그 범죄자, 증인별로 인덱스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이것은 뉴른베르크 전범재판, 1947년의 Dachau에서의 전범재판등에서도 이용되었을 정도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비센탈이 확보한 나치범죄자의 목록은 22,500이 넘어서고 일단 명성이 나자 계속 관련 자료들이 답지하였다. 1961년에는 1만5천명의 SS대원의 계급, 사진, 특기사항등과 함께 적힌 명단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인쇄된 이 명단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어서 여기에 포함된 자는 자신이 SS대원임을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자신이 독일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의 대부분을 이 사업에 투자하였다. 뿐만아니라 전세계의 유태인과 그 조직,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성금이 모여들었다. 대단히 불규칙한 이 돈을 잘 관리하면서 나중에 한달에 1500달러가 넘는 경상비를 충당해 갔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어느 정부의 돈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열만으로 아이히만, 멩겔레를 비롯하여 악명 높은 나치범죄자의 추적과 확인, 체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이름은 이미 전세계로 숨어든 나치범죄자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또 그만큼 나치전범들과 신나치조직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비센탈이 지목한 나치전범 1,100명 가운데 4명은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소송까지 제기하였으나 아무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험한 일을 계속할 그의 후계자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였다.

비센탈의 개인적 노력은 1977년 시몬 비센탈 센타가 설립됨으로써 항구적 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센타는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하여 대학살에 관한 연구와 인종간의 화해를 위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교육과 계몽을 통하여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과 교훈을 전세계에 전달함으로써 동일한 죄악이 인류사에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시몬 비센탈 외에도 나치헌터들이 많이 있었다. 뉴욕의 치과의사 Charles Kremer는 Valerian Trifa의 신원을 밝히고 노출시키는데 주력한 사람이었다. 트리파는 원래 루마니아 태생이었는데 전쟁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로마정교회의 주교가 되어 권세와 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 그는 이른바 Iron Guard의 지도자로서 나치를 위해 일했으며 4천명의 루마니아 유태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였다. Kremer는 트리파의 과거를 모두 폭로하고 진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 다시 치과의사로 되돌아갔다.

뒤에서 보는 Hermine Braunsteiner Ryan의 경우에도 그를 쫓는 나치헌터가 있었다. 리얀은 폴란드의 Maidanek 강제수용소의 여자 경비원이었는데 천명이 넘는 여자와 아이들의 사망에 관여하였다. 종전후 미국인과 결혼하여 캐나도로 이주한 다음 다시 뉴욕으로 옮겨 미국시민이 되었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그녀에게 재앙이 온 것은 바로 이민국에 근무하던 Anthony J. DeVito때문이었다. DeVito는 전쟁 중 미군으로 복무하면서 강제수용소의 참혹함을 목격한 바 있었다. 그는 이민국에 근무하면서 리얀이 미국에 온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폭로하였다. 수년의 노력끝에 리얀은 폴란드로 강제송환되어 그곳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iii)반인종주의연맹(Anti-Defamation League)


인종차별과 반유태인주의와 싸우는 중요한 기구로서 이 단체를 빼 놓을 수 없다. 이 기구의 책임자인 Welles와 그의 부인 Ceil도 나치 강제수용소의 수용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계속되는 나치 헌팅을 연구하는 그룹이나 상원 위원회에 증언을 위해 나가기도 하고 나치전범 처단의 당위성을 강연하러 다니기도 한다. 제대로 된 사무실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손으로 쓴 수많은 전화번호와 인명 리스트는 적지 않은 위력을 지니고 있다. 이 리스트에서 가장 유명한 나치전범 Brunner파일을 찾아냈던 것이다.


(2)독일

기본적으로 나치범죄가 대부분 독일 땅에서 독일인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독일정부가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관할권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1949년까지는 독일인과 무국적자에 대한 범죄행위에 대해서만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49년 이후에야 비로서 독일은 연합국과 그 국민에 대해 저질러진 범죄까지 처벌대상으로 확대되었다. 서독정부의 나치전범수사본부는 남부독일의 루드비그스부르크에 자리잡았고 유능하고 헌신적인 나치 헌터 알프레드 쉬트라임이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러한 수사와 처단, 추적에 도움을 주고 근거가 된 것은 나치전범의 기록을 보관하는 자료보관소들이이었다. 나치전범추적의 가장 중요한 자료센터는 국무성 산하의 베를린문서센터(Berlin Document Center)였다. 2차대전 전쟁동안의 대학살과 나치작전에 관한 유일하고도 엄청난 규모의 자료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1946년 문을 연 이 센터는 노획된 독일문서의 공식적인 창고였으며 전세계로부터 오는 나치당에 대한 정확한 정보 요청에 응하였다. 연합국에 의해 관리되던 이 센터는 1988년 독일정부에 반환되었다.

