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장-뤽 낭시의 '뮤즈들'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에 관한 자료를 옮겨놓는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공동작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낭시는 흔히 '데리다 사단'으로 분류되는 철학자인데, 데리다 스스로가 이 '제자'에게 상대한 두께의 저작을 헌정했을 정도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국내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는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2005)에 낭시의 공동체론이 들어가 있고,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는 낭시 등이 편집한 책이다(참고로, 그의 저서가 일본어로는 10권 이상이 번역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간지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세계 지식인 지도>(산처럼, 2002)에서 대략적인 소개를 읽어볼 수 있다.

 

 

 

 

난데없는 낭시 타령인가 싶지만, 러시아 학자와 낭시와의 대담 하나를 번역하게 될지 몰라서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영역본으로는 가장 최신간인 <다양한 예술: 뮤즈들2(Multiple Arts: The Muses II)>(스탠포드대학출판부, 2006)를 대출했다. <뮤즈들>에 이어서 자투리글들을 모은 낭시의 예술론집인데(불어 원서가 있는 건 아니고 영역본의 편자가 낭시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표지의 사진이 인상적이어서(게레로의 작품이라고만 나온다)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 두 책을 소개한다는 명분으로 이 페이퍼는 '세계의 책'으로 분류된다. 아직 주저들이 번역/소개되지 않은 철학자이지만(나는 네댓 권의 영역본과 연구서를 갖고 있다) 불시에 또 소개될지 누가 알겠는가.

달랑 이런 내용만 띄워놓기는 멋쩍으니까 참고자료도 하나 덧붙여둔다. 앞서 언급한 블랑쇼의 책을 번역한 박준상씨가 2003년 6월 동국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게재한 소개의 글이다.

장-뤽 낭시와 공유·소통에 대한 물음

박준상 (연세대 철학과 강사)

1. 공유 내의 존재 etre-en-commun
여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장-뤽 낭시Jean-Luc Nancy(1940- )에 대해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하는가? 그의 사상의 특성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을 밝혀봄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낭시의 사유의 핵심에 정치적인 것이 놓여 있으며, 그의 사상은 시종일관 정치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많은 다른 정치사상가들의 경우에 그러하듯, 낭시는 물론 정치적 사건들(동구권의 해체, 걸프전), 정치적 변화들(세계화, 서양중심주의의 한계), 정체政體들·이데올로기들(민주주의, 공산주의, 나치주의)에 대해 구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분석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일 뿐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판단으로 이어질 뿐이며, 모든 경제·문화·사회현상들을 총체적으로 설명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원리를 배경에 깔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낭시의 정치철학은 이른바 '형이상학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 또는 조건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치적인 것이란 이미 공동존재(함께 있음, etre-avec)에, 인간들 사이의 소통에 기입되어 있으며, 어떤 '우리'의 존재의 수행(실현, 표현)이다. '우리'의 존재, 다시 말해 '나'의 존재도 타자의 존재도 아닌, 모든 단일성, 동일성(정체성), 내재성 바깥의 존재, 고정된 개체의 속성에 따라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나'와 타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 내의 존재, 관계에만 정초될 수 있는 존재.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귀결되는 자기의식의 반대편에 놓이는 존재, 또한 어떤 주제theme에 고정되어 동일화된, '내'가 구성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존재. 정치적인 것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수행이란 '우리'의 서로에게로 향함·나타남, 관계 내의 서로를 향한 실존들의 만남, 접촉touche이다. ('접촉'은 낭시의 용어이지만, 그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람은 그의 동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이다. 데리다의 낭시에 바쳐진 저서, <접촉, 장-뤽 낭시> 참조, J. Derrida, Le Toucher, Jean-Luc Nancy, Galilee, 2000.)



낭시는 보이지 않는 관계('나'와 타인은 보이지만 그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를 조명하며, 거기에 그의 사유, 정치적 사유의 핵심이 있다. 그러나 '나'와 타인―또는 타인들―의 관계를 정치에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거나 과장이 아닌가? 분명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 그 자체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공유 내의 존재는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종류의 만남의 근거에 있는 나눔partage, 어떤 '무엇'을 나눔이 아닌,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나눔의 양태, 나눔의 전근원적 양태를 지정한다. 공유 내의 존재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종류의 소통과 공동체 구성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결정·행동에 있어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유 내의 존재는 '정치적'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정치의 근원이다.

아마 낭시는 공유 내의 존재가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사유된 적이 없이 망각 가운데 묻혀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까지 나눔과 공동체라는 정치적 문제에 있어, '무엇'을 나눔과 '무엇'에 기초한, '무엇'을 위한 공동체만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걸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하나의 '무엇', 즉 재산의 공유共有였다.

나치는 열광적인 정치공동체를 이루었지만, 그것은 공동의 이념적 '무엇'(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의 기초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동체가 가시적 '무엇'(재산, 국적,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때,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왜곡, 말하자면 보이는, 쥘 수 있는―전유專有할 수 있는―동일성의 지배, 공유 내의 존재의 망각. 그 '무엇'에 따라 전개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목적일 수 없는, 실존의 나눔의 망각, 함께 있음 자체의 망각.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자에 대한 이해와 소유라는 관심에 사로잡혀 존재망각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낭시는 우리가 보이는 '무엇'에 대한 공유 바깥의 나눔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기입되는 공유 내의 존재를 망각했다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 결국 낭시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적 물음이 있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 아니며, '무엇'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우리는 재산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이 말은 재산을 나눈다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다만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음, 즉 공유 내의 존재를 위한 함께 있음,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눔,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됨,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



2. 유한성의 경험
공유 내의 존재,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시적 어떤 것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향해 다가옴, '내'가 그 다가옴에 응답함, 즉 '내'가 타인을 향해 건너감, 타인을 향한 외존外存ex-position, 관계 내에 존재함, 어떠한 경우라도 비가시적, 동사적 움직임들의 부딪힘, 접촉이다. 유한有限한 자들의 만남. 낭시는 현대철학에서 많이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된 '유한성finitude'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상가이다.

인간의, 인간들의, '우리'의 유한성, 여기서 유한성은 첫째로 완전한 내재성內在性의 불가능성이다. 완벽히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을 수 있는, 그 스스로에 정초된―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로 향함, 그에게 노출되어 있음, 그를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함, 그것이 '나'의 존재의 조건이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향해 있는 타인에 의해 제약된 존재, 하지만 그 제약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sens에 이를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유한성 가운데에서의 존재란 먼저 외존 가운데에서, 관계 내에서의 존재, 폐쇄성과 내재성 바깥의 존재를 의미한다.

두 번째로 유한성은 만남의 유한성을 가리킨다.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접촉은 불규칙적, 단속적 시간에, 즉 시간성 내에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을 통해 확인하고, 표상할 수 있는 '무엇'에 정초되어 있지 않고, '무엇' 바깥의 타인의 나타남에 응답하는 순간의 정념情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접촉, '무엇'에 의하지 않는, '무엇' 때문이 아닌 급진적인 만남, 그것에 정념만이, 극단의 단수성(singularite, 타인의 나타남의 단수성)을 긍정하면서, 답할 수 있다. 정념, 만져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무엇'에 따라 고정될 수 없는 관계 자체에 대한 감지.

그러나 만남의 유한성은 인간들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나아가 지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유한성은 관계를 '내'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즉 타인을 '나'에게 필요한 그 '무엇'의 요구에 따라 어떤 동일성 내에로 동일화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에 따라 그것은, 만일 '무엇'이 관계를 지배할 때, 그러한 지배(예를 들어 재산의 지배, 정치적 이념의 지배, 인종과 국적의 동일성의 지배―지금 이 땅의 경우 학벌과 지역적 동일성의 지배)에 지속적으로 저항할 수 있게 하는, 근거·이유·목적도 없는 만남, 또는 그 자체가 이유와 목적인 만남, 즉 실존들의 접촉과 그 순수성을 정당화한다.

