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자본론' 한국어판 20주년

약속이 취소되는 바람에 하루종일 집에 붙어 있게 된 탓에 신문을 보지 못했다. 물론 인터넷으로 주요 기사들을 훑어보게 되지만 '신문지'를 읽는 것만큼 개운하지는 않다. 구닥다리 활자문화세대이면서, 신문지 세대여서 그런가 보다. 온라인 기사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띈 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마도 내일자 지면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자본론>의 한국어판 출간 20주년에 관한 기사이다.

경향신문(07. 01. 15)  이보게, 마르크스 다시 얘기해보세…‘자본론’ 재조명 활발

직선제 헌법 20주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20주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20주년…. 올해는 유난히 ‘20주년’이 많다. 1987년 6월 민주화의 산물들이다. 또 하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한국어판 출간도 20주년이다. ‘무시무시한 금서’로 일본어판, 북한 번역본 등이 은밀히 떠돌던 자본론이 당당하게 일반인들 손에 쥐어질 수 있었던 것도 민주화의 세례 중 하나다.



당시 한국사회에 자본론을 공개적으로 처음 소개한 사람은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부 교수(53)와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65). 김교수 책이 더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빗장을 열어젖힌 것은 강교수의 ‘자본’(이론과실천)이다. “87년 농협중앙회 조사부 근무 시절이었어요. 이론과 실천의 김태경 사장이 와 뭔가 건넸는데 집에 와서 뜯어보니 ‘자본론’이더군요. 익명의 서울대생들이 초벌 번역한 것이었죠. 밤을 새워가며 다듬어 ‘익명의 역자들’로 해서 출간이 됐습니다. 당시 문화공보부에 납본(納本)하기까지 1주일간 책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어요. 난리가 났죠.”

잠적했던 김태경 사장이 결국 잡혀 법정에 섰다. 민주화 물결 속에서 김사장의 부인이었던 당시 강금실 부산지법 판사, 김수행 한신대 교수 등의 탄원에 힘입어 기소유예 처분이 내려졌다. 사실상 ‘해금’이었다. 강교수는 이어 자본론 2, 3권을 실명으로 번역해냈다.

“실명으로 책을 낼 때는 학교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당시 학계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받아줄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민주화 이후 동아대에서도 학생회가 대학 당국에 ‘정치경제학’ 강의를 요구했죠. 그래서 박사논문 쓴 지 6개월도 안된 제가 임용됐어요.” 강교수는 절판된 자신의 번역본 출간 20주년을 맞아 주석까지 모두 담은 자본론의 독일어판 번역본을 새로 낼 예정이다.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비봉출판사)은 좀더 완결된 번역으로 89년 2월 출간돼 대중에게 파고들었다(*영역본을 옮긴 것으로 안다). 72년 외환은행 런던지점 근무 시절이던 자본론을 접하고 문화충격을 받았던 김교수는 80년대 초부터 이미 자본론 번역에 들어갔다. “서울대 교수가 출판하니 공안당국에서도 손을 댈 수 없었다고 봅니다. 당시 내 강의는 수강생이 1000명이 넘었어요. 다 수용하지 못해 후배 학자들을 동원해 강의를 맡겼을 정도였죠.”

주황색 표지에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그려진 ‘자본론’(1~3권) 완역본은 불온서 해금의 상징이 됐다. 비봉출판사에 따르면 책은 지금도 매년 1000여권씩 나가는 스테디셀러로 제1권 상(上)편 기준으로 3만여권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나도 이 책만 갖고 있는 듯하다). 김교수는 “93년 한꺼번에 몰아 받은 인세로 산본의 아파트 분양대금을 치렀다”며 “마르크스가 나를 먹여살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생명은 짧았다. 소련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다. 많은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고, 대신 그람시, 알튀세르 등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했다. ‘시차를 갖고’ 도입된 마르크스주의였지만 그나마도 대중화되기에 시간이 짧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론은 97년 외환위기 이후 다시 조명을 받게 됐다. 김수행 교수는 “경제적 불안정성, 공황의 반복과 실업 증가, 빈부격차의 증대 등 자본주의의 모든 문제가 드러났다”며 “자본론의 수요가 다시 생겨났고, 연구자들도 조금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강신준 교수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으로 소수만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상황을 보며 지금이야말로 마르크스를 다시 얘기해볼 수 있는 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마르크스주의는 자본론 번역 20년을 맞아 중흥을 꾀하고 있다. 김수행, 김세균, 이진경 교수 등이 문화사회연구소에서 마련한 ‘한국 마르크스주의 지형 연구’ 강좌를 진행 중이다. 또 한국사회경제사학회는 오는 4월 학회 설립 20주년을 맞아 ‘민주화 이후의 한국자본주의’를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다루는 학술대회를 열 예정이다.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있는 학자들로 구성된 맑스코뮤날레 등도 마르크스주의를 주제로 한 문화제인 제4회 ‘맑스코뮤날레’를 열 계획이다.

이 외에 장상환, 정성진 교수가 주축이 돼 마르크스 경제학 이론 연구를 주도해온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은 ‘마르크스주의 연구’ 6호를 냈다. 20년전 자본론 한국어판을 처음 내 옥고를 치른 이론과 실천 김태경 사장은 최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다시 펴내며 이렇게 밝혔다.



“‘수고’가 쓰였던 1844년에도, 출간됐던 1932년에도, 한국에 번역됐던 1987년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인간 사회 저 심연에 똬리 틀어 입 벌리고 있는 악의 본질이 존재하는 한, 그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사유의 무기로 ‘경제학-철학 수고’는 아직 유효하다.”(손제민 기자)

07. 01. 25.

P.S. 국내 마르크스 학자들 간에도 의견/노선 차이가 심한 것으로 아는데, 그 중 한 축을 대표하는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가 작년말에 출간됐다. 564쪽이니까 두툼하다. 나로선 마르크스보다 트로츠키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한번 들춰볼 듯한데,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가 현재까지는 제로이군(최근에야 깔린 것인가?)...

P.S. 생각난 김에 시 한 편도 옮겨둔다. '자본론' 하면 떠오르는 시가 내겐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이다. 나도 프로그레스출판사의 양장본 마르크스를 모스크바에서 잠시 찾은 적이 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아내가 먼저 이 닦고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이빨 닦고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데워서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하악을 이빠이 벌려서
  눈이 흉하게 감기는 동물원 짐승처럼.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食事.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想起,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살아 있다.
  비참할 정도로 나는 편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이빨 닦고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 먹고,
  물로 입 안을 헹구고, (이 사이에 낀 찌꺼기들을 양치질하듯
  볼을 움직여 물로 헹구는 요란한 소리를 아내는 싫어했다.
  내가 자꾸 비천해져 간다고 주의을 주었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소파!
  '소파'하면 나는 '비누' 생각이 났다가 또 쓸데없이
  '부드러움'이라는 형용사가 떠오르다가 '거품-의자'가 보인다.
  의자같이 생긴, 젖통이 무지무지하게 큰 舊石器時代의
  이 多産性 여인상은 사실은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오우 소파, 나의 어머니!" 나는 속으로 이렇게
  영어식으로 말하면서, 그리고 양놈들이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소파에 앉았던 거디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 거실이 飜譯劇 무대 같다.
  중앙에 가짜 가죽 소파 하나, 그 뒤엔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고, 세잔風 정물화 한 점, TV세트,
  窓을 향한 幸運木 한 그루, 그리고 폼으로 갖다놓은 읽지도 않은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모스크바, 프로그레스 출판사) 양장본 3권이
  가로로 쓰러져 있는 서투른 書架와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
  그렇지만 이 무대에서 번역될 만한 비극은 없다.
  다만 한 사나이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젊었을 적 사진으로는 못 알아보게 뚱뚱해진,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최근엔 입에서 나쁜 냄새가 난다고 아내에게 비난받은 바 있는
  이 사나이가 멍하니 소파에 앉아, 마치 동물원 짐승이 그렇게 하듯이,
  하품을 너무 길게 하고, 눈물이 난 눈을 두 번 깜, 빡, 깜, 빡하고 있을 때
  무대 왼편(주방)에서 그의 아내가 등장했으며, 그녀가 소파에 걸터앉아
  그의 턱을 쓰다듬어주면서 면도 좀 하라고 하자,
  그가 아내를 껴안으면서 "엄마!"라고 불렀을 뿐이다.
 