이리하여 서독정부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조사한 나치전범용의자는 91,160명에 이르며 그 가운데 6,482명을 기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12명이 사형, 160명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기소된 나치전범들의 평균 선고형량은 8년이었으며 실제 복역연수는 4년이었다. 그러나 기소된 전범 숫자의 75%가 독일이 연합국의 점령하에 있을 당시(1945-1949)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1950년 이전에 기소된 5,228명의 전범 가운데 살인등 중대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은 단지 100명뿐이었고 그 가운데 강제수용소에서의 살인은 15명이었다.

1970년대 이후에 기소된 유명한 나치전범들 가운데 SS대위였던 Paulus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71년 함부르크에서 161명의 민간인 살인혐의로 기소되었다. 공소시효 만료로 무죄로 풀려났다가 대법원에서 파기되는 바람에 1986년에 다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선고결과는 징역4년에 불과하였다. 이에 항소한 Paulus는 20년간에 걸친 재판은 국제인권규약위반이며 81세의 나이와 건강으로 보아 재판을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소기각판결을 받고 말았다. 1988년에는 아우슈비츠 SS경비병이었던 Weise라는 자가 5건의 살인혐의로 기소되어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재판장은 Weise가 "자신의 기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자들을 장난감처럼 다루었다"고 설명하였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또다른 나치전범은 역시 SS상사였던 Karl Frenzel이었다. 74세의 프렌젤은 Sobibor강제수용소의 유태인학살의 책임자로 기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피고인들 자신이 너무 연로하여 배심원들의 처벌의지를 약화시켜 대부분 경미한 선고를 받게 되었다. 게쉬타포 장교로서 1만5천명의 유태인을 강제송출하고 학살하였던 Helmut Krizons은 재판당시 68세로서 단지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나치군 중위로서 라투아니아 강제노동자를 살해한 Kurt Rahauser는 3년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SS를 포함하여 수십만건의 전범사건이 아예 기소를 면하였다. August Heissmeyer라는 SS 장군은 처음에는 기소를 면하고 있다가 국내외의 압력으로 기소되었으나 그에게 적용된 죄명은 가명사용일 뿐이었다. 감옥은 커녕 그는 나머지 여생을 코카콜라회사의 서독 지사장으로 보냈다. 뒤에서 보는 'Paperclip Project'가 냉전에 협력한 나치과학자들의 면책에 관한 음모라면 나치기업가들에게도 비슷한 종류의 면책이 주어졌다. 나치의 전쟁과 학살의 수단을 제공하고 비인도적 범죄에 직접 가담한 많은 나치기업가들이 종전후에도 그들의 부와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1964년 3월 서독정부는 전범으로 분류될 수 있는 독일 최대의 화학재벌 Heinrich Butefisch에게 최고의 훈장인 Grosses Bundesverdientkreuz를 수여하였다.

이와같이 독일에서 나치전범들이 제대로 충분하게 처벌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선 독일의 법체제가 엄격한 실증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새로운 유형의 나치범죄처벌에 장애가 되었다. 미국법정에서 민간인을 다수 살해한 혐의로 미국 시민권을 박탈한 우크라이나 경찰관 Bohdan Koziy에 대해서 독일정부는 독일법하에서 범죄구성이 어렵다는 이유로 송환요청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독일정부의 견해에 의하면 미국법정에서 유죄로 판명된 대부분의 전범들이 면책될 판이었다.

더구나 독일법은 공소시효를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1980년 1월 1일 이후에는 모든 전쟁범죄들이 처벌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전세계의 유태인단체들의 항의에 따라 1979년 7월 3일 독일연방의회는 살인과 제노사이드 범죄에 관한 공소시효를 제거하였다. 그러나 이 이후에 처벌된 나치범죄자들은 별로 없었음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한편 2차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다수의 나치범죄자들이 세계 도처로 흘러들어갔고 독일은 이들에 대한 송환 요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독일이 몇가지 사건을 예외로 하고 이러한 송환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독일정부는 비록 나치정부의 권위하에서 벌어진 범죄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독일 영토밖에서 벌어진 비독일인의 범죄인 경우에는 관할권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독일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클라우스 바르비 사건등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났다. 바르비에 대해 관할권을 가지고 있는 독일정부는 볼리비아로부터의 추방을 위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으며 관할권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프랑스정부가 최종적으로 추방요구와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면 바르비는 결코 법정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3)캐나다