세 번째로 낭시가 말하는 유한성은, 그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한계상황(죽음, 병, 고독)에 놓여 있는 인간의 존재양태를 표현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낭시에게 유한성은 공유 내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죽음에로의 접근이 '나'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존재양태, '그 누구Man'의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에로 눈을 돌리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반해 낭시는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본래적 실존에로 돌아가게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외존(타인을 향해 존재함, 타인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을 통한 급진적인 공유 내의 존재를 부르게 한다고 본다.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은 '나'와 자신의 본래적 관계의 회복을 요청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절대타자 앞에서 '나'의 동일성이, 그것이 무엇이든,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07. 01. 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한국사회는 기업사회인가?

어제 주문한 책들 중의 하나는 사회학자 김동춘 교수의 신간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길, 2006)이다. 아마도 작년 연말에 나왔어야 하는 책이 약간 지체된 모양이다. 저자의 전작들 만큼이나 두툼하고 또 듬직하다. 거기다 제목! 그래서 읽어야 할 '의무감' 같은 걸 촉발시킨다(2월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야겠다). 미리 리뷰기사 두 개를 참고삼아 읽어둔다. 개인적인 스크랩이지만 출간 소식을 반가워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일보(07. 01. 12) "한국, 10년만에 기업사회로 변했다"

외환 위기를 경험한 지 10년. 세련된 말로 표현을 못해서 그렇지, 국민 대다수는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몸으로 알고 있다. 김동춘(48)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최근 출간한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도서출판 길)에서 “한국이 ‘기업사회’가 됐다”는 말로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표현한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지만, 단순화하면 시장 혹은 기업이 사회를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사회가 시장의 일부가 되고, 기업이 가장 이상적인 조직으로 부각된 것이다.

김 교수가 말하는 한국의 기업사회화 양상은 이렇다. 초일류, 일등 등 경쟁을 부추기는 용어가 난무하고 CEO 대통령, CEO 총장, CEO 장관, CEO 시장이 유행이다. 경제부처 장관이 교육부 장관에 기용되고, 정부 관료가 대기업에 무더기로 들어간다. 대기업 혹은 그 대기업 총수의 잘못은, 돈을 벌어준다는 이유로 법적 면죄부를 받고, 엄정한 법 집행을 책임지고 있는 법무부 장관은 “기업이 신명 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삼성경제연구소가 2만 달러 시대를 주창하면 정부가 이를 받아 반복한다. 정부는 운영의 법칙과 지향이 기업과 다른데도 여전히 기업 배우기에 열중이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우리 사회가 미국을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미국은 돈이 지배하는 사회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기업가의 아들이고, 낸시 페레스 하원의장은 남편이 백만장자다. 기업에 대한 비판이 거의 없고, 그래서 기업이 정치 외교 군사 심지어 사람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김 교수가 보기에 한국의 기업사회화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돼 있다. 시장도, 국토도 좁아 생존의 압박이 매우 크기 때문에 기업의 신호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교육 의료 복지 등 공공 영역의 임무를 개인이 부담하는 것도 돈에 대한 의존을 높이는 요인이다.

김 교수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기업사회가 반공사회와 닿아있다는 점이다. 과거 안보를 이유로 고문 등 비인도적인 행위가 용인됐듯이, 지금은 돈만 되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것이다. 군사형 사회가 총과 칼을 앞세웠다면 기업사회는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김 교수는 이 대목에서 “히틀러는 경제 불황을 활용해 나치즘을 일으켰다”고 상기한 뒤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절망감이 우리 사회에 새로운 파시즘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의 기업사회화 정도가 미국에 달렸다고 말한다. 고삐 풀린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견제를 받을 때 우리의 기업사회화도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배층의 도덕성에 대한 유달리 강한 저항력도, 기업사회화를 억제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보고 있다.

김 교수는 “1970년 전태일이 제 몸을 불살랐을 때는 대학생들이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지만, 지금과 같은 분위기라면 사회적 약자가 분신해도 그를 못난 놈이라며 더 소외시킬 가능성이 있다”며 “당장 먹고 살기 힘들더라도 과도한 기업사회화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박광희 기자)

한겨레(07. 01. 12) 한국사회는 기업의 식민지

시이오 시장, 시이오 총장, 시이오 목사, 시이오 대통령…. 한국에서 시이오(CEO,기업 최고경영자)는 모범이자 모델이고 표준이자 이념이다. 지방자치단체를 운영하는 일에서부터 국가와 정부를 통괄하는 일까지, 학문의 전당을 책임지는 일에서부터 사람의 영혼을 돌보는 일까지 모든 것이 ‘기업경영’을 이상형으로 삼고 있다. ‘전사회의 기업화’ 논리는 기업가 식으로 하는 것이 가장 창조적이고 가장 효율적이며 가장 진취적이라는 가정 위에서 맹렬한 힘으로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있다.

‘반공’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던 한국사회는 이제 혁신만이 살 길이고 변화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고 있다. 요컨대, 기업만이 구세주라고 통성기도하는 형국이다. 이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여기에 함정은 없는가. 혹시라도 기업가의 피리 소리를 따라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내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가 최근 출간한 책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성찰>(도서출판 길 펴냄)에서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기업화 광풍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나섰다.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 사회 변화를 성찰한 글을 모은 이 책은 서론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김 교수는 이 글에서 1997년 외환위기 이래 한국사회가 ‘기업사회’로 전환했다고 진단하면서, 그 변화의 파국적 본질을 직시할 것으로 촉구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처음 제시한 ‘기업사회’라는 말은 한 마디로 줄이면, 기업이 중심이자 주인이 된 사회다. “기업이 단순히 사회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기업의 모델과 논리에 따라 재조직되는 사회”가 기업사회다. 경제학자 카를 폴라니의 논리를 빌리면, 기업사회는 “시장이 사회로부터 분리돼 나와 자율적인 것이 되는 데 머물지 않고, 사회를 식민화한 상태”를 말한다. 이 식민화의 가공할 성격은 사람들이 식민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과거의 식민화가 총과 칼을 앞세운 것이었다면, 새로운 식민화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앞세운다. 사회 전체를 기업의 힘 아래 굴복시킨 기업사회는 강력한 이데올로기 체제다.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와 헌신을 끌어내고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작동하기 때문이다.

삼성공화국, 정책 입맛맞게 조성

자본주의 체제, 시장경제 체제라고 해서 모두 기업사회인 것은 아니다. 기업이 사회의 기준으로 서고 기업가 마인드가 사회적 마인드가 되고, 기업의 사회지배를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회가 기업사회다. 기업은 단순이 이윤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고용을 창출한다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이윤은 더 많은 고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기업사회의 바탕에 깔린 일반적 믿음이다. 기업의 이익이 곧 사회의 이익이 되는 것이다. 이 믿음 위에서 이제 기업 바깥의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기업가의 손이, 기업가 마인드가 뻗치지 않은 공공 영역은 비효율과 무능력의 온상으로 낙인찍힌다. 그런 인식이 진전되면 “효율성과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이 정부와 정치를 모두 직접 담당하는 게 좋지 않은가”라는 과격한 주장마저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대기업이 국가의 교육과 복지는 물론이고 국가의 최후 보루인 안보와 전쟁까지 담당하는 ‘기업가정부’, ‘기업가국가’가 나타날 가능성이 커진다. 김 교수는 지금 미국이 거기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의 지구적 확산으로 기업사회라는 미국적 모델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기업사회는 국경을 치고 들어가 점령군처럼 주둔하고서 연일 포고령을 내린다. 모든 것을 기업의 이익에 맞춰 바꾸라. 부패한 것은 참아도 이익을 내지 못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비효율이야말로 부도덕이다.

