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드무비 > 우리들의 한글나라 - 2007 동아일보 단편소설

2007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우리들의 한글나라’
[동아일보   2007-01-01 03:00:00] 
[동아일보]

유아용 한글 카드다. 콘크리트 칸막이 기둥마다 붙어 있는 네모난 카드는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이다. 엽서 크기만 한 카드 왼쪽에는 굵은 명조체로 ‘가’가 써 있고, 그 옆에는 가위가 그려져 있다. 글자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단어와 연상되는 그림이 짝지어 있는, 유아용 한글 학습 카드가 분명하다. 싱글과 커플만 사는 원룸에 아이가 있을 리 없고 아이가 있다 해도 어둑한 주차장에서 놀게 할 부모는 없다. 까막눈의 노인이 살 만큼 관리비며 주위 상가의 물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투명테이프로 반듯하게 붙여놓은 걸로 보아 누군가 한글 공부를 하나보다. 어둑한 주차장에서 한글을 공부하는 사람은 누굴까? 글자만 보면 솔깃해지는 내게 한글 카드는 묘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가’를 지나고 ‘나’ ‘다’를 지나 ‘라’ ‘마’ 앞에서 후진을 하여 자동차를 주차시킨다.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사이 ‘가’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일정한 간격과 박자, 웅얼거리는 음성,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라본다. 어렴풋한 형체가 색으로 먼저 눈에 띈다. 푸른색 상의와 갈색 하의, 청소원 복장의 여자다. 나는 고개를 뒤로 빼고 운전석에 등을 밀착시킨다. 여자와 나의 거리에는 자동차 일곱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여자는 기둥에 붙여놓은 한글 카드를 느릿느릿 떼어내며 카드에 적혀 있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는다. 여자의 한국어는 어설프다. 하지만 여자의 억양에는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다. 살짝 등을 떼고 여자를 염탐한다. 여자는 큰 소리로 글자를 반복하여 말한 후 카드를 툭 떼어내 한 손에 모아 쥐고 한 번 더 말한다. 여자는 여러 번 크게 소리 내어 ‘마’ 카드에 써 있는 ‘마술’을 읽는다. 마수, 머슬, 마슬을 발음하다 가까스로 ‘마술’이라 말하고는 ‘바람’으로, ‘사과’로, ‘아가’로 이동한다. 여자가 카드를 다 떼어낸 뒤 콘크리트 기둥 뒤로 사라진다. 웅얼거리는 소리도 멀어진다. 운전석에 얼굴을 파묻는다. 얕은 한숨이 새나온다.

“아, 마샤? 그 여자 이름이야. 나이는 한 스물 넷? 미니슈퍼 아줌마한테 들었어. 꽤 친절하고 유능하대. 남의 나라에 와 있어서 그렇지, 자기네 나라에선 선생님이었다나 봐. 왜 그런 경우 많잖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깔보고 함부로 해도 자기네 나라에선 한 자리 했던 치들이 돈 벌러 오는 거잖아. 그런데 넌 주차장에서 그걸 다 지켜본 거야?”

샤워를 끝내고 나온 정연이는 조금 전 주차장에서의 일을 듣자마자 여자를 알은척 한다. 뉴스에서 고용주에게 억울하게 임금 체불을 당하고 핍박받는 이주노동자들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가까운 곳에 있는 그 여자를 봤을 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외려 나는 여자가 불편하다. 까만 피부에 덩그마니 쌍꺼풀 진 큰 눈은 경계심으로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할 때면 의뭉스러워 보였다. 마샤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이름 따위 아무려면 어떤가. 주차장에서 홀로 한글 공부를 하는 걸 보면 의지의 한국인 못지않은 것 같다.

언젠가 광화문에서 까만 피부의 남자가 나를 쫓아온 적이 있다. 버스에서 내리려는 찰나였다. 남자는 함께 서 있던 사람들에게 서툰 한국어로 “여기가 광화문 맞습니까?” 하고 물었다. 남자와 가까이 서 있던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우산을 폈다. 가을비였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남자는 빗물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내게 간절히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우산을 남자 쪽으로 기울였다. 남자가 내 우산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남자는 고맙다는 말 대신 대뜸 시간이 있느냐 물었다.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빗물에 젖은 남자의 까만 피부에선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자 남자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투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는 거래처 사무실로 향했다. 두어 시간 쯤 지났을까. 일을 보고 나오는데 불쑥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가 멈춰 있어 남자는 말끔한 차림새였다. 정확히 두 시간 삼십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앞장서서 남자와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자세히 보니 까만 피부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더듬더듬 한국말로 내 이름을 묻고 직업을 물었다. 나는 고분하게 말해주었다. 남자는 커피를 벌컥 마신 후 내게 영어를 잘 하느냐고 물었다. 간단한 회화 말고는 영어를 못 한다고 했다. 남자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기 위해 각종 한국 방송과 책들을 섭렵했다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나는 빙긋 웃었다. 남자가 갑자기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 왜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한 개 국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며 남자는 애정 어린 충고를 했다. 한국에 와서 라면으로 때우며 살았던 나날을 회상하던 남자는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머뭇거리다 사무실 호출이 와서 일어나야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남자는 일어서려던 나를 제지하며 대뜸 자신이 나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프리토킹, 완벽한 원어민 발음, 전화로 영어 통화 수시 가능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고객을 기다린 남자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싸게, 싸게 해드려요!”

나는 선풍기 앞으로 가 앉아 땀을 식힌다. 주차장에서 송 선배가 거절한 내 폰트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정연이의 컴퓨터를 올려다본다. 정연이는 머리의 물기를 떨어내며 다가와 웹 폰트 작업 중인 컴퓨터를 천천히 꺼버린다.

“전기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미안.”

전기세 때문이 아니라 내가 모방할까 두려워서라는 걸 나는 안다. 말을 삼키듯 선풍기 풍향을 한 단계 높인다. 미니홈피에서 정연이가 단독 개발한 한글은 잘 팔린다. 벌써 두 번째 한글 폰트를 개발 중이다. 내 폰트는 언제쯤 네티즌들에게 공급될까. 아니, 내 폰트는 언제쯤 한반도를 강타하는 폰트가 될까. 정연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선풍기 풍향을 낮춘다. 매몰차게 모니터를 꺼버린 행동을 정당화시키려는 정연이의 지루한 자기변호다.

“마샤가 재활용 창고 운영하는 거 알아? 누구한테 무엇이 필요한 지 알아뒀다가 가져다준대. 덕분에 오피스텔 사장이 구의원 나올 때 도움도 되고 해서 계속 놔둔다나봐. 그래서 매트리스 하나 부탁했어. 번갈아 가며 침대에서 자는 거 좀 불편하지 않니? 미니슈퍼 아줌마한테 슬쩍 운을 떼어 놨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선풍기를 정연이에게 내어주고 땀에 전 티셔츠를 벗는다. 장미꽃 피는 계절인데 날씨는 초여름이다. 앙가슴 사이로 땀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화장대에서 머리 끈을 집어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묶는다. 정연이는 부러 고개를 돌리고 머리의 물기를 떠는 데 집중한다. 내가 옷을 입을 때까지 정연이는 그러고 있을게 분명하다. 2년째 같이 살면서 정연이는 자신의 속살을, 속마음을 쉽게 내비치지 않는다. 우리 우정은 미니슈퍼 아줌마와의 친분보다 못하다. 제 것을 드러내면 내가 움켜쥐기라도 할까봐 정연이는 조심, 또 조심한다. 내가 벌거벗고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정연이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말리다 박제가 될지도 모른다. 동거인을 박제로 만들 수는 없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매트리스가 필요해? 여긴 너무 좁아.”

정연이는 내가 옷을 입었다는 걸 알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얘기한다. 정연이가 폰트 개발에 성공하는 이유는 사방에 눈을 심어두기 때문일지 모른다. 정연이는 안 보는 듯 하면서 다 보고 있다. 그게 정연이의 필살기일까.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저 테이블을 현관 쪽으로 옮기면 돼. 테이블에 잡동사니뿐이잖아.”

정연이는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남은 물기를 떨어낸다.

“그거 얼마나 한다고. 필요하면 우리 생활비에서 하나 사지 그래?”

청바지를 벗어 침대에 던질 뻔 한 팔을 재빨리 거둬내고 바닥에 던져놓는다. 정연이와 내가 함께 산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물과 기름이 합쳐지기도 하느냐고 물었다. 정연이와 나는 함께 출발한 신입사원이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 학원을 수료한데다 집 떠나 살고 있는 동향인이라는 것까지, 닮은 데가 많아 쉽게 친해졌다. 신입사원 시절 윗사람의 횡포를 묵묵히 받아내며 서로를 위로하다 보니 함께 살자는 말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튀어나왔다. 물과 기름이 교묘하게 일치하는 정점, 생활비를 절약하자는 모토가 우릴 한 곳에 몰아넣었다. 동료로서 뿐만 아니라 동거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살면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 살던 사람들이 내놓는 거면 웬만큼 쓸 만 할 거야. 좀 기다려보자고. 이사 가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조만간 매트리스 하나 나올 거야.”

호기로운 정연이의 말 꼬리를 덮치듯 현관 벨이 울린다. 인터폰에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한글 공부를 하던 여자, 마샤다. 마샤의 동공은 사물을 움켜쥐고 있는 듯 팽팽하다. 앙 다문 두터운 입술, 자두알처럼 동그란 얼굴형과 옴폭 파인 턱, 질끈 묶어 올린 머리 아래로 야생초처럼 듬성듬성 흘러내린 잔머리. 마샤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응답을 기다린다. 정연이가 일어나 인터폰 수화기를 든다.