캐나다의 전범처리 문제가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캐나다유태인총회가 이민 담당 장관을 초청하여 캐나다에 살고 있을 나치전범의 처리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였고 캐나다홀로코스트생존자협회등에서 의회에 대한 나치전범처벌법 제정에 관한 로비를 하고 있었다. 1978년 Kaplan 의원은 이러한 로비끝에 C-215법안('캐나다에서의 전범에 관한 법')을 의회에 제출하여 1949년의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한 시민권박탈을 골자로 하는 캐나다국적법의 개정을 권고하였다. 다른 동료의원의 무관심으로 이 법안은 무용지물이 되었으나 의회는 몇명의 나치전범용의자들에 관한 자료를 제출하였다. 캐나다 밖에서는 나치 헌터 시몬 비센탈이 나치전범으로 알려진 사람들에 대해 캐나다 정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음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이들에 대한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 지기 전에는 캐나다 땅을 밟지 않으리라고 언명했다. 그는 동시에 캐나다 내에 살고 있는 나치전범이 1천여명에 이르며 미국과 같이 대부분 우크라이나 또는 동구권으로부터 이민온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단속적으로 캐나다 의회, 정부, 국민들 사이에 논의되던 이 문제가 추상적인 입법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으로 터져나온 것은 1982년 봄의 Albert Helmut Rauca사건이었다. 73살의 이 사람은 리투아니아에서 수천명의 학살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독일정부로부터 송환 요청을 받고 있었다. 이 해에는 나치 통치기간 유태인들의 캐나다 이민을 극도로 제한한 조치를 비난한 학문적 연구서 'None is Too Many'라는 책이 나와 대중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 책은 나치전범과 직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캐나다가 피난처를 거부한 유태인의 운명과 전후 기꺼이 피난처를 제공한 나치전범에 관한 모순된 캐나다 정부의 정책을 쟁점화한 계기가 되었다.

계속된 압력으로 캐나다 정부가 마침내 조사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1985년 2월에 이르러서였다. 특히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천사'로서 생체실험을 담당한 나치 의사 멩겔레가 캐나다에 몰래 숨어 살고 있다는 주장은 여론을 극도로 악화시켜 이러한 조사위원회의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리하여 멩겔레를 비롯하여 캐나다 내의 전범의 존재를 조사하고, 그리고 이들을 다룰 캐나다 법체제를 연구할 위원회를 설치하고 이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퀘벡최고재판소 판사 Deschenes가 임명되었다. 그동안 나치전범 처벌을 주장해 왔던 유태인 단체들과 의원들은 전범 용의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재판절차 대신에 단순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한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그해 4월 10일 처음으로 이 위원회가 열려 활동규칙등이 제정되었고 증인심문과 증거제출에 관한 규정들이 포함되었다. 이 조사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한 이후 나치범죄자로 추정되는 용의자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이해관계를 가진 단체들의 의견진술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치 치하에서 유태인과 폴란드인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나치 점령자와 탄압에 앞장선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비난과 이에 대한 우크라이나 출신자들의 반박이 계속되어 인종집단간의 갈등이 빚어졌다. 유태인과 우크라이나인 사이의 구원(久怨)이 이 위원회의 활동을 사이에 두고 폭발하였던 것이다.

많은 증인들의 증언과 증거자료의 검토가 계속되어 Deschenes위원회의 보고서가 준비되었다. 이 자료속에는 소련으로부터 보내온 것도 포함되었다. 1986년 6월 30일이 보고서 제출의 데드라인이었다. 그러나 사건의 복잡성때문에 1987년 3월이 되어서야 이 보고서는 햇빛을 보았다. 두 파트로 이루어진 이 보고서의 첫번째 부분은 966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으로 위원회의 조사절차와 이 위원회에 제기된 많은 법률적 문제들, 권고안, 8백여명에 이르는 나치전범 용의자들(익명으로 처리되어 있음)에 대한 위원회의 조사내용이 들어 있었다. 두번째 부분은 비공개자료로서 위 8백여명 가운데 구체적 혐의가 드러난 29명의 용의자들에 대한 혐의와 증거의 요약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후에도 이 위원회에 유력한 정보가 쏟아졌으나 이미 조사할 시간이 더 없는 상태였다. 위원회는 20명의 주요혐의자들과 218명의 추가조사를 요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제출하였다. 이로써 캐나다가 아직도 나치범죄 용의자들의 천국임을 이 보고서는 분명히 하였다. Deschenes는 체코,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등 캐나다가 범죄자인도협정을 맺고 있는 나라와는 나치전범을 송환할 것과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보편적 관할권을 인정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OSI와 같은 수사대의 창설은 부적절하며 그것은 캐나다의 다인종 사회를 근저에서 뒤흔들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 보고서의 권고에 기초하여 캐나다 정부는 나치전범 뿐만아니라 모든 전범을 캐나다에서 처벌할 수 있는 형법의 개정 또는 특별법의 제정을 추진하였다. 이리하여 1987년 9월 드디어 캐나다전쟁범죄법(The Canadian War Crimes Act)이 제정되었다. 캐나다가 2차세계대전에 참여한 1939년 9월 9일 이후 전쟁범죄 또는 비인도적 범죄를 캐나다 밖에서 저지른 캐나다인에 대해서도 캐나다 법원의 관할을 인정하는 법률이었다. 국제법상의 이른바 '보편적 관할권'을 입법화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해서 비록 캐나다 외의 지역에서 범한 나치범죄의 경우에도 그 범죄자가 캐나다 내에 살고 있다면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치범죄자임이 확인되면 범죄지 국가로 송환하는 미국과는 달리 캐나다 법원이 직접 재판하여 처단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 법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2차세계대전 당시의 나치범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소급입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범죄가 범해질 당시에 캐나다법에 의해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처벌할 수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소급입법의 논쟁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당시 범죄가 이와같은 보편적 관할권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하고 그 범인이 캐나다 국민이거나 캐나다와 교전중에 있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요건이 추가로 요구되었다. 역시 이 법률에 의해 1987년 12월 9일 76세된 헝가리 태생의 Imre Finta가 구속되었다. 강제구금,납치,살인에 관계했다는 혐의로 구속된 Finta에 대한 재판은 미국을 포함한 북미주에서 최초의 직접적인 전범재판이었다.