기업사회는 수천년 인류를 이끌어온 도덕의 기준마저 바꾸어 놓는다. 그러나 기업사회는 결코 대중의 이익에 복무하는 사회가 아니다. 기업사회는 기업주의 사회이며, 더 좁혀 말하면 대기업 소유주와 경영자의 사회다. 통제받지 않는 기업사회는 대기업의 절대권력화를 낳으며 그것은 기업사회 이데올로기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기업부패를 불러온다. 기업가의 이윤 추구와 공공의 이익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빚어진다. 기업의 생산성 향상의 결과는 사회의 특권층에게 집중된다. 공공성은 실종되고 기업의 사익이 공익으로 둔갑해 횡행한다.

약자 보호법 대항 공장이전 위협

김 교수는 지난 10년 사이 기업사회의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기업은 선과 정의와 올바름의 잣대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기업을 비판하는 것은 곧 공익을 비판하는 것이 됐고 기업가의 잘못을 추궁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산을 공격하는 것이 됐다. 김 교수는 여기서 삼성의 경우를 이야기한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기업사회 한국’의 한가운데에 삼성이 버티고 있다.

삼성은 국가경제를 책임지는 견인차와 같은 존재로 칭송받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나서서 자신이 아니라 삼성이 한국의 대표자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삼성의 경쟁력 강화는 곧 국가 경쟁력 강화로 통한다. 급기야 정부의 주요 정보가 삼성의 정보망을 통해 사유화된다. 삼성의 힘은 관료사회를 움직여 정부의 정책마저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정할 정도로까지 강력해지고 있다. 국가와 정부가 껍데기 또는 들러리가 되고 삼성이 나라의 핵심을 장악하는 말 그대로 ‘삼성공화국’이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공화국 현상은 한국사회가 기업사회로 진입했음을 도드라지게 입증하는 사례다. 기업사회는 사회를 재편하려는 이데올로기 공세도 멈추지 않는다. 기업가 단체들이 ‘중고등학교 경제교과서 반시장·반기업 정서를 부추긴다’며 뜯어고칠 것을 요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 법안을 통과시키면 기업을 국외로 이전해버리겠다는 ‘기업 파업’ 위협도 마다하지 않는다. 국민이 기업을 키운 것이 아니라 기업이 국민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공격적으로 구사하는 모습이다.

정치기능 복원·주체적 대중이 해법

기업사회의 이 진군은 사회적 보호장치가 폐기되고 약자가 강자의 힘 앞에 무방비로 서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기업사회에서 처벌은 체포·구금·고문·학살이 아니라 명예퇴직 강요, 분사, 비정규직화, 해고, 비연고지 근무 요구”로 나타나며, 더 끔찍한 것은 그것이 “처벌이 아니라 기업 경영 합리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포장돼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약자들의 자살행렬이 ‘기업의 처벌’에서 비롯한다.

김 교수는 이렇게 사회 구성원을 식민화하고 지배하는 기업사회에서 벗어나려면 정치의 기능을 복원시켜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기업사회의 하수인이 된 정치를 본디 상태로 정상화해야 한다. 대중이 단순히 기업사회의 지배대상인 ‘소비자’가 아니라 시민으로, 주체로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유권자이며 노동자이며 주민이며 학부모이며 자신의 귀중한 삶의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존엄한 인간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억울한 죽음에 공감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다.”(고명섭 기자)

07. 01. 12.

P.S. 한국사회의 단면을 꼬집는 기사 하나를 덧붙여둔다.

경향신문(07. 01. 12) 상상할수록 불쾌한 광고…양극화 부추기는 TV광고 눈총

TV 광고가 도를 넘는 소재와 설정으로 시청자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 소비자들의 마음은 물론 지갑까지 열어야 하는 광고의 속성상 허영을 부추기고 현실을 과장할 수도 있지만, 요즘 방영되는 광고는 지나치게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하는 데다 사람 목숨을 아예 돈으로 환산하는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부럽거나 불쾌하거나

지난해 말 한 보험회사 광고가 논란을 일으켰다. ‘남편이 죽은 뒤 보험설계사의 도움으로 생명보험금 10억원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광고를 본 시청자들은 ‘실제로 10억원을 받으려면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는 지적부터 ‘생명을 돈으로 연결시켰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보험설계사를 남자로 설정해 부적절한 상상까지 가능케 했다’는 반응도 있었다. 광고회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광고가 소비자들에게 불쾌감을 안겼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명품 아파트’ 이미지를 남용하고 있는 아파트 광고에서 소형 평수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헬스클럽에 골프장까지 갖춘 대형 아파트에 사는 여성들은 서로 같은 아파트 주민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때로는 유럽이나 뉴욕의 이미지를 차용하며 집안에서 드레스를 입고 다닌다. 유부남, 유부녀가 아파트에서 첫사랑과 재회하는 분위기를 묘사하는 한 아파트 광고는 ‘불륜 아파트인가’ 하는 냉소까지 유발한다. 아파트 속 모델들은 신형 아파트의 특별한 시설을 통해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고 배우자, 아이와 함께 지나가다 어색하게 마주친다. 집값 폭등과 경제적 양극화,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 등으로 괴로운 소비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광고는 끊임없이 ‘돈 들고 돈 되는’ 아파트만 보여준다.

자동차 광고에서는 자동차의 크기나 값을 사회적 ‘성공’과 ‘능력’의 증거로 연결시킨다. 광고 속에 외환위기 시절 절약의 이미지를 대변하기도 했던 소형차나 경차는 온데 간데 없고 대형 외제차를 경쟁 상대로 삼는 대형차들만이 넘쳐난다. 대형차를 타는 아버지를 둔 아이가 친구들에게 인형을 나눠주는 내용이 방영되기도 했다.

이런 광고에 대해 시청자들은 불쾌함을 넘어 화가 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학생 김민석씨(27·한국외대 불어과)는 “아는 분이 광고를 본 아이가 ‘우리는 집이랑 차가 왜 이렇게 작으냐. 언제 저런 데로 이사가느냐’고 물어 가슴이 아팠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트렌디 드라마에 외제차와 최신형 휴대전화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처럼, TV 광고도 비현실적 상황으로 허영을 조장한다”고 말했다.

#일그러진 현실 더욱 일그러지게

학습지나 학원 광고도 비뚤어진 우리의 교육현실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한 학습지 광고에서는 학부형이 치과에서 이빨을 잘못 뽑히고도 “괜찮다”며 웃는다. “당신은 상위권 엄마의 기쁨을 아느냐”고 묻는 이 엄마는 아이가 상위권이 된 배경에는 학습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와 함께 학습지 교사에게 머리 숙여 인사한다. 심지어는 ‘학년을 앞서가는 힘’이라며 미리 학습지로 공부한 아이들이 학교 선생님을 떠난다는 내용의 광고도 있다. 광고 속에 등장하는 교사마저 ‘애들은 (학습지)를 좋아해. 자꾸 자꾸 앞서가면 나는 어떡해’라며 노래한다.공교육이 힘을 못 쓰고 사교육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현실이 광고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교육효과를 강조하는 것을 넘어 공교육을 아예 무시하는 듯한 광고를 보는 시청자들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김형진 팀장은 “광고가 부정적인 현실을 더욱 왜곡하며 사회적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팀장은 “소비층은 다양한데 비해 광고는 상류층 지향으로만 흐르고 있다”며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끌어내기 위해 불쾌감까지 주면서까지 소비자들을 자극한다”고 지적했다.(장은교 기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묵공'과 묵가의 유토피아

금요일엔 대개 한겨레를 사서 보기 때문에 한국일보를 지면에서 읽는 건 드문 편이다. 그래도 내일을 한 부 사서 읽어봐야겠다. '이대현의 영화로 보는 세상' 꼭지 때문이다. 최근 한중일 3국 합작으로 제작하고 안성기와 유덕화가 주연한 영화 <묵공>이 상영중인 걸로 안다. 관심을 갖던 차에 며칠전 한 사이트에서 영어자막으로 된 영화를 다운받아서 초반부만을 봤는데, 기사에서는 제목에도 들어가 있는 묵자/묵가의 사상에 대해서 유례없이 긴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설마 지면에 다 실리는 것일까?). 필자의 열기가 느껴지는 기사이다. 일독해 볼 만하다(묵독해야 하는 건가?).