“무슨 일이세요?”

“매트리스, 왔어요.”

“네? 아, 매트리스? 고마워요. 금방 갈게요.”

정연이는 마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팽팽했던 마샤의 풍선이 푹 꺼져버린 느낌이다.

“거봐. 내가 뭐랬니? 금세 하나 생겼잖아.”

정연이는 싱긋 웃어 보이며 컴퓨터 앞에 풀썩 앉는다. 다리를 꼬고 턱을 받친 채로 모니터를 켠다.

“참, 송 선배 만났지? 뭐래? 니 폰트 사겠대?”

정연이는 생각보다 인내심이 많다. 내가 원룸에 들어서던 순간 궁금했을 텐데 지금까지 참은 걸 보면 정연이의 인내심은 칭찬할 만하다. 나는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천천히 뚜껑을 연다. 건조대에 있는 컵을 바라보다가 주스 병째 벌컥 마셔버린다. 내 등에 생채기를 낼 것처럼 정연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동거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정연이는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금세 대답하지 않는 내 침묵으로 미뤄 알고 있다. 때로는, 최소한의 예의를 잊어버릴 때도 있다.

“잘 안 됐구나? 나도 처음엔 그랬어. 송 선배가 오죽 까다로워야 말이지. 그래도 송 선배가 틀린 말 하는 사람은 아니더라고.”

정연이의 폰트 ‘천사체’는 미니홈피에서 베스트 상품이다.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가 활성화되면서 자신의 글에 어울리는 향기처럼 독특한 글씨를 선택하는 사용자가 늘어났다. 몇 년 전 함께 일하던 송 선배가 한글폰트디자인 사무실을 차리면서 좋은 폰트를 사들이고 있었다. 정연이는 회사에서 팀장 역할도 똑 부러지게 해내면서 개인적으로는 송 선배에게 자신의 폰트를 팔고 있다. 먼 훗날 제 이름을 내 건 회사를 차리기 위해 정연이는 여러모로 준비를 하는 중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수석 디자이너로 써먹겠다고 하지만 며칠 전 K기업 로고디자인 프로젝트팀에서 정연이는 내 이름을 빼버렸다.

“조금만 더 고쳤으면 좋겠대.”

마지못해, 자기 위안처럼 정연이에게 말한다.

“어떻게?”

호기심 많은 정연이, 쓸데없는 관심은 싫은 나. 침대에 걸터앉아 내 포트폴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연이는 내 시선을 쫓아 집요하게 묻는다.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괜찮아. 내일부터 생각할래.”

“넌 그게 문제야.”

“뭐가?”

“금방 좌절하는 거. 쉽게 좌절하고 쉽게 절망하는 거 말이야. 그리고, 폰트를 무조건 팔겠다고 생각하면 안 돼. 거기엔 디자이너의 혼과 집념을 쏟아야 돼. 무조건 팔려고 하면 그게 상품이지, 예술작품이니? 그래, 상품인데 예술작품 다운 면모를 갖춰야 팔린다 이 얘기야. 내가 회의 시간마다 누누이 강조하잖아. 디자인이 경쟁력이고, 디자이너가 상품이다. 언더스탠?”

정연이는 입 꼬리를 올리며 회전의자를 돌려 앉는다. 회사에서 내 직속상관인 팀장 정연이는 이젠 집에서도 팀장 행세를 하려든다. 팀장과 동거인의 위치를 망각해버리는 정연이를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걸 구분할 줄 알면 사람이 아니지. 정연이는 팔을 뻗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가지런하게 제자리에 올려놓는다. 책상 밑에 놓아둔 가방에서 안경집을 꺼내 안경을 꺼내 쓴다. 사감선생 같다고 놀려도 정연이는 뿔테 안경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이 더 위악적으로 보이길 바란다. 그것이 자신의 경쟁력이고 상품이라는 듯이. 팀장 정연이는 오늘 바닥에 요를 깔고 자야 한다. 그래서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고 작업을 할 작정인 것 같다. 번갈아가며 싱글 침대에서 자는 방법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정연이는 자신이 바닥에서 자야 하는 날에는 밤새 불빛을 어른거리게 하여 내 잠을 망친다.

얼핏 잠이 들었을까. 뜨거운 샤워가 온몸을 녹지근하게 만들었다. 현관벨 소리에 눈을 뜬다. 정연이가 뿔테 안경을 위로 치켜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연이는 팔짱을 끼고 선 채로 모니터 속의 얼굴을 바라본다. 마샤다. 다시 현관 벨이 울린다. 모니터 속의 마샤는 주위를 둘러보며 원룸의 동정을 살피듯 현관 문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정연이가 낚아채듯 인터폰 수화기를 든다.

“무슨 일이죠?”

정연이는 한참 골몰하고 있던 중이었나 보다. 날 선 목소리가 날아가는 새 깃털이라도 잘라버릴 것만 같다. 모니터 속의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머리를 긁적인다. 어색한 상황일 때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은 온 지구인의 공통점인가.

“매트리스요. 안 가지세요?”

한 겹 철문 밖이라 마샤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린다. 정연이가 한숨을 내쉬며 인터폰이 붙어 있는 벽에 등을 기댄다.

“알았어요. 나중에 갈 테니까 보관 잘 해놓으세요.”

“아, 안돼요. 그냥 두면, 나 없으면, 누가, 가져버려요. 지금, 가져야 돼요.”

마샤의 어설픈 한국어가 툭, 툭 분주하게 튀어나온다. 가위를, 마술을, 사과를 발음하던 음색과는 딴 판이다.

“그럼 그렇게 해요. 하나 사면 되니까 그대로 두세요.”

정연이는 인터폰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는다. 모니터 속의 마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듯 사라진다.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

“안 잤어? 지금 막 중요한 타이밍이었단 말이야. 그깟 매트리스 사면 되지 뭘 그래.”

내가 이불을 조심스레 거둬내고 일어나는 사이 정연이는 오만 상을 찡그리며 책상 앞에 앉는다. 다시 잠들기 어려울 것 같다. 침대 옆에 있는 가방을 끌어당긴다. 담배를 꺼낸다.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연다. 찬 바람이 훅 얼굴을 덮친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

“윤서영. 나 작업하는 거 안 보이니?”

“어, 미안.”

나는 담배를 창밖으로 내던진다.

“야! 불나면 어쩌려고 그래? 담뱃불 끄고 버린 거야?”

“아, 아니….”

“얼른 나가봐. 얼른!”

정연이가 큰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바지와 카디건을 집어준다. 뭔가 내키지 않지만 방화범이 돼버리는 극단적인 상상에 떠밀려 옷을 걸치고 신발을 꿰어 신고 나온다. 엘리베이터가 맨 꼭대기 층에 있어 할 수 없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간다. 5층에서 1층까지 단숨에 뛰어내려와 담배를 던진 화단으로 향한다. 가느다란 흰 연기를 뿜고 있는 담배를 찾아 발로 비벼 끈다. 위를 올려다본다. 정연이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담배를 들어 보인다. 정연이가 말없이 고개를 뒤로 빼고 창문을 닫는다.

발로 비벼 끈 불이 내 가슴으로 옮겨온 것처럼 식은땀이 난다. 허기가 진다. 뭔가 먹고 싶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걸렀다. 카디건 주머니를 뒤진다. 만 원 짜리 한 장이 잡힌다. 어쩐지 당한 느낌이다. 이 카디건은 장 볼 때 입는 ‘마트 전용 카디건’ 이다. 여분의 돈을 넣어둔 것도 정연이의 아이디어였다. 담배를 꺼낸 건 자발적이었지만 당황스러운 깜짝 각본은 떨떠름하다.

테이크아웃 식품을 들고 가는 손들, 아무 곳에도 시선을 주지 않는 마네킹들이 사는 오피스텔 근처, 샐러드 바로 들어간다. 샐러드 바에는 서너 명의 여자아이들이 생과일주스를 홀짝이며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 뉴에이지 피아노 연주곡 속으로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캐스터네츠처럼 부딪쳤다 흩어진다. 단골이라고 결코 알은척을 하지 않는 샐러드 바 주인이 목례를 하고 진열대를 응시하며 조용히 주문을 기다린다. 늦은 저녁이라 메뉴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먼저 토마토 주스를 주문한다. 주인은 발 빠르게 밀폐용기에서 토마토를 꺼내 믹서에 넣고 작동 버튼을 누른다. 믹서 소음이 샐러드 바를 휘젓는다. 주인이 토마토 주스를 내 쪽으로 건네고 진열대 앞으로 와 선다. 아스파라거스와 데친 새우, 양상추를 가리키자 주인은 집게로 적당량을 집는다. 계산을 하고 나서 샐러드 접시와 토마토 주스를 들고 빈 테이블에 앉는다. 열 평 남짓한 샐러드 바, 조금만 집중하면 옆 테이블의 사소한 정보쯤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여자아이들은 진로 문제와 남자친구 이야기를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뜨린다. 흘린 이야기들을 다시 또 주워 담느라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양상추에 새우를 포개 파인애플 소스에 찍어 한 입에 넣는다. 새콤한 소스가 혀에 착착 감겨든다.