이 법률에 의해 캐나다가 문명사회에 의해 비난받는 나치범죄자들을 위한 '천국'이 될 수 없게 되었다. 캐나다 의회 의원 한 사람은 "전쟁범죄 또는 비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자를 처벌하는 확고한 정책없이 캐나다를 정의로운 사회 또는 문명화된 곳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 법안을 통과하면서 "캐나다인은 이러한 종류의 행위가 불처벌된 상태로 남겨둘 수는 없다"는 강한 메시지를 온 세계에 전했던 것이다.

(4)오스트레일리아


① 오스트레일리아행 피난민 속의 나치


인구밀도가 희박한 오스트레일리아는 제2차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넘쳐나는 유럽의 인구와 피난민을 흡수할 수 있는 적합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스스로도 산업노동력을 확보할 필요성이 있었고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국제적 책임을 다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1947년 이후 4년반에 걸쳐 약 18만명의 난민이 유럽을 떠나 "멀지만 광대하고 인구밀도가 희박한 나라"로 이민의 길을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도 나치범죄자와 그 동조자들이 끼어 있어 1942년 이미 조직되어 있었던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유태인위원회(The Jewish Council)는 이들 오스트레일리아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의 신분을 제대로 조사하는 일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태인위원회가 그당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피난민 가운데 SS대원의 문신을 가진 사람들, SS대원으로서 찍은 사진등을 가진 사람들이 발견되었으나 무시되었으며 도착후 캠프에서 유태인 난민들이 조직적으로 공격받은 사실도 있다고 하였다. 이들이 오스트레일리아의 곳곳에 정착한 후에도 자신들의 과거를 자랑하거나 무의식중에 나치활동을 한 사실을 자인하는 등으로 나치범죄자임을 드러내 지역 신문에 보도되기 조차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오스트레일리아로 들어온 난민 가운데 상당수의 나치범죄자 또는 그 동조자들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을 알려주고 있으나 그당시에는 대체로 중시되지 않았다. 더구나 냉전의 격화와 1949년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의 미국 편향은 반공주의를 최우선과제로 등장시키면서 더 이상 소수이민자의 나치출신 가능성에 대한 관심을 소멸시키고 말았다. 심지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경찰로서 독일인 보다 더욱 유태인 수용자들을 학대하였던 Bontschek이란 자에 대하여 여러 수용자들의 진술서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정보기관은 증거가 없다면서 조사를 종결하고 네들란드 정부의 송환 요구를 거절하였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더 이상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않게 된 나치협력자 출신들이 1957년초 모임을 결성하여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반볼세비키연합(Anti-Bolshevik Bloc of Nations)의 오스트레일리아지부가 그것이다. 이 조직은 원래 냉전이 격화되면서 서방의 정보기관들이 반공 정보 네트워크로 이용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용가치가 떨어지면서 그에 대한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반소.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이들은 보수 우익의 이념을 실현하는 정치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② 새롭게 깨운 나치범죄자에 대한 경각심

나치에 대한 정치인들과 언론의 오랜 무관심을 일깨워 준 것은 1986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먼저 이 때 5부작으로 방송된 ABC라디오 다큐멘타리 '오스트레일리아의 나치'(Nazis in Australia)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방송은 그당시까지도 오스트레일리아 보수적 정치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Ljenko Urbancic이 슬로베니아 Ljubljana의 "작은 괴벨스"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었다. Urbancic은 독일점령 및 관리하의 슬로베니아 정보부서에서 신문, 방송, 강연등을 통해 나치즘 선전에 광분하였음이 밝혀졌다. 세계적인 나치헌터 시몬 비센탈이 ABC 프로그램에 나와 Arnoldus Pabresha라는 사람은 독일간첩이며 리투아니아 극우폭력집단의 회원으로서 1천3백명이나 죽였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나아가 100여명의 나치범죄자가 오스트레일리아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시는 침묵과 무관심의 30년을 지나 전세계적으로 나치범죄자들의 색출과 처단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미국과 캐나다는 이미 그런 바람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러한 물결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쳐 왔다. 오스트레일리아 유태인 협회가 1986년 초부터 이러한 세계적 움직임에 자극받아 자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그 협회 회장 Caplan은 당시 수상 Hawk를 만나 나치전범조사와 처벌을 권고하였다. 사방의 압력으로 일단 그해 6월초순 비로서 Andrew Menzies가 비공식적인 조사책임자로 상원에서 임명되었다.


