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한국 출판계의 고질병

출판계의 고질적인 관행/병폐를 짚어보는 기사를 옮겨온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내용이지만 종합/정리한다는 의미는 있겠다. '2007년 한국 출판의 현단계'라고 보아도 좋겠고. 올 연말에는 출판계가 얼마나 달라질 것인지 기대해보면서 짚을 건 짚고 넘어가도록 해보자.  

 
뉴스메이커(07. 01. 09) 출판계의 고질병 ‘스타마케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과 ‘마시멜로 이야기’(한국경제신문). 두 책의 공통점은 2006년 서점가를 강타한 베스트셀러라는 점이다.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12월말 현재까지 70만 부가 팔려 2007년 하반기 100만 부 돌파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자기계발서 ‘마시멜로 이야기’는 2006년 8월 이미 100만부 판매 기록을 세웠다.

베스트셀러라는 점 외에도 두 책의 공통점은 공지영과 정지영이라는 ‘스타’가 각각 저자와 번역자라는 점이다. 물론 ‘마시멜로 이야기’는 정지영이 아닌 제3의 인물이 대리번역한 사실이 뒤늦게 폭로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러나 역설적으로 ‘마시멜로 이야기’가 밀리언셀러로 등극하는데 가장 큰 공로자는 10대, 20대에 인기가 높은 정지영이라는 TV스타였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정지영은 프리랜서로 독립하기 전까지 ‘SBS 뉴스퍼레이드’ ‘접속 무비월드’ ‘출발 모닝와이드’ ‘TV문화지대-낭독의 발견’ 등을 진행하며 지적인 아나운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출판사는 이 점에 착안, 책 광고모델로도 정지영을 내세웠고 수차례에 걸쳐 팬사인회도 열었다.

공지영 소설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역시 그가 지닌 스타성과 무관치 않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뿐 아니라 일본작가 쓰지 히토나리와 함께 펴낸 ‘사랑 후에 오는 것들’(소담출판사)도 2006년 28만 부가 판매됐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문학성 외에도 대중이 공지영이라는 스타작가에게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그의 책 판매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공지영은 2006년 5월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황금나침반)를 출간했다. 이 산문집에서 공지영은 늘 왕따였던 어린시절 이야기와 세 번 결혼해 세 번 이혼했고 성이 다른 세 아이를 낳은 사연 등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기호 소장은 “이 산문집에 실린 공지영의 인생역정 등도 대중이 공지영이라는 스타작가를 한결 인간적으로 느끼게 해준다”고 말했다.

정지영의 대리번역 파문에 이어 최근 출판계를 발칵 뒤집은 또 다른 사건은 대필 논란이다. 유명 화가 겸 방송인 한젬마의 최근작 ‘화가의 집을 찾아서’와 ‘그 산을 넘고 싶다’(샘터)가 거의 전적으로 대필작가에 의해 완성됐다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출판계에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대필작가, 일명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그림자작가 또는 유령작가)에 대한 환기를 불러 일으켰다. 고스트라이터는 수려한 문장력과 적절한 비유로 책을 완성도 높게 만들지만 책 판권정보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필자이기 때문에 그림자작가 또는 유령작가로 통한다.
 

 

 

이들의 역할은 저자가 쓴 원고를 좀더 매끄럽게 손보는 윤색 수준부터 완전 대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들의 도움을 얻어 책 판권정보에 이름을 올린 저자는 명예와 인세(보통 판매수입의 8~10%)를 챙기는 반면 대필작가는 대부분 인세 대신 원고지 장당 얼마씩 계산하는 식의 수고비를 받는다. 한성출판기획 박영욱 대표는 “가령 대필자에게 원고료로 500만 원을 지불하기로 계약했고 책의 정가가 1만 원이라고 하면 초판을 5000부 찍어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대필자에게 주고 재판부터 발생하는 모든 인세는 저자로 이름을 올린 이에게 준다”고 설명했다.

대필은 주로 자서전 위주로 이루어져왔다. 작가지망생들이나 배고픈 문인들이 부업으로 정치인이나 재벌총수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는 것으로 이는 가장 흔한 대필의 형태이다. 출판계 풍문에 따르면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국내 최고의 드라마작가로 손꼽히는 A씨가 2억 원을 받고 대필했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도 대필자가 따로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문인 중 대필작가 시절을 한번쯤 거치지 않은 이는 드물다. 그러나 자서전을 대필하는 것에 딴죽을 거는 이는 없다.

문제는 이처럼 자서전 위주로 이루어지던 출판계의 관행이 이제는 자기계발서나 수필, 동화에까지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 출판관계자는 “소설을 제외하고 국내에서 발간되는 서적의 50% 이상은 고스트라이터의 손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자서전과 자기계발서는 100%, 베스트셀러 중 6~7권은 대필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젬마의 두 책이 문제가 된 것도 이 지점이다. 맨 처음 한젬마의 두 책에 의혹을 제기한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한젬마가 자신이 직접 쓴 초고라며 구성작가에게 준 것은 메모와 자료 더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출판 직후 각종 인터뷰에서 대필작가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경험인 양 이야기했다고 보도했다. 한성출판기획 박영욱 대표는 “한젬마씨는 자료라도 줬으니 그나마 나은 편”이라며 “심한 경우 대필작가가 취재와 집필을 다하고, 책 판권정보에 저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마지막 교정지만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출판계의 대필관행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은 출판사의 도를 넘는 대필관행이 ‘스타’를 내세워 판매부수를 높이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는 점이다. 한젬마의 경우 1999년 ‘그림 읽어주는 여자’ ‘나는 그림에서 인생을 배웠다’(명진출판)를 내며 스타덤에 올랐다. 출판계에서 명진출판은 기획출판을 통해 스타 저자를 많이 배출한 출판사로 이름이 높다. 1999년 당시 한젬마를 출판사에 소개한 출판전문가 김영수씨(김&정 기획실장)는 “한젬마씨는 서울대 미대 출신에 예쁘장한 외모여서 스타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명진출판이 한젬마의 이와 같은 스타성을 더욱 부각시켰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명진출판이 내놓은 두 책과 이번에 문제가 된 샘터사의 두 책의 표지사진은 모두 스튜디오에서 공들여 촬영한 한젬마의 모습이다.

 


김영수씨는 “요즘엔 작가도 이미지가 따라주지 않으면 책이 안 팔린다”며 “이는 소설부문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책 판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글이 50%이고 나머지는 작가의 외모나 경력, 사생활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때 출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신문 등 인쇄매체와 TV 등 영상매체다. 신문이나 TV를 통해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면 쉽게 유명인이 되고 이는 곧 책 판매와 직결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출판사는 책 출간과 동시에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기본이고 책 성향에 따라 방송 프로그램을 섭외해 저자를 직접 출연시키면서 스타 만들기에 힘을 쏟는다. 김영수씨는 “1990년대 중반부터 출판사들은 기획을 통해 스타 만들기가 가능한 사람에게 자전적 에세이를 의뢰하는 경우가 증가했다”고 말했다.

아예 연예인 등 스타를 내세운 에세이도 줄을 이었다. 1998년 박원숙의 ‘열흘 운 년이 보름은 못 울어?’(중앙M&B)부터 1999년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2004년 김혜자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오래된미래) 등 많은 책이 나왔다. 이 중 서갑숙의 ‘나도 때론…’은 100만부 이상 팔린 밀리언셀러다.

