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즐거운 도망, 즐거운 저항

지난 2004년 11월말에 올린 모스크바 통신문은 "책은 무조건 즐겁게 읽어라"란 제목을 달고 있는데, 그 후반부는 올해초에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로 따로 정리해놓은 바 있다. 그 전반부를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제목은 페나크의 소설에서 인용한 '즐거운 도망, 즐거운 저항'으로 바꿔달고. 다시 읽어보니 '나의 독서론'도 겸하고 있다.

낮에 (점심이 아니라) 아침을 먹고서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나서는 참에 문 우편함에 인쇄 우편물이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북매거진 <텍스트>(23호)였다. 지난 22호부터 20일 간행 체제로 바뀌고서 두번째로 나온 것인데(22호에 나는 ‘체홉론’을 기고한바 있다), 표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실용적’이었지만, ‘책과 시대’란 가볍지 않은 주제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었다. 제목의 인용구는 다니엘 페나크의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에 대한 서평의 제목이기도 한데, <텍스트>의 표지에는 그의 글이 조금 더 인용돼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인격을 형성해온 책읽기란 대개는 순응하고 따르는 책읽기라기보다는, 무언가에 반하고 맞서는 책읽기였다. 즉 이제껏 우리가 책을 읽어온 것은, 마치 세상과 등지듯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과 대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현실 도피자처럼 여겨지고 현실마저 우리가 탐닉하는 독서의 매력에 가려져 아득해질지언정, 어디까지나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도망자,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탈주자인 것이다. 모든 독서는 저마다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이다.”(<소설처럼>, 103-4쪽)

두 개의 인용구를 종합하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페나크에 따르면)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이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즐거운 책읽기’와 관련하여 나에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두 권 있다. 그건 김현의 평론집 <책읽기의 괴로움>(민음사)과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동문선)이다. 기억에 <책읽기의 괴로움>은 최인훈의 <회색인>에 대한 평문의 제목을 표제로 한 책이었다. 나는 김현 전집으로 다른 책과 묶여서 나온 <책읽기의 괴로움>도 갖고 있지만, 내가 더 아끼는 건 민음사판의 초판본이다. <분석과 해석> 이전에 나온 것이니까 아마도 80년대 초반에 나왔을 법한데, 내가 중학교 때부터 문학평론집을 읽은 건 아니므로 내가 이 책을 구한 건 당연히 훨씬 나중이다(물론 책은 이미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다 읽은 뒤이다).

절판됐던 그 책을 구한 건 아마도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90년대 초반에 새로 개장한 영풍문고에서였다. 아마 재고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책이 나온 듯한데, 나는 한 권 남아 있던 이 책을 집어들고서 쾌재를 부른 적이 있다(요컨대, 이런 게 ‘책 구하기의 즐거움’이다). 그게, 마지막 한 권이었는지는 어떻게 아느냐고? 그걸 확인해보려고, 책을 사고 며칠 안 돼서 서점에 또 가봤기 때문이다(더는 진열돼 있지 않았다). 해서, 한동안 내가 가장 즐겨 들르던 서점이 영풍문고였고, 영풍문고는 내게 <책읽기의 괴로움>으로 각인돼 있다.

사실, (내 기억에) 김현이 말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책을 통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세상 읽기의 괴로움’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즐거운 책읽기’를 괴롭게 만드는 건 세상인 셈. 하지만, 책읽기의 즐거움은 그런 괴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도록 하는 즐거움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쾌락원칙을 넘어선다. 즉, 책읽기의 즐거움은 쾌락이 아니라 향락이다.