한국일보(07. 01. 11) <묵공>이여, 당신의 꿈이 만든 집단자살극을 아는가

'묵자' 읽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3, 4년 전이니 공교롭게도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것과 때를 같이한다. 물론 우연의 일치였다. 책을 정리하다 읽지 않고 두었던 <묵자>를 발견하고 펼쳐본 것이 계기였다. 첫 장부터 눈길을 사로 잡았다. 평등과 기득권타도, 분배를 외치며 집권한 노무현정부에 대한 기대와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낙원'을 꿈꾸었던 묵자. 2,500년 전 그는 꿈은 정말 멋지고 원대했다. 차별 없는 하늘같은 나라. 내남없이 서로 사랑하는 겸애(兼愛)는 500년 후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한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고, 계급차이 없이 가진 것을 골고루 나누고 아껴쓰는 절검(節儉)은 마르크스의 사회ㆍ경제 사상과 다르지 않았다.

중국 천하가 갈갈이 찢기어 언제 오늘의 형제가 적이 돼 쳐들어 올지 모르는 상황에,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전쟁으로 피냄새가 마를 날이 없는 춘추전국시대에 홀연히 '반전'구호를 과감히 들고나온 좌파의 시조. 그는 스스로를'북방의 천한 사람'이라고 했다. 봉건제도와 계급사회에서 고통 받는 백성에 눈을 돌려 기존의 신분사회를 기반으로 한 철학인 유학 대신 '겸애'를 주장하며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자신이 이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면 끝까지 행하는 사람'이었다. 낡고 검은 옷에 맨발로 천하를 돌며 이웃 사랑을 외친 운동가이자 묵가의 교주였다. 전쟁에 지치고, 가난에 신물이 난 백성들은 열광했다. 그들을 향해 그는 외쳤다.

“하늘은 우리 모두를 똑 같이 사랑한다. 그 은혜를 저버린 자는 어김없이 천벌을 받으리라. 하늘을 숭배하는 자, 하늘의 두려워하는 자, 하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 하늘의 이치를 본받는 자는 성(盛)하리라. 그의 혼은 하늘에 있으리라. 하늘을 비웃는 자,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 하늘을 배반하는 자는 멸(滅)하리라. 몸뚱이와 영혼이 함께 땅에서 썩어 흔적조차 사라지리라.”

“하늘은 가름(差別)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곳, 모든 생명에게 비와 이슬을 내려주고, 빛과 바람을 맞게 한다. 이것이 하늘의 마음이다. 천하는 큰 나라 작은 나라 할 것 없이 '하늘'의 고을이다. 어리고 나이 많고 귀하고 천한 구별 없이 모두 '하늘'의 자식이다. 가는 터럭이라도 할지라도 하늘이 만들지 않은 게 없다. 그런데 어찌 하늘이 천하를 아울러 사랑하고 이롭게 하지 않겠는가.

“가름은 사람에게서 나왔다. 탐욕이 세상을 갈라놓고, 전쟁을 만들고, 빈부를 만들고, 계급을 만들었으며 귀함과 천함을 구분 지어 놓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이 가름을 없애는 일이다. 가름을 없애기 위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힘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고, 바른 도(道)를 알고 있으면 서로 가르쳐주고, 재물이 있으면 서로 나눠주라.”

이 얼마나 멋진 주장인가. 인류가 꿈꾸는 지상낙원의 모델을 보는 듯했다. 정말 인류사에 감춰진, 불운하게도 덜 알려진 위대한 사상이 여기에 있었구나. 본격적으로 <묵자>를 만나보기로 작정했다. 묵자를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묵자를 언급한 중국 고전들을 찾았다. 이런 위대한 사상가를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다니. 노무현정부는 뭘 하나. 자신들의 통치철학이 될 수 있는 모델이 여기에 있는데…'

고전 읽기의 즐거움 중 하나는 그것을 현실과 끝없이 비교하는 일일 것이다. <묵자>도 그랬다. 기존 세력과 가치관(유학)에 대항하며 변혁을 꿈꾸는 묵자의 외침은 그 반역의 강도만큼이나 매력적이었다. 마치 노무현의 좌파정부가 처음 그랬듯이(*이 좌파정부에는 따옴표를 붙여야 하지 않을까?).

묵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외쳤다. “의로움이야말로 올바른 것이며 천하의 보배다. 의로움은 어리석고 천한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드시 귀하고 지혜로운 것에게서 나온다. 그럼 무엇이 귀하고 지혜로운가. 하늘이 귀하고 하늘이 지혜로울 다름이니, 의로움은 하늘에서 나오는 것이다. 만약 의로움을 행하기가 불가능하더라도 절대 그 길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목수가 나무를 깎다가 잘 되지 않는다고 먹줄을 버릴 수는 절대 없다. 이를 따르는 것이 '천의'(天義)다.”

묵가는 확신주의자들이었다. “칭찬 받으려 의를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가는 것이 진실로 올바른 도라면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 한들 무슨 상관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입으로만 그러지 않고 몸소 실천했다. 목수 출신인 묵자 스스로 몸에 따라 옷을 입고, 배나 채우려 음식을 먹으며 떠돌아다니는 천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음악을 부정하고, 전쟁이 있는 곳이면 열흘이 걸리더라도 달려가 그 부당성을 호소했다.

김학주 교수는 그의 저서 <묵자, 그 생애·사상과 묵가>(명문당 펴냄)에서 그런 이들을 이렇게 규정했다. "지배자의 비위를 건드리고 시대조류를 어기며 낮은 서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과격한 주장들을 내세우고, 또 자기 희생을 무릅쓰며 그러한 주장들을 실천하였다는 것은 종교적인 신념 없이는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묵가는 묵자를 정점으로 받드는 조직적인 집단을 이루어, 그 집단의 주장과 조직을 위하여서는 자기 희생을 가벼이 여기며 일사분란하게 단결하였으니, 이것도 종교집단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믿어진다. 따라서 묵자는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묵가라는 종교의 교주였고, 그의 사상은 종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묵가는 단순한 학파가 아니라 당시 사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던 종교집단이기도 했다.

이를 증명하는 사건이 묵가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인류 최초로 기록될 끔찍한 종교적 집단자살극이. BC381년의 일이다. 이날의 사건을 소설식으로 꾸며보면 이렇다. 맹승은 '검은 무리'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거자(巨子)다. 그는 친한 친구이자 스승이기도 한 초나라 양성군의 부탁으로 제자 183명과 함께 그의 성을 지키는 일을 맡기로 했다. 성에 도착하던 날, 양성군은 옥을 반으로 깨뜨려 하나를 맹승에게 주며 말했다. “우리 이걸 부신(符信)으로 삼아 나눠 차세. 믿음의 맹서일세. 어떤 일이 있을 땐 이 부신을 서로 합치고 기꺼이 서로를 따르기로 하세.”