그러나 정지영과 한젬마를 둘러싼 파문에서 보듯 부작용도 적잖다. 글솜씨는 물론 너무 바빠 원고를 직접 쓸 시간조차 없는 스타들을 내세우면서 대리번역, 대필문제가 대두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글솜씨가 없는 전문가가 글솜씨가 있는 이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전문지식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마담으로 이름과 얼굴만 빌려주고 책의 내용 대부분이 대필자의 창작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출판을 통해 스타가 된 이가 심각한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는 일도 있다. 1995년 베스트셀러가 된 ‘나는 언제나 한국인’(대원미디어 출간)의 주인공 에리카 김(한국명 김미혜)이 한 사례다. 문제는 그의 동생인 김경준씨가 일으켰다. 김씨는 2001년 크게 회자된 ‘옵셔널벤처스 금융사기사건’의 주인공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도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이 전 시장은 2000년 김경준씨와 함께 서로의 머리글자를 딴 ‘LK이뱅크’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김씨는 2001년 당시 코스닥 기업이던 옵셔널벤처스코리아를 운영하다 거액의 회사 자금을 유용하고 미국으로 도망쳤다. 인터폴의 수배를 받던 김씨는 2004년 5월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돼 현재 LA 메트로폴리탄 디텐션 센터에 수감돼 있다. 1990년대 후반 당시 이 전 시장에게 김씨를 소개한 이는 다름아닌 베스트셀러 저자로 명성을 높인 에리카 김이었다.

출판계에서는 정지영과 한젬마를 둘러싼 파문을 ‘출판계의 황우석 사태’라며 자조한다. 랜덤하우스코리아 유영준 팀장은 “국민을 상대로 한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사기극은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과학계 전체가 욕을 먹고 위축되지 않았느냐”며 “마찬가지로 자기가 쓰지 않은 책을 자신이 썼다며 명예와 인세 등 달콤한 과실만 먹은 이는 비난받아야 하지만 잇따른 이 두 번의 파문에 의해 출판계 전체가 위축될 수 있어 염려스럽다”고 토로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나 출판사들이 두 번에 걸친 파동으로 보조작가가 필요한 서적마저 출간을 꺼릴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대리번역과 대필, 사재기 등 출판계의 도덕성 시비가 당분간 봇물 터지듯 터질 것”이라며 “그러나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출판계 스스로 정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주례사비평이 한국문학 죽였다”

 


출판계의 ‘스타 마케팅’은 비단 요즈음의 일만은 아니다. 국내 소설이 한창 대중적 사랑을 받던 시절, 즉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소설가를 ‘스타’로 띄우기 위한 출판사들의 노력이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책의 판매부수를 높이기 위해서다.

물론 당시의 마케팅은 대리번역, 대필, 사재기 등으로 얼룩진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와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의 작품을 언론을 통해 띄우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등 많은 독자의 아낌을 받았던 작가들이 이때 등장하여 주목을 받았다. 스타를 만들어낸 주역은 출판사와 평론가, 주류 언론이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특정 스타 작가의 작품이라면 완성도와 상관없이 한국 최고의 문학작품인 양 소개하는 주례사 비평이 평론가와 언론의 입을 통해 잇따랐다”며 “궁극적으로 이런 문화가 한국문학을 절벽으로 내몬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례사비평이란 비평가적 양심보다 출판사, 학연·지연 등 특정한 이해관계에 얽혀 마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듯 작품과 작가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풀어놓는 비평행위를 말한다. 2002년에는 이런 잘못된 비평행위를 정면으로 비판한 ‘주례사비평을 넘어서’라는 책이 나오기도 했다. 이 책의 표지에는 ‘비판 없는 비평이 몰고 온 비평의 타락과 문학의 위기’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다. 이 책에서 김명인, 고명철, 이명원, 홍기돈, 김진석, 신철하, 하상일, 진중권 등은 신경숙, 은희경, 전경린, 김형중 등 스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한기호 소장은 “평론가와 언론은 주례사비평을 일삼고 스타 작가들은 작품을 공들일 여유조차 없이 비슷한 성향의 작품을 연달아 성급하게 생산하면서 현재 한국문학의 자멸을 초래한 것”이라며 “요즘은 팩션이나 일본소설을 제외하면 공지영과 김훈 외에 초판 3000부 이상 팔리는 책조차 없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한국문학이 침체를 면치 못하자 지난해부터 문화예술위원회(옛 문예진흥원)는 ‘힘내라, 한국문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문학회생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수십억 원의 복권기금을 이용해 우수문학도서 구입과 배포, 문예지 게재 우수작품 원고료 지원, 우수 문예지 구입과 배포 등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학회생프로그램이 오히려 한국문학을 한층 더 고사시킬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작가에게 원고료를 지원하고 한국문학을 출판한 출판사의 해당 책을 사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근원적 해결방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는 정도의 미봉책’이라는 시각도 적잖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국가에서 한국문학의 침체를 손놓고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자세는 좋으나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이라며 “작가나 출판사에 대한 지원이 궁극적으로 한국문학을 회생시키는 방안이라기보다는 미봉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박주연 기자)

 

07. 0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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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지난주에 장정일의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소개 페이퍼를 올리면서 인터뷰기사 한 꼭지를 옮겨놓았었는데, 내친 김에 북데일리에 실린 인터뷰 또한 옮겨놓는다. 대충 읽어보고 말 생각이었지만 이 인터뷰 기사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장정일만큼 책을 읽는 건 아니지만 나도 책에 대해 아는 체를 많이 하다보니 간혹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오해받곤 한다. 그런 기대와는 반대로 평소에 나는 책을 너무 안 읽는다고 자책하며 사는 편이다(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투정하는 게 사실은 더 많지만). 마일리지도 쌓인 김에 이번에 <장정일의 공부>와 함께 몇 권의 책을 더 주문했는데(책은 이미 학교로 배달되었지만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분량상 <공부>를 제외하면 내가 빨리 완독할 수 있을 책은 <언어학과 정치>(역락, 2006) 정도이겠다.

 

 

 

 

거기에 현재 읽고 있거나 대출해놓은 책들이 10여권. 강의준비나 필요 때문에 읽어야 하는 책들이 또 두서없이 그만큼이다. 지난 주말부터 가방에 들어가 있는 책은 아이리스 장의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와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2006)이고, 집에 와서 잠시 펼쳐본  책이 <계몽의 변증법>(문예출판사, 1995), 그리고 엊그제부터 행방을 찾고 있는 책이 비릴리오의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이다(나는 국역본과 함께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는데, 최근에 영역본도 구했다).

 

 

 

 

전업작가라면 나름대로 책읽기에 질서를 부여해서 '로쟈의 공부'라도 내놓을 준비는 돼 있지만 장정일만큼 쌓아놓은 공덕이 없기에(내가 읽은 '장정일' 가운데 베스트 네 권이다. 나는 그의 <삼국지> 등을 읽지 않았다) 그럴 경우 생계를 책임질 수 없다. 그러니 울적하다. "다 읽으면 굶기 때문이죠." 더불어 아무리 부지런히 읽는다고 해도 이젠 책들을 다 읽을 수 없다. 그러니 막막하다.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말하건대, "저, 독서광 아닙니다!"