  하마터면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아내가 출장 레슨 나가기 전에
  그에게 와서 나를 어루만져줄 때가 나는 좋다.
  나는, 아내가,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커트해 줄 때,
  낮잠 자고 있는 그에게 가만히 다가와 나의 발톱을 잘라줄 때,
  혹은 그를 자기 무릎에 눕혀놓고 내 귀지를 파줄 때, 좋다
  아침마다 그에게 녹즙을 갖다주고, 입가에 묻은 초록색을 닦아주자
  나는 그녀를 보면서 방그레 웃었다.
  나는, 아내가 그를 일으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의 남은 생을, 그녀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
  코로 쉼만 쉴 뿐, 꼼짝도 않고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그녀가 다 알아서 해주는 식물 인간이고 싶다.
  가끔 햇빛을 보고 싶어하므로 창문을 열어줄 필요만 있을 뿐.
  동정할 수는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이 幸運木, 나는
  이 病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아서,
  아내가 나갔기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서 혼자 놀았다.
  비계 덩어리인 구석기 시대 어머니상에 푸욱 파묻혀서
  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너무 많이 남아도는 나의 시간들이 누에 똥처럼 떨어졌지만
  나는 수락했다. 이것도 삶이며
  이제는 그것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
  사람이 喜劇이 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까마는
  그러므로 무위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格이랄까,
  사람이 만화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비록 사나이 나이 사십 넘어서 "내가 헛, 살았다"는 깨달음이
  아무리 비참하고 수치스럽다 할지라도, 격조 있게,
  이 삶을 되물릴 길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 인정하기 조금은 힘들지만
  세상에 조금이라도 복수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천함보다야
  無爲徒食輩가 낫지 않겠는가! 나는 소파에 앉아서 하루종일,
  격조 있게, 놀았다.
  탄식하는 시계가 분침과 시침을 벌려
  역광을 받는 공작새처럼 화사한 오후를 만들고,
  내가 손대지 않은 無垢한 시간을 뜯어먹은 누에가
  다른 종류의 생을 예비하는 동안
  수족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에
  橫으로 도열한 수마트라 두 마리, 열대어 화석처럼 박혀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담겨 있는 空氣族館을 느꼈다.
  거기서 나는 고기처럼 또 하품을 했고,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前해군참모총장이 검찰청 앞에서
  검은 라이방을 쓰고 사진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거디었다.
 
  내가 "오우 소파, 마마이야!" 외치면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아내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대 오른쪽에서 등장했다.
  슈퍼마켓에 들렀는지 식료품 봉다리를 들고.)
  나는 오늘, 밥 먹고 TV 보고 잤다.
  자기 전에 아내가 이 닦고 자라고 해서 이빨도 닦았다.
  화장실 앞에서 前해군참모총장처럼 포즈를 취했더니
  아내가 쓸쓸하게 웃었다는 것도 적어야겠다.
  아 참,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았고 서울과 중부 지방 낮 28도였다.
  내가 안방 문을 열면 무대, 불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나이가 외친다; "지금, 옥수수밭에 바람 지나가는
  소리, 들리지?" 저 15층 아래 강;
  밤에는 강이 긴 비닐띠처럼 스스로 광채를 낸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가련한 空氣族들이여, 안녕, 빠이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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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자기 시대의 수도사

중견작가 김영현씨가 신작소설을 냈다. <낯선 사람들>(실천문학사, 2006). 소설집이 아니라 전작 장편소설이다. 300쪽 남짓이니까 분량이 두툼한 건 아니지만. 특이한 건 노골적으로 러시아작가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베끼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작가들은 구원론적인 주제를 탐구하려면 도스토예프스키적인 걸 다뤄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몇 년전에 읽은 것으로 역시나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주제를 다룬 정찬의 <그림자 영혼>(세계사, 2000)도 아주 실망스러웠다).

아래 인터뷰기사를 보면, 작가 자신이 '문학의 제2기'에 들어선 것 같다고 고백하는데, "당분간은 종교적 탐구를 계속해 보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멘트가 기대보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사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야말로 광신도적인 신앙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구원에 대한 회의를 끝까지 밀고간 작가가 아니었나(왜 우리 주변엔 인도로 가거나 수도원으로 가는 작가들만 있는 것인지? '당대적 현실'은 어디로 간 것인지?). 

한국일보(07. 01. 15) '낯선 사람들' 낸 소설가 김영현

소설가 김영현(52)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은 이렇다. 리얼리즘, 낭만, 서정, 민중문학, 민중운동, 학생시위, 긴급조치 위반, 구속, 고문…. 실천문학사 대표라는 현재 직함이나, 낭만적 색채 짙은 그의 리얼리즘이 민중문학의 발전이냐 퇴보냐를 놓고 뜨겁게 벌어졌던 1990년대 초의 ‘김영현 논쟁’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다.

그가 4년 만에 새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실천문학사)을 펴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저 열거된 단어들의 어떤 기색도 찾아보기 어렵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표나게 원용한 그의 이 신작은 욕망과 원죄, 악령과 신성이라는 종교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를 탐구한, 말 그대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작품이다.

“이제야 비로소 김영현 문학의 제2기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패배감의 터널에서 빠져 나와 문학적으로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그는 말했다. 운동을 할 때는 그래도 내 삶이 가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감내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편안한 것 자체도 감수하기 힘겹다고. “우리처럼 오랫동안 운동권에 있었고, 아직도 몸 속에 그 많은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2000년대로부터 조롱당하는 것 같은 참담함과 좌절감을 느껴왔죠. 지금의 세계는 좋게 말하자면 다원화한 노마디즘의 세계지만, 다른 면에선 일종의 무정부 상태예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내던져진 존재가 돼버린 거죠. 오지 여행도 많이 하고, 러시아 문학도 다시 읽고 하면서 이제야 내가 어떤 문학을 해야 할지 알게 됐습니다.”

피살된 아버지와 그의 아들들의 비밀을 추리소설 기법으로 파헤친 <낯선 사람들>은 이런 회의와 고통의 소산이다. 소설은 파렴치한 수전노 아버지와 그의 걸신들린 욕망이 낳은 배 다른 아들들의 갈등을 축으로 하는데, 이 소설에서 수도원 신학생인 차남 성연이 아버지의 진짜 범인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윤리적, 존재론적 갈등은 오롯이 작가 자신의 것과 겹친다.

“성연이 수도원을 떠나 첫 사랑 안나를 찾아나서는 결말을 통해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부대끼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명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수도사처럼 침묵 속에서 생을 완성해가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릴 때가 많아요. 하지만 얄궂은 운명 속에서 관계를 맺었다 해도 이 누추한 삶을 껴안고 살 수밖에 없지 않느냐, 그게 의미 있는 삶 아니냐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인간과 함께 피의 역사가 시작됐지만 사랑의 역사도 시작됐고, 그게 우릴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김영현의 작품을 김영현적이라 하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적이라고 말하는 게 미안하지만, 작가는 <낯선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해 체홉, 투르게네프 등 러시아 작가들의 방법론을 활용해보려는 거대한 구상의 첫 작품이라고 말한다. “소설을 쓰지 않는 동안 고전으로 다시 돌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침체된 우리 문학을 위해 고전적 주제와 품격, 구도를 가진 문학을 다시 재건해내야겠고 생각했어요. 박완서 이문열 같은 1세대 작가들과 유행에 휩쓸리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텅 빈 중간세대로서 제가 할 일은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제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소화력 강한 위장이 생긴 것 같다는 그는 “저도 제 자신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에는 한 달에 1주일은 집필실에 들어가있겠다고 선포까지 했다. “작가는 평생 삶의 화두를 찾아 떠도는 자기 시대의 수도사입니다. 저는 삶의 의미라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막막한 우주에 영혼이라는 이토록 정교한 장치들이 존재한다는 게 바로 그 증거일 겁니다. 그걸 기독교가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당분간은 종교적 탐구를 계속해 보고 싶네요.”(박선영 기자) 

07. 01. 15.