샐러드 접시를 거의 다 비웠을 때쯤 샐러드 바 문이 열리는 동시에 후끈한 바람이 먼저 들어온다. 푸른색 상의에 갈색 바지를 입은, 마샤다. 그녀의 옷은 색상뿐만 아니라 신분에 대한 상징이기도 해서 얼굴색과는 상관없이 고단해 보인다. 마샤가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아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여자아이들은 마샤와 닿지 않고 좁은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간다. 마샤가 내 옆을 지난다. 샐러드 바 주인이 유난한 목소리로 여자아이들을 배웅한다. 뒤돌아 마샤를 본다. 마샤는 샐러드 바 앞에서 메뉴를 고르고 있다. 주인은 냉담한 표정으로 마샤를 훑는다.

“이거, 이거, 주세요. 칼로리 없어요?”

마샤가 손가락으로 메뉴를 고른다. 주인은 싸늘한 시선으로 답하며 천천히 접시와 집기를 집어 든다. 외려 마샤는 주인의 표정에도 담담하다. 그런 일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유가 느껴진다.

“우리 샐러드바 메뉴에는 명찰마다 칼로리가 적혀 있습니다.”

주인은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낚시라도 하는 듯 마지못해 메뉴들을 집어 접시에 올려놓는다.

“아, 맞다, 여기, 써 있어요. 고마워요.”

“양상추와 새우 드릴까요?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없습니다.”

마샤는 반듯하게 선 채로 또박또박 말한다.

나는 샐러드 접시를 들고 카운터로 가 반납한다. 주인은 와중에도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깍듯하게 내게 인사한다. 주인이 마샤가 고른 샐러드를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을 가늠한다.

“삼천 팔백 원입니다.”

주인은 마샤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에 빈 주스 잔이 눈에 띈다. 주스 잔을 들고 다시 카운터로 간다. 마샤가 주머니를 뒤적인다. 천 원짜리 석 장을 꺼내 보인다.

“팔백 원, 없어요, 빼주세요.”

마샤는 얼버무리며 말한다.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다.

“미안합니다. 빼주세요.”

마샤가 다소곳하게 한 번 더 말한다. 주인은 신경질적으로 집게를 집는다.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지폐를 만지작거린다. 주인의 행동을 참을 수가 없다. 대놓고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지켜볼 만한 구경거리는 아니다. 주인이 마샤가 고른 샐러드 접시에서 새우 조금, 양상추 조금을 덜어내려 할 때, 나는 주인에게 손을 들고 말한다.

“여기, 천 원 있어요. 거스름돈은 됐어요.”

천 원짜리 한 장을 들어 보인 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뒤돌아 나온다. 오월의 밤에 여름의 전조가 풍긴다. 카디건을 벗어 허리에 두르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아그작, 이 밤을 깨물어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심호흡을 한다.

담배 냄새가 자욱한 피시방에는 축 늘어진 채로 손가락만 움직이는 군상들이 모여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포털 사이트에서 내가 처음으로 커버 디자인한 책 ‘비즈니스 브리지’를 검색한다. 경영학과 수업 듣는데 비즈니스 브리지 요약 좀 해주세요, 비즈니스 브리지 읽고 리포트 써야 하는데 도와주세요…. 책 내용과 관련된 질문 맨 밑에 그해의 베스트 북커버 디자인으로 뽑혔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시상식 사진이라든지 내 신상명세서 등의 정보는 없다. 이 책은 나 혼자 디자인했다. 저자의 얼굴 윤곽과 부리부리한 눈이 돋보이도록 세피아의 농담을 조절해 모노톤 기법으로 그렸다. 활자는 세로로 배치했다. 고딕체와 명조체를 결합하여 특이한 폰트를 그려낸 것도 비즈니스 브리지만의 특징이다. 기존의 폰트가 아니어서 따로 조판과 필름 작업을 거쳐 찍어야 했다. 인쇄공들에게 간식을 사다 나르며 비위를 맞췄고 밤샘 작업을 거듭했다. 구매욕을 북돋우며 지적인 이미지를 갖췄다는 평을 받아 경영학 서적 커버 디자인의 전형이 될 정도였다. 비즈니스 브리지는 한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다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스테디셀러 같은 삶, 내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꾸준히 사랑받는 한 권의 책처럼,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안온함.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정상 체온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환절기에는 감기에 걸렸고 불규칙한 계절의 본성을 버거워했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잘 지낸다는 안부가 새삼 귀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 한 번의 성공을 기억한다. 독특한 폰트라며 한글 서체로 개발하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나는 실패를 생각하지 못했다. 국제표준 폰트인 유니 폰트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동원하여 사용빈도가 높은 한글 2350자의 웹 폰트를 만든다. 홀로 작업해야 글꼴의 분위기와 개성이 고르게 나타난다. 근육통과 관절염은 액세서리처럼 따라붙는다. 외로움과 인내의 싸움이다. 송 선배는 보기 좋게 늘 나를 넘어뜨렸다. 그건 겨우 단 한 번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며 꿈을 깨라고 했다. 명품 넥타이를 바투 조이며 송 선배는 내 폰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영 씨 폰트는 너무 안이해. 폰트야말로 디자이너의 감각적인 마인드를 표현하는 거라고. 자음은 명조의 느낌이 많이 나고 특히 ‘ㅡ’ ‘ㅜ’ 는 가로획이 너무 짧아. 모음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느낌이 나. 다른 자음들과 어울려 있을 때 균형미도 떨어지고. 확 튀어버리니까 다른 글씨체와 섞여 있는 것 같아서 독창성이 없어. 다시 한 번 해봐. 영혼을 넣어보라고, 영혼을.”

송 선배는 매번 똑같은 소리만 반복한다. 그걸 누가 모르나. 영혼을 넣고 디자이너의 마인드를 살린 감각적인 폰트를, 세상에 단 하나뿐인 폰트를 만들고 싶다. 균형미를 갖추되 개성을 담고 있으며 독창적인 이 세상 단 하나의 폰트를, 내가 만들고 싶다. 내 영혼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헤매고 있을 만한 영혼이 내게 있었던가. 아. 이 지독한 패배 의식. 그래도 만약 영혼이 있다면 부디 내 손으로 스며들기를. 스며든 후엔 결코 사라지지 말기를.

피시방에서 나와 한달음에 원룸에 도착한다. 현관 벨을 누른다. 기척이 없다. 열쇠를 갖고 나오지 않아 난감하다. 정연이는 벌써 잠이 든 걸까. 현관 문 틈으로 원룸의 동정을 살핀다.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인터폰 스피커로 정연이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어디 갔다 와?”

“… 피시방.”

“나간 김에 매트리스 좀 갖고 와. 오늘부터 매트리스에서 자도록 하자. 내가 치워놓을 테니까 얼른 다녀와. 응? 부탁한다, 친구야.”

정연이는 일 년에 한두 번쯤 내게 친구라고 부른다. 자기 생일과 내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때. 올해는 그 소리를 다 들었으니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오피스텔 후문을 통과해 재활용 창고로 향한다.

재활용 창고에 드리워진 비닐 발로 불빛이 새나온다. 고요하고 스산하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말한다.

“저기, 계세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빛 옆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커진다. 비닐 발을 들추고 마샤가 나온다.

“무얼 찾으세요?”

“저기, 매트리스 가지러 왔어요.”

“503호? 잠깐만요. 아, 샐러드바!”

뒤돌아서던 마샤가 나를 알아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거스름돈, 여기, 있어요.”

마샤가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내게 내민다. 나는 겸연쩍어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감사합니다.”

마샤는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동전을 주머니 속에 넣는다. 엉거주춤 선 채로 나도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두 사람이 맞절이라도 하는 품새다. 고개를 들자 어색한 웃음이 동시에 새나온다.

나는 마샤를 따라 재활용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스탠드, 테이블, 전기밥통까지 재활용 창고는 잡동사니 천국이다. 벽에는 마른 꽃다발까지 걸려 있어 이국의 카페 같기도 하다. 백열전등 아래 자그마한 탁자 위에 노트와 연필, 한글카드가 널려있다. 주차장에서 보았던 그 한글카드다. 마샤는 창고 구석에 쌓아놓은 폐휴지 더미들을 한 덩어리씩 옮겨놓는다. 마샤의 키만큼 폐휴지들이 쌓인다. 그 뒤에 매트리스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인다.

“이렇게 안 하면, 누가, 가져요.”

마샤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마샤가 매트리스를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나는 마샤를 도와 매트리스 한 귀퉁이를 나눠 잡고 발을 맞춰 옮긴다. 한쪽에 세워놓은 매트리스에 마샤가 마른걸레질을 한다. 나는 뒤돌아서다 쌓아놓은 폐휴지 더미들에 걸려 넘어진다. 동시에 폐휴지 더미들도 쓰러진다.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폐휴지 종이들은 직소퍼즐 조각처럼 흩어져버린 후다. 마샤는 개의치 않고 매트리스를 정리한 후에 폐휴지 더미들을 정리한다.

“미안해요.”

마샤는 너그러운 미소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폐휴지 더미를 모은다.

“같이해요.”

나는 마샤처럼 쭈그리고 앉아 흩어진 폐휴지들을 모은다. 폐휴지들은 연극 포스터, 의류 대 방출 바겐세일, 신장개업 북경반점 등 크기가 다른 광고지 일색이다. 무조건 눈에 띄도록 디자인은 무시하고 커다란 글씨로 써 있어 공해처럼 여겼었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모아놓고 있었다는 느낌 때문일까. 구겨지거나 발밑에 깔려 누추하게 삶을 마감해버리는 폐휴지들과 달리 서로의 등을 껴안고 있었을 폐휴지들은 마니아의 소장품처럼 귀중해 보인다.