북데일리(06. 11. 20) "저, 독서광 아닙니다, 다들 안 읽기 때문이죠"

지난 2월.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소설가 장정일(45)이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학교 측은 “교육부 학력 규정상 장 씨를 전임교수로 임용할 수 없어 초빙교수로 채용했지만, 임기를 마치면 발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음란물 비시에 휩싸여 구속되기도 했던 ‘화제의 작가’ 장정일. “나는 문학이 직업이 아니라면 구역질이 난다”라고 스물한 살 일기장에 그렇게 적었던 그는 시인도 됐고, 소설가도 됐고 교수까지 됐다. 모두 ‘책’ 덕분이다. 밤낮으로 읽은 책 이야기. 그가 쓴 6권의 <독서일기>는 독서광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전설적인’ 책이다. 책 전문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의 진행자로 발탁 되었을 때 그의 어눌한 말솜씨에 불만을 갖던 사람들도 “그럴 만하다”며 독서력만큼은 인정했다.

학교에 ‘덜’ 다닌 대신 ‘더 많이’ 읽은 장정일. 그가 <장정일의 공부>(이하 '공부')(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라는 책을 펴냈다. 이번에는 읽은 책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뾰족한 일침까지 던졌다. 관심분야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책에 미쳐있는 그를 간곡한 설득 끝에 ‘어렵게’ 만났다. 정면의 시선을 던지지 못하는 그의 수줍음 사이로 마흔 다섯 해의 기나긴 책의 역사가 사라졌다 피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 시인, 소설가로 살다가 직장인이 되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백수로 있는 것만 못 하죠. 작가는 24시간 365일이 자유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학생들을 위해 내 삶을 쪼개야 하니까 작가가 낫지요”

- 그 좋은 자유를 포기한 것이나 나고 자란 대구를 떠나 서울 살이를 시작한 것이나 자신에게는 큰 변화일 텐데요. 대구와 서울을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서울은 재입성이에요. 90년도에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사 왔다가 96년도에 다시 대구로 내려갔죠. 그리고 10년 만에 올라 온 거에요. 대구와 서울을 굳이 비교하자면 도시와 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사회에서는 ‘은거’ 에 비할 수 있는 지방생활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어요. 인터넷, 신문. 아무것도 없는 ‘은거’가 불가능한 시대죠. 저는 젊은 작가들을 만나면 꼭 서울살이를 해보라고 해요.

사실, 대구에 가도 서울 생활하고 비슷하거든요. 그럴 바에는 대도시에서 부대끼며 살아보는 게 경험상 낫다는 거죠. 젊은 작가라면 특히, 대도시 생활을 겪어 봐야 해요. 촌으로 가겠다는 젊은 작가들한테는 나이 50, 60되서 가도 괜찮으니까 지금은 대도시에서 생활해 보라고 말해요. 대도시 문명과 호흡하면서 글감과 문젯거리 같은 것들을 만나봐야 해요.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면 외국 생활도 좋은 경험이 될 거에요. 누구든 문명에 노출 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은거의 장점도 살리지 못할 바에야 중소도시 보다는 대도시에서 살아 보는 게 경험상 좋다는 거죠”

“지금은 민주주의 아닌, 과두제”

- <독서일기>와 <공부>의 공통점이 있다면 역시, ‘책’입니다. 책읽기라는 것은 마흔 다섯이 된 지금의 자신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독서일기>가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이야기 했다면 <공부>는 ‘책 속에는 길이 없고, 책과 사이사이에 난 길을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 책입니다. 사실, 책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못해요. 만약 길이 있다면 남이 만들어 놓은 길이겠죠. 길은 스스로 만드는 거에요. 텍스트를 가지고 콘텍스트 속에 스스로 길을 만드는 겁니다. <독서일기>는 책이 먼저 독후감이 뒤에 있는 책이지만 <공부>는 반대로 관심 있는 테마를 정한 후 관련된 책을 읽은 것 입니다. 책이 먼저가 아니라 뒤에 선택 된 거죠. 그게 가장 큰 차이점이에요. 책을 읽는 이유를 물으면 저는 늘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교양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나쁜 시민이라는 뜻이에요. 사람들은 ‘공부’하면 지긋지긋하다고 하는데 너무 입시위주의 공부를 해서 그런 거고, 공부는 평생 함께 가야 할 좋은 친구입니다. <공부>는 나이 마흔 다섯 된 제가 공부라는 게 참 재미있다고 말하는 책이에요”

- '책 읽기를 통해 스스로 길을 만든다'는 말씀에서 ‘길’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텍스트로 옮겨 가는 길이 아니라 사회 안으로 들어가는 길 같습니다. '비행기의 1등석에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국경이 없지만 3등석 밖에 탈 수 없는 사람들에게 국경의 벽은 높다'며 현 사회를 ‘과두제’에 빗대는 등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도 쏟아 내셨는데요.

“지금은 민주주의 시대가 아닙니다. 이미, 과두제에 들어갔죠. 미국도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에요. 과두제란 특권층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모든 부와 권력을 나눠 갖는 시대죠. 프랑스 혁명 이후 세금 내는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잖아요. 지금이야 형식적으로 1인1표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돈 있는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선거비용을 많이 낸 사람이 당선확률이 높고, 돈 있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을 만들어 내고 결국 그들이 법을 만듭니다. 그러니 민주주의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죠. 그래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속게 되죠. 정치권력, 자본주의에 휘둘리기 쉬운 사람, 만만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단돈 몇 천원만 사기 당해도 속았다고 분해하면서 책을 안 읽는 다는 건 문제죠. 엠마뉘엘 토드, 촘스키 모두 ‘책 읽는 능력이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말을 했습니다. 책읽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고 보다 철저히 기업과 정치를 감시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 소수종파의 문제 아니다”

- 아직도 여호와의 증인을 믿고 있는지요. 본문에 보면 '학력이 중학교 졸업밖에 되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서 당시에 치러지던 고등학교의 군사훈련(교련)을 피하고자 진학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1만 명의 신도를 감옥에 보내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해온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이 유일하다'고 밝히셨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사이비로 지탄 받아온 것. 대체복무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특혜시비라고 지적한 개신교에 대해서도 분노를 표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닙니다. 18세에 신앙을 버렸어요. 여호와의 증인 때문에 양심적 병역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어느 종교든 간에 살생, 살인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겁니다. 우리나라 종교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이는 한국 종교의 현 위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신앙인이라면 ‘나는 양심에 의해 살인은 못하겠다’고 하고 ‘그러니까 양심적 병역대체를 하게 해다오’라는 문제의식을 갖는 게 당연 한 건데. 우리나라 종교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이 소수종파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 겁니다. 또 불합리 한 건 종교 안에도 계급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군대나 살인문제에 대해 평신도가 고민을 하면 감옥에 가고 성직자는 면죄가 된다는 거에요. 성직자라면 평신도를 위해 발언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 고민에서 벗어나 있어요. 성직자라고 면죄 되어서는 안 되죠”

- 40년간 문학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는 일본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를 향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한 동문 오에겐자부로에 대한 열등감을 표출한 것은 아닌지’라는 반문을 던지셨습니다. 문학을 읽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인문, 교양 분야의 책들로 포진되어 있는 <공부>를 보면 스스로도 문학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20년간 문학작품을 안 읽었다고 합니다. 다카시는 21세기 교양의 총체는 자연과학으로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은 늘 사회 현실과 조우했지만 어느 날 그게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일본 문학이 언젠가부터 자아나 내면도피로 방향전환을 했다는 거죠. 그래서 문학을 안 읽는다고 해요. <문학의 종언>에서 하는 얘기가 그런 겁니다. 작가들이 점점 사회와 괴리 될 때 문학도 독자와, 사회와 끊어진다는 거죠.