맹승은 훗날 언젠가는 이 옥 조각이 자신과 제자들의 피를 요구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 역적이 되고, 아침에 초의 땅이 저녁에 진의 땅이 되는 배반과 전쟁의 혼란시대가 아닌가. 그러나 맹승은 이 위험천만하고 어리석은 맹서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가 베풀어준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맹승은 젊은 시절 양성군의 식객이었다. 양성군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함께 거두어 주었다. 다른 식객이 주인을 도운답시고 빈둥대며 입만 나불거리는 것과 달리 맹승과 제자들은 잠시도 쉬지않고 집 안의 궂은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맹승을 양성군은 좋아했다. 기꺼이 대부로 대접했고, 친구가 돼 아침 저녁 겸상까지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 때 맹승은 다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어떻게 보든 이 친구와의 신뢰는 지키리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자 하는 하늘의 의로움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초나라 왕이 승하했다. 한달 전이었다. 초나라도, 양성군에게도 비극의 전조였다. 양성군은 서둘러 맹승에게 성을 맡기고 왕궁으로 갔다. 도읍인 영(?)으로 떠나는 양성군의 얼굴에는 비장한 빛이 감돌았다. 그 이유를, 그리고 그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이유를 맹승은 이제야 알았다. 왕의 장례가 있기도 전에 재상 오기가 죽었다. 천하의 별이 또 하나 떨어졌다. 그가 누구인가. 불과 6년 만에 덩치만 컸지 허약하기 그지없는 이 나라를 200년 전 장왕시대의 영광으로 되돌려놓지 않았는가. 구차하게 이웃 나라와 손잡지 않고 위와 한의 남하를 막고, 날로 세력을 뻗치는 진(秦)의 깊숙한 곳까지 공격, 천하를 다투던 인물이 아닌가.

적들은 그의 이름만 듣고도 몸을 떨었다. 잔인함과 출세욕과 뛰어난 용병술로 숱한 일화를 남기지 않았던가. 그는 노(魯)의 장수가 되기 위해 적인 제(齊) 출신 아내의 목을 서슴없이 베었다. 병사들과 똑 같은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걸었으며 자기 식량을 직접 들고 다니는 등 기꺼이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병사들은 그 모습에 감격했다. 오기는 알고 있었다. 승리는 무기도, 병사의 수도, 맛있는 음식에도 있지 않고 병사들의 사기에 있다는 것을.

장수에게 감격한 병사는 '목숨 아끼지 않은 전사'가 된다. 그것을 알고 있는 한 어머니는 종기가 난 아들의 고름을 그가 직접 빨아주었다는 소식에 통곡했다. 사람들이 연유를 물으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에 남편이 종기가 났을 때, 그가 고름을 빨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그에 감격해 물불 안 가리고 싸워 결국 죽었습니다. 이제 내 아들까지 그렇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왕의 신임도 두터울 수 밖에 없었다. 오기는 군사 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개혁의 칼도 휘둘렀다. 그의 전략은 간단했다. 그냥 있는 것 잘 정리해 두 배로 만들기였다. 재물만 탐하면서 불평불만 해대는 귀족과 관리들을 쓸어내 버렸다. 그리고 불필요한 관직을 없앴다. 예외는 없었다. 빈둥거리는 왕실의 친척의 봉록을 없애고 그것으로 군사를 길렀다. 군대는 풍족해졌고, 병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았다. 그런 병사들을 이끌고 오기는 남쪽의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쪽의 진(陣), 채(蔡)를 정벌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권력과 부정하게 얻은 재물을 뺏긴 왕족과 귀족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나라의 부강보다 자신의 이익이 중요한 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강력한 그의 후원자인 왕이 죽은 것이다. 왕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 거사에 양성군도 가담했다.

쫓기다 막다른 길에 몰린 오기는 왕의 시신 아래 숨었다. 그들은 오기를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화살은 오기는 몸에 무수히 꽂혔고 그들은 오기의 사지를 수레에 묶어 찢어 죽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화살이 왕의 시신에도 무수히 가서 막힌 것이었다. 아차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역시 오기는 지략은 그들보다 한 수 위였다. 죽어가면서도 원수를 갚을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멍청한 그들은 오기가 왜 도왕의 시신 아래로 숨었는지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위험에 처하고서야 알았다. 덜 떨어진 태자 역시 아버지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던 오기가 아니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불효자로 남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는 숙왕(肅王)에 오르자마자 장수 영윤(令尹)을 불러 명령했다. "아버지의 시신에 화살을 쏜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라. 그 일족까지 죽이고, 그들의 성을 거둬들여라."

그 일로 이미 70여 집안이 도륙됐다. 이제 마지막 양성군 차례다. 더구나 순순히 목을 내놓지 않고 도망가버렸으니 왕의 분노는 더욱 크리라. 왕의 명령은 정당하다. 그 정당함에 맞서는 것은 반역이다. 맹승은 고개를 돌려 제자들을 보았다. '저들은 몸이 가루가 되도록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래도 왕의 군대를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목숨을 위해 대신 지켜주기로 약속한 남의 성을 내줄 수도 없다. "내일이면 왕의 군대는 올 것이고, 우리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맹승은 바람을 피하려 고개를 잔뜩 숙인 채 누(樓)로 걸음을 옮겼다. 양상군의 만류를 뿌리치고 누구보다 앞장서 백성들과 함께 들판에서 일하느라 땀에 절어 여기저기 버캐가 핀 헐렁한, 정강이까지 올라온 검은 홑바지가 뼈만 남은 앙상한 다리를 깃대 삼아 사납게 펄럭였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려갈 것이 불안해 보였다. 자루가 긴 창인 극(戟)을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가누어 누에 오른 맹승은 바람에 꺾인 흰 수염을 손으로 한번 쓰다듬고는,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실눈으로 남쪽 벌판을 응시했다. 극의 끝에 달린 붉은 천이 그의 머리 위에서 펄럭였다. 왕의 군대 전령이 다녀간 지 반나절. 벌판에는 흙먼지만 자욱할 뿐이다.

흙바람에 30리 밖에 있는 왕의 군대도 전진을 멈추고 쉬고 있으리라. 이런 흙바람 속에서 굳이 군사를 몰아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적과의 전쟁이 아니다. 난동에 가담한 한 신하의 목숨과 재산을 거둬들이는 일이다. 순순히 항복하고 성을 내 준다면, 굳이 칼에 피를 적실 이유가 없다. 모두 왕의 백성이고, 땅이기 때문이다. 전령은 그 시한을 오늘 해지기 전까지라고 했다.

“우리 뿐이로구나.” 짧게 한숨을 섞어 이렇게 중얼거린 맹승은 고개를 돌려 누 아래 먼지를 뒤집어쓴 채, 깃발처럼 펄럭이며 서있는 185명의 제자를 내려다 보았다. '검은 무리'의 상징이 돼버린 누더기 칡 베옷, 땡볕에 그을린 새까만 얼굴, 바지 아래로 드러난 앙상한 종아리, 너덜해진 짚신이 그들의 고된 노동과 절약으로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콩국과 냉수로 끼니를 채워 온 그들의 생활을 숨김없이 드러내 주고 있었다.

'옛날 우(禹) 임금처럼 소나기에 목욕하고, 거센 바람에 머리 빚으면서 장딴지의 살과 정강이의 털이 없어질 만큼 밤낮으로 고생하면서도 거둔 것은 나눠주며 살아왔다. 그게 우리의 법이지 않는가. 단 한번, 단 한명 그것을 어긴 적은 없었다. 죽음 앞이라고 달라지지 않는다. 저들은 어떤 길이라도 따를 것이다. 모두 불에 뛰어들고, 칼날을 밟으라면 밟을 것이다.'