 

 

 

 

바르트의 책 <텍스트의 즐거움>은 우리말로 두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데(나에겐 이 두 번역본과 영역본이 있다), 읽은 만한 건 김희영 교수가 옮긴 동문선본이다(연대출판부본은 ‘책읽기의 괴로움’을 강요하는 번역이다). 바르트의 책들은 우리말 전집이 기획/출간되고 있을 정도이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지만, 아쉽게도 그의 유미적인/유희적인 문체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사랑의 단상>이나 <카메라 루시다> 정도가 예외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말로 번역된 바르트의 책들은 대부분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다(<카메라 루시다>, 즉 <밝은 방>만 아직 보지 못했다). 더 번역된 건 두툼한 선집 외에 정도. 그 중에서 내가 산 건 아직까지는 <기호의 제국> 한 권뿐인데, 그건 내가 영역본을 따로 갖고 있지 않아서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을 읽기 위해서 먼저 읽어야 하는 것은 '저자의 죽음'과 '작품에서 텍스트로(From Work to Text)'라는 바르트의 두 짧은 평문이다(동문선본에 같이 번역돼 있을 듯하다). 어떤 책을 ‘작품(Work)’으로 간주하는 건 간단히 말해서, 그걸 산출한 ‘주인’ 혹은 ‘아버지’로서의 저자를 상정하고, 그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작품 읽기의 목적으로 삼는 태도이다(따라서 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태도이다). 반면에 어떤 책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는 건(‘교재’란 의미의 ‘텍스트’가 아니다), 더 이상 그런 의미작용의 중심으로서의 저자를 고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래서, ‘저자의 죽음’이다(이건 반형이상학적이며 탕아적인 태도이다).

바르트는 ‘작품’의 은유로 ‘유기체’를 드는 반면에 ‘텍스트’의 은유로는 ‘덫’을 든다. 하나는 채워져 있고, 다른 하나는 비어 있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독자가 ‘채워넣는’ 것이 된다. 해서, (바르트의 다른 용어로 표현하자면) ‘작품’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에 대응한다면, ‘텍스트’는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에 대응한다.


나는 러시아 문학 이전에 ‘문학’이 전공이다 보니까 문학이론/비평 또한 관심에서 제쳐놓을 수가 없(었)는데(해서 문학이론서들을 지겨울 정도로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 ‘이론’이라는 게 말 그대로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요구한다. ‘공부’하기엔 좋은 동네인 셈), 이른바 ‘이론’은 20세기 후반 인문학의 주도적인 담론이었다. 그 기폭제가 (프랑스) 구조주의였다면(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구조주의는 ‘현실’을 ‘구조’로 대체/환원했다) 문학비평에서 ‘구조주의 혁명’을 주도했던 바르트의 위치는 간과될 수 없다(물론 그는 <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경계로 포스트 구조주의로 넘어간다). 

 

특이한 건 그가 주로 아카데미즘의 바깥에서 활동했다는 것.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기호체계의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로 취임하는 것이 1977년이니까 1953년 <글쓰기의 영도>(이 또한 우리말 번역이 있는데, ‘번역의 0도’쯤으로 불릴 만하다)로 ‘데뷔’한 지 22년이 지나서야 그는 ‘변변한’ 직업을 갖게 된다(이전에 그가 몸담았던 연구소 등에서의 지위나 보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는 것은 불과 몇 년 후이다(내 기억에는 1980년이고 그의 유작이 <밝은 방>, 곧 <카메라 루시다>이다).


아마도 그런 전기적 이력이 보다 ‘본격적인’ 구조주의 비평가라는 제라르 주네트보다 바르트에게 더 친밀감을 갖게 하는 듯하다(나는 두툼한 영어판 바르트 전기도 갖고 있으며, 1/3쯤 읽었더랬다). 그건 ‘불문학자’ 김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프랑스비평사: 현대편>(문학과지성사)에서 주네트 대신에 바르트에게 한 장을 할애한다(곽광수 교수 같은 이는 바르트를 딜레탕트 비평가, 좀 ‘재치 있는’ 비평가 정도로 평가절하한다).