문학이 살아나려면 내면에서 벗어나 사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옛날 시인, 소설가들에게 사회는 “여기 앉으세요”라며 자리를 마련해 줬습니다. 그건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말을 듣고 싶다”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아요. 그건 작가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작가도 한국사회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죠. 이렇게 사회에서는 멀어지고 내면 도피나 자아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니까 ‘미래파’라는 시가 나오는 겁니다. 작가들도 내면 도피에서 벗어나서 사회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저는 종종, 작가들은 ‘야반도주’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야반도주’는 내면 도피 문학을 말합니다. 작가는 사회에 빚이 많습니다. 그러니, 빚지고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책은 반드시 도서관에서 읽은 후 구입”

-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다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아무리 빌려 읽는다 해도 워낙 오래 된 책탐이니 모은 분량이 엄청나겠습니다.

“도서관에서 자주 빌려 읽습니다. 책은 꼭 도서관에서 읽어보고 사요. 신간은 도서관에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3달 정도 늦게 사게 되지만 그래도 읽어 보고 삽니다. 이런 구매법을 권해주고 싶습니다. 도서관, 출판계 모두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소장권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5년 전에 중학교 때부터 모았던 책을 헌책방에 모두 내다 버렸거든요. ‘나는 왜 이렇게 살까’라는 자책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그건 아마 모든 수집광, 마니아들이 한번쯤 겪는 관문일 거예요. 다 내다 버리고 ‘재생의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는 생각을 한 거죠.

전에 집에 쌀이 떨어졌는데 한 선배가 라면 사라고 돈 3만원을 줬어요. 그런 선배를 참 좋아 하는데 “지금 무슨 글 써?”라고 묻는 선배보다 “너 요새 먹고는 사나? 돈은 있나?”라고 묻는 선배가 정말 좋은 선배에요. 글이야 다 알아서 쓰니까. 아무튼 그 선배가 준 돈 3만원으로 쌀을 안사고 교보문고 가서 책을 사버렸죠. 그러면서 자책했어요. “나 정말 왜 이러고 살까” 결혼기념일에 아내 선물 사줄 돈으로 책 사버리고. 그러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귀한 책도 많았고 도서관이 안 부러울 만큼 갖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싫어서 다 갖다 버렸어요. 결국 재생의 길을 걷지 못한 거죠. 지금 다시 사 모으고 있으니까“

- 아직은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니 저는 아직 그 수준이 되려면 먼 것 같습니다. 책 읽기 전에 손을 씻는다고 들었는데요. 다른 특별한 버릇 같은 것이 있나요. 접는다거나 줄을 친다거나 포스트잇을 붙인다거나....

“그런 시기가 마니아들에게는 꼭 한 번씩 온다니까요.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웃음) 시기야 다 다르겠죠. 책은 사면 커버부터 버려요. 책 읽는데 방해가 되거든요. 책은 이방 저 방에 두고 오가며 읽어요. 한 가지 테마를 정해 놓고 10권 정도를 동시에 읽는 편입니다. 그래야 시너지가 생기거든요. 관심 있는 싶은 주제는 그렇게 접근해요. 접거나 줄치지는 않아요. 읽으면서 파악하려고 노력해야지 줄을 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면 거기에 묶이죠. 두 번, 세 번 다시 읽더라도 그건 좋은 독서법이 아니에요”

- 독서광들이 정말 어려워하는 질문이지만, 빼놓고 싶지 않은 질문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책이 있다면.

“책 많이 읽은 사람들은 그 답을 뽑아 낼 수가 없어요. 그래도 말하라면 카프카에요. 젊은 시절 무척 좋아했죠. 최근에 읽은 책 중에는 엠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을 권해주고 싶고....또....아! KBS 박성래 기자가 쓴 <레오 스트라우스>(김영사. 2005)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에요. 제가 한겨레21에 그 책 서평을 쓰면서 “이 책을 읽거나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 아는 것은 독도를 얻는 것과 똑 같다”고 했어요. 레오 스트라우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합니다. 그가 쓴 <마키아벨리>(구운몽. 2006)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에요”

 

 

 

 

- 소설 집필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부>를 바탕으로 2003년 대선 이후의 한국 풍속을 다루는 이야기를 쓸 예정입니다”

- 시인으로 데뷔해 교수의 자리에 오기까지 글쟁이로, 독서광으로 20년을 보내셨습니다. 꿈을 이룬 지난 시간 동안 행복했나요.

저는 독서광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너무 안 읽으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것뿐이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한 달에 10권 읽는 건 기본 아닌가요. 저는 조금 더 읽었을 뿐이에요. 모두가 그렇게 읽었다면 제가 독서광이 될 이유가 없었겠죠. 행복요? 음....행복했죠. 지금도 행복하고. 정규교육을 못 받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그걸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했어요. 명문대를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땄다면 세상을 뀄다는 자신감에 아마 책을 안 읽었을 거예요. 조금 배웠기에 많이 읽어야 했고, 덕분에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언제나, 행복했습니다”(김민영 기자)

06. 11. 20.

P.S. 결론은 이렇다. "기본을 갖추자!"

P.S.2. 생각이 난 김에 장정일의 시 '삼중당문고'도 다시 읽어보록 한다. '정규교육'을 못 받은 그에게 삼중당문고는 그의 '학교'였고 '교사'였으며 또한 '친구'였으리라.

삼중당문고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잃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 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 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 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왔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이 끼고 나온 삼중당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흥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고시공부 때려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 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뱃대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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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볼프강 몸젠과 1848년 체제

독일의 역사학자 볼프강 몸젠의 <원치 않은 혁명, 1848>(푸른역사, 2006)이 출간됐다. 작년말이다. '몸젠'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아서 찾아보니까 내가 들어본 몸젠은 다른 '몸젠들'이었다. 그의 조부는 고대 로마사연구로 노벨상까지 수상한 테어도어 몸젠이고, 아버지 역시 <비스마르크>(한길사, 1997) 등의 저서를 갖고 있는 저명한 역사학자 빌헬름 몸젠이다. 내가 이 볼프캉과 혼동했던 역사학자 한스 몸젠은 그의 쌍둥이 형제였다. 이 만한 가계면 적어도 역사학계의 다윈가나 헉슬리가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소개에 따르면 볼프강 몸젠은 "1968년부터 1996년 은퇴할 때까지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교에서 근세사 부문 정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전공은 제국주의 시대이지만, 그가 관심을 가졌던 시기는 자유주의에서부터 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다. 막스 베버에 관한 전문가로서 베버 전집 간행 작업을 총괄했으며, 1988년부터 4년간 독일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이 간략한 이력에 출생과 작고 년도는 빠졌는데, 1930년 11월 5일에 태어나서 2004년 8월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형제 한스는 아직 생존해 있다.

일단 독일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의 저작이란 점에서 눈길을 끌지만, 책은 부제대로 '1830년부터 1849년까지 유럽의 혁명운동'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끈다. 러시아 지성사에서 사실 1789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해가 바로 1848년이기 때문이다(얼마전에 관련 기사를 옮겨온 적이 있는 알렉산드르 게르첸 같은 경우도 1848년 혁명에 환멸을 느껴서 서구파에서 중도적인 슬라브파로 '전향'하게 된다). 그간에 이 시기는 홉스봄의 책들 정도로 카바하고 있었는데, 몸젠의 책이 '본진'의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책소개에 붙어 있는 역자의 말을 참조해보면 이렇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강조했던 것처럼, 19세기 서양의 역사는 "혁명의 시대"로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부터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그리고 1871년 파리 코뮌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역사는 정치적 소용돌이와 휴지기가 연속적으로 교차하면서 진행되었다. 이 모든 사건들 가운데서도 역사가들이 1848년 혁명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새로운 산업사회의 주축을 이루게 된 노동자들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면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때라는 점이다. 둘째, 1848년을 계기로 유럽이라는 거대한 수레를 움직여 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양대 바퀴가 엄청난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충돌은 그 후에 닥쳐올 수많은 파란과 비극의 시원이 되었다.