“이걸 모은 거예요?”

“…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한글, 공부해요. 재밌어요.”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2년, 됐어요.”

마샤가 검지와 중지를 세우고 말한다. 승리를 기원하는 표시 같아 괜스레 웃음이 난다.

“이사 가고, 오면 재활용 많이 버려요. 좋은 거 없어져요. 금방 없어요. 아까 909호, 이사 갔어요. 안 쓴대요, 버렸어요.”

“고마워요. 덕분에 잘 쓸게요. … 꽤 늦었는데, 집에 안 가요?”

“여기, 지하에, 내 방, 있어요. 잠깐, 방 구할 때까지만, 살아요.”

마샤는 얼추 폐휴지 더미들을 정리하여 네 개의 덩어리로 분류한다. 덩어리들을 들고 한쪽으로 갖다 놓는다. 바닥에 초등학생 노트와 철제 필통이 눈에 띈다. 노트 겉장에는 마샤의 이름이 비뚜름히 써 있다. 마샤가 다가와 머리를 긁적인다. 어색하고 쑥스러울 때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은 마샤의 성격인 듯하다. 나는 마샤의 손에 노트를 건네준다.

“아, 미안해요. 글자만 보면 습관적으로 쳐다보게 돼요.”

마샤가 두 손으로 노트를 들고 내게 내민다.

“한글, 가르쳐주세요. 배우고, 싶어요.”

뜻밖의 부탁이라 나는 조금 당황스럽다. 지하주차장에서 마샤는 홀로 한글을 깨쳤다. 한글 카드를 보고 배울 정도라면 내가 가르쳐 줄 단계는 지난 게 아닐까. 어설프지만 제 의견을 말하는 것만 봐도 마샤의 한국어 능력은 상당하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게 끝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더 배우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해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듯 마샤는 입술을 오므리고 지그시 웃는다. 한국에 돈 벌러 왔으니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배우느냐는 내 질문은 어리석었을지도 모른다. 마샤의 한글 노트를 펼쳐 유심히 살펴본다. 모음과 자음이 가지런하지 않고 제각각 놓여있는 글씨부터 모음 자음을 바짝 붙여 쓴 글씨까지, 삐침이 있는 명조도 둔탁한 고딕도 아닌 마샤만의 글씨다. 길쭉한 자음과 작은 알갱이처럼 붙어있는 모음은 그 하나만으로도 독특한 분위기가 난다. 한글로 메워진 노트를 멀리 놓고 보니 한 폭의 그림 같다. 머릿속으로 마샤의 글씨를 그린다. 각 진 모음의 글꼴에 명조의 삐침을 넣어 자음을 만든 내 폰트의 이름은 ‘서영체’다. 오랫동안 군림해온 두 개의 폰트를 합친 이유는 익숙한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명조의 삐침을 여리게 하고 고딕의 딱딱함을 부드럽게 공 굴려도 여전히 두 개의 서체는 너무나 달라 조합될 수 없었다. 조금 모양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오랜 세월의 무게를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이름을 그려주세요, 써주세요. 예쁜 글씨, 쓰고 싶어요. 한글, 이뻐요. 그림, 같아요. 한국말 잘하면 다른 사람, 될 것 같아요. 나는 내 나라 사랑하지만 한국도, 사랑해요.”

마샤가 노트를 내민다. 노트를 받으며 마샤의 푸른 상의를 들여다본다. 늦은 밤까지 제복을 입고 있는 마샤. 물음표를 남발하는 것 같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

“제복 입고 있으면, 제복이 유니폼이에요, 알죠? 제복 입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요?”

“편해요. 이거 입어야 사람들, 내가, 누군지 알아요. 괜찮아요. 난 좋아요. 지금은 오피스텔 청소하지만, 난 달라질 거예요. 다른 사람, 될 거에요.”

“왜, 이름이 마샤예요? 좀 특이해서요. 마샤의 나라에서 보통 쓰는 이름이 아니잖아요?”

“우리 아버지, 선생님이에요, 러시아, 이야기 좋아해요, 많이 읽었어요, 마샤는, 모스크바에 가면, 다를 거라고 믿는, 여자 이름이에요, 아버지 나한테, 그랬어요. 나처럼, 살지 마, 안 돼, 더, 좋은 세상, 가, 그랬어요.”

마샤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더 좋은 세상에 와 있을지도 모를 마샤는 울면 더 약해진다는 금기사항이라도 새긴 것처럼 금세 눈물을 닦고 방긋 웃는다. 노트를 빤히 보며 자신의 이름이 쓰이기를 기다린다. 나는 푸른색 상의에 흘림체로 수놓은 마샤의 이름을 노트에 쓴다. 아니, 마샤의 말대로 마샤의 이름을 그린다. 쓰는 게 아니라 그린다, 이다. 마샤의 미음(ㅁ)은 아득한 평원에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울타리 같다. 시옷(ㅅ)은 한자의 ‘사람 인’ 자 같기도 하고 자음의 ‘ㅑ’ 와 만나 보드라운 느낌도 든다. 마샤는 내게서 노트를 받아 주의 깊게 본 후 내 글씨와 비슷하게 자신의 이름을 그린다.

마샤가 한글을 쓴다. 마샤의 글씨는 명조체도, 고딕체도 아닌 이 세상, 단 하나의 글씨처럼 보인다. 연필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고 마샤는 자신의 이름에 들어 있는 모음과 자음을 천천히 써내려간다. 마샤의 미음(ㅁ)은 어디에나 내걸어도 좋을 창이다. 시옷(ㅅ)은 평원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의 걸음 같고 자음의 ‘ㅑ’와 만나 씩씩한 느낌이 난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처음 한글을 배웠던 시절, 나는 다섯 살이었다. 또래아이들보다 일찍 한글을 떼었고 내가 쓴 글씨는 모든 아이들이 흉내내고 싶어 할 만큼 예뻤다. 새로운 글씨체들을 마구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내 글씨를 모방했다. 그러나 간혹은 아이들의 외면을 받은 글씨들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찬사를 받지 못한 글씨를 원망하며 망설임 없이 휴지통에 버렸다.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누군가 그랬다.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고. 그러므로 나는 이길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마샤에게 주문한다.

“잘했어요. 다시 써 봐요.”

마샤는 연필을 다시 모아 쥔다.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고 중지로 연필을 받친다. 두 글자를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마샤의 눈빛은 진지하고 섬세하다. 마샤에게 한글은 더 좋은 세상의 창이 되고 있는 걸까.

제 이름을 써놓고 마샤는 무릎걸음으로 폐휴지 더미로 다가간다. 종이 한 장을 꺼내와 내 앞에 내민다.

“여기, 이 글씨처럼 써주세요.”

마샤가 내민 두툼한 아트지는 어떤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다. 독특한 서체로 디자인한 숫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것이 마감일이 멀지 않은 폰트디자인 공모 포스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글씨, 너무 예뻐요, 그림, 같아요. 똑같이 안 돼요, 될 것 같아요. 아, 될 거예요.”

콘테스트 제호를 아라베스크 문양과 결합시키고 보라색으로 농담을 조절한 ‘폰트디자인콘테스트’는 글자 하나하나 독립돼 있고 어울려 있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다른 글자들과의 어울림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나는 머리에 둔기를 맞은 것처럼 새로운 창을 발견한 느낌이다. 언젠가 내 글씨와 똑같이 쓸 거라는 확신에 찬 마샤의 말이 주문처럼 들린다. 마샤가 정성들여 글씨를 쓴다. 한글을 그림이라 생각한 마샤, 울타리를 치지 않고 창을 만든 마샤의 눈썰미는 아름답다. <끝>

이은조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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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한국사회의 현단계

'사회적 독서'를 위한 점검으로 일단 한국사회의 현단계를 짚어보는 두 칼럼을 읽어둔다. 하나는 정치학자가 진단하는, 한국사회 20-30대의 급격한 보수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학자가 꼬집는바 좌파연하는 사회적 엘리트층의 생활우파화 경향이다. 나는 이게 2007년을 맞는 우리 사회의 '액면'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얼마만큼 변화할 수 있을까? 이달에 새로 바뀐다는 천원권, 만원권 지폐의 도안만큼이나 변화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액면'은 언제나 그대로 보존되는 것일까?

한국일보(07. 01. 01) 젊은 보수

새해가 밝았다. 지겨운 한 해가 끝난 것이 다행이면서도 정치권이 대선을 앞두고 얼마나 이전투구를 벌일지,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새해에는 무엇으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지금 현재 워낙 인기가 없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뒤 노 정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대적으로 좋아질 것이다. 노 대통령이 최소한 3김 식의 제왕적 대통령제와 사당정치를 해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도하지 않은 성과도 있다. 그것은 국민통합을 이룬 것이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대부분 “연초부터 무슨 헛소리냐”고 분노할 것이다. 현 정부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가 전투적 언행으로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국민분열을 가속화시킨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노 정부가 엉뚱한 방식이긴 하지만 국민통합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국민들이 반(反)노무현으로, 그리고 그 결과 한나라당 지지로 뭉치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특히 지역대립에 이어 새로운 사회적 갈등으로 부상하던 세대갈등을 깔끔하게 해소시켜줬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 사회는 노 대통령을 지지하는 20~30대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50대 이상이 부딪쳤다. 그리고 노 대통령은 젊은 표 덕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이후 탄핵 사태도 이들의 절대적인 지지 덕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재보궐선거와 관련해 한국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은 취약층이었던 20대에서 49.5%의 지지율을 기록했고 특히 최취약층이었던 대학생들에서 54.5%라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는 한나라당의 평균지지율 47.9%보다도 높은 것이다. 한마디로, 노무현 정부 덕분에 심각한 세대갈등이 해소되고 젊은이든 노인이든 모두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세대통합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노무현 정부가 젊은이들까지도 정치적으로 보수적 생각을 갖는 ‘??은 보수’의 시대를 활짝 열어준 것이다. 대학생의 54.5%의 지지를 받는 한나라당이라,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다.