 

 

 

 

 

 

 

 

 

 

참고로, 김현이 재구성한 프랑스 현대비평은 '사르트르-바슐라르-바르트-블랑쇼'의 4각형으로 이루어지는바, 이들의 키워드를 차례대로 나열하면 '참여-상상력-언어-죽음'이다(나는 문학을 구성하는 네 원소가 ‘사랑과 가난과 죽음과 언어’라고 생각하는바, 사랑과 상상력, 가난과 참여를 등가화시키면, 두 사각형은 동일한 매트릭스의 변주가 된다).


어쨌든 <책읽기의 괴로움>과 <텍스트의 즐거움>, 두 권의 책이 생각난다는 얘기이다. 물론 ‘텍스트’가 그러하듯이 모든 ‘생각’에는 꼬리가 있다(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김현의 유작은 사후에 출간된 일기 <행복한 책읽기>인데, (내 기억에) 생전에 제목을 정해두었다는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책읽기의 괴로움>이었을 것이다(돌이켜 보건대, 그의 죽음은 90년대 한국문학의 최대 손실이다. 비평가와 불문학자로서 그의 ‘열정’과 ‘업적’을 넘어설 만한 이는 아직 없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건 한편으로 고인에게 부끄러운 일이다). 그 ‘행복한 책읽기’가 10년 정도만 더 연장됐어도, 우리는 (그는 4년에 한번 꼴로 책을 냈으므로) 최소한 두 권의 문학비평집과 (그가 <프랑스비평사>에서 포부를 밝힌바) 리쾨르와 데리다 등의 연구서를 더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주인/아버지로서의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 바르트였지만, 사실 그에겐 아버지가 없었다(일찍 여읜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그에겐 내내 어머니밖에 없었으며(<밝은 방>은 그 어머니의 죽음에 바쳐진 책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교통사고이긴 했지만) 그는 얼마 더 살지 못했다(참고로 그는 동성애자였다). ‘유복자’ 혹은 ‘아비 없는 자식’이란 점에서 바르트는 한 세대 선배인 사르트르를 따르고 있다(프랑스의 20세기 지성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은 사르트르-바르트-데리다이다. 데리다의 죽음으로 이들은 모두 고인이 됐다. 1980년부터 2004년까지이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나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79년 박정희의 죽음이 아니라 80년 사르트르의 죽음이었다(*나는 '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이란 글을 쓴 바 있다). 나는 신문지상에 보도된 그의 죽음에 매료됐고, (‘정치가’가 아닌) ‘작가’의 길을 선망하게 된다(그 길이 이 길이었다니!).

 

 

고등학교 때부터 사르트르의 소설들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책들을 모두 읽은 건 아니다(나는 <존재와 무>도 아직 읽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나온 사르트르에 대한 책들은 거의 다 읽었다. 얼마 전에는 헌책방에서 러시아어로 된 사르트르 연구서를 샀는데(333쪽이고 1,600원) 레오니드 안드레예프란 저자의 이름은 낯설지만, 1994년에 나온 이 책이 러시아에서 나온 ‘최초의 사르트르 연구서’란 점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레이몽 아롱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좌파였던 사르트르 세대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과거 소련체제, 그리고 소련의 작가들과 가졌던 ‘친분’을 고려하면(이들의 서신교환도 두툼한 책 한 권 분량이다), 9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연구서가 나왔다는 점은 다소 의외이다(소련에서는 ‘부르주아 철학’도 열심히 연구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1994년에 책이 나온 건 1964년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거부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갖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올해는 그의 노벨상 수상/거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어제 날짜 <니자비씨마야>의 ‘엑스 리브리스’의 표제기사가 그걸 상기시켜주었는데, 러시아(소련)에 사르트르가 제일 처음 소개된 것이 바로 그 해 1964년이고, <노브이 미르>란 잡지(1962년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됐던 잡지)에 <말>이 번역/소개됐다(그의 ‘자서전’ <말>은 ‘읽기’와 ‘쓰기’ 두 대목으로 구성돼 있다. *새로운 우리말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럽다).