문득 드는 생각은 그 '파란과 비극'의 구도 안에 있다는 점에서 한국사회는 1987년 체제이면서도 세계사적으로는 1848년 체제에 속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987년 체제 전환을 위한 개헌논의가 한창 벌이질 듯한데 거기에 덧붙여 좀 거시적으로 1848년 체제에 대한 성찰도 시도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래는 몸젠의 타계 이후에 나온 가디언지의 추모기사이다. 저자에 대한 유익한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옮겨놓는다.  

Wolfgang Mommsen

A leading German historian, he brought academics together to further the understanding of his country's past

Richard J Evans
Tuesday August 17, 2004

The historian Wolfgang Mommsen, who has died of a heart attack while bathing in the Baltic Sea at the age of 73, was a leading member of a remarkable generation of liberal and left-leaning historians who championed a more critical attitude to the German past from the 1960s onwards.

He came from a famous family of scholars: his great-grandfather was Theodor Mommsen, a leading late 19th-century liberal and winner of the Nobel Prize for Literature for his trilogy on the history of ancient Rome. Visitors to Wolfgang's family home in Düsseldorf, overlooking the Rhine, could not escape noticing the large gallery of photographs of the many eminent professors whom he numbered among his ancestors and relatives. His father, Wilhelm Mommsen, was also a historian.

So, too, was Wolfgang's identical twin brother Hans, whose career matched his with uncanny precision. After studying in Marburg, Wolfgang obtained his doctorate in Cologne in 1958, in the same year as his brother was awarded his PhD in Tübingen. Both were appointed to chairs in the same year, 1968: Hans in Bochum, Wolfgang a stone's throw away in Düsseldorf.

To attend a German historical conference where both were present was an uncanny experience, as each, in true professorial style, flitted from one parallel session to the next, making participants who did not know them wonder why the same historian had to make two different contributions to the same discussion within the space of a few minutes. Hans smoked and drank, while Wolfgang did not; and seeing them together was like seeing the effects of 40 years of alcohol and tobacco on the same body: Wolfgang was undoubtedly the leaner and fitter of the two, though even he perhaps was throwing caution to the winds when he plunged fatally into the cold waters of the Baltic.

While Hans eventually became an important historian of Nazi Germany, Wolfgang specialised in the Imperial period, from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to the end of the first world war. His dissertation, on Max Weber and German politics, published in English in 1984, must surely be one of the most brilliant debuts a historian has ever made: it revolutionised our understanding of the 20th century's most influential sociologist by setting him firmly in the context of his times, and showing him to be a liberal nationalist and imperialist, much to the horror of many of his admirers. He went on to demonstrate that a knowledge of Weber's political thought and action was essential if we were to grasp accurately his theory of power. This was an outstanding achievement, and Wolfgang followed it up by playing a leading role in editing a new, comprehensive edition of Weber's works; his dynamism was essential in pushing on towards its completion.

The Mommsens were related to Weber by marriage, so there was something particularly iconoclastic in Wolfgang's book, which caused a huge storm when it first appeared. Building on this, he went on to produce a wide range of studies on German liberalism and on imperialism. But in the central period of his career, it was as an academic politician and administrator that he made his mark. A spell as a British Council scholar in Leeds at the end of the 1950s had made him into something of an Anglophile: it was a mark of his acculturation that the best gift one could take him on a visit to Germany was a packet of plain English tea - Liptons, PG Tips or Brooke Bond, not the fancy concoctions that are all one can obtain in German grocery stores. So it seemed natural that he should take over as director of the recently founded German Historical Institute in London in 1977.

Wolfgang's energy quickly made the institute into the most important centre for British historians working on Germany. He raised large sums of money, building up a well-stocked library and moving the institute into spacious and elegant new premises on the corner of Great Russell Street and Bloomsbury Square. He attracted a brilliant generation of young German historians as research fellows. And above all, perhaps, he organised a string of important conferences, of which the most influential was held in 1979, on state and society in Nazi Germany. The vehemence of the clashes between those who argued that it all came down to Hitler, and those who argued for the primacy of structural forces, took many observers aback, and still reverberates today.

In such a setting, Wolfgang was in his element. His love of controversy found another outlet in his cogent contributions to the debate that raged in Germany in the mid-1980s over whether the time had come to draw a line under the Nazi past: Wolfgang was sharply critical of those, such as the rightwing historian Ernst Nolte, who thought it had. All of this was too much for the conservative government led by Helmut Kohl that came to power in West Germany in 1982, however, and Wolfgang was effectively forced to return to his chair in Düsseldorf in 1985, leaving the institute in less energetic hands.

Wolfgang quickly found another role as president of the Association of German Historians from 1988 to 1992, and in this capacity took a lead in arguing against those who saw German reunification as the opportunity for a more nationalist view of the German past. In the mid-1990s he produced his masterwork, a huge, two-volume history of Germany from 1850 to 1918, elegantly written, comprehensive, and full of stimulating insights and material scarcely known even to specialists. On their simultaneous retirement in 1996, the Mommsen twins spoke jointly at a seminars in London and Cambridge: their mutual competitiveness had not diminished with time, and it was almost impossible for other participants to get a word in edgeways as each launched into a string of criticisms of the other's paper.

Wolfgang was not always an easy character to work with; he could seem arrogant and self-important, though those who knew him well could see through these traditional social attributes of the German professor to the real man underneath. He was particularly kind to younger British historians, and made those of us who knew him feel that we were making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explaining his country's past, whether we really were or not. His infectious, braying laughter enlivened many an academic occasion and revealed a lighter side to his nature.

His perpetual restlessness and youthful energy led him, in his 60s, after his children had grown up and left home, to leave his wife for a graduate student. However, the relationship did not last, and Wolfgang spent his final years in a bachelor apartment in Berlin, continuing to work on the Weber edition and to publish books, the most notable of which was a study of Germany's part in 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 He is survived by his wife Sabine and their four children. 

07.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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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20세기 최고의 한국 영화감독 7인

며칠전 세상을 떠난 고 신상옥 감독에 관한 추모의 글들을 읽어보다가 몇년 전 <필름2.0>의 특집기사(2003. 05. 07)를 찾게 됐다. 김영진 편집위원의 글인데, '20세기 최고의 영화감독 7인'이 타이틀이다(오해가 있을까봐 페이퍼의 제목에는 '한국'을 더 집어넣었다). 아마도 설문조사에 토대하여 작성된 듯한데, 이 참에 잠시 한국영화 '거장들'의 면면을 확인/기억해 두도록 한다. 기사에서 거명되고 있는 그 7인의 감독은 임권택, 김기영, 유현목, 홍상수, 신상옥, 이창동, 이만희이다(이창동과 이만희는 공동 6위이다). 기사에 포함돼 있는 '응답자 코멘트'는 생략한다(대신에 간간이 '나의 코멘트'는 덧붙이겠다).  

 

 

 

 

-여기 모인 7인의 감독들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들이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 남다른 작가 의식으로 역사에 기록될 이들에게 작가의 만신전을 바친다.