③ 전범처벌법의 개정


Menzies보고서는 특정인에 대한 나치 단정이나 이민유입과정에서의 오스트레일리아 관리들의 고의적 묵살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정부에 대하여 "중대한 전쟁범죄를 범한 사람들을 재판에 회부하는 조치를 취할 것"과 전범용의자들을 수사하기 위하여 미국과 같이 법무성 아래 특별수사대를 설치할 것, 그리고 혐의가 분명해진 자들에 대한 시민권박탈, 범죄지로의 추방, 1945년의 전범법개정등을 건의하였다.

1945년의 전범법(1945 War Crimes Act)은 아시아지역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인에 대하여 행해진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만약 나치전범, 그것도 30년이 지난 후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그 법의 개정이 불가피하였다. 특히 전범용의자를 추방하기 보다는 오스트레일리아 내에서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재판할 수 있도록 위 전범법을 개정하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법무성 내에 특별수사대(Special Investigation Unit)를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 검찰차장까지 지낸 Robert Greenwood를 임명하였다.

1987년 10월 법무장관 Lionel Bowen은 전범법개정안을 하원에 제출하였고 야당조차도 동구권으로부터의 정보를 증거로 쓸 것인가에 대한 논란외에는 별 반대없이 동조하였다. 12월에는 이미 상원에서 이 법안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고 1988년에 이르기까지 350건의 건의서 제출, 17명의 증언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전범법 개정안이 상하양원에 의해 통과되어 나치전범자에 대한 안식처가 이 지구상에서 또하나 사라졌다.


(5)미국

- 은신처와 추적자의 두얼굴


① 나치범죄자의 이주와 추방에 관한 미국의 법제


유럽의 피난민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미국에 피난민을 가장한 나치범죄자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였다. 미군의 보호하에 독일에 설치된 난민수용소에는 나치협력자들이었고 특히 발트인들의 3분의 1은 게쉬타포나 SS대원이라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질서를 주도하게 된 미국은 일단 난민을 가능한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미국은 당초 할당제를 도입하여 소련에 의하여 병합된 발트 3국이나 동구권에 우선적 비자 발급을 해 주었다. 미국의회는 1948년(DP법)과 1953년(RR법)의 특별 이민법을 개정하여 종래의 이민 할당제도를 제거하고 보다 많은 이민의 유입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이민 관련 법률들은 물론 민간인들의 학대와 처단에 조력한 어떠한 나치범죄자도 제외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원과 활동을 숨긴채 나치범죄자들은 쉽게 미국에 이주할 수 있었다. 위 특별이민법에 의해 난민위원회(Displaced Persons Commission)가 설치되고 CIC의 도움을 받아 선별작업에 나섰으나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유럽 전지역으로부터의 난민의 신분을 제대로 확인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할당제에 의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독일계 동구권 난민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아볼 수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의 신원에 대한 실질적 심사가 불가능 하였다. DP법이 만료된 1952년까지 40여만명의 유럽 난민이 미국으로 유입되었고 그 가운데 1만명 가량은 나치전범으로 추산되었다. 미국은 완전히 나치전범들의 '안전한 천국'(safe haven)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국내외 여론으로 나치전범들의 신변에 위협이 닥쳐왔다. 유태인조직과 미국내 인권단체들의 나치추방 여론 형성과 나치범죄자 색출운동이 벌어진 이후 미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많은 나치범죄자들이 차례로 확인되었고 대부분이 시민권이 박탈되거나 국외로 추방(deportation)되었다. 이민법(INA)이 이러한 절차의 근거가 되었다. 1978년 의회는 이민법을 개정하여 종래 있던 추방 규정에 나치범죄자의 추방에 관한 규정을 추가하였다.


"1933년 3월 23일부터 1945년 5월 8일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나치정부, 나치정부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 지역의 정부, 나치정부의 지원과 협력에 의해 설치된 정부, 나치정부의 동맹국이었던 나라의 정부의 지시 또는 그 연계하에 인종, 종교, 출신국가,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하여 어떠한 사람을 학대하는 일을 지시하거나 선동하거나 지원하거나 참여한 외국인"


이러한 요건에 해당되는 나치전범에 대해서 먼저 시민권이 박탈당하고 이어 국외로 추방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특정국가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지는 송환(extradition)도 취해졌다. 송환은 송환협정이 체결되어 있을 경우에 한하여 가능한 것인데 미국에서 송환된 케이스는 Ryan, Artukovic, Demjanjuk 3건에 불과하였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소련은 미국에 대하여 Maikovskis, Linnas 등에 대한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송환협정이 체결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시민권박탈(denaturalization)절차와 추방(deportation) 절차는 미국법상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시민권박탈절차는 연방지방재판소의 재판과 순회재판소의 항소, 대법원 상고로, 추방절차는 이민담당판사 앞의 청문, 이민항소위원회(Board of Immigration Appeals), 순회항소재판소와 대법원을 각각 거치게 되어 있었다. 이 두개의 절차는 각각 진행되게 마련이었고 그 재판의 내용도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7번의 심급의 모든 절차를 밟는데는 7년여의 세월이 걸리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연 때문에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해당 나치전범이 사망하는 경우조차 생겨났다.