 

계기는 물론 그가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에 대해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상은 거부한다.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를 인용한 러시아 필자는 이것이 ‘진정한 철학적 행위’라고 평한다. 그는 사르트르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니까, 반어적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나부터도) 흔히 “나는 노벨상을 거부한다”란 그의 선언을 사르트르 철학(=자유의 철학)의 상징적인 제스처로 이해해왔는데, 알고 보면 그건 절반의 이해였던 셈이다.

 

거기에 덧붙여져야 할 것은 “하지만, 돈은 받겠다!”이다.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구호가 아주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가?(즉, 실존주의는 마음이 약하고, 돈에 약하다!) 그리고, 그럴 때에라야 실존주의가 왜 프롤레타리아 철학이 아니라 부르주아 철학인가가 명료해지지 않는가? 더불어, 우리는 사르트르를 더 좋아하게 되지 않는가?..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 사르트르는 <말>과 <구토> 등이 포함된 작품집과 <보들레르>, <상상적인 것>(그의 초기 상상력 연구서) 등이다(<존재와 무>는 너무 고가여서 사지 못하더라도 ‘전쟁일기’인 <이상한 전쟁의 기록>이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은 형편을 봐서 구할 생각이다. 어린시절 ‘영웅’에 대한 예의로서). <상상적인 것>은 그가 후설의 영향하에 쓴 것으로 흔히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연구와 비교된다(김현의 연구가 있다). 더불어, 얇은 분량의 <보들레르>는 그의 ‘실존적 정신분석’이란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이다.

 

<상상적인 것>은 우리말 번역이 없지만,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는 오래 전에 번역/출간돼 있다(아마 절판됐을 것이다). 나는 지난 달에 2권짜리 보들레르 선집도 구했기 때문에(1권은 시집이고, 2권은 산문집이다) 이젠 좀 읽어보는 일만이 남았다(보들레르를 읽는 건 나의 오랜 숙제 중의 하나이다. 그가 현대시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한국어와 영어와 러시아어로(들뢰즈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말을 빌면, “훌륭한 작품은 모두 외국어로 씌어져 있다”니까 읽는 것도 ‘외국어’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국어 사르트르는 제법 풍족한 편이다. 작품도 <자유의 길>을 포함해 대부분 번역돼 있고(그의 일기와 플로베르론인 <집안의 백치>, 철학서인 <변증법적 이성비판> 정도를 제외하면) 정명환, 박이문, 박정자 선생들의 소개도 충실하고 수준도 높다. 사실 다른 작가/철학자들의 경우도 이런 정도의 소개 수준만 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이에 견줄 만한 작가는 김화영 교수의 카뮈 정도이다). 사르트르의 전기로는 코헨-솔랄의 3권짜리 전기 <사르트르>가 우리말로 번역돼 있는바, 규모에 맞게 충실하면서도 재미있다.


실존주의 세대(4-50년대)와 구조주의 세대(60년대)를 대표하는 사르트르와 바르트는 각각 ‘타동사’와 ‘자동사’로서의 문학을 주창한 걸로 흔히 비교되는데(하지만 사르트르 자신도 시는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켰다), 폴 존슨이 쓴 <지식인들>을 보면, 딱히 그렇게 대조적인 것만도 아니다(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그의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브레히트 비판이다). 그는 사르트르를 ‘모피를 뒤집어쓴 잉크’라고 불르는데, 하여간에 이 ‘인간’은 평생 끊임없이 뭔가를 써댄 것이었다(그렇게 써대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으니 할말은 없지만).


즉, 그에게서 글쓰기의 발화주체는 타동사적 주체였지만(사르트르의 글쓰기 주어로서의 ‘나’), 발화행위주체인 사르트르 자신은 자동사적 주체였던 것이다(쉽게 얘기하면, 앙가주망(=타동사)을 주창하는 글들을 그는 자동사적으로 썼다). 그러니, 사르트르의 ‘참여’란 것은 좀 의심스러운 것일까? 거꾸로인 것 같다. 그는 모든 지식인의 참여가 갖는 자동사적 성격(‘자위행위적’ 성격)을 상기시켜주는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앙가주망은 ‘진짜’ 앙가주망이다(오히려 우리가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은 그런 자위행위적 성격을 부인/배제하는 앙가주망이 아닐까?).