P.S. 미완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주인공 알료샤는 수도원을 나와 (창작 메모에 따르면) 나중에 테러리스트가 된다(구원은 그 다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시대의 수도사'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테러리스트'가 아닐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결코 삶의 의미 따위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다부진 결의로 무장한. 러시아 작가들의 방법론의 '한국화'에 대해서 우려를 갖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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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

작년에 '2006년의 영화책'으로 <트뢰포>(을유문화사, 2006)와 함께 꼽았던 책이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을유문화사, 2006)였다. 우연찮게도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는데, 이 책에 대한 서평으로 연초에 읽어두었던 것을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지난 2003년에 반쪽짜리 책이 나왔을 때 추천사를 쓰기도 했던 영화평론가 김영진씨의 칼럼이다.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씌어진 '적임자'의 서평이다. 더불어 기대하게 되는 것은 한국 영화비평에서의 '로저 에버트들'이다. '들뢰즈들'이나 '지젝들' 말고.

필름2.0(07. 01. 05)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에 대한 서평

얼마 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 영화평론 심사를 맡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래의 평론가를 꿈꾸며 보내온 글들을 숙독했다. 장년층의 필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 특기할 만했으며 글에 인용되는 지식의 범주가 꽤 광범위해서 은근히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똑똑한 글들이 많은데 인상적인 글이 적다는 것도 신기했다. 대다수의 글들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주인 입장이 되어 평론 대상이 되는 영화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위압적이며 수직적으로 어떤 특정지식에 의지해 영화를 내려다보며 훑는 글은 매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똑똑한 티가 나긴 하지만 글을 읽고 나면 거기 분석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영화와는 상관없는 성실한 대학원생의 리포트를 읽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좋은 평론은 언제나 작품과 수평적으로 대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평론이, 평론이 아니라 이론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은 1960년대의 구조주의 열풍 이후 한때 영화학계의 신념이 됐다. 검증될 수 없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영화가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삼류 저널리즘의 인상비평에서나 할 짓이라는 통념은 오늘날에도 완강하게 통용되고 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글들에서는 대개 열정과 공감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되는 대신 평자들이 표현자와 맞먹으려 들며 과시하려 드는 자기도취의 흔적을 보게 된다. 평자가 표현자의 위치에 오르려는 것은 자연스런 욕망이며 그게 결핍의 표현으로써 시지푸스의 운명처럼 거듭된 성실성으로 나타날 때 위대한 평론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와 반대로 평자가 이미 표현자의 자의식을 갖고 대상이 되는 작품을 제멋대로 갖고 놀며 군림하려 들 때 그 평론은 추악해지기 쉽다. 영화보다 평론가의 자의식과 지식이 더 돋보이는 대다수의 평론은 그래서 불편하다. 이게 동시대의 대중뿐만 아니라 동업자들끼리도 평론을 잘 읽지 않는 이유다.



그런 심정으로 나름대로 반성하고 있는데 로저 에버트의 <위대한 영화> 1권의 개정판과 <위대한 영화> 2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1권의 추천사를 쓴 사람의 입장에서 그 뉴스는 기분 좋은 것이었다. 미국의 스타 평론가의 글을 묶은 두툼한 분량의 책이 상당량 팔려나갔다는 것은 여하튼 이곳에 평론을 읽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실 <위대한 영화> 역서를 읽기 전에는 에버트의 평론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시카고 선타임스’에서 수십 년 동안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건 텔레비전 비평쇼를 진행하는 이 할아버지 평론가는 지금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평론을 쓰고 있지만 그가 텔레비전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거나 내리거나에 따라 때로 영화의 흥행 성적이 갈라지는 그 위대한 영향력 말고 대체 취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 싶었다.
이런 선입견은 인정에 끌려 추천사를 써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식 출판되기 전의 역서를 읽은 후 손쉽게 무너졌다. 영화평론가로서는 미국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에버트의 경력이 괜한 허명은 아니었다는 자책이 생겼다.

기자로 시작해 평론가로 자리 잡은 에버트의 글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료하고 쉽다.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읽고 영화를 볼까 말까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토록 폭력적인 저널리즘 독서 환경에서 단련된 에버트의 문장은 담담하면서도 신중하고 때로 신랄하며 종종 열정적이다. 그는 개봉영화들을 따라가는 집필활동 틈틈이 고금의 명작들을 소개하는 칼럼을 쓰고 그 영화들을 스크린으로 상영하는 영화제를 개최하며 관객들과 일주일 동안 특정 영화를 숏 바이 숏으로 분석하는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위대한 영화>는 그런 에버트의 과외활동의 산물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에버트가 점점 더 많이 영화를 알아가는 사랑의 방식이 독자에게도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는 솔직하게 예전 기자 시절에 썼던 영화평의 태도를 스스로 비판하기도 하고, 접하지 않아 일정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독자들에게 강요하지 않고도 명작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다.

에버트의 책 초고를 읽으며 근사한 문장이 나올 때마다 옮겨 적던 필자는 그게 10쪽을 넘어가자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영화의 이미지가 주는 매력을 활자로 따라잡는 불가능한 임무를 때로 해내는 에버트의 손이 행한 기적에 부러움을 느꼈다. 이를테면 그는 니콜라스 뢰그의 매혹적이지만 플롯이 헝클어진 영화 <쳐다보지 마라>를 옹호하면서 이렇게 쓴다.

“유령이 출몰하는 도시 베니스가 〈쳐다보지 마라〉에서보다 더 우울한 모습을 보였던 적은 결코 없었다. 도시는 광대한 공동묘지처럼 보이고 돌덩이들은 축축하고 연약하며 운하에는 쥐떼가 우글거린다. 앤소니 B. 리치몬드와, 크레딧에는 오르지 않은 뢰그가 담당한 촬영은 베니스에서 사람들을 제거해버린다. 북적거리는 길거리나 대운하 인근에서처럼 베니스 거주자나 관광객들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장면이 있지만, 존과 로라가 (처음에는 함께, 나중에는 별도로) 길을 잃는 한결같은 두 장면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고, 거리와 다리와 운하와 막다른 골목과 잘못된 모퉁이는 그것들끼리 서로서로 포개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버트는 이런 유형의 영화들이 ‘플롯에서 자유롭고, 어떤 최종적인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 하나의 체험으로만 존재하는 영화’이며 관객인 우리는 ‘소풍을 따라 나섰다가 안전하게 돌아온 소녀들과 비슷하다’고 본다. 이것은 결국 우리 시대에 점점 사라져가는 영화보기의 매혹과 미덕에 관한 장 뤽 고다르의 다음과 같은 잠언을 인용하는 것과 연결된다. “영화는 역이 아니다. 영화는 기차다”라는 고다르의 말을 언급하며 에버트는 자크 타티의 <윌로씨의 휴가>를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전혀 몰랐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영화를 ‘역’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기차’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차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대신 빨리 목적지인 종착역에 도착하려 안달하는 어린애와 같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 파탈>과 같은 영화가 대중의 적대감을 사는 것에 대해서도 에버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작품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요즘 관객들의 조바심을 고발하는 고발장이라 할 수 있다. 요즘 관객들은 괴롭힘 당하기를 원하지, 유혹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에버트에 따르면 “대부분의 영화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영화의 플롯에 의해 규정되거나 제한된다는 암묵적인 가정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나 인생은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인생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어린이들을 위한 영화와 어른들을 위한 영화의 차이점이다.” 이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를 분석하면서 에버트가 정의하는 영화의 꼴인데, 이런 방식으로 에버트가 끌어내는 영화의 매력의 범주는 넓게 뻗어간다.

그는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들>을 찬양하면서 빠른 글 호흡으로 그 영화의 비범한 시각적 특질을 따라잡는다. “레오네는 롱 숏으로 화면을 시작해 권총, 얼굴, 눈동자, 그리고 비지땀과 파리들을 클로즈업으로 작업해 들어가면서 이 장면을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길게 끌고 나간다. 자신이 서스펜스를 얼마나 길게 유지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시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게 진짜 서스펜스이기는 한 걸까? 전적으로 스타일의 시험이었고, 장면 자체에 주의를 끌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감독의 고의적인 조작이었을 것이다. 레오네가 장난을 치곤 했던 패러디의 자유를 여러분이 맛봤다면, 여러분은 그의 방법을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이다.”