지난 대선 당시의 여론조사를 보면 이들 20~30대가 50~60대와 다른 것은 북한과 미국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서였다. 이들은 친북적인 주사파나 반미운동세력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북한과 비교할 수 없는 경제력에 기초한 자신감에서 대북 포용정책을 지지했고 미국에 대해서도 할 말을 해야 한다는 자주노선을 지지했다. 한마디로, 탈냉전적 사고를 가진 것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이 핵심정체성인 냉전주의를 벗어나지 않는 한 20~30대의 지지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구체적으로, 한나라당이 변하지 않는 한, 잇따른 재보궐선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국적 선거이고 상대적으로 투표율이 높은 대통령선거의 경우 인구분포 면에서 가장 비중이 큰 20~30대의 지지를 얻지 못해 또 다시 패배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냉전주의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30대가 한나라당지지로 돌아섰으니 이변 중의 이변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이라는 포괄적인 답을 넘어서 20~30대가 한나라당 지지로 돌아선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한 청년실업과 폭등한 집값에 따른 절망감 등을 추측해볼 따름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탈냉전적 사고를 가지고 있고 한나라당과 상극인 20~30대를 한나라당 지지로 만들어낸 것을 보면 역시 노 대통령이 재주 하나는 비상하다는 감탄이다. 낡은 냉전주의의 망령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 덕에 한국에도 ‘젊은 보수’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것인가?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 놓고 지난 연말 갑자기 내놓은 병역 복무기간 단축이라는 깜짝 카드로 돌아선 젊은이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손호철의 정치논평)

한국일보(06. 12. 20) 사상-생활 분리주의

탁석산씨의 <대한민국 50대의 힘>이라는 책을 읽었다. 가장 눈길이 가는 대목은 '사상과 생활의 네 가지 조합'이었다. 그는 사람의 사상과 생활을 좌ㆍ우파로 분류해 ①사상 우파-생활 우파 ②사상 우파-생활 좌파 ③사상 좌파-생활 우파 ④사상 좌파-생활 좌파 등 네 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②유형이 가장 바람직하고 ③유형이 최악이라는 탁씨의 주장엔 논란의 소지가 있겠지만, 이제 '사상'만 말하지 말고 '생활'과 '인격'에 대해서도 말할 때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문제 제기는 소중하다 하겠다.

● '사상 좌파, 생활 우파' 엘리트의 문제

한국의 엘리트 계급을 놓고 말한다면, 가장 흔한 게 ①, ③ 유형이다. 사상에 관계없이 대부분 생활은 우파라는 것이다. 사상ㆍ생활 분리주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거니와 여전히 그 장점도 있기 때문에 ③유형이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긴 어렵다. 문제는 ③유형이 너무 많다는 데에 있다. 좌우 개념을 세력균형 중심의 상대적 관점에서 보아 개혁파까지 '사상 좌파'로 간주한다면 말이다. 그로 인한 문제는 대략 네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 사회적 의제 설정의 왜곡이다. 개혁 의제를 민생과 동떨어진 의제 중심으로 가져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생활 중심 의제에선 자신들이 '사상 우파'를 압도할 수 있는 차별성을 보여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 우파'인지라 서민 중심 의제의 절박성을 감지하기 어려운 탓도 있을 게다.

둘째, 출세를 위한 사상의 도구적 이용이다. 사상이 생활과 분리된 채 출세주의의 도구가 되면 '사상 좌파' 권력에 대한 충성 경쟁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경쟁에선 생활이 우파일수록 강경파 노릇을 하는 법이다. 이는 권력의 자기성찰과 자기교정 기능을 박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셋째, 불신 초래와 민심 이반이다. 민심은 처음에는 '사상 좌파'가 '생활 우파'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 탈법ㆍ부도덕의 혐의가 짙은 '생활 극우파'의 모습이 드러나는 일이 빈발할 경우 등을 돌릴 뿐만 아니라 기만을 당했다고 분노하게 된다.

넷째, '생활 좌파'의 득세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생활 우파'는 사상에 관계없이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생활 좌파'보다 높은 경쟁력을 자랑한다. 또 언론은 '사상'만 보도할 뿐 '생활'은 다루지 않기 때문에 일반 대중은 '생활 좌파'의 진정성을 접하거나 그 가치를 평가하기 어렵다.

이런 네 가지 문제를 이젠 본격적으로 거론할 때가 된 것 같다. 김대중ㆍ노무현 정권이 국민에게 안겨준 가장 큰 실망은 '사상ㆍ생활 분리주의'와 그에 따른 부작용이라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좌파쪽 입장에선 생활은 우파인데도 사상은 좌파인 사람들이 힘을 보태준다고 해서 고맙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득세로 인한 기회비용의 문제를 이젠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겠다.

● DJㆍ노 정권이 준 가장 큰 실망

고액 연봉을 받는 고위 공직자나 전문직 종사자라고 해서 곧장 '생활 우파'라고 할 수는 없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사상 좌파'이면서도 소득 상위 20% 계층의 연간 가구소득(7,280만원)보다 더 많이 재산을 불려놓고선 자신을 '청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놓고선 가만 있으면 모르겠는데, 한국엔 기부 문화가 없어서 큰 일이라고 개탄하기까지 한다. 아마도 부정한 돈 한푼 안 받으면 '생활 좌파'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한국에서 사상ㆍ생활 분리주의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데다 그럴 만한 역사적ㆍ구조적 조건이 있기 때문에 쉽게 극복되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분리주의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더 탄탄한 이론적 배경을 자랑한다고 볼 수도 있다. 사상ㆍ생활 분리주의의 폐해를 더 겪어봐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07. 01. 01.

 

 


 

P.S. 한국사회의 현단계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읽어볼 만한 책은 손호철의 <해방 60년의 한국정치>(이매진, 2006)와 강준만의 <한국생활문화사전>(인물과사상사, 2006)이다. 서구의 이론과는 다른(짝퉁!) '한국적' 정치사와 생활문화사에 대해서 한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다.  

P.S.2. 겸사겸사 한겨레에 실린 박명림-김명인 교수의 대담도 옮겨놓는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더불어, 박명림 등의 <해방전후사의 인식6>(한길사, 2006)과 김명인의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6)를 참고할 만한 책으로 추가해야겠다.

한겨레(07. 01. 01) 6월항쟁 20돌 ‘시대정신’을 찾는다

박명림-김명인 교수 대담

2007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새해를 맞는 국민의 마음은 밝지만은 않다. 1987년 6월항쟁 이래 더디지만 꾸준히 진척돼온 한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기로에 봉착했다. 노무현 정부와 민주주의 세력의 지리멸렬과 좌충우돌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믿음에 상처를 입혔다. 희망보다는 불안이 큰 시기다. 그러나 전망이 어둡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더구나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다. 어떤 사람을 다음 5년 대한민국호 선장으로 뽑느냐, 어떤 세력에게 나라의 미래를 맡기느냐에 온 국민의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다. 눈앞의 안개를 걷어내고 길을 여는 시대정신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견 학자로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김명인 인하대 교수와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모처럼 맞주앉아 오늘 한국사회에 절실한 시대정신을 찾는 일에 지혜를 모았다. 대담은 지난 25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렸고, 사회는 한승동 문화부문 책·지성 팀장이 맡았다.

사회= 2007년은 특별한 해다.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지만, 6월항쟁 20돌이 되는 해라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20년이면 한국 민주주의가 풍성한 수확을 얻을 만한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우리 민주주의의 현재를 냉정히 진단해볼 필요가 있겠다.

박명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부터 짚어보고 싶다. 2007년은 6월항쟁 20돌이기도 하지만, 김대중 정부 이래 민주정부가 지속된 지 10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10년 동안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현실 사이의 괴리 문제가 불거졌다. 둘째, 민주주의 실천의 내용이 문제로 떠올랐다. 다시 말해,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높이느냐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됐다. 셋째, 한·미 에프티에이(FTA)와 북핵문제를 포함한 국제적인 현안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문제가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 10년, 6월항쟁 20년을 맞은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무현 정권 사회통합 의제 손놔

김명인= 대통령 선거를 생각해보면, ‘노무현 이후’ 한국사회를 어떻게 이끌 것이냐는 게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문제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딱히 답할 만한 것이 없다.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떠안고 가야 할 과제로서의 ‘공안’(公案)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김영삼 정권 이래 공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세계화’밖에 없었다. 하다 못해 박정희 정권 때는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라도 있었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 오늘 이 자리가 그런 공안을 찾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 노무현 정부의 지난 4년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정부는 결국 실패한 것인가.