'길은 하나 밖에 없다.' 맹승은 눈을 감았다. 눈앞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자신의 존재마저 사라지는 듯했다. 그는 빛보다 어둠이 늘 더 편안했다. 스승은 빛이야말로 하늘이 주시는 평등의 선물이라고 했지만 그는 어둠이야말로 '하나'이고 '평등'이라고 생각했다. 삼라만상이 어둠에 복종할 때,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던가. 누구도 어둠을 거스를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어지러운 세상은 사라진다. 어둠 속에서 꾸는 세상에 대한 꿈은 또 얼마나 좋은가. 꿈을 배반하는 건 늘 어둠을 증발시켜 버리는 환한 태양이다.

마른기침을 해도 먼지 먹은 목이 터지지 않아 맹승은 허리에 찬 물통을 열어 남아있는 물을 모두 마셨다. 먼지 먹은 얼굴들의 시선이 버려지는 물통을 따라 일제히 움직였다 다시 그의 얼굴로 모였다. 그들 역시 결단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적으로 느끼는 듯했다. '검은 무리'의 맹서를 읊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맹승은 옥 조각을 쥔 왼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되듯 조용해졌다. 바람을 가르며 맹승이 입을 열었다.

“제자들이여, 검은 무리여! 나는 이 성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약속으로 이 부신까지 받았다. 그런데 지금 서로 합쳐 뜻을 따르기로 한 다른 한쪽 부신은 볼 수 없고, 힘으로는 왕의 군대를 막을 수 없다…” 맹승은 잠시 말을 끊었다. 바람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고 고개를 모로 돌렸다. 검은 구름 뒤에서 해가 떨어지고 있는지 사위는 더욱 검었다. '검은 하늘, 검은 땅, 검은 사람… 잠시 후면 이 모든 것을 지울 더욱 짙은 어둠이 우리를 찾아 오겠지.' 제자들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킬 수 없다면, 스스로 죽을 수 밖에 없다.”

놀란 눈동자들이 일제히 맹승을 향했다. 낮은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바람소리에 귀가 웅웅댔다. 맹승은 그들의 눈길을 피해 자신의 키보다 1자는 족히 더 긴 극의 끝을 바라보았다. 맨 위에서부터 날이 자루와 직각으로 한 뼘 간격으로 짧게 뻗어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맹승은 '이 극은 남을 죽이기는 좋은 무기지만, 자살하기에는 자루가 너무 길다'고 생각했다.

침묵을 깬 건 수제자 서약(徐弱)이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죽음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죽어서 양성군에게 도움이 된다면 죽는 것이 옳지만, 우리의 죽음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데, 단지 우리의 도(道)를 지키다 우리들만 세상에서 없어지게 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서약의 말에 용기를 얻은 듯, 뒤쪽에서 젊고 낯선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우리는 양성군의 일족도, 그의 군사도 아닙니다. 우리의 죽음을 양성군도 바라지 않을지 모릅니다…”

모두 놀라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보며 맹승은 이름을 생각해내려 애썼다. '뭐더라. 완(緩)이지 아마. 늘 얼굴에 깊은 그늘을 갖고 있는….' 그가 떠듬거렸다. 자신의 말에 스스로 자신이 없는지 목소리가 점점 오그라들었다. “…어쩌면 우리의 죽음이야말로 친구의 신의와 뜻을 저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맹승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나와 양성군의 관계는 스승도 되고 벗도 되며, 벗도 되고 신하도 된다. 죽지 않는다면 이제부터 엄한 스승을 구할 때 사람들은 반드시 '검은 무리'에게서 찾지 않을 것이며, 현명한 벗을 구함에 있어서도 '검은 무리'에게서 찾지 않을 것이며, 훌륭한 신하를 구함에 있어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죽는 까닭은 우리의 의(義)를 행하고, 우리의 업(業)을 계승케 하려는 것이다. 거자는 송(宋)에 머물고 있는 전양(田襄)에게 물려 줄 것이다. 전양은 현명한 사람이니 어찌 '검은 무리'의 존재가 세상에서 끊어질까 걱정하겠는가?”

그들의 죽음을 알기라도 한 듯 지붕 위의 까마귀가 날개를 퍼덕이며 요란하게 울었다. 맹승은 기도하듯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고함소리가 들렸다. 놀란 맹승이 눈을 번쩍 떴다. “스승님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청하옵건대 제가 먼저 죽어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역시 서약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짧은 칼이 그의 목을 뚫고 있었다. 외마디 소리와 함께 분수처럼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뿜어져 나온 피가 장작 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동시에 쿵 하고 서약이 쓰러졌다. 그의 죽음이 신호라도 되듯 제자들이 일제히 '검은 무리'의 맹약을 암송했다.

“우리는 모두 하늘의 자식이다. 남이란 없다. 남을 내 부모형제처럼 섬긴다. 재물은 남을 위해 쓰며, 빈궁하게 산다. 우리에게는 나라도 왕도 규범도 없다. 오직 하늘의 의로움만을 따른다. 전쟁을 단호히 반대한다.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키며, 지도자에 절대 복종하며 죽음도 기꺼이 바친다.”

맹승은 오른손에 잡은 과를 발 앞에 비스듬히 세워놓고는 힘차게 끌어 당겼다. 세번째 날이 그의 목을 찌르고 들어왔다. 귀에서 세찬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목에 뭔가 자꾸 걸렸다. 기침을 해보려 했지만 되질 않았다. 뭔가에 머리가 세차게 부딪쳤다. 눈에 하늘이 보였다. 어둠, 그것도 아주 진한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방에서 기침소리가 났다. 둘러보려 했지만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다. 아직도 누군가 맹약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겨우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보았다. 검은 피가 메마른 땅 여기저기 흩어지고 있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눈앞에 시꺼먼 물체가 달려드는 것 같았다. 저 놈의 까마귀. 맹승은 놈을 노려보기 위해 눈을 크게 뜬다고 떴지만 어두워 사위를 분간할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 왕의 군대가 도착했다. 대장 영윤은 검은 무리의 주검을 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친구와의 약속 때문에, 스승의 한마디에 한 사람의 도망자 없이 모두 스스로 목에 칼을 찔러 넣을 수 있단 말인가. 신념과 집단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가벼이 여기는 '검은 무리'라는 말은 들었지만 영윤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붓을 들어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양성군의 성을 거두다. 광기의 무리 183명 모두 자살하다.'

 

 

 

 

정말 상상만해도 끔찍한 이 사건을 소설가 최인호는 <유림>(열림원)에서 '오늘날 맹신적 사교집단의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자신의 도를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모습에서 고귀함을 느끼기 보다는 광신의 섬뜩함이 느껴진다. 그 테러리즘이 타인을 향했을 때를 상상하면 더욱 그렇다. 광신이야말로 자신과 다른 상대에게 무자비할 수 있지 않은가. 애써 묵자 시대에서 찾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그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묵자>는 잠시 엄청난 환상을 심어주고, 현실만 더욱 어지럽히는 한낱 꿈처럼 보였다.

안성기가 왕의 군대의 대장 항엄중 역을 맡아 눈길을 끄는 홍콩 장지량 감독의 한ㆍ중ㆍ일 합작 영화 <묵공>(墨功)은 그러나 이 집단자살극을 싹 감추고 홀로 찾아온 묵자의 거자인 혁리(류더화)의 영웅적인 방어전쟁을 그리고 있다. 일본 만화가 원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마 광신도의 자살극으로는 차마 묵자의 '반전' '평화' '겸애'사상을 이야기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묵자>에 나와있는 것처럼 방어라면 일가견이 있는 묵자의 전술을 보여주려면 자살항복으론 안되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액션 사극일 수 밖에 없고, 그 속에서 묵자의 사상을 논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성이 있어야 황궁도 있다. 저을 무찔러야 자유가 있다. 전쟁은 피하는 게 좋다. 전쟁에서 안 억울한 사람 있나. 비공(非攻)과 겸애만이 평화의 길. 전쟁에서는 산 자나 죽은 자나 불행하기는 마찬가지. 사람이 사람을 왜 죽여야 하지'란 대사를 간헐적으로 내뱉을 뿐이다.