‘대담한 제스처를 향한 찬양’, 이런 식의 표현은 멋지다. 에게, 겨우 그것 같고 그러냐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다. 우리가 거대한 틀에 갇혀 영화를 보는 고정관념을 에버트는 쉽게 넘어선다. 그가 영화의 시각적 스타일 못지않게 상세하게 접근하는 배우들의 매력을 서술할 때도 마찬가지다. <스카페이스>에서의 알 파치노의 연기를 칭찬하면서 그는 파치노가 토니 몬타나라는 인물을 ‘오페라 같은 규모로 연기해낸다’고 쓴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그는 책상 위에 코카인을 쌓아놓고는 삶 그 자체를 흡입하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그 속에다 코를 처박는다. 파치노는 코에다 흰색 분말을 묻힌 채로 그 장면을 연기했다. 종종 패러디되는 디테일이지만, 이것은 자신의 욕망을 제외하고는 만사에 무관심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남자를 보여주기 위한 적절한 선택이었다. 파치노가 <스카페이스>에서 한도를 넘어선 연기를 했다면, 그것은 캐릭터가 그를 그곳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한계를 넘어선 세상, 그곳이 바로 토니 몬타나가 사는 곳이다.” 이런 문장은 쉬워 보이지만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로 영화를 따라잡는 경지의 출발점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영화대상과의 일체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의 평론은 보여준다.

07. 0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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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유리 로트만(1992-1993)은 러시아 최대의 문화이론가이자 기호학자이며 문학연구가이다. 오래전 학원 시절에 작성한 글 하나를 그에 관한 '소개'의 글이 될 만하겠다 싶어서 여기에 옮겨온다. 혹 텍스트이론이나 문화기호학에 관심있으신 분들에게 소용이 닿았으면 싶다.

로트만의 저작으론 <예술텍스트의 구조>(고려원, 1991), <문화기호학의 이해>(민음사, 1993), <영화기호학>(민음사, 1994), <문화기호학>(문예출판사, 1998)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 물론 그의 학문적 업적과 국제적인 지명도에 비하면 소략한 편이다. 로트만 문화기호학의 기본 개념들과 프로그램 등에 대한 소개는 송효섭의 <문화기호학>(아르케, 2000) 등을 참조할 수 있다(세번째 이미지는 러시아에서 나온 로트만 전집 중 마지막 권의 표지이고, 마지막 이미지는 강의중인 로트만. 그는 에스토니아의 타르투대학에 오래 봉직했다. 아래 사진은 타르투대학의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1. 텍스트에서 텍스트-기계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30여년 간의 지적 여정을 통해 러시아의 대표적인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은 기호텍스트/문화텍스트에 대한 방대한 양의 또다른 텍스트를 남겼다. 그의 텍스트들이 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기호텍스트(예술텍스트)[초기]와 문화텍스트[후기]의 의미생산 방식이다. 그에게서 물질계와 생명계의 모든 현상은 기호작용을 통해 언어[기호]로 번역되어 기호계로 편입된다. 그리고 이 기호계는 무엇보다도 의미의 생산과 소통의 메카니즘으로 구성되는 세계이다. 이 기호계에 편입되면서, 현상은 비로소 현상의 이름에 값하는 의미를 획득하며, 현실의 사태는 사태로서의 규모와 의의를 부여받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의미작용이다. 

의미작용이란 의미를 생산하는 작용이다. 여기에 어떤 텍스트가 주어졌다고 할 때, 그것은 단순하게 어떤 의미 잠재태, 의미 가능태를 지닌 존재의 현실태일 따름이다. 텍스트는 그저 사물로서 존재한다(로트만의 아들 미하일 로트만은 자신의 아버지를 칸트주의자로 규정하면서 그의 기호학의 기본개념인 텍스트가 칸트 철학에서의 물자체(Ding an sich)라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사진은 미하일 로트만). 즉 다만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있는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텅빈 기호로 자신의 존재를 변환시켜야 한다[=기호작용]. 그리고서는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이름부르는 행위가 바로 ‘읽기’이며, 이 읽기를 통해 텍스트는 자신의 많은 가능태 중의 하나를 현실태로 만든다{=의미작용]. 이러한 일련의 과정, 그러니까 다수의 가능태가 하나의 현실태로 고정되는 가역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이 바로 의미생산과정이며, 이것은 의미작용의 결과이다.

 

이때 이러한 과정 속에 놓이게 되는 대상이자 주체인 텍스트는 말의 정당한 의미에서 텍스트-기계가 된다. 그것은 생산하면서 생산되는 특수한 기계이다. 로트만의 기호학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이 텍스트-기계이다로트만이 직접 ‘텍스트-기계’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텍스트-기계'는 그의 ‘텍스트’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다. 참고로, 텍스트-기계(textual machine)는 에코에게서 빌어온 개념이다). 그래서 그가 텍스트 기호학자라는 말은 이 텍스트-기계의 기계공학자라는 말과 등가적이 된다. 사실, 이러한 명칭은 그의 지적 경력에 잘 들어맞는 것이기도 하다.

  

 

 

 

 

 

 

 

 

2. 기호와 기호-기능       


기호는 기호작용의 결과로 생성된다. 기호는 기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부품이며 원소이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다소의 모호함을 내포하게 되는데, 바로 텅비어 있음이 기호의 기본적인 자질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이 기호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아니어야 한다. 기호는 다만 어떤 것이 되기 위한 가능성일 따름이고 준비상태일 따름이다. 그래서 기호는 기호-기능과 별다른 의미차이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U. 에코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호-기능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에코가 퍼스(C. S. Peirce) 기호학의 실용주의적인 사고를 받아들이고 있는 한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때 실용주의적인 사고란 것은 이름껍데기만 있는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고를 말한다.

 

이에 대한 로트만의 입장은 조금 차이를 보인다. 그는 텍스트의 자리를 텍스트-기계 이전의 단계에 물자체와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는 것으로서 마련해둔 것처럼 기호의 자리를 기호-기능 이전의 단계에 마련해둔다. 에코적인 입장에서 보면, 기호는 본 얼굴이 없고 단지 마스크들만 있는 것이고, 로트만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그런 마스크들의 가족유사성을 보장해주는 어떤 얼굴(혹은 얼굴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미묘하긴 하지만 여러 가지 효과를 낳는다. 텍스트와 텍스트-기능에 대한 로트만의 구분은 이 효과에 속한다. 그것은 기호와 기호-기능의 구분과의 연관성 속에서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3. 텍스트와 텍스트-기능


텍스트는 일반적으로 표현성, 경계성, 구조성에 의해 규정된다(<예술텍스트의 구조> 참조). 여기서 표현성이란 공간적인 고정화를 말하고, 경계성이란 비텍스트와의 대립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걸 말하며, 구조성이란 특수하게 조직화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말한다. 이걸 뭉뚱그려서 표현성이라고 한다면, 언어학적 텍스트는 이 표현성에 의해 규정되는 텍스트이다. 그런데 이 언어학적 텍스트만이 텍스트의 전부가 아니다. 로트만은 거기에 메타언어학적 텍스트 개념을 도입한다.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는 진리성이라는 사회적/문화적 가치에 의해 규정되는 텍스트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가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면,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는 가치론적 규정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로트만의 기호학 이론체계 속에서 텍스트는 종적 분화를 일으킨다 어떤 기호나 텍스트가 그것 자체로 가치담지적이라고 보는 바흐친/볼로쉬노프의 입장과 로트만의 입장 사이의 차이가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리고 이것이 로트만의 텍스트론의 바탕을 이루면서 문화텍스트에 대한 그의 기호학을 생산적인 것으로 만든다(참고로, 이장욱의 <혁명과 모더니즘>(랜덤하우스중앙, 2005)에는 로트만 기호학에 대한 해설과 함께 바흐친과의 흥미로운 비교가 제시돼 있다).  

 

텍스트 = 언어학적 텍스트(표현성) +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진리성) 

 

이 메타언어학적 텍스트를 로트만은 텍스트-기능이라고 부른다. 이 텍스트-기능이 문제되는 지점은 텍스트가 문화적 가치체계의 변동 속에 놓이면서 언어학적 텍스트와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의 단일성이 의심받게 되는 지점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의 표현성이 더 이상 메타언어학적 텍스트의 진리성을 담보하지 못하게 될 때, 텍스트의 권위에 가려져 있던 비텍스트 그룹의 숨은 주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텍스트를 사칭하는 일이 발생한다. 텍스트와 비텍스트 간의 동력학은 이런 과정을 문화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견인해낸다. 그리고 이 동력학에 의해 로트만의 형식주의는 특이한 활력을 획득한다. 텍스트적인 하위약호들의 조직화(표현성)를 전제로 한다면(로트만은 '텍스트와 기능'이란 논문에서 마이너스 표현성까지 고려하여 원래는 텍스트를 8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텍스트와 텍스트-기능은 네 가지 범주의 텍스트 유형을 만들어낸다.