1위 임권택 뒤통수의 미학을 보여주는 감독

-임권택은 1980년대 후반 어느 인터뷰에서 "뒤통수를 찍어도 그 인물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내 영화의 목표“라고 말했다. 임권택의 영화는 무심하게 보면 흘려 지나치기 쉬운, 그 무수한 뒤통수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겉으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형식 속에서 인물의 감정과 세상의 공간적 기운을 꾹꾹 눌러 담는 자기만의 세계로 오랜 충무로 경력 끝에 도달한 미학을 펼쳐보이고 있다.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후 <춘향뎐> <취화선>의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임권택의 행보는 한 예술가의 고통스러운 성숙의 행로이기도 하면서 충무로라는 전통적인 한국 영화 산업이 배출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미학을 가늠할 수 있는 자취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1960년대 내내 오로지 먹고살기 위하여 영화를 찍었던 임권택은 흥미로운, 그러나 기억되지는 않는 숱한 오락 영화를 연출했으며 본인의 말에 따르면 1973년 작 <잡초>를 계기로 영화를 통해 자신과 세계에 대해 발언할 방법을 진지하게 모색하기 시작했다. <깃발 없는 기수> <족보> 등의 영화로 1970년대 후반 주목받지 못한 채 성큼 진전된 영화 세계에 이른 그는 <짝코> <만다라> 등의 영화를 통해 198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올랐다.

-<족보> <짝코> <만다라> 등은 물론이고 <티켓> <길소뜸> <서편제>, 최근작인 <취화선>에 이르기까지 임권택은 저마다의 도덕적, 인간적 결함을 안고 방황하며, 더러는 돌아오지 못하는 세계 속에서 거처할 곳을 찾는 등장인물을 그렸다. 임권택의 영화에서는 당연히 길의 이미지가 떠나지 않는다. 빨치산 토벌 대장 송기열과 빨치산인 백공산의 일생에 걸친 추적과 도피의 삶을 다룬 <짝코>는 물론이고 <만다라>에서의 두 승려의 구도의 길, <길소뜸>에서 동진과 화영이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길, <개벽>에서 해월 최시형이 끊임없이 걷는 길은 모두 인간과 자연을 이어주는 가느다란 선이었다. 임권택 영화 가운데 최고 흥행을 거둔 <서편제>에서도 길은 소리와 함께 주인공의 마음을 전해주는 풍경의 주제를 품고 있다.

 

 

 

 

-2002년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취화선>에서 임권택은 적은 편집과 간결한 화면으로 생략과 압축을 취하는 특유의 스타일을 더 밀고나가면서 <춘향뎐>에서 시도했던 완벽한 형식주의의 세계를 한 예술가의 전기라는 이야기의 세계와 조화시켰다. 그는 여전히 감정의 노출을 절제하는 생략의 싸움을 벌인다. 장승업의 일대기로 이야기의 구심력을 삼으며, 장승업이 그리는 그림과 그가 그림에 채워 넣고자 했던 자연 산수의 풍경을 겹쳐놓은 채 이야기의 원심력을 매듭 짓는 <취화선>은 임권택의 통 큰 미학의 정체를 증명하고 있다. 역사적 상처에 대한 강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임권택은 플롯에 의존하지 않는 모자이크적인 에피소드 구성의 생략을 통해, 화면과 화면의 연결 사이에 큰 관념을 넣을 줄 아는 이 시대의 어른 감독이다. 그가 성취한 것과 성취하지 못한 것은 상당 부분 한국영화의 현재와 통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래서 임권택은 영화의 거장이라기보다는 '한국 영화', '한국적 영화'의 거장이라고 해야 할 듯.) 

2위 김기영 '영화 작가’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감독

-“인간의 몸을 자르면 검은 피가 나온다”고 생전의 김기영 감독은 말했다. 김기영은 능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감독이다. 하길종 감독은 1970년대에 이미 “김기영은 누구보다 영화를 잘 아는 사람이고 ‘영화 작가’란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감독이다”라고 그를 평했다. 세월의 흐름을 이겨낸 김기영의 황당무계한 발상과 독창성은 지금 봐도 무시무시하다. 1960년에 처음 발표한 뒤 그 뒤 여러 차례 리메이크해서 김기영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된 <하녀> 시리즈는 가정부나 술집 여자가 중산층의 가정에 들어와 그 가정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얘기다.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인간들의 심리를 독특한 화면 색감과 공간 연출을 통해 파헤치며 농촌 출신 여자가 도시 가정을 무너뜨리는 이야기 구조에 은근히 근대화 과정에 있었던 한국 사회에 대한 계급적 통찰까지 새겨놓았다.

 

 

 

 

-그러나 김기영이 처음부터 사이코 스릴러영화를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설>(1958), <10대의 반항>(1959) 등의 영화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배어 있다. 그러나 어떤 영화를 만들어도 김기영 특유의 염세적인 비틀린 유머나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독특하게 풍기는 취향이 튀어 나온다. 심지어 김기영의 두번째 장편 극영화인 <양산도>(1955)에는 여주인공이 무덤에 있는 연인과 성교를 하고 함께 하늘로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1970년대의 김기영은 주로 문학 작품이 원작인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광수와 이청준의 소설을 각각 영화로 만든 <흙>과 <이어도>는 원작의 분위기와는 저만큼 떨어져 있지만 영화적으로 훌륭하게 재구성된 이 시기의 걸작이다. 또한 이 시기에 김기영은 저예산 날림 영화지만 종잡을 수 없는 스타일을 지닌 <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 등의 영화로 훗날 일부 영화광에게 컬트 감독으로 대접받기도 했다.

-하길종은 그런 김기영의 작품 세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김기영의 영화는 인습적인 줄거리 틀이 없고 인간의 의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황만이 있다. 그는 다분히 실험적이고 편집광적인 태도로 인간의 의식 구조에 집착한다. 김기영은 항상 한국 사회의 한 측면을 과장된 수법으로 그렸지만 이야기가 황당무계하냐 아니냐는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이야기가 황당하다면 당대의 한국 사회를 황당무계하게 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는 '영화작가'이면서 '감독들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아닌가 싶다.) 

3위 유현목 '예술'을 하려 한 감독, 실제로 그렇게 한 감독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사가 이영일은 유현목의 <오발탄>에 대해 “이것은 한국 리얼리즘영화의 전형이다”라고 단언했다. <오발탄>은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한국영화가 아직 산업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온전한 얼굴을 갖추기 전에 만들어진 <오발탄>은 지식인의 실존적 자의식과 몽타주와 화면 구성이라는 영화 미학의 양대 통사를 가장 체계적으로 구사한 걸작으로 칭송받았다.

-그때 이후로 유현목에게는 늘 ‘예술파 감독’이란 별명이 따라붙었다. <공처가 3대> <수학여행> <한> 등의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유현목 영화의 본령은 역시 비판적인 현실 안목, 전후 불행한 삶의 조건을 내려받은 한국 사회에 대한 도저한 구원 의식, 영화의 미학적 표현에 예민한 손끝을 드러내는 일련의 진지한 작품에 있었다.