한편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기소나 처벌절차가 미국내에서 개시되지는 않았다. 나치범죄가 미국내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형사재판권의 관할 결정에 있어서 국적주의, 영토주의, 범행지주의의 원칙을 지켜 왔다. 나치범죄는 미국인이 미국에서 미국인에 대하여 범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은 나치전범을 처단하기로 하는 모스크바 선언과 런던협약에 서명하였고 1946년 유엔총회는 모든 국가로 하여금 전범을 체포하고 이들을 범죄지 국가에 송환할 것을 결의하였기 때문에 법률적 송환의무를 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미국이 그러한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또한 현재 발전하고 있는 국제법상의 '보편적관할권이론'에 의해 미국이 직접 나치처벌에 나서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미국은 이미 테러리즘에 대항해야 할 필요성에서 테러리스트에 대한 보편적 관할권을 인정하는 입법을 한 바 있다.


② 나치범죄자 색출운동의 시작


미국내에 나치전범들이 유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국행정부가 이들의 소재를 탐지하거나 기소하려는 노력을 30여년간 거의 한 적이 없었다. 1945년 이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민국(INS)을 통하여 나치관련자를 확인하고 추방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형식적이거나 비효율적이었다. 이 기간 동안에 이민국이 나치협력자에 대해 조사를 벌인 것은 10건이 채 되지 않았고 그 가운데 단 1명만이 추방되었다. 이와같은 무관심과 비효율의 배경에는 당시 냉전의 격화와 더불어 나치즘 보다는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더 강화되었을 뿐만아니라 이민국의 취급이 중앙이 아닌 지방단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나치범죄자에 대한 이민국의 조사는 다른 범죄와 달리 특별한 취급을 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성실한 조사가 따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Hermine Braunsteiner Ryan 사건은 미국 국민의 나치전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42년 폴란드 루블린에 설치된 수용소의 악명높은 여성경비병이었던 Braunsteiner가 뉴욕에서 남편과 함께 가명으로 살고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녀에 대해 1973년 서독정부는 송환을 정식으로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미국 법원도 그 요구에 따랐다. 서독에서 6년동안 재판을 받은 끝에 1981년 서독 법원은 그녀에게 다수 살인죄를 적용하여 종신형을 선고하였다.

여성 하원의원이던 Eilberg와 그를 뒤이은 Holzman이 미국내에서의 나치전범 수색과 추방을 위한 켐페인에 불을 당기고 운동을 이끌었다. 1973년 세계유태인협회의 Otto Karbach 박사는 이민국에 59명의 미국내 나치전범용의자명단을 제출하였고 이민국은 즉각 조사팀을 설치하였다. 뉴른베르크 전범재판 이후 나치범죄자를 조사한 최초의 기구이기는 하였으나 1명으로 구성된 이 조사팀이 그 방대한 조사업무를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74년에 이르러 하원 법사위원장 Joshua Eilberg가 국무성의 관심을 촉구하는 서한을 키신저 국무장관에게 보냄으로써 국무성은 1975년 서독등 관련 국가에 Karbach List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이들 국가로부터의 정보제공과 이민국의 용의자에 대한 국적박탈소송이 시작되었으나 이민국의 불성실한 증거자료준비, 생존한 증언자들의 희소성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③ OSI와 나치범죄자

1977년 이민국 내에 다시 Martin Mendelsohn변호사를 책임자로 하는 특별소송팀(Special Litigation Unit)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나치관련자들에 대한 수색과 소송등에 큰 진전을 보지 못하자 불만이 의회내에 고조되었다. 나치범죄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가 이루어진 것은 의회의 압력으로 1979년 법무성 산하에 특별수사대(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나치전범의 수사와 추방에 관련된 모든 업무가 본격적으로 그리고 단일한 체계하에서 취급되었다. 2백8십만불의 예산도 책정되었고 수사인력도 대폭 증가되었다.

초대 책임자는 뉴른베르크 검사 출신의 Walter Rockler였고 1980년에는 부책임자였던 Allan A.Ryan이 그 뒤를 이었다. 18명의 변호사, 6명의 역사학자등을 포함하여 직원이 47명에 이르렀다. 1981년에는 하원의 100명이 넘는 의원들이 OSI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다하도록 레이건 대통령에게 탄원하였다. 같은해 크리스토퍼 도드 상원의원등 11명의 상원의원이 OSI 예산감축을 반대하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다.