미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비평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사르트르인바(‘문체의 기원’이란 제목인가로 책이 나와 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형식>(<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로 번역됨)에서도 (여느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사르트르를 중요하게 다룬다. 하지만, 제임슨을 필두로 한 미국의 강단 좌파들의 ‘정치적 행위’는 (사르트르와 비교해 보더라도) 대학 등의 지식인 사회에만 한정된 것이다. 즉, 그들의 참여는 의미론적으론 타동사이지만, 화용론적으론 자동사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물며 대부분의 미국 학문은 기능주의적이지 않은가? (직접적인 경험담은 아니지만) 철학이 그렇고, 심리학이 그렇다. 분업화된 분석철학은 철학의 자기소외를 자기존립의 당위적인 조건으로 수용한다는 점에서 자폐적이며, 자아(에고) 심리학은 사회에 대한 (병리적) 개인의 ‘적응’을 중심적인 과제로 설정함으로써 정작 사회의 병리성 자체는 사고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직면한다. 가령, 소비자심리학이나 유권자심리학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가령, 분석철학이나 자아심리학은 파농의 탈식민주의를 문제로서 사유할 수 있는가?(최근 파농의 <대지의 저주 받은 사람들>(그린비)이 번역돼 나온 걸로 돼 있다. 기억에, 재번역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전 미 대선 결과에 대한 김우창 교수의 시론(時論)을 읽고서 든 것인데, 정작 9.11 테러사건이 발생한 맨하탄 지역에서 부시의 지지율이 20%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케리가 패배한 것은 도시 지역의 진보적 지식인/중산층들과 그와는 전혀 다른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전통적/보수적 ‘시골’ 사람들이 서로 유리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건 마치 제정 러시아시절, 인텔리겐치아와 민중 간의 유리를 상기시킨다).

 

아무리 대학은 좌파 혹은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어도 그 영향력은 대학가 주변에 한정돼 있는 것(한국이라고 사정이 다른 건 아니다. 80년대 대학가와 지방 소도시의 ‘공기’는 너무도 달랐다). 그러니까 미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네트워킹이 부족한 고립사회이다(아메리카는 ‘섬’들로 이루어진 대륙이다). 개방된 고립사회(서로 문은 열어두고 있지만, 아무도 왕래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좌파)이론이 ‘첨단’을 가고, 좌파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하더라도 그 사회의 보수성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것이다(데리다의 ‘새로운 계몽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건 흔한 말로 시민의식의 강화이면서 시민교양의 확충이며, 그로써 지식인과 대중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지식인이 대중화되고, 대중이 지식인화되어야 한다. 마치 모든 노동자가 예술가이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구호처럼, 모든 노동자는 ‘지식인’이 될 필요가 있다. 의사나 교수보다 응급차 운전기사가 더 많은 월급을 받았던 과거 소련에서처럼).

 

 

 

 

 

 

 

 

 

 

그리고 거기에 기본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책들을 읽(히)는 것이고(가령, 시카고시에서 <앵무새 죽이기>를 단체로 읽듯이), 서로 대화/토론하는 것이다(학교에서 왜 ‘말하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이 생활의 ‘기본’이 될 경우에(학교에서 왜 ‘글쓰기’를 교육하지 않는가?), 민주주의(=존재적 차원)는 (지젝이 지적하는바) 포퓰리즘(=존재론적 차원)으로 추락하지 않게 될 것이다(이런 경우엔 하이데거가 아니라 레비나스를 따라서, '존재에서 존재자로'라고 말해야 할 듯하다). 이 정도도 너무 거창한 것인가?

 

06. 05. 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