=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사회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불안과 희망 없음이 우리 사회의 주조가 됐다. 노무현 정권 이후 불안이 더 확산됐다. 박탈감, 절망감이 더 번졌다. 민주 정권이 2기에 들어섰는데, 민주주의가 정착하기는커녕 오히려 삶의 활력을 빼앗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심리적 안정감이 위태로울 정도로 흔들리고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형국이다. 악마적 시장경쟁이 사람들을 완벽하게 포박해 실존적 궁지로 몰아넣었다. 국가는 그런 상황을 방치했다. 사회를 통합할 어떤 의제도 제시하지 못한 채 손놓고 있다. 노 정권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그만큼 큰 것 같다.

=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정부라고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성공적이지 못한 건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는 민주주의의 한국적 모델을 정립하지 못했다. 국가경영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준비도 연구도 부족했다. 과거 반독재 투쟁의 열정에 비해 민주주의적 대안을 찾는 지혜는 현저히 부족했다. 그 결과 개인이 시장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삶의 집합적 안정성이 흔들렸다. 민주주의가 실현될수록 삶이 예측 가능한 것이 돼야 하는데 오리혀 그 예측 가능성이 크게 파괴됐다. 이 점에 관해서는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로 책임을 다 돌려서는 안 되고, 한국사회 진보세력 전체가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엄정한 반성이 필요하다.

사회= 과거와 비교해 삶의 안정성, 예측 가능성이 줄었다고 했는데, 외환위기 사태와 무한경쟁으로 내몬 신자유주의 물결이라는 불가피한 흐름에 떠밀린 탓도 있지 않을까.

= 신자유주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면을 강조하고 싶다. 6월항쟁 이후 민주화를 이뤘다고 하지만, 소극적 차원에 머물렀고 적극적인 내용을 창출하지 못했다. 우리가 상상한 민주화는 구성원의 자발적 합의에 기초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고 사회 공동체가 자기 운명의 결정권을 갖게 되는 것이었는데, 신자유주의가 들이치면서 과거보다 더 강력한 구속상태로 떨어졌고 공동체적 자기 결정권은 더 약해지고 형해화했다. 개인의 자유, 의지, 희망을 보호해주는 장치가 사라져버리고 외적 강제에 내맡겨진 상황이 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타율성을 강화하는 역설이 빚어졌다.

사회=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시민의 실패, 국민의 실패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국민 몫으로 돌릴 잘못은 없는가.

=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라는 두 가치의 결합이다. 자유주의는 경쟁을 보장하는 것인 반면에, 공화주의는 박애와 연대와 평등으로 자유의 빈 곳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급경한 좌우 이념논쟁에 휘말리면서 자유주의 원칙만 남고 공화주의 원칙은 실종되고 말았다. 경쟁의 원칙에 연대의 원칙이 짝으로 서야 하는데, 연대의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여기에 위기의 원인이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의 문제임과 동시에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실천은 훨씬 정교한 디자인과 비전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 제도만 성립시키면 된다고 자만하다보니,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았다. 실패는 실천의 영역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국민은 그걸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의 실패라고 생각한다.

= 노무현 정권 실패는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 자체의 실패라고 보아야 한다. 진보개혁 세력이 정권에 무책임하게 자유를 의탁했고 수수방관했던 측면이 있다. 민주 정부는 민주주의의 조건을 확보한 것일 뿐인데, 그 내용을 채우는 일에 진보개혁 세력이 방관했다.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신자유주의 개혁이 훨씬 더 급격하게 진행됐는데, 거기에 편승하는 게 마치 민주화의 성과를 다지는 일인양 생각했다. 김대중 정부 때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견제장치라도 있었는데, 노무현 정부는 그런 장치마저 포기했다.

유럽, 우파가 집권해도 ‘사회국가’ 유지

사회=‘국가의 역할’이라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인 듯하다.

= 신자유주의에 따른 문제는 정부의 실패이자 시장의 실패다.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건 정부밖에 없는데, 정부가 그 몫을 다하지 못했다. 유럽의 상황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유럽에서는 우파가 집권하더라도 헌법에 명문화된 ‘사회국가’ 원리는 그대로 유지된다. 시장의 실패나 정부의 실패를 보완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사회국가’ 모델을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권위주의 국가 모델 아니면 시장국가 모델 두 가지밖에 없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내몰린 사람들은 누가 보호할 것인가?

사회=민주주의 문제에 대해 좀더 논의해보자.

= 민주주의는 시간이나 비용 측면에서 싸지 않다는 걸 생각해야 한다. ‘386세대’의 반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386세대가 너무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과학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측면이 있다. 일종의 오만이다. 사회과학적 차원이 아니라 인간을 목적으로 보는 인문적이고 사회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경쟁과 연대가 공존하는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 나는 70년대에 학생운동을 한 사람인데, 그 시절엔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마틴 부버의 <나와 너>, 라인홀트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등을 먼저 읽었다. 내면적인 가치를 중시했다고 할 수 있는데, 386세대는 사회공학적 측면이 훨씬 더 강한 것 같다.

386세대 정치적 실패 겪은적 없어 성찰 부족

= 70년대와 80년대 학생운동의 독서행태를 조사해본 적 있는데, 정말 달랐다. 70년대 세대는 인문적 상상력을 소중히 여겼고, 소설을 많이 읽었다. 80년대엔 강령이나 지침으로서의 독서가 주종을 이뤘다. 게다가 이 세대는 정치적 실패를 겪어본 적이 없다.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민주정부를 성립시켰고, 또 386이 정권을 장악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정권 집행세력이 전혀 실패의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성찰의 시간이 없었다. 이들이 주도한 한국 민주주의는 탈지성화, 탈인문화와 같이 갔다. 인문적 지성 없이는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경제’를 만들어낼 수 없다.

= 지식 담론이 김대중 정부 때 좀 나왔다가 ‘신지식인’으로 변질돼버렸다. ‘인문학적 지식’을 사회적 의제에서 빼버렸다. 특히 대학이 그 대열에 앞장섰다. 그러다 보니 낭만적 상상력,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고갈돼 버렸다. 속도·경쟁·양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고방식에 일대 전환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이런 인문학적 상상력이 복원돼야 한다.

사회= 이야기를 정치 쪽으로 돌려보자.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민주노동당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 87년 이후 ‘시민담론’과 ‘민중담론’이 분리됐는데, 그래서는 보수세력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분열돼서는 개혁을 집행할 힘이 생기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노동자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이 연대해 ‘노동-자유연합’을 만들고 그 힘으로 현재의 사회국가를 이루었다. 우리는 작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진영이 분화돼버렸다. 민주주의는 타협·대화·소통을 요구한다. 시간과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드는 제도다. 노무현 정부는 그런 문제에 대처하지 못했다. 민주세력의 분열이 희망의 소멸에 큰 책임이 있다.

= 그러다 보니 보수기득권층한테 헤게모니를 빼앗겨버렸다. 관료조직에 대한 어떤 통제도 하지 못했다. 보수적 지배구조가 민주적 절차라는 방식으로 옷만 갈아입은 꼴이 되고 말았다. 집권한 민주세력은 그걸 성공이라고 오인했다. 민중적 가치를 민주적 가치와 분리한 뒤 민중적 가치를 다 내버렸고, 그걸 내버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했다.

사회=그렇다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어떻게 이뤄야 하나.

= 민주주의 사회는 구성원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그런 확신이 넓게 공유돼야 한다. 기층민중과 소수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려면 이제껏 실종된 민중적 상상력이 다시 작동해야 하며, 새로운 변혁 역량을 찾아야 한다.

비정규직 양산은 연대와 배려 없는 집단광기

=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한마디로 말하면 ‘경쟁사회에서 연대사회로’ 가는 것이다. 지나친 경쟁으로 영혼이 부박해졌고 삶이 강퍅해졌고 핏발선 사회가 됐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목표가 아니고 과정이며 수단이다. ‘좋은 삶’이라는 집합적 가치를 이루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 최근 우리은행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했다. 이건 자본에게 여력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비정규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식의 얘기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일 뿐이지, 자본주의적 합리화와는 별 관련이 없다. 연대와 배려를 부인하게 만드는 집단적 광기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정신을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자.

= ‘경쟁에서 연대로’를 다시 강조하고 싶다. 사회적 영혼을 돌보고 사회의 인간화를 이끄는 것은 연대밖에 없다. 또하나 이야기한다면, ‘격물치지’의 가치를 들 수 있겠다. 우리 사회의 역할에 합당한 품격이 사라져버렸다. 대통령의 대통령다움이 없고, 언론의 언론다움이 없고, 지식인의 지식인다움이 없다. 말하자면 품격이 없다. ‘다움’이 없다보니 배려도 관용도 따뜻함도 없다. 이 가운데 지식인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좋은 시민을 길러내는 데 지식인의 역할이 크다.