          

 

     텍스트

    텍스트-기능

   텍스트Ⅰ

        +

         +

   텍스트Ⅱ

        +

         -

   텍스트Ⅲ

        -

         +

   텍스트Ⅳ

        -

         -

 

먼저 텍스트Ⅰ은 텍스트의 언어학적인 의미론적 통사론적 구조와 메타언어학적 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텍스트Ⅳ는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로서 비텍스트, 즉 텍스트의 예비주자이다. 텍스트Ⅱ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더 이상 텍스트-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에 대한 예로서 로트만이 들고 있는 것은 1830년대 러시아 시문학이다. 시에서 산문으로 이행하던 이 시기에 시(=텍스트)는 더 이상 가치담지적인 장르로 인식되지 않았고 따라서 텍스트-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반면에 이 시기의 산문은 텍스트Ⅲ에 속하게 되는데, 새로운 산문 장르가 가치담지적이라는 당대의 믿음 때문에 1830년대 산문문학은 텍스트의 지위를 획득한다.

 

이 네 가지 텍스트 유형은 당연히 고정적이거나 정태적인 것이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언어학적 텍스트는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가치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기능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자리바꿈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더구나 우리 시대는 어떤 보편적인 가치체계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가치들이 양립하고 있는 가치 다원(주의)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동일한 텍스트일지라도 개개인이 가진 가치관이나 문화적 선입견에 따라 서로 다른 텍스트 유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4. 피에르 메나르의 경우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보르헤스 전집2: 픽션들>, 민음사, 1994, 67-89쪽)는 나보코프와 동갑내기로서 형이상학적 주제(혹은 문학이론)를 서사화한 대표적인 작가로 주목받는 호르헤 보르헤스(1899-1986)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프랑스 작가인 피에르 메나르(허구적 인물)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 일부를 한 자도 틀리지 않게 베껴썼음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를 능가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다시 쓰기, 베껴쓰기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많이 이해되는 이 단편을 로트만의 텍스트/ 텍스트-기능 범주를 이용하여 다시 읽게 되면, 이 작품이 문학텍스트에 대한 ‘읽기’의 문제 또한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언아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고 주장하는 서술자는 이어서 직접 한 대목을 비교한다. 바로 이 대목이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한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돈키호테> 제Ⅰ부 9장)


  17세기의 <평범한 천재>인 세르반테스에 의해 편집된 이러한 열거형 문장은 역사에 대한 단순한 수사적 찬양에 불과하다. 반면 메나르는 이렇게 적는다.


……진리, 진리의 어머니는 시간의 적이고, 사건들의 저장고이고, 과거의 목격자이고, 현재에 대한 표본이며 충고자이고, 그리고 미래한 대한 상담관인 역사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이다. 이러한 생각은 놀라운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와 동시대 사람인 메나르는 역사를 현실에 대한 탐구가 아닌 현실의 원천으로 생각한다. 메나르에게 있어 <역사적 진실>이란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마지막 문구는 뻔뻔스럽게도 실용주의적이다. (...) 또한 문체에 있어서의 차이점도 아주 명명백백하다. 메나르의 고어체-무엇보다도 외국어 문체적인-는 작위적인 흔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따.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알았던 선구자 세르반테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 메나르는 (아마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테크닉을 통해 그때까지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 고의적인 시대 교란과, 잘못된 원저자 설정의 테크닉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메나르의 텍스트 간의 언어학적 텍스트, 즉 표현성은 동일하다. 하지만 메나르가 3세기 후에 다시 (베껴)쓴 텍스트는 전혀 다른 텍스트가 된다. 이것을 텍스트 개념만 가지고 이해하려 하면 패러독스에 부딪치게 된다. A=A이면서 A≠A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률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지만 텍스트-기능 개념을 도입하여 읽게 되면, 세르반테스의 텍스트가 평범한데 비해서 메나르의 것은 놀랍다는 서술자의 주장은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두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가치체계의 차이로 말미암아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두 텍스트는 가치론적으로는 서로 다른 텍스트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언어학적 텍스트와 메타언어학적 텍스트 사이의 불일치가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베겨)쓰기’가 아니라 ‘읽기’이다. 이 읽기는 텍스트를 재현하는 모방론적 읽기가 아니라 텍스트를 생산하는 생성론적 읽기이다.(이런 관점에서 [메나르가] “초보적이고 불완전했던 읽기라는 예술을 풍요하게 만들었다”는 서술자의 평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텍스트는 없고 텍스트-읽기만이 존재하는 것일까? 로트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비록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텍스트-읽기[현상]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텍스트[물자체]를 부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그의 칸트주의적인 성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기호이론 체계에서 객관적 실재에 대한 요구는 중심적인 것이다. 그가 텍스트-기계의 의미생산에 관심을 두면서도, 동시에 기호활동의 목적이 일정한 내용[전언]의 전달에 있다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요구가 놓여 있는 것이다(그의 이러한 입장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강조하는 R. 바르트 기호학의 쾌락주의와 의미전달(communication)을 강조하는 U. 에코 기호학의 실용주의의 중간쯤에 자리하는 것이다. 이걸 규범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이 점은 “(로트만의) 예술텍스트 분석이 결국 예술어를 비예술어로 번역함으로써 예술텍스트의 어떤 일정한 의미, 명백한 의미를 알아내고 있는 작업이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바흐친과 달리 예술텍스트 구조분석에 로트만이 전적으로 시텍스트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흐친 또한 산문텍스트만 연구대상으로 사용하면서 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쨌든 과연 이 두 이론체계를 평가할 수 있는 공약적인 준거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칸트철학과 헤겔철학이라는 두 비공약적 전통에 기대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흐친의 경우 (신)칸트주의 입장과 헤겔주의의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에 대해서는 페터 지마의 <문예미학>, 을유문화사, 1993 참조). 어쨌거나 예술텍스트의 번역가능성은 로트만 기호학의 기본 전제이다.(아래 사진은 아내이자 저명한 러시아문학 연구자인 민츠 여사와 함께 한 만년의 로트만.)

 

5. 로트만-기계와 한국 현대시 

한 이론의 이론으로서의 생산성을 판단하는 한 가지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많은 데이터에 적용될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이론의 번역가능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로트만-기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이론이 한국 문학, 특히 한국 현대시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그의 시텍스트 분석 개념과 방법이 우리 나라에 일부 소개된 바 있지만(유재천, '로트만의 시의 기호학', <현대시사상>(1991년 여름호) 등), 아직 실제적인 분석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어(교착어)와 러시아어(굴절어) 사이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시 장르 자체가 언어 기호의 가능성(특히 기표적 가능성)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한 언어의 가능성에 근거하여 정초된 시이론이나 분석방법이 다른 언어에 그대로 적용될 리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로트만의 텍스트/텍스트-기능 범주는 언어학적인 범주가 아니라 메타언어학적 범주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적용의 범위가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서는 아주 간략하게 한국 현대시, 1980년대와 90년대의 몇몇 시인의 경우를 가지고 로트만 텍스트론의 적용가능성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한국문학사에서 80년대 초반은 ‘시의 시대’라 불릴 만큼 많은 시인들이 활동했고 다량의 시들이 생산됐던 시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의 시대’의 대표주자들이 자신의 시를 의식적으로 반시 혹은 비시로서 규정하고자 했던 점이다. 이것은 80년 광주 경험 이후, 모든 현실적인 가치에 대한 부정에서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확인하고자 했던 젊은 시인들의 정치적 (무)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과 어법을 파괴와 해체와 두드러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즉 시의 텍스트성(표현성)이 더 이상 가치담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 이상, 오히려 반텍스트성, 즉 텍스트에 대한 파괴와 해체가 시의 시다움을 보장해주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는 모두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① 그해 가을 나는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다 살아

   버렸지만 壁에 맺힌 물방울 같은 또 한 女子를 만났다

   그 여자가 흩어지기 전까지 세상 모든 눈들이 감기지

   않을 것을 나는 알았고 그래서 그레고르 잠자의 家族들이

   埋葬을 끝내고 소풍 갈 준비를 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그해 가을, 假面 뒤의 얼굴은 假面이었다  


②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지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매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③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①은 이성복의 '그해 가을'(부분), ②는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전문), ③은 최승자의 '즐거운 일기'(부분)이다(보다 더 형태파괴적인 시들이 있지만(특히 황지우의 경우), 인용의 번거로움 때문에 여기서는 ‘모범적인’ 시들을 골랐다. 참고로 이들의 데뷔시집은 이성복, <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1981)이다).