 

 

 

 

-<김약국집 딸들> <막차로 온 손님들> <문>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사람의 아들> 등 유현목의 주요 작품을 일별하다 보면, 우리는 그가 흔히 말하는 리얼리즘 스타일의 감독이라기보다는, 곧 현실을 응시하는 감독이라기보다는 현실을 어떻게 형식에 반영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모더니즘 취향의 재능이 더 강한 감독임을 깨닫고 놀라게 된다. 동시대의 다른 한국영화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현목도 영화사에서 주문받은 작품을 만드는 자의 운명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현목은 당대의 어떤 감독보다 인간의 실존적인 조건에 고민하고 그에 따르는 가난, 분단, 종교, 근대화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카메라의 눈을 들이댄 예민한 예술적 자아의 소유자였다. <오발탄>은 그런 유현목의 예술적 자아가 가장 의기충전했을 때 세상에 나온 작품이며 한국적인 사실주의의 범례로 남는, 동시에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예술적 자아의 증거물로 역사에 제출된, 유현목 영화 세계의 기념비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다른 영화들을 별로 보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의 <오발탄>은 영화사의 과녁에 명중한 영화로 남을 것이다.) 

4위 홍상수 내게 거울을 비춰줘

-홍상수의 등장과 함께 한국영화는 ‘일상’이란 비평 어휘를 얻었다.(*그 일상은, 그러나 매우 '충격적인' 일상이었다.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은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와 함께 쉽게 넘보지 못할, 전설적인 데뷔작으로 남을 것이다.) 대다수 극영화에서 간과하고 무시했던 일상의 극적이지 않은 사건들이 홍상수의 영화에선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차곡차곡 모아진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개봉했을 때 사람들은 서울에 이토록 누추하고 비루한 일상이 펼쳐진다는 것에 새삼스레 놀랐고, 그 심심해보이는 공간 속에서 그렇게 격정이 은밀하게 휘몰아친다는 것에 또 놀랐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이어 홍상수는 연애 삼부작이라 할 수 있는 <강원도의 힘> <오! 수정>을 연달아 내놓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여러 남녀가 엇갈리며 교차하는 사랑 이야기를 짜맞췄다면 <강원도의 힘>은 같은 시간에 강원도를 따로 여행하는 불륜 관계의 남녀 이야기를 각자의 시점에 따라 1,2부로 나눠 찍은 것이고 <오! 수정>은 남녀의 기억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펼쳐지는 연애담을 펼쳐놓는다.

 

 

 

 

-홍상수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의 표면을 꼼꼼하게 관찰하기 위해 영화 형식을 열어놓는 스타일에 능한 감독이며 조금씩 자기 스타일의 영역을 확장했다. <생활의 발견>은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여행중에 만나 진귀한 에피소드를 펼쳐놓는 또 한 편의 연애담이다. 홍상수는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영화를 찍지 않는다. 그는 대부분의 대사와 행위를 현장에서 즉석에서 만들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영화의 전개를 관찰한다. 그것이 그의 영화의 톤을 멜로드라마의 정형화된 과장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슬픔과 웃음과 치욕과 기쁨을 오락가락하는 기묘한 초상화로 꾸민다.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거울을 보듯이 우리 삶을 보는 것이다. 매일 거울로 나를 바라보듯이" 라고 말했다. 그가 영화로 비춘 거울은 앞으로도 볼 만할 것이다.(*그의 <해변의 여인>을 빨리 보고 싶다.) 

5위 신상옥 1960년대 한국영화의 뿌리

-신상옥은 한 명의 영화감독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1960년대의 한국 영화 시스템을 대변하는 존재였다. 과장하자면 1960년대의 한국영화는 신상옥이 관여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대별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신상옥 감독을 감독이라고만 부르는 건 왠지 부족해 보인다. 그는 '한국영화 시스템' 자체였기에.) 신상옥이 설립한 신필름은 오늘날의 방송국 규모에 견줄 만한 규모와 인력으로 전근대적인 한국 영화 산업 시스템에서 최초로 메이저 스튜디오를 지향한 굉장한 한국 영화 제작의 본거지였다. 신필름을 무대로 신상옥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쌀> <상록수> 등의 예술적인 기품이 묻어나는 영화와 <빨간마후라>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등의 대작 전쟁 영화와 사극을 고루 찍었다. 신상옥의 작품 세계는 하나의 말로 요약될 수 없는, 대제작자의 욕망과 영화 작가의 욕망이 늘 충돌하는 다양한 색깔을 지닌 것이었지만 그것은 곧 그의 영화가 대다수 한국영화의 장르에 걸쳐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신상옥 본인의 표현을 빌면, “한국영화에선 처음으로 화면 사이즈 연출 감각이 드러나는 영화”였으며 <성춘향>은 컬러 현상으로, <빨간마후라>는 특수 효과로 한국 영화 기술사에 남는 영화기도 하다. 신상옥은 평생의 반려자인 최은희를 비롯해 수많은 감독과 배우를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배출했고 잘 알려진 대로 1980년대에는 피랍된 북한에서도 자신의 연출 경력을 이어나갔다. 오늘날 신상옥의 영화를 다시 보는 것은 거대한 한국 영화 역사의 중간 뿌리를 묶음째로 들여다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에선 전근대적인 삶의 자취를 응시하면서도 영화 형식의 현대적인 발언을 대중적인 통로로 쏟아내려 한 맹렬한 야심을 읽을 수 있다.

6위 이창동 영화감독은 지금 출장중

-이창동의 영화 세계는 한국 영화 역사의 오랜 화두였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맨 얼굴로 서로 부딪치는 격전장이다. 이창동 본인은 리얼리즘적 태도를 대중적 화술과 조화시키려는 것이 자신의 영화 세계라고 말하지만 <박하사탕>과 <오아시스> 등의 그의 영화에서 현실을 재현해 보여주려는 그의 태도는 관객의 반응을 섬세하게 고려해 '과연 영화를 보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를 집요하게 묻는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창동은 잘 알려진대로 소설가 출신이며 그의 모든 영화는 상징적 의미가 정연한 논리 체계로 완벽하게 짜여진 폐쇄적 소우주다. 그의 영화에서의 공간과 사물은 어느 것도 무심히 존재하는 법이 없다. 이미 의미론적으로 꽉 채워진 세계에 주인공은 던져져 있으며 그 세계에서 이창동은 삶의 구체적인 꼴을 그리는 자기만의 내기를 건다.(*<박하사탕>을 통해서 이창동은 많은 이들의 시대에 대한 채무를 대신 갚아주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늘 그에게 감사한다. 약간의 채무감을 느끼면서.) 

 

 

 

 

-일산과 영등포를 통해 현재와 과거의 한국 사회에서 잃어버렸고 잃어가고 있는 가치를 담아내려 한 데뷔작 <초록물고기> 이후 <박하사탕>을 통해 이창동은 본격적으로 현실과 영화 형식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낸다. <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는 광주에 계엄군으로 투입되고 독재 정권 시절의 대공분실에서 일하며, 가구점을 운영하는 천민 자본가로 증권에 투자했다가 신세를 망치는, 한국 현대사의 이런저런 현장에 늘 가까이 있던 인물이다. 그는 그 대가로 인간성의 파멸이라는 천형을 받는다. 그를 구원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영화의 플롯이다. 역순 구조의 플롯을 통해 이 인물은 역사적 인과 관계의 희생자라는 천형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

-세번째 영화 <오아시스>에서 이창동은 꽉 짜인 의미론적 세계에 불행한 남녀의 사랑을 던져놓고 들고 찍기로 일관하는 느슨한 카메라로 이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의 정체를 거꾸로 되묻고 있다. 잔인하지만 동시에 통렬한 이 방식을 통해 그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잠깐 ‘출장중’이다.(*물론 그는 출장에서 돌아왔다. 그의 <밀양>은 언제 햇볕에 나오는지?) 