=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정신으로 ‘성찰적 행동주의’를 제시할 수 있겠다. 한 사회 전체가 성숙하려면 성찰과 배려가 행동 속에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가치를 사회 속에 실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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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한국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

새해 첫 신문에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일제히 발표되는 건 한국사회/언론의 관행이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근래에 '웰메이드' 작품들이 양상되면서 신춘문예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내가 근심하는 건 당선자들의 평균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다간 문학 또한 '실버산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문제의식과 맞물려 신년 벽두부터 '센' 구호가 등장했다. '한국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 '변화'가 아니라 '진화'이다. 그건 두 가지를 전제한다. (1)'단편'보다 '장편'이 진화한 양식이다. (2)그러한 진화의 과정은 좀 시간이 걸린다. 사안의 견적상 그러한 '진화'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건 다 아는 일이다. 필자도 지적하고 있는 바대로, 단편 중심의 등단제도와 문예지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국 문단의 '체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계 사람들 대부분 인정하는 건 단편보다 장편이 '돈'이 된다는 사실이다. 고액의 상금이 걸려 있는 문학상들이 대부분 장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장편의 일정한 '질'을 담보할 (제도적?) 방책이 불비하다는 것, 혹은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 문학의 위기 국면에 대해서는 공감하는 의견이 적지 않으므로 모종의 윈-윈 전략이 마련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한겨레(07. 01. 01) 한국 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

새해 첫날 아침이다. 저마다 희망과 포부를 한껏 부풀리고 있을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들은 누구일까? 여러 사람이 있겠지만, 문학 담당 기자의 직업의식을 조금 발휘해 답해 보고 싶다.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어떨까? 그들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 세상 전부를 얻은 것 같은 행복감을 맛보고 있지 않을까.

새해 첫날 아침을 신춘문예라는 문학적 축제와 더불어 맞이하는 일은 분명 축복이다. 문학의 위기가 공공연히 운위되는 가운데서도 신춘문예를 비롯한 문예 공모의 출품작들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은 고무적이다. 문학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응모자들의 열기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신춘문예에도 그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춘문예 제도의 제정 취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는 여러 비판적 견해들이 제출되어 있다. 당선 작품들의 천편일률성, 소수 심사위원들의 독점적 ‘심사권’ 행사, 패기와 실험성이 결여된 ‘웰 메이드’ 계열 작품들의 난무 등….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조금 다른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거의 모든 신춘문예에서 소설 부문은 단편으로 제한해서 모집하고 있다. 드물게 중편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편이 신춘문예에 포함된 사례는 전무하다. 물론 장편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 공모가 없지 않고 갈수록 느는 추세이기는 하다. 그러나 소설가를 꿈꾸는 이들은 등단의 관문을 뚫기 위해 우선 신춘문예가 요구하는 단편 습작에 매진하기 마련이다.

등단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지면은 대체로 문학잡지들이다. 이때도 잡지들이 청탁하는 작품은 대개가 단편들이고 약간의 중편이 포함된다. 문학잡지에 장편소설이 실리는 것은 다소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다음 단계는 각종 문학상이다. 우리나라 유수의 문학상들은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단편소설에 쏠려 있다. 일본의 아쿠타가와상 정도를 제한다면, 외국의 소설 부문 문학상들은 대체로 장편을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쪽 사정은 오히려 장편소설을 대상으로 삼은 문학상이 예외로 취급되는 현실이다.

등단에서 잡지를 통한 작품 발표, 그리고 각종 문학상 수상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 우리의 소설 장르가 단편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히 작가들 역시 습작 무렵부터 단편을 써 버릇하고, 등단 이후에도 잡지 발표와 문학상을 염두에 두고 단편을 쓰는 데에 진력하게끔 되어 있다. 장편은 단편에 비해 소홀히 취급되기 마련이다.

물론 단편은 장편을 쓰기 위한 훈련으로서도 의미가 없지 않다. 대개의 작가들이 등단 초기에는 단편에 주력하다가 점차 필력이 붙으면서 자연스럽게 장편 쪽으로 옮아 가곤 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 작가들은 과도하리만치 단편에 매달리는 것이 사실이다. 장편에 쏟아야 할 에너지를 단편에 ‘낭비’한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단편을 쓸 때 작가들은 단어 하나와 문장 한 줄에도 최선을 다해 완성도를 높이고자 한다. 상대적으로 장편을 쓸 때는 전체적인 틀에 신경을 쓰면서 독자와의 소통에 더 무게를 둔다. 미학적 완성도라는 기준을 들이대면 장편에 비해 단편소설 쪽이 높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따라서 단편은 '소설'보다는 '시'에 더 근접한다. 소설다운 소설'보다는 '시적인 소설'이 더 득세하는 것이 우리의 문학현실이다).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단편문학의 전통이 있다. 이효석, 김유정, 이태준에서 김승옥과 오정희를 거쳐 내려오는 미학주의의 전통이다(*물론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장편문학의 전통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독자들은 단편에 비해 장편을 선호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즈음의 출판사들이 단편을 묶어 책으로 낼 때 ‘소설집’이라는 표기 대신 그저 ‘소설’이라는 모호한 표기를 앞세우는 까닭은 단편(집)에 대한 독자들의 냉담한 반응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독자들은 장편소설을 원한다

우리 소설을 외국에 소개할 때에도 단편은 장편에 비해 꽤 불리하다.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해 보아도 우리 독자들이 외국의 단편집보다는 장편소설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 소설이 외국어로 번역 출간될 때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오르한 파무크의 주요 작품들을 비롯해 오에 겐자부로, 엘프리데 옐리네크, 귄터 그라스 등 대부분의 역대 수상 작가들은 장편 작가들이었다(*국제시장에 대한 감각이 탁월한 작가 김영하가 장편에 매진하는 이유이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말할 차례다. 간단하다면 간단하다. 한국 소설의 체질을 단편에서 장편 중심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 작가들 자신과 문학잡지 및 출판사들, 그리고 평론가와 독자들이 두루 합의하고 노력해야 한다. 우선 이 아침,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행운을 거머쥔 주인공들에게 당부드리고 싶다. 단편보다는 장편에 주력해서 침체에 빠진 한국 소설의 활로를 열어 주시라!(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1. 01.

 

 

 

 

P.S. 몇 권 꼽아본 작품들이 지난해 장편으로 문학상을 수상하거나 문학상에 당선된 작품들이다. '장편'으로의 진화를 가늠해보는 척도가 됨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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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사회적 독서'를 시작해보자

신년이긴 하나 휴일의 하루인지라 느지막이 일어났다(돼지해이니까 돼지꿈이라고 꿔줘야 했을 텐데, 설날을 기약하는 수밖에). 아침신문들을 읽다가 눈에 뜨인 기사는 '책읽기 365'를 제안하는 도정일 교수의 칼럼이었다. 365이니까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끈을 바짝 조이는 의미가 있겠다. 그간에 독서문화운동이나 독서캠페인 등을 많이 있어 왔지만, '사회적 독서'를 기치로 내건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 독서'의 짝이 될 이 말의 효용에 대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나의 방점은 '해보자'에 찍힌다. 뭐라도 해보기로 결심하는 게 또한 시년을 맞는 의례이기도 하므로 '사회적 독서를 시작해보자'라는 제안에 한 표를 던진다.   

경향신문(07. 01. 01) 독자여, 당신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미국 일리노이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바락 오바마는 차세대 대통령 감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떠오르는 별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이다. 마흔 다섯 살의 초선 의원이 정계 진출 3년 만에 이처럼 빠르게 부상한 것은 존 F. 케네디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오바마 현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정치에 실망하고 정치판에 덧정 떨어진 국민들에게 그가 신선한 희망으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희망’을 말하기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근년 한·미 두 나라 정치판은 기이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국민은 극단적인 분열과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풍비박산 쪼개져 있으나 정치는 이 분열을 치유할 힘이 없다. 정치 자체가 분열의 조장자이자 분열을 먹고 사는 독버섯 같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판은 진지한 토론과 숙고 대신 막말, 욕설, 비방, 험담으로 날 새는 저열하고 잔인한 정쟁의 지옥이 되어 있다.

-희망의 원천은 시민의 자질-

대립과 싸움은 정치의 숙명이다. 민주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대립이고 싸움이냐에 따라 정치의 품질과 수준은 한참 달라진다. 국민을 위한 봉사보다는 오로지 권력잡기가 목표일 때 정치는 사회악이 되고, 국가적 현안과 국민생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보다는 당략과 점수따기를 위한 진흙던지기가 될 때 정쟁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싸움질로 전락한다.

인권변호사, 공동체 운동가, 시카고 법대 강사의 경력을 가진 오바마가 정치에 투신한 이유는 미국의 ‘깨진 정치과정을 수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분열보다는 공통의 희망과 꿈으로 국민을 한데 묶어주는 일이 더 위대하고 시급하다는 것이 그가 최근 저서 ‘대담한 희망’ 등에서 말하는 희망의 정치 기조다. 당리당략과 이데올로기를 넘어 건강한 양식과 상식의 힘으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자는 주장도 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정치 방법론이다.



-‘사회적 독서’를 시작해 보자-

금년은 우리에게 대선의 해다. 우리에게도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정치문화가 필요하고 정치과정의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하다. 희망의 메시지도 그립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를 가능하게 할 궁극적인 힘은 ‘시민’에게서 나오므로 그 시민의 판단력과 자질이 또다시 요긴해지고 있다. 시민적 자질을 강화하는 첩경 중의 첩경은 누가 뭐래도 책 읽기이고 독서를 통한 숙고의 능력 키우기다.

무슨 책? 독자여, 나는 당신에게 어떤 책도 권할 생각이 없다. 나는 오히려 당신이 뽑아주는 책, 당신이 만드는 책들의 목록을 보고 싶다. 그 목록으로 우리가 사회적 독서를 시작하고, 이슈를 가리고 문제를 토론해 보는 것이 금년에 우리가 해야 할 소중한 일의 하나다. 경향신문이 새해 벽두부터 책읽기 문화의 확산을 위한 연중시리즈 ‘책읽기 365’를 시작하는 의미도 거기에 있다.(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07. 01. 01.