 

이 시들에서 표출되고 있는 환멸, 증오, 풍자, 연민 등의 정서는 이전 세대의 시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직선적이고 공격적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서정시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이것도 시인가?”라는 반응을 보일 만도 하다(좋은 시는 정서를 순화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 하지만 이런 공격성(=전투성)이야말로 이 시대 시의 징표였다. 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시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을 이제 우리는 텍스트-기능의 관점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바, 이들은 기성의 가치와 체제에의 저항이야말로 시의 존재의의이며 기능이라고 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 시대의 문화적 컨텍스트는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보다는 가치론적으로 규정되는 텍스트, 즉 텍스트-기능을 보다 더 많이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80년대 후반(그리고 90년대 초반)에 등장한 몇몇 시인들의 시에도 시/비시[텍스트/비텍스트]의 문제틀은 텍스트-기능과 관련하여 적용될 수 있다. 장정일, 유하, 기형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다.


④ 햄버거 빵 2/ 버터 1½큰술/ 쇠고기 150g/ 돼지고기 100g/ 양파 1½

   달걀 2/ 빵가루 2컵/ 소금 2작은술/ 후추가루 ¼작은술/ 상치 4잎

   오이 1/ 마요네즈소스 약간/ 브라운소스 ¼컵

    (……)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볶아 식혀 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 명상에 흥미를 느낀다는 뜻이기도 한데

   흥미가 없으면 명상이 행해질 리 만무하고

   흥미가 없으면 세계도 없을 것이다.


⑤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중원을 휩쓸고 우뚝 무림왕국을 세웠던

   무림패왕 천마대제 만박이 주지육림에 빠져 온갖 영화를 누리다

   무림의 안위를 위해 창설했던 정보기관 동창서열 제이위

   낙성천마 금규에게 불의의 일장을 맞고 척살되자

   무림계는 난세천하를 휘어잡으려는 군웅들이 어지러이 할거하기 시작했다

   차도살인지계를 누구보다도 잘 이용했던 천마대제 만박

   천상옥음 냉약봉, 중원제일미 녹부용이 그의 진기를 분산시킨 것도 원인이 되겠지만,

   수하친병의 벽력장에 철골지체 천마대제가 어이없이 살상당한 건

   곁에 있는 사람도 자객으로 변한다, 삼라만상을 경계하라는

   무림계의 생리를 너무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었다    


⑥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④는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부분), ⑤는 유하의 '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부분), ⑥은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전문)이다(참고로 이들의 데뷔작은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유하, <무림일기>(1989),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1989, 유고시집)이다. <무림일기>의 이미지가 없어서 <세상의 모든 저녁>을 대신 띄운다).

 

④, ⑤에서 특징적인 것은 규범문화 속에서 비텍스트에 속하는 요리책과 무협지의 언어들이 시어로 편입되면서 텍스트화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화에는 사회적 인준의 절차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바, ④를 표제시로 한 시집이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하고 ⑤의 연작시 또한 정통 문학지의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이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텍스트-됨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비시적인 요소들이 오히려 시적인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 것인데, 비텍스트의 마이너스적 가치가 오히려 플러스적인 가치로 전화된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⑥은 시의 내용에서 그런 마이너스적인 가치가 시적인 질감을 얻게 된 경우이다. 비교적 전형적인 시텍스트의 형식과 어법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시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비관적인 음조의 자기통찰은 독특한 개성으로 자기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때문에 평자에 따라서는 “시가 아니다”고 평가절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의 새로운 구석을 보여줌으로써 이 시인의 경우 90년대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시인들의 작업 배경에 바야흐로 소비 사회의 도래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적 가치의 영역에 있어서도 오래 음미하면서 읽어내는 시가 아니라 한번 읽고 재미보는 시들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점차 문학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고, 앞에서 열거한 세 시인의 경우는 기존 문단의 순수시(이건 고정관념이지만)와 새로 등장한 소비성 시 사이의 경계에 놓여 있다(특히 ④와 ⑥은 베스트셀러 시집이었다). 이 점은 8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지식인-시인, 투사-시인들과 비교될 만한 것이다. 이후 90년대 중․후반에도 여전히 많은 시들이 씌어지고는 있지만 앞에서 열거한 80년대 초반, 후반 시인들의 시적 인식틀과 문제틀을 넘어설 만한 새로운 시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물론 이러한 진단은 '과거'의 것이다. 2000년대 이후에 새로운 시인들이 많이 등장했으므로. 소위 '다른 서정'의 '미래파'들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텍스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컨텍스트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어떤 시가 새로울 수 있느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바, 그것은 변화하는 시대, 디지털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텍스트-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로트만 텍스트론의 관점을 한국 현대시에 적용하여 본 바, 시에 대한 거시적인 준거점의 확보에 그의 이론이 잘 원용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보다 말끔하고 정치한 분석은 다른 자리를 요구하는 것이긴 하지만.

 

 

6. 재약호화와 텍스트-기능


로트만의 기호이론은 약호화(coding)와 재약호화(recoding; transcoding)를 구분하는 바('재약호화'는 '코드변환'으로도 번역된다), 이 또한 그만의 특징이 된다. 약호화, 즉 일차적인 약호화는 기호의 기표 체계와 기의 체계 사이의 등가적인 관계 형성이다. 이것은 달리 기호화라 말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기호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재약호화는 이에 비해 광범위한 의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관계맺음이다. 이것은 약호화의 정태적인 이항 모델과대비되는 동태적인 컨텍스트 모델을 구축한다. 여기서 이항 모델이 안정된 커뮤니케이션을 보장해주는 근거가 된다면, 컨텍스트 모델은 다의미성의 모태가 된다.

 

이 컨텍스트 모델에서 기표(표현층위)와 기의(내용층위)는 교점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묶음[다발]에서 만난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이 기표와 기의 주자들은 댄스장에서 만난다. 이들에겐 어떤 정해진 짝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저 댄스 레퍼토리에 맞는 짝을 고르면 된다. 그리고 이 댄스 레퍼토리가 바로 다양한 의미 컨텍스트이고 문화적 컨텍스트이다. 따라서 이 레퍼토리에 대한 고려 없이는 기호의 의미생산 메카니즘을 알 수가 없게 된다. 어째서 그런 짝이 맺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약호화, 즉 이차적인 약호화란 것은 텍스트 구조 속에서, 그리고 문화적 장 속에서, 마치 댄스 레퍼토리에 따라 새로운 짝들이 맺어지듯이, 구축되는 새로운 관계쌍을 말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 새로운 관계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 예술텍스트가 정형화된 형식 속에서도 다른 텍스트들보다 많은 정보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보다 많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먼저 텍스트 내적으로는, 운율적 층위에서, 어휘적 층위에서, 그리고 통사적 층위에서 예술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의 다양성이 한정된 구성소를 가지고서도 다양한 의미조합의 형성을 가능하게 한다. 또 텍스트 외적으로는 텍스트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 중에 개입하게 되는 다양한 사회적 힘들이 텍스트를 주무르게 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는 그 손때만큼이나 확장되게 된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예를 들어보자.


   한 명의 아줌마 안에 수백 수십 명의 아줌마가 숨어 있다

   그 수심의 깊이는 아줌마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한다

   아줌마는 현재 우리 집 안에도 있다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

   아줌마의 생각을 알려면 아줌마들만의 은어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회학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들이다.

 

김상미의 '아줌마'(<시와 시학>(1997년 봄호), 55-56쪽)란 시의 1연이다. 이 시에서 ‘아줌마’란 단어는 “아버지나 어머니와 같은 항렬의 여자”라거나 “동년배 혹은 젊은 남의 부인을 높여 정답게 부르는 말”로서의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인 뜻만 가지고 시텍스트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오지 않는다. 이 시텍스트 속에서의 ‘아줌마’는 그동안 자신의 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가(그래서 아줌마들끼리는 “은어”로 소통한다) 비로소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한 이 시대 한국 주부들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때에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아줌마이다(이 시는 한국시사에서 ‘아줌마’란 제목을 가진 최초의 시이다). 말 그대로 아줌마들의 손때가 묻은 ‘아줌마’인 것이다. 이런 사정은 이 ‘아줌마’ 대신에 ‘아저씨’나 ‘아가씨’란 단어를 대입시켜 읽어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아저씨/아가씨가 생각하는 것은 아저씨/아가씨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란 진술이 결코 “아줌마가 생각하는 것은 아줌마들에겐 중요한 것이다”란 진술 만큼의 울림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아줌마’의 경우 컨텍스트적 모델로서 재약호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기호는 텍스트-기호가 된다.