6위 이만희 시대를 잘못 만난 공인받은 천재

-이만희는 전설의 걸작, 그렇지만 현재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은 <만추>의 감독 바로 그 사람이다. 동세대의 감독들로부터 가장 인정받는 천재가 이만희였으며 자기 삶을 거의 방치하듯이 마구잡이로 영화를 찍었는데도 늘 수일한 영화의 완성도를 일궈냈던 불가사의한 재능의 소유자도 바로 그 사람이다. 이만희는 출세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이래 어떤 소재의 영화를 만들어도 탁월한 시각미를 지닌, 동시에 긴장감을 주는 이야기를 짜내는 재능으로 부러움을 샀다. 그는 도회적인 우수와 고독을 그리는 데 특히 뛰어났으며 도시 공간을 그리는 데 능했던, 체질적으로 현대적인 감수성을 지닌 감독이었다.(*이만희는 김기영에 이어서 최근에 가장 주목받고 있는 거장이다.) 

 

 

 

 

-한국 영화감독들 가운데 드물게 추리영화를 만드는데도 뛰어났던 이만희는 당시의 억압적인 정치 현실에 좌절해 늘 술에 절어 살았으며 제작자가 의뢰한 숱한 영화를 마구잡이로 찍었지만 자기 색깔을 놓치진 않았다. 심지어 반공 전쟁 영화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등의 영화도 이만희가 메가폰을 잡자 상투적인 전쟁 무용담을 벗어나는, 체제와 인간의 대결 의식이라는 주제 의식이 돌출되는 박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만희는 아쉽게도 너무 빨리 세상을 등졌다.

-그의 유작인 <삼포가는 길>(1975)은 황석영의 동명 단편 소설을 각색해 영화로 만든 것이며 영화 속 세 주인공의 따라지 인생에는 당시 한국 사회에 맺힌 슬픔과 삶의 흥이 격정적으로 담겨 있다. 이 영화는 1970년대 한국의 스산한, 그렇지만 고향 같은 푸근함을 동시에 간직한 남도의 풍경을 아스라이 전해주는 이만희 최후의 유작이다.

06. 04. 18.

P.S. 사랑도 이젠 소용 없네. 삼포로 나는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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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이스트우드가 새로 쓴 역사

얼마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2006년 최고의 영화 10편을 꼽으면서 1위에 올려놓은 작품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이다. 이 노익장 감독은 지난해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각각 10월과 12월에 미국과 일본에서 개봉되었다고 하고, 이스트우드는 평단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골든글로브 및 아카데미의 유력한 작품상/감독상 후보로 점쳐지고 있단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해마다 문제작들을 쏟아내는 그의 열정이 경이롭다. 여하튼 올해 가장 주목해볼 만한 영화들 중의 두 편이 이스트우드의 작품일 거라는 예상은 해볼 수 있겠다(더불어, 영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이들의 과제목록이 하나 더 늘겠다. '이스트우드가 새로 쓴 역사'라고).  

Letters from Iwo Jima

중앙일보(07. 01. 09) 이스트우드가 새로 쓴 역사

할리우드의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77) 감독은 "역사는 승자와 패자 양쪽의 눈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통설을 단호히 거부한 그의 손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가 다시 쓰여졌다. 2차 대전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 이오지마(硫黃島) 전투를 미군과 일본군의 시각에서 각각 조명한 영화 '아버지의 깃발'(미.일 지난해 10월 개봉)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미.일 지난해 12월 개봉)를 통해서다.

이에 따라 이스트우드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가 15일 시상하는 제64회 골든글로브상에서 유력한 감독상 후보로 꼽히고 있다. 후보 자리는 모두 다섯인데, 그는 두 영화로 각각 감독상 후보에 올라 혼자서 두 자리를 차지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일본에선 특히 '이오지마…'가 평론가와 관객 모두에게서 호평을 받으며 연말연시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전투에 참가한 병사들의 인간적 고민에 초점을 맞춘다. 1945년 2월 19일 미군의 상륙으로 시작된 이오지마 전투는 한 달가량 이어졌다. 양쪽 모두에서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하루하루 죽음과 맞서 싸워야 했던 병사들의 고뇌도 깊었다.



'아버지…'은 고지에 대형 성조기를 세우는 미군 병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의 진실성을 추적한다. 영화에 따르면 사진은 연출됐을 뿐 아니라 사진 속 병사 중 한 명은 언론에 알려진 것과 다른 인물이다. 깃발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였다. 그렇지만 미국 정부는 세 명의 병사를 영웅으로 미화한 뒤 전쟁국채 발행을 위한 홍보요원으로 적극 활용한다. 이들은 "우릴 영웅으로 만드는 건 사기다. 진정한 영웅은 전장에서 죽어간 전우들"이라고 항의하지만 묵살된다.



'이오지마…'의 주인공은 섬 수비대 사령관 구리바야시(와타나베 겐) 중장과 말단 병사 사이고(니노미야 가즈나리)다. 원치 않는 전쟁에 조국의 이름으로 불려온 이들은 수시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띄운다. 따라서 영화는 전쟁을 미화하거나 전사자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버지…'은 다음달 15일 국내 개봉 예정이며, '이오지마…'는 아직 개봉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주정완 기자)

◆이오지마(硫黃島)=일본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100㎞ 떨어진 태평양의 작은 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일본 본토를 향해 폭격기를 띄우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군은 이오지마 비행장을 확보한 1945년 3월부터 도쿄 대공습을 감행해 확실한 승기를 잡게 된다.(*아주 오래전이지만 나는 가장 처절했다는 이 전투를 담은 영화 <유황도>를 본 적이 있다. 이스트우드가 쓴 '다른 역사'가 기대된다.)

마이데일리(07. 01. 08) 클린트 이스트우드, 오스카 전초전 美NBR 작품상

클린트 이스트우드(76)가 감독한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Iwo Jima)가 전미비평가위원회(National Board Of Review) 선정 최우수작품상에 선정됐다. 7일(현지시간) 영화전문잡비 버라이어티, 헐리우드닷컴 등은 이 영화가 비평가위원회 선정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고 보도했다. 비평가위원회 수상결과는 아카데미시상식, 골든글로브 등에 많은 영향을 보여와 오스카 전초전으로 불린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난 2005년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었다. 비평가위원회 감독상은 ‘디파티드’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선정됐고 남자배우상은 ‘라스트 킹 오브 스코틀랜드’의 포레스트 휘태커, 여자배우상은 ‘더 퀸’의 헬렌 메린이 뽑혔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최대 격전지였던 태평양의 이오지마(유황도) 전투를 그린 영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지난해 이 영화와 똑같이 이오지마 전투를 영화로 제작한 ‘우리 아버지의 깃발’을 감독했고 연이어 ‘아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선보였다. ‘우리 아버지의 깃발’은 미국 군인 입장에서 이오지마를 그렸고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일본군의 시각에서 바라본 전투를 필름에 담았다.

Letters from Iwo Jima

‘우리 아버지의 깃발’은 라이언 필립, 제시 브래포드 등이 출연했으며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라스트 사무라이’로 잘 알려진 와타나베 켄이 주연을 맡아 일본어로 촬영됐다.



이오지마 전투는 6명의 미국 해병대 대원이 섬 정상에 성조기를 뽑는(*꽂는?) AP보도 사진으로 유명하며 ‘우리 아버지의 깃발’은 이 사진을 모티브로한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이오지마 전투는 미군 2만 4800명이 사상자를 냈고 일본군은 2만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이경호 기자) 

07.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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