P.S. 그러니까 논리는 이렇다. 새로운 정치문화는 시민에게서 나온다 -> 따라서 시민의 판단력과 자질이 요긴하다 -> 그러한 자질을 강화하는 첩경은 책읽기이다. 이 책읽기가 다가올 '파국'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해줄 수 있을지 회의적이긴 하나(지젝의 표현을 빌면, 소행성과의 충돌 같은 재난 앞에서 철학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기분이면 못할 것도 없겠다. 한데, '주최측'에서 어떤 책도 권할 의사가 없다고 하므로 좀 난감하다. '당신이 뽑아주는 책으로 시작해보겠다고 한다. 젠장, 민주주의의 고단함이여!

 

 

 

 

해서, 마지못해 몇 권의 책을 꼽아본다. 한국사회에 대한 책으로 지승호의 대담집 <금지를 금지하라>(시대의창, 2006), 그리고 미국에 대한 책으로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알마, 2006), '인문서'로 어느샌가 출간된 테리 이글턴의 <우리시대의 비극론>(경성대출판부, 2006), 그리고 시집으로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코리아, 2006). 네 권을 1월에 짬짬이 읽을 책으로 정해둔다. '이슈를 가리고 문제를 토론해보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 책임감'이 강제하는 책읽기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올해는 분단국에서 또 한 차례 대선이 치러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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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마르크스-강유원-보르헤스

"여러 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한" '비정규직' 철학박사 강유원의 신간이 출간됐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이론과실천, 2006)이 그것이다. 흔히 '경철수고'라고 불리던 책인데, 지난 1987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김태경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던 책이다. 그때 분량은 151쪽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번역본은 229쪽이다. 목차로 봐서는 후주의 분량이 많아진 탓인지 책의 판형 때문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아직 책을 직접 보지 못했다).

이 '경철수고'와 관련하여 내가 갖고 있는 책은 국역본이 아니라 펭귄판 <초기 저작선(Early Writngs)>(1992)인데, 이 영역본의 분량으론 120쪽 가량이다. 책은 재작년에 모스크바대학의 구내 헌책방에서 50루블(당시 환율로 2,000원)에 구한 것이다. 국역본과 영역본의 표지를 나란히 놓고 보니까 마르크스의 사진이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공산당선언>이 발표되기도 전엔 1844년에 나온 '경철수고' 자체가 청년 마르크스(1818-1883)의 저작인 만큼 영역본의 사진이 보다 어울려 보인다(그러니까 마르크스가 만 26세에 쓴 글이다).

 

 

 

 

짐작에 1841년에 쓴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그린비, 2001)를 제외하면 가장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단행본 저작이겠다. 참고로, 김태경 번역본은 절판되었고, 박종철출판사에서 나온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1997)에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가 발췌돼 실려 있다.   

신간의 출간과 관련하여 '강유원'을 검색해보다가 발견한 글은 재작년 교수신문에 실렸던 한 칼럼이다('독서유감'이란 제하에 당시 대학강사이던 강유원의 연재칼럼이 게재된 바 있다).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제목이 달려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없는데 이 깐깐한 서평가에게 '소설읽기의 괴로움'이란 '철학읽기의 즐거움'이 갖는 이면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의 '서평들'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하여 옮겨놓도록 한다. 읽고나서 남는 게 없기 때문에 소설은 읽을 게 못된다, 그나마 보르헤스의 문학론 정도는 정보량이 많아서 읽을 만하다, 라는 게 대략적인 요지이다.  

교수신문(04. 04. 09) 소설읽기의 괴로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끝까지 읽지 못했다. 그의 다른 대하소설들 ‘아리랑’이나 ‘한강’도 마찬가지다. 대하소설, 견뎌내기 힘들다. 아무리 얇아도 소설 읽긴 너무 힘들다.

소설 읽기가 힘든 이유는 첫째, 소설은 논리적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대강이라도 앞을 예측하지 못하는 건 불안만 안겨줄 뿐이다. 영화를 보러 갈 때도 미리 스토리를 다 알아야 하며, 유념해서 봐야 할 장면들을 챙겨서 가는 나로서는 소설의 이러한 돌발성을 감당하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이다.

두 번째로 소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읽고나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진한 감동을 남기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글쎄 그렇게 남은 감동이 도대체 내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별로라는 대답이 저절로 나온다. 오히려 내가 소설을 읽고나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소설에 아주 풍부한 정보가 담겨 있을 때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판타지 문학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이것만은 꼭 읽어야겠다 싶어서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붙잡고 낑낑대다가 결국 손에서 놓고 말았다. 뭔 책인들 제대로 읽었겠는가마는, 어쨌든 판타지 문학은 남는 거 없고 시간낭비에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내 빈곤함 때문에 늘 실패로 돌아간다.

보르헤스는 톨킨과 마찬가지로 한참 '유행'할 당시, 한번 읽어보기나 해야겠다 싶어서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톨킨의 책을 내팽개쳤다면 보르헤스는 그러지 않았다. 보르헤스가 뭐 대단한 소설가여서가 아니라 그의 소설들은 짧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르헤스를 그 뒤로 계속 읽은 것은 그 소설들의 짧음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의 소설들이 재미없다는 것을 느꼈고, ‘허구들’(녹진 刊), ‘불한당들의 세계사’(민음사 刊), ‘셰익스피어의 기억’(민음사 刊)만을 읽고 말았다. 역시 소설은 소설인 것이다.

나에게는 보르헤스가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문학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으로서 매력이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 보다는 문학론, 책 이야기에 관한 책은 반드시 사서 읽게 된다. 그의 이런 책들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정보가 풍부한 책들인 셈이다.

‘칠일 밤’에 들어있는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여기에서 그가 이야기하는 일곱 개의 주제들 중, '신곡', '천 하룻밤의 이야기', '카발라' 등은 오랫동안 날 매혹시켜온 주제들이다. 소설이 아니니 앞에서부터 읽지 않아도 그만이고, 그 주제들만을 골라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는 가운데 만나게 되는 몇몇 구절들은 나를 더없이 흥분시킨다.

이를테면 이런 것, "우선 헤로도토스의 ‘역사’ 9권에서 머나먼 이집트의 존재에 대해 밝힌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머나먼'이라고 말한 것은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고, 여행은 그지없이 위험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이집트라는 세계는 가장 오래되고 위대한 세상이었고, 그들은 이집트를 미스터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공간은 시간에 의해 측정된다"는 말에서 나는 '현대의 시공간 압축'을 떠올리면서 그 말을 음미하며, 선진국 이집트를 동경했던 플라톤을 생각한다.

또 이런 것.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적어도 괴테의 나선형식 진보를 믿습니다." 여기서 나는 괴테와 헤겔이 동시대인이었으며, 헤겔의 변증법적 전개가 나선형이었음을 상기하면서, 또는 칼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에로’의 내용들을 이어 붙이면서 텍스트를 즐긴다. 어디선가 보르헤스가 말했듯이 책들끼리의 대화가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과독한 탓인지 내게 이런 즐거움을 주는 한국 작가는 아주 드물다. 당대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신문에 덜 익은 정견이나 발표하고,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건 본 적이 있다. 이제 그런 거 그만하고, 일단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에 들어있는 '소설가가 작품의 전면으로 나설 때'를 읽은 뒤, 방에 들어  앉아서 공부들이나 좀 했으면 싶다.(강유원 / 동국대 철학)

06. 12. 21.

 

 

 


P.S. "무슨 정당에 가서 공천 심사나 하는" 작가가 알다시피 작가들의 공부방을 마련해놓고 강유원 이상으로 '교양'을 강조해마지 않는 소설가 이모씨라는 건 아이러니컬하다. 여하튼 이 칼럼은 '서평가' 강유원에 대해서 많은 걸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기에 유용하다. 거기에 덧붙여 읽어볼 만한 것은 서평집 <주제>(뿌리와이파리, 2005)의 서문이다(이 책은 얼마전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과 함께 한국출판평론상을 수상했다. '출판평론'이란 이 경우에 '서평집'을 말한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책'이 몇 권 있다. 아니 다섯 권 있다. <길가메시 서사시>, <오디세이아>와 <오이디푸스 왕>, <신곡>과 <정신현상학>. 이 책들 중에서 <정신현상학>을 제외하고는 원어로 읽어보지 못하였다. 죽기 전에 진심으로 기원하여, 다음 생에서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두 권 정도 더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다시 또 죽은 뒤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나머지 두 권을 읽어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보르헤스의 문학을 평하여 '진지한 농담'이라고도 하지만 이런 '소망'이야말로 진지한 농담의 전형 아닌가? 그의 분류를 그대로 적용하자면, '강유원 서평집'이란 부제를 달고 '니 주제를 알라!'란 표어를 내세운 이 서평집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책들은 <신곡>을 제외하면 모두 '책 아닌 것들'이겠다. 그러니 "여기에 묶인 글들은 주석이나 해설이나 베낀 것에 대한 하찮은 푸념일 뿐이요, 주석도 해설도 베낀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비웃음이다."란 자평은 액면 그대로 접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푸념과 비웃음에 또 '출판평론상'이란 게 주어졌으니 이 또한 고난도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고. 초급 아이러니스트인 내가 명함도 못내밀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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