 

기호는 의미작용 과정에서 텍스트가 되려는 성향을 갖는다. 예술텍스트에서의 기호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기호는 회화적인 이미지, 어떤 공간적인 이미지가 그렇듯이 단의적인 의미에 저항한다. 그걸 로트만은 의미(론적) 면적이란 말로 표현한다. 이때의 면적이란 것은 여러 묶음 체계가 교차하는 공간이고, 다의적인 의미가 현실화되는 공간이다(라흐만에 의하면, 로트만의 '텍스트-기호'는 바흐친/볼로쉬노프의 ‘대화성’이나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 개념과 등가적이다). 

 

이 공간은 복수적 약호화에 의해 그 규모가 유지된다. 가령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라고 할 때, 13이란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다. 13이란 숫자에 교차하고 있는 많은 문화텍스트적 의미가 다 소진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 의미의 테두리만을 대충 그려볼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감상하고 나서 그걸 언어로 테두리 지으려고 할 때와 비슷한 사정이다.

 

문제는 특히 예술텍스트의 경우, 텍스트-기호의 가능성을 모두 허용하면서도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텍스트-기호 이전 단계에 기호의 자리를 인정해야 하는 필요성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해서 로트만 기호이론체계에서 모든 개념은 두 단계로 이분화된다(그의 견고한 이분법!). 이차모델화가 그렇고, 재약호화가 그렇고 텍스트-기능이 그렇고 텍스트-기호가 그렇다. 이러한 형식적 이분화가 로트만 기호학의 균형감각을 지탱해주는 밑바탕이다. 특이한 것이 이런 이분화가 동태적인 모델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그의 기호학은 이상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7. 이제 시작인 결말


앞에서 대략 로트만 기호학의 특징적인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오해)의 몇 단락을 늘어놓았다. 문학/문화 연구 방법론으로서의 기호학은 이미 20세기 후반의 한 지배적인 학적 패러다임이 되었고, 톰슨(E. M. Thompson)의 지적대로, 자연과학에서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정보이론)과 인문(과)학에서의 기호학(=구조주의)은 통합적인 방법론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양대 지적 조류이다. 이 두 조류가 유행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과학-정향성(그리고 새로운 과학/통합과학)에의 요구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정초된 섀넌(C. E. Shannon)과 위너(N. Wiener)의 커뮤니케이션/정보 이론과 소쉬르와 퍼스의 기호학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새로운 학제적 모델이 되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문학/문화 텍스트에 적용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되는 유리 로트만의 기호학 또한 이러한 방법론사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로트만의 동료 퍄티고르스키는 1960년대를 회고하면서, 모스크바-타르투학파는 인문학에 ‘정밀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은 ‘현대적인 (과)학자’를 자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자신들의 학적 태도에 특히 20세기 중반 비엔나 학단의 (논리)실증주의가 미친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스크바-타르투학파가 ‘2차 모델화 체계’를 기호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과학의 언어를 철학의 연구 대상으로 규정한 카르납(R. Carnap)을 따른 것이다(이때 철학은 언어분석이 된다). 이러한 대상 규정은 단순히 방법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카르납이 하이데거(M. Heideggar)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리)실증주의를 나치즘과 파시즘, 즉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이념(=논리)으로서 제시한 사실은 이 시기의 과학-정향성, 즉 합리주의에 대한 요구가 방법론적인 요청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요청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철학자 로티(R. Rorty)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시사적이다. “영어권 철학에서 1930년대 이전에는 과학철학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1945년경에는 그것이 철학의 중심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하이데거와 카르납 간의 논쟁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카르납은 반나치즘의 정치적 태도와 정치적 자유주의 등을 자연과학의 위상과 연합시켰으며 라이헨바흐, 헴펠, 파이글 등과 더불어 과학의 본질 이해는 곧 나치즘의 비합리성 이해에 중요하다는 레토릭을 설득력 있게 피력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즉 거기에 반기를 드는 것은 곧 나치즘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고 간주되었고, 확증의 논리 등을 탐구하는 과학철학은 철학의 중심 영역이자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실용주의와 과학과 기술', <과학사상>(1997년 봄호), 190쪽)

 

로트만 기호학의 과학-정향성 속에 숨겨진 정치적 무의식을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로트만이 자신의 문화유형론 속에 20세기 러시아 문화유형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그의 마이너스 정치참여로 볼 수 있다). 그것은 1930년대 중반 소비예트 권력에 의해 중단된 러시아 형식주의의 학문적 유산과 과학적 정신을 암묵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학문적 저항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신)칸트주의(neo-Kantian Formalist position)와 헤겔주의(Hegelian Idealism) 사이의 갈등의 한 양태이다. 이러한 관계를 이분법적으로 도식화한다면, “과학=실증주의=합리주의=형식주의=형식논리=(진리 유보적) 칸트주의 대(對) 이데올로기=역사주의=비합리주의=내용주의(사회학주의)=변증법=(진리 담보적) 헤겔주의”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밑그림을 가지고 로트만 기호학의 개념체계에서 텍스트/텍스트-기능 개념을 자세하게 분석해보는 것이 이 글의 구상이었지만, 여러 가지 여건의 미비로 말미암아 문장 대신에 몇 개의 단어만 나열되어 있는 형국이 되었다. 그나마 이런 형국에도 몇 가지 오해가 개입되어 있을 테지만, 다시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점들이 수정되고 보완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쨌거나 워밍업은 끝난 것이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의 기호학을 공부해볼 만한 시간이다. 비로소 시작인 것이다...

 

06. 01. 16.

 

 

P.S. 참고로, 왼쪽은 영어권에서 가장 최근에 나온 로트만 연구서인 앤드류스(E. Andrews)의 'Conversations with Lotman'(토론토대학 출판부, 2003)이며, 오른쪽은 로트만의 저작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영역선집 'Universe of the Mind'의 신간본(인디애나대학 출판부, 2000). 이 영역본의 서문을 움베르토 에코가 썼으며, 책은 국역본 <문화기호학>의 대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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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생명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이 글의 이전 제목은 '<나쁜 피>의 한 장면에 대한 생각'으로 1997년 성탄절에 쓴 것인데, 내 딴에는 '생명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미래의 글을 예비하는 차원에서 적어둔 것이었다. 지난 황우석 사태를 통해서 알려진바, 영화 <아일랜드>(2005)에서와 같은 본격적인 생명복제시대는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그러니 본격적인 글을 쓰는 데 아직은 '여유'가 있는 셈이다. 당분간은 20년전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입막음 해야겠다. 대신에 이미지 버전으로 업데이트해서 창고에 넣어둔다. 

..

1.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알렉스가 안나에게 묻는다. 안나는 등을 돌린 채 세차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레오(스) 카락스의 사랑의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 <나쁜 피>(1986) 한 장면이다(*<소년, 소녀를 만나다>, <퐁네프의 연인들>이 나머지 두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 문답의 바로 이전 장면, 즉 문밖에서 담배를 물고 서성이던 알렉스가 라디오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나오자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처음엔 비틀거리며 걷다가 몇 개의 블록을 마치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질주하던 그는, 음악이 멈추자 그대로 정지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묻는다. "안나,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2. (한)순간에 완성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그것은 반시간적 사랑이 아닐까? 순간이나 영원이란 것은 시간적인 계기이지만 동시에 반시간적 계기이다. 그것이 반시간적인 것은 시간의 고유한 운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영원의 무한수축이고 영원은 순간의 무한팽창이지만 이 수축/팽창의 운동은 자연적 시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의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동형론적 형질전환이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이렇듯 반시간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라는 개념적-정념적 테두리 안에서 다 파악될 수 없다. 즉 그것은 감성적 사랑을 초과한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이 초감성적 사랑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을 정념의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념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닌 오직 가상(이미지) 속에서만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감성적 사랑, 즉 미적 가상이 아닌 현실 속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진화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만족할 만한(agreeable) 상태, 즉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이란 "정상적으로 생겨 먹은 생물체의 경우 ①자기보존의 본능과 ②종족보존의 본능, 이 두 가지의 충족을 의미한다. 본능 ①의 충족은 개인적인 생존을 뜻하므로 음식과 주거의 문제이다. ②의 충족은 종(족)의 유지와 번영을 뜻하므로 성적 욕구의 문제이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 자기보존의 본능(생존의 욕구)이 종족보존의 본능(생식의 욕구)보다 먼저 고려된다. 즉 생식의 욕구라는 생물학적 기제의 정신적(정서적) 대응(수반)으로서의 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다(사랑을 팔고 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초감성적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사랑이겠다(사랑에 죽고 못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한)순간에 자신이 완성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도망간다(혹은 죽고 만다). 하지만 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귀신이 되어 되돌아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쁜 피, 우리의 생-본능을 관장하는 '나쁜 피' 때문이 아닐까?