1982년 CBS 텔레비젼의 "60 Minutes"라는 프로에 '나치 커넥션'이 나가자 언론인과 의회, 일반대중의 관심과 여론이 폭발하였다. OSI의 수사관이었던 죤 로프트스는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정보기관이 나치범죄자들을 그들의 요원으로 몰래 채용하여 활용하였다고 폭로하였다. 그는 지난 35년간 아무도 이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으나 실제로 그동안 크고 작은 단체들이 그러한 사실을 고발하였으나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수없이 미국 시내를 활보하고 있을 나치전범들의 존재를 알리려 하였으나 관심을 끌지 못하자 Paul Silton이라는 랍비는 나치의 SS복장을 한 채로 1979년 11월 콩코드호텔에 나타나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④미국의 음모, 나치전범의 은폐와 활용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미국이 나치전범자들을 정보원등으로 고용하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온세상에 드러난 것은 클라우스 바르비 사건때문이었다. '리용의 도살자'로 널리 알려진 바르비는 1983년 볼리비아에서 프랑스로 송환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에서 거주하는 동안 미군첩보대인 CIC에 의해 그가 나치전범임을 알면서도 정보원으로 고용하였던 사실이 밝혀져 미국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공식적으로 정중한 사과까지 하였다. 미국군형법(UCMJ)상의 이적행위등에 해당되는 이러한 행위는 공소시효경과등의 이유로 CIC관계자들은 처벌되지 않았다.

미국의 CIC는 전쟁 종료 직전 나치의 SS, SD, 게쉬타포등에 소속된 일부 나치정보장교들을 독일과 점령당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보호하였다. 이른바 "rat-line"이라는 것을 만들어 수배된 나치전범을 유럽에서 도주하는 것을 돕기까지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일부는 미국정보기관의 도움으로 미국시민권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한편으로 뉴른베르크에서 재판을 벌이면서 나치처단과 인류 정의를 외치면서 미국은 뒷구멍으로 자신의 국익을 위해 전범들을 빼돌리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 후에도 미국은 냉전의 격화와 더불어 나치추적과 처단의 의지 보다 반공의 결의를 더욱 다지게 되었고 과거 공산주의자 탄압에 경험이 있던 나치의 정보장교들을 반공전선의 정보원등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더구나 독일점령을 위해 배치되었던 각국 사이뿐만아니라 미군부대 사이에도 상호간의 정보 경쟁이 치열하여 전쟁 중의 경력을 불문하고 현재의 정보요원으로서의 가치를 따졌다. 바르비의 경우는 과거 전력을 무시하고 정보요원으로 채용된 하나의 예일 뿐이었다. 이들은 현지 물정을 전혀 모르는 미군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존재였고 특히 독일의 정보장교들 가운데 일부는 소련의 영향하에 든 동구 여러나라의 공산당과 그 당원, 그 활동등에 정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활용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정보기관이 지난 수십년동안 활용한 나치관련자들이 최소한 156명이라는 주장도 있다.

뿐만아니라 1,558명에 이르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과학자들이 국방성 및 국무성의 'Project Paperclip'이라고 불리는 작전을 통하여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나치당원이거나 SS대원이었다. Wernher von Braun, Theodor Zobe, Herbert Axter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이 그룹 속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탈나치화정책과 전범처벌의 원칙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을 위해 각종 기관에서 종사하고 있었다. 흔히 달로켓, 제트비행기, 그외 상당수의 과학적 성과들이 바로 Paperclip의 유산이라고 말해지지만 동시에 그 유산은 미군을 실험대상으로하여 발전시킨 가공할만한 신경가스등 신경화학무기도 포함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OSI가 다루고 있던 사건 가운데서 적어도 20건 이상은 미국정부가 활용한 나치전범들이었다.

유럽 여러나라에서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나치 전범용의자들의 송환 요구에도 몇차레 미국은 거절하였다. 아직 미국이 그 국가를 승인하지 않았다거나 그 재판의 공정성을 믿을 수 없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유고슬라비의 경우 7백건 가량의 송환요구를 하였으나 미국은 단지 20여건에 대하여만 유고슬라비이에 송환하였다. 미국의 이와같은 나치범죄자의 보호와 이용은 소련이 "서방국가들이 나치전범들을 품안에 넣고 추방을 거절하고 있다"는 비난한 내용과 일치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⑤추방되는 나치전범들


미국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나치범죄자들은 대체로 나치 강제수용소의 경비병, 경찰, 또는 나치 정부 관리들이었다. 강제수용소 경비병이었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자로서는 Feodor Fedorenko, Karl Linnas, Ivan Demjanjuk등이 유명하다. Fedorenko는 80만명의 유태인 가스실에서 학살당한 트레블링카 수용소의 경비병이었다. 그의 비자에 농부라고 기재했다가 사실이 밝혀져 1981년 미국 대법원 판결에 의하여 시민권이 박탈되고 소련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Linnas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수용소 책임자로 있던 자로서 역시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Demjanjuk사건외에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상사였던 Hans Lipschis는 1983년 서독으로 추방되었다.