그러나 용감히 전쟁을 치르면서 혁리가 한탄하는 이런 말조차도, 정반대로 싸우기를 포기하고 '도'를 지킨다며 집단 자살한 행동만큼이나 백성들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어쩌면 “모든 이를 사랑하라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양성의 왕이 한 말이야말로 묵자에게는 날카로운 비수일 것이다. 결국 성을 지키고, 백성을 지킨 사람은 혁리가 아닌 바로 그 왕이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 결코 현실일 수 없다. 현실과 거리가 먼 꿈일수록 달콤하다. 사람들은 쉽게 그 꿈에 열광하고, 희망을 품는다. 꿈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이며 꿈 꾸는 자가 행복한 이유다. 그래서 세상은 늘 꿈으로 가득하고, 그 꿈에 사람들은 취하고, 꿈에 취한 사람들의 더욱 고통스런 신음을 남긴다.(이대현 편집위원) 

07. 01. 12.

P.S. 오전에 한국일보를 사서 읽었지만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짐작대로 지면 기사는 아닌 모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카를로 폰티와 소피아 로렌

잠깐 머리도 식힐 겸 신문기사들을 둘러보려는데 바로 눈에 띄는 기사가 있다. 이탈리아의 영화제작자 카를로 폰티(1912-2007)의 타계 기사이다. 그 유명한 배우 소피아 로렌(1934- )의 남편이었고 데이비드 린의 영화 <닥터 지바고>(1965)의 제작자였다(필모그라피를 보니 펠리니의 <길>도 그의 손을 거쳤다). 영화계의 '큰손'이었다고 할 만하다. 기사를 읽어보니 이 제작자-여배우 커플의 사랑이 '의외로' 파란만장한데, 사실 <닥터 지바고>에서 줄리 크리스티가 맡았던 라라 역으로 그가 점찍은 여배우도 원래는 아내인 소피아 로렌이었다고 한다. 나이가 많고 키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데이비드 린이 받아들이지 않았다지만.

한겨레(07. 01. 11) ‘소피아 로렌’의 남자라 행복했어요

영화배우 소피아 로렌(오른쪽)의 남편이자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영화 제작자인 카를로 폰티(94·왼쪽)가 9일 타계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1912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그는 1938년부터 50여년 동안 <닥터 지바고> <길>(La Strada) 등 모두 150편 이상의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대중에게 이탈리아의 육체파 여배우인 소피아 로렌의 유일한 남편으로 더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폰티는 1952년 당시 불과 17살이던 소피아 라자로를 미인대회 심사위원석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나폴리 빈민가 출신인 이 선이 굵은 미녀에게 한 표를 던졌음은 물론이다. 이후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성 영화에 라자로를 기용했다. 그리고 성도 로렌으로 바꿔 불렀다.

하지만 20살 어린 로렌과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까지는 험난했다. 그는 유부남이었고 당시 그의 고국은 이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로렌과의 사랑을 철저히 비밀로 한 뒤, 1957년 멕시코에서 양쪽 변호사만을 내세운 채 신랑·신부 없는 결혼식을 올렸다. 이 사실이 이탈리아 언론에 알려진 뒤 콘티는 중혼 혐의로 기소당했다. 로렌은 당시를 “나는 끝없는 지옥불과 파문의 위협에 처해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공공의 죄인들로 손가락질했다”고 회상했다. 로렌은 이 결혼식에 대해 “몇시간 동안 울었던 기억 밖에 없다”고 밝혔다.(*아래 사진은 1961년의 두 사람) 

두 사람은 결혼식 이후 타국을 떠돌았고, 결국 멕시코 결혼을 무효화한 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런 ‘사랑의 곡절’은 프랑스 시민권 획득으로 결말을 맺었다. 조르주 퐁피두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배려로 시민권을 받은 뒤, 1966년 파리에서 두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호사가들은 폰티의 여배우 편력과 로렌 주위를 맴돌았던 많은 남자들을 떠올리며 결혼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예측은 어긋났다.

폰티는 로렌뿐 아니라 지나 롤로브리지다 등 걸출한 이탈리아 배우를 발굴하고 키웠다. 많은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다. 하지만 그는 폐렴 합병증으로 9일 저녁 스위스 제네바의 한 병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아내와 함께했다. 로렌이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을 지켜봤다고 친지들은 전했다.(강성만 기자)

07. 01. 11.  

P.S. 사랑은 세월을 버티는 힘이지만 세월은 사랑을 지워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조지 이거스의 20세기 사학사

필요한 책들이 있어서 여덟 권을 한꺼번에 주문했는데, 그 중 하나는 역사학자 조지 이거스(1926- )의 <20세기 사학사>(푸른역사, 1999)이다. 지난 2005년에 내한한 바 있는 이 저명한 역사학자는 사학사의 거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국내에는 그의 3부작이 모두 번역/소개돼 있다(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20세기 사학사>뿐이지만). 독일 태생이어서 '게오르그 이거스'라고 표기되기도 하지만, 유태계 독일인으로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의 대학에서 오래 봉직했다면 '조지 이거스'라고 불리는 것도 타당하다(그는 독어와 영어로 책을 쓴다). 지난 2002년 신년초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新질서 新문명' 코너에서 다루어진 인터뷰 기사와 소개기사를 자료로 옮겨놓는다(기사가 올려진 게 마침 오늘 날짜이다).

동아일보(02. 01. 11) 뉴욕주립대 명예교수 조지 G 이거스

조지 G 이거스 미국 뉴욕주립대 명예교수(76)는 역사를 바라보는 학자들의 시각을 한 발 뒤에서 관조하는 세계적인 사학사(史學史)학자로 유명하다.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급변하는 세계 질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보았다(*아래는 조지와 윌마 이거스 부처. 조지는 <20세기 사학사>를 아내 '윌마'에게 바치고 있다).

-세계질서의 변동이 진행되고 있는 21세기를 조망하기 위해서는 20세기역사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 역사의 중요한 흐름은 어떤 것이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소련 붕괴 이래 지난 10년 동안 세계 질서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고 이와 함께 역사 인식도 변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20세기에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1945년 이후 형식적인 의미에서 식민주의시대는 끝이 났고, 이전의 식민 지배국가들 대부분이 1945∼1960년 사이에 피지배국들의 독립을 받아들였습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계속 장악하려 했고, 프랑스와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수치스런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침공도 마찬가지였지요. 인종차별 제도도 미국에서는 1960년대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1990년대에 무너졌습니다. 백인우월주의는 이전의 식민지에서뿐 아니라, 1960년대부터는 서구 국가 내에서도 광범위하게 도전을 받았지요.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의 가치도 여성 운동의 부상과 함께 위협을 받았습니다.”

-이런 역사의 변화는 역사 인식과 역사 서술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역사 서술에는 두 개의 매우 다른 흐름이 있습니다. 이 두 흐름은 공식 문서에만 매달리며 사회적 문화적 요소들을무시하는 국가 중심적 역사의 오래된 패러다임을 대치했습니다. 한편에서는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성과와 함께 컴퓨터 기술을 이용할 수 있게됨에 따라 고도로 계량화된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가 일어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을 포함한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새로운 접근이 시도됐습니다. 사회과학적 역사는 비(非)개인적인 구조와 과정에 초점을 맞췄지만, 매일의 일상에 주목하는 이 새로운 역사는 생생한 인간들과 그들의 느낌들을 양적 측면보다는 질적 측면에서 잡아내고자 했습니다.”