 

4. 애초에 사랑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이어서이다. 즉 육체(나쁜 피)는 사랑의 가능조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육체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초감성적 사랑의 불가능조건이 된다. 이 육체는 우리를 정념의 공간 속으로 내던져 놓고는 뭔가 이루어질 만하면 다시 잡아당기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디론가 무한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곧 걸음을 되돌려야만 한다. 그래서 이 질주에 대해 "끝없이 몸부림치지만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불가해성과 무력함 그리고 이것 자체에 대한 분노 등"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다만 여기서 '나아갈 수 없는 삶'이란 걸 나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 바꿔 읽고 싶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감성적 사랑, 아름다운 사랑의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숭고하다(죽음을 무릅쓰는 사랑!). 이 숭고한 사랑은 (감성적) 사랑의 이해관계(목적)에 구속받지 않으며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숭고한 사랑의 맹목적인 운동 앞에서 망연자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간혹 우리가 그러한 사랑에 걸려들기 때문에!). 알렉스의 물음에 대해 안나가 세차게 머리를 젓는 것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두려운 사랑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의 생-본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두려움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두렵다(불쾌하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의 생-본능이라는 인간조건을 일시적으로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를 (한)순간 개방한다(우리의 죽음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한다(머리가 잘린 통닭모양).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아니다, 그건 더 이상 사랑도 예술도 아닌 어떤 것이다. 하여간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5. 프로이트의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아름다움은 생-본능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함)은 죽음-본능과 연관되어 있다. 생-본능은 사는 것, 잘사는 것, 보다 더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성의 기능이란 것은 이러한 생-본능을 바람직하게 보좌하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에 대하여 죽음-본능은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본능에서 발원하지만 곧 그것을 초과하고 만다(그래서 이성-이념의 한계를 표시한다).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이란 결코 삶의 안쪽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끊임없이 무에 유혹되고 죽음에 도취된다. 마치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처럼(에로티즘 또한 생식의 욕구에서 발원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불가해하듯이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우리에게 불가해하다. 이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타자이다. 우리의 이성, 즉 개념적 사태 이해는 이들 안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의 뒤치다꺼리에나 바쁠 따름이다. 간혹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우리를 유혹하는가? 그럼 어쩔 텐가? 우리는 안나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이 또 다른 '나쁜 피'로부터 도망가는 수밖에. 그러다 발병이 나고 덜미를 붙잡히는 수밖에!

6. 칸트가 주장하는 취미(아름다움) 판단의 무관심성(무사심성)은 숭고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안나의 부정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평정한 태도,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안락의자에 주저앉는 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지만,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 가령 어떤 예술작품 속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어딘가 불편하지 않을까? 만약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라면 숭고에 대한 무관심은 필사적인 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알렉스의 질주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생-본능은 숭고(죽음)로부터,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질주)할 때에만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 그런 필사적인 도주를 우리는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 만큼이나 숭고에 대한 무관심 또한 아이러니적이다. 너무 말이 없어서 '떠벌이'란 별명이 붙은 알렉스처럼.

 

 

 

 

7. "현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들뢰즈) 이러한 주장은 비단 현대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리라.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대해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우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반 고호의 그림에서 구두끈이 반쯤 풀려/조여 있는 걸 두고 이중의 구속(double bind)을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의 잘난 예술은 우리를 (껴)안아주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담배나 (꼬나)물고 그것의 주변만을 서성거릴 뿐이다, 문밖에서. 그러다가 문득 자각한다, 우리 자신의 숭고함을!

 

 

 

 

8. 자신의 사랑에 대해 중언부언하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지만,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겠다. 사실, 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물음, 즉 정념론적 과제는 나에게 있어서 칸트 이후에 제기된 인식론적 과제와 결코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순수이성비판>)라고 말할 때, 이성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물음들이란 바로 숭고한 물음들이며, 예술적인 물음들이다(가령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든가, "우주는 팽창하는데 왜 우리는 팽창하지 않는가?"라는 식의 물음들).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이 물음들을 이성의 잉여효과, 혹은 과민반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친 듯한 질주가 어찌 과민반응이 아닐 수 있을까? 진화사적으로 볼 때도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우리의 자기보존 본능이나 종족보존 본능에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형이상학적 사유에 필요한 기회비용을 다른 데 투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의미에서도 인식의 형이상학이나 정념의 형이상학 모두 본래의 프로그램을 초과하고 있다. 그것들은 프로그램의 돌연변이이며 아나그램이다.



9. 뒤샹의 경우.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이 경우에는 화장실에서 미술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행위이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중의 하나인 <자전거 바퀴>(1913)은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이 바퀴와 의자는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오브제가 동시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거기에 어떤 미감적 효과(뒤샹 효과)가 유발되는 것이다(그래서 자신이 예술작품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 이 새로운 예술, 혹은 '미적 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이고, 자리의 이동이다. 이점은 <샘>의 경우에 보다 극적으로 드러난다.

  

전시회에 예술작품으로 놓인, 그리고 '샘'이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변기에서 우리는 이미 도구 존재로서의 도구다움을 경험할 수 없다. 이 변기의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될 만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인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기는 안전하고 편리한 배뇨를 위한 기구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 즉 신뢰성을 자신 가운데로 모아놓고 있다. 이를테면 변기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 있지 않음(탈은폐) 가운데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 이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식의 하이데거적인 사유는 그림이 아닌 실제 오브제의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이미지로서의 고호의 구두 그림이 실제의 구두에로 관심을 정향시킨다면, 실제로서의 이 뒤샹의 변기는 오히려 완강하게 자신의 도구로서의 흔적을 지우며 이미지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이 변기는 도구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신뢰성을 철저히 부인하고 망각한 이후에야 예술작품으로서, '샘'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예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고, 무엇일 것인가?

10. 과학사에서 1997년이 의미있는 해로 기록된다면 그건 단연 복제양 돌리 사건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내지는 치료)라는 것은 생물체의 고유한 유전자 염기배열을 기술적으로 조작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유전자 염기배열이란 A, C, T, G 네 개의 문자로 표시되는 DNA 염기의 조합('책')이다. 이제까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이 타고난 유전자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거기에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 것.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조작은 일종의 아나그램(철자변환)이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재료(레디메이드)의 배열을 바꾸는 것이고, 자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면서 예술이다.

아나그램으로서의 예술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기술과 예술의 비분리를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인지(이에 대한 사유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미래에, 이성의 도움없이도 자기복제를 통한 종족보존이 가능해질 경우(그것이 허용될 경우), (숭고한)사랑은 무엇일 것인지? 레디메이드 이후에 (숭고한)예술은 무엇일 것인지? 그런 물음들 앞에서 사랑과 예술은 자신들의 유사한 운명을 놓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11.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서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모든 단락은 보완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카뮈)라는 권고를 제법 따르려고 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칸트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좋아하는 만큼 더 읽게 되면, 조금은 무겁게 말할 수 있을는지(여전히 사랑하면서)? 끝으로, 이 몇 가지 생각의 꼬투리가 되어준 카락스/알렉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알렉스 오스카(Alex Oscar)는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의 아나그램이다. 예술은 분신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젊은 카락스/알렉스는 내게 말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12.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구애를 한다는 것이며, 이 구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될 것이다."(<아방가르드의 다섯 노총각들>, 현대미학사, 1993)

06.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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