경찰로서는 전쟁 중 라트비아 경찰책임자였던 Boleslaves Maikovskis가 유명하다. 자신이 라트비아 철도청 서점주인이었다고 속여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나 거짓임이 밝혀져 서독으로 추방되어 재판을 받았다. Serge Kowalchuk는 우크라이나 민병대에서 일했던 사람임이 밝혀져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크로아티아의 내무장관으로 일했던 Artukovic은 자신이 수천명의 세르비아인, 유태인들이 수감된 강제수용소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1984년 유고슬라비아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나치범죄자 추방절차는 너무도 지리한 것이었으며 1980년 OSI 창설 이후 본격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져 이미 때늦은 것이었다. 추적의 단서를 찾기 쉽지 않았으며 대상자들의 나이는 너무 들어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상대 국가가 열심히 받아들여 법정에 세우기를 바랄 때 미국은 적극적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스스로의 법정에 이들을 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추방당한 전범 보다는 안전한 피난처를 미국에서 구한 전범이 더 많으리라는 추정은 합리적인 것이다.


5.결론

- 정의는 구하고 기억하는 자만이 누릴 자격이 있다.


"죽은 사람들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 때문에, 그 보다는 그들의 아이들 그리고 당신의 아이들 때문에 이 재판은 중요합니다. 이 재판은 미래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이 재판은 기억의 이름으로 미래에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기억되지 않는 정의란 불완전하고 거짓되며 정의롭지 않은 정의입니다. 망각이란 아우슈비츠가 절대적 범죄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부정의입니다. 망각이란 나치의 결정적인 승리로 이어질 것입니다. - - -물론 어느 것도 죽은 사람들을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본 법정에서의 만남과 증언 때문에 피고인은 죽은 사람들을 다시금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죽이게 된다면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입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본재판은 기억에 그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유태인으로서 나치수용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엘리 위젤, 그 처절한 경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공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엘리 위젤. 그는 기억이야말로 정의라고 단언하고 있다. 망각은 불의이며 기억은 정의라고 외치는 그는 나치의 범죄를 집단의 기억속에, 그리고 역사의 기억속에 남기는 것으로써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되풀이하고 만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이다.

나치범죄자들이 전쟁이 끝난 뒤 반세기에 이르도록 끝없이 추적당하고 처단당하면서 안전한 휴식처, 피난처를 구하지 못했던 것은 이들을 뒤쫓은 집요한 나치사냥꾼들의 존재, 이들을 뒷받침한 전세계의 양심과 여론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바로 그 범죄에 대한 분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같은 사건의 반복에 대한 우려와 재발방지의 염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수십년 전에 있었던 비극에 대한 인류 공동의 망각에 대한 단호한 거부, 끈질긴 기억의 산물이었다.

이 속에서 나치범죄자가 언제 체포될 지 모르는 상태에서 불안해 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거나 결국 체포당하여 범행지로 압송당해야 했다. 체포의 가능성과 공포 속에서의 불안한 생활, 또는 자신이 저질렀던 범행의 현장에서 그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조롱과 손가락질 속에서의 재판이 바로 나치범죄자들이 전쟁의 종료 후 직면해야 했던 운명이었다.

이것은 바로 정의의 실현이었다. 범죄자로 하여금 죄값을 치르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치범죄의 극악함을 드러내는 일은 물론이고 범죄자는 결코 용서받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준 이러한 과정의 뒤에는 고단한 나치범죄추적자들의 추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나치범죄자들과 이들의 공모자들이 더 이상 어둠 속에 남을 수 없게 되었다. 범죄자들의 손에 희생된 사람들과 그 가족, 나아가 전 세계인들이 정의감을 맛볼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이들의 노고 때문이었다. 정의는 결국 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진실을 인류에게 교훈으로 남겨주었던 것이다.

이제 그 끔찍한 세계대전이 끝난지 반세기를 막 넘어 섰다. 그 반세기 동안에도 지구상의 곳곳에서 전쟁의 포성이 멎지 않았다. 대량의 학살도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전세계에서 지속되고 있는 나치전범의 추적과 처단의 소식은 이러한 학살의 범죄자에게는 경종이 되었으며 인류에게는 전쟁과 학살에 대한 경각심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다. 최근 보스니아에서의 인종말살정책의 책임자들이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설치된 전범재판소에서 기소됨으로써 비인도적 범죄는 전쟁중의 행위라 하더라도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또하나의 선례가 되고 있다. 이제 나치범죄자들의 거의 대부분은 사망하였고 더이상 추적의 필요성도 사라졌다. 그러나 인류의 정의를 향한 투쟁과 추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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