-20세기말에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은 특히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주목하는 역사 서술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프랑스와 리오타르, 헤이든 화이트 같은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1960년대에 이미, 계몽주의 이래로 역사 서술의 원천이 됐던 서구의 ‘거대 담론’에 도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역사는 목적도 방향도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에게는 진실한 과거란 없었고, 따라서 과학적 또는 학문적 객관성의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각각 짜맞춰지거나 혹은 더 낫게 이른바 ‘창안된’, 검증 가능성 없는 많은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이거스 교수님께서는 미시사적 접근을 비판하고 거시사적 역사 서술 방법을 주장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미시사는 거시사에서 간과하기 쉬운 인간 일상의 삶을 드러내 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대담론의 퇴조와 함께 한국에서도 미시사적 접근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의 ‘거시사’는 ‘미시사’로 대치되곤 했습니다. 이런 새로운 접근들은 실제로 과거에는 하찮게 여겨져 왔던 삶의 많은 측면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미시사가들은 이런 일상의 삶들이 일어난 큰 맥락을 다루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20세기를 장식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처절한 잔혹 행위들을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없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일어난 9·11 테러와 그에 뒤이은 ‘테러와의 전쟁’ 역시 그런 맥락일 겁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세계질서의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큰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 9월 11일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역사와 역사 서술의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수천 명 죽인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지만, 이는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이 겨냥한 것은 바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중심과 미국군사력의 심장부였습니다. 역사가들이 생각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이 이런 공격을 유발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한 것은 작은 테러리스트 조직일 수 있겠지만, 이들의 반(反)서구적, 특히 반미(反美)적 증오 뒤에는 무슬림이라는 훨씬 넓은 여론층이 있고, 나아가 이런 생각은 전에식민지배를 받았던 지역에 상당히 널리 퍼져있습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와 소수자들의 경험적 삶에 주목하는 미시사는 모두 이 문제를 놓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분명히 자본주의의 힘에 의한 비서구사회의 식민지화를 탐구하는 거시사적 접근이 있어야 합니다.”

-자본주의와 식민지화에 대한 것이라면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방식이 많이 사용돼 오지 않았습니까?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자본주의적 팽창의 역동성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착취를 탐구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의부자와 가난한 자,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요. 그러나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문화와 종교에 뿌리를 둔 비경제적 요소들을 충분히 설명해 내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사회과학적 분석들을 효과적으로 종합하는 데는 반드시 역사의질적 측면을 고려하는 문화인류학적 개념과 방법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9·11테러는 이런 역사 인식 방법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현재 상황에서 비극적인 문제는 전쟁의 상대인 테러리스트뿐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맹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현 정부와 그 동맹국들은 그들의 정책과 오만함으로 인해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삶이 거의 모든 측면에서 피해와 상처를 입고 있다는 점을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국과 서방의 적들은 ‘서구’도 ‘비서구’도 모두 획일적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서구세계에도 고삐풀린 전지구화의 위험을 아는 넓은 여론층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근대 서구의 유산 중에는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필수적 긍정적 요소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과거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전세계의 많은 이들을 괴롭히고 있는 가난과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유산에 주목해야 합니다.”(이메일인터뷰〓김형찬기자)

Picture of Georg G. Iggers

 

 

 

 

 

◇조지 G 이거스는 누구인가=미국 뉴욕주립대(버팔로) 명예교수인 조지G 이거스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사학사(史學史)가이다. 192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나 소년기에 나치를 경험한 그는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망명자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를 공공연히 지지했고, 베트남 참전을 반대하는 반전운동 및 민권운동에 적극 가담해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프랑스사에서 독일사로, 지성사에서 역사이론으로 확대되며 역사 연구와 역사 서술의 역사를 국제적 수준에서 조망할 수 있는 우리시대의 유일한 역사가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 역사학계에서 그의 중요성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미 모두 우리말로 번역된 ‘독일 역사주의’(박문각), ‘유럽 역사학의 신경향’(전예원), ‘20세기 사학사’(푸른역사)라는 그의 사학사 3부작이 나오지 않았다면, 사학사라는 분야는 역사학내에서 불필요한 분야로 고사 당했을지 모른다. 사학사란 하나의 역사서술이 나타나는 역사적 맥락, 즉 사회문화적 토대를 연구하는 분야로서 일종의 지성사다. 이거스 교수의 3부작은 바로 레오폴드 폰 랑케 이래 오늘날까지 역사학의역사가 어떤 흐름으로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대작이다.

둘째, 역사학을 보는 그의 시야는 그야말로 전지구적이다. 독일 역사주의를 기점으로 해서 성립한 근대 역사학은 역사를 ‘국민국가의 역사’ 곧 국사(國史)로 축소하는 전통을 낳았다. 이런 역사의 ‘국사화’는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역사학을 발전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지만,다른 한편으로는 역사학을 정치의 시녀로 전락시킴으로써 역사학의 위기를 초래했다.

오늘날 역사학 위기의 근본원인은, 역사의 중요한 문제들은 전지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서 발생하는데 비해 전문 역사학자들은 그 문제에 대한 연구를 국사의 차원으로만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역사학의 위기에 직면해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역사학 분야는 역사학의 문제를 역사적으로 진단하는 사학사다. 이같은 맥락에서 이거스 교수는 사학사적 관점에서 9·11 테러 이후 앞으로의 역사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한다.

1960년대이래 서구 지성계의 가장 큰 흐름은 진보를 위한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의 종말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나타난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이 미시사이다. 이거스 교수는 역사학의 이런 미시사적 경향이 대두하는 배경과 문제의식에 대해서는깊이 공감하지만, 그것이 역사학의 지배담론이 되는 데는 명백히 반대한다. 그는 9·11 테러가 일어난 역사의 거대한 맥락이 미시사적 역사 연구를 통해 해명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9·11 테러의 근본 원인은 분명 미국 패권주의 혹은 서구 자본주의와 같은 역사의 거대한 구조다. 그러나 어떻게 오사마 빈 라덴 같은 인물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미시사적 연구를 통해서는 이런 역사의 거대한 구조가 해명될 수 없는 것일까?

이거스 교수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사학사적인 메시지는 ‘거시사 대 미시사’라는 이원론적 구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둘 사이의 새로운 접합을 통해 ‘서구’와 ‘비서구’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해방과 자유의 역사라는 세계사의 보편적 과정 속에서 한국사의 특수한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김기봉/경기대 교수·서양사학)

07. 01. 11.

P.S. 국역본의 대본은 독어본 'Geschichtswissenschaft im 20.Jahrhundert'(괴팅겐, 1993)으로 돼 있는데, 목차로 보아 그 증보판인 영어본 'Historiography in the Twentieth Century'(Wesleyan University Press, 1997)도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영어본과 독어본은 많이 '다르다'. 3년 동안 저자가 책도 더 읽었고 또 염두에 둔 독자층도 각기 다르기 때문). 동료 역사학자인 피터 버크의 추천사가 붙어 있는 영어본은 나대로 의미가 있는 책이다. 러시아에서 구한 것이기 때문이다. 애를 써서 구한 것도 아니고 매일 같이 들르던 구내 헌책방에서 어느날인가 못보던 영어책이 눈에 띄었는데 아주 새책이었다. '이거스'란 저자의 이름도 눈에 익어서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국내에 번역본이 있는 듯했다. 게다가 가격은 50루블(2,000원). 그게 지금 책장에서 빼와 만지작거리고 있는 영어본이다. 내일은 그 국역본을 손에 넣을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