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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 간 훌리안 - 2022 어린이도서연구회 추천도서 ㅣ I LOVE 그림책
제시카 러브 지음,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21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림이 아주 예쁜 그림책을 읽었다.
아니 보았다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겠다.
글보다 그림이 눈에 띄고, 글밥은 적고 그림이 많은 책이기 때문이다.
난 약간 활자중독 같은 게 있어서 그림보다 글자에 늘 먼저 눈길을 주는 편이다.
대개의 그림책을 '그림'책 임에도 불구하고 글부터 먼저 읽곤 했다.
글과 그림을 같이 보거나 글을 먼저 읽었더라도 그림도 본 다음 그 뒷 페이지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글만 찾아 끝까지 다 읽은 후에 흥미가 생기면 그림을 보거나 아니면 아예 그림을 다시 보지 않고도 다 읽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림을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부수적인 도구 정도로만 받아들였으니 그림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간 많이 놓쳤을것 같다.
글을 모르던 시절에 보았던 그림책이 지금껏 강하게 남아 있는 건 글이 아닌 이미지로 느끼고 상상하고 기억하기 때문일텐데, 어느 순간 부턴가 나는 그림책을 보는 법을 잊어버리고 살았다.
아이들에게 읽어줄때도 나는 글을 읽어주고 애들에게만 "그림도 한번 봐"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은 갈색바탕 종이 위에 그려진 화사한 색감의 그림들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책이다.
글이라고는 15문장도 채 안된다.
그나마 "오" 또는 "아, 이런." 과 같은 짧은 감탄사로만 되어 있는 페이지도 있다.
그래서 그림이 내 눈에 들어왔고 그림에 눈길을 주고보니 그림이 무척 예쁜 책이었다.
제목이 <결혼식에 간 훌리안> 원제는 Julián at the wedding 으로 보물창고에서 번역하여 출간했다. 지은이는 제시카 러브 (Jessica Love).
배경이 결혼식이고 여기 등장하는 훌리안과 마리솔은 각자 할머니(?) 손에 이끌려 결혼식에 참석했다.
결혼식이라 다들 제일 예쁜 옷들을 입어 단장을 하고 모였구나. 표정들도 모두가 밝고 즐거워 보인다.
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격식을 갖춘 엄숙한 결혼식을 했던 것 같다. 결혼식 날, 찾아주신 분들께 인사하며 내가 활짝 웃었더니 내게 너무 웃지 말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가뜩이나 엄숙한데 더 경건하게 식을 올렸더랬다. 만난 지 얼마 안되서 했던 결혼이라 심지어 신랑마저도 낯설었더래서 내 결혼식은 파티라기 보다는 예배 같았다.
그런데 이 책의 결혼식은 즐거운 파티처럼 보인다.
실제로 책에도 그렇게 쓰여있다. "결혼식은 사랑을 위한 파티야."
이 문장 외에 사실 마음을 사로잡은 글귀도 없었다. 뒷부분에 마리솔이 뛰고 뒹굴며 놀다 옷을 더럽혀서 옷이 더러워졌다고 할머니께 얘기했을때 그 할머니가 "그래, 얘야, 그런데 이제 넌 날개를 달았구나!"라고 말한 정도가 전부다.
훌리안과 마리솔은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 결혼식에 갔었다. 하지만 예식이 끝난 후에는 맘껏 뒹굴며 놀았고 그렇지만 마리솔에게 아무도 옷을 더럽히니까 얌전히 앉아있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마리솔의 옷에 진흙 같은 게 잔뜩 묻어 더러워진걸 보고 훌리안이 자기의 셔츠를 벗어주고 버드나무 잎사귀 같은 걸로 장식을 하며 노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마리솔의 할머니가 날개를 달았구나 하며 마리솔의 머리에 마리솔이 처음에 쓰고 온 야구모자 같은 걸 씌워줄 뿐이었다. 예쁜 원피스 위에 야구모자를 쓰고 왔던 마리솔.
이 그림책은 들여다보고 있을수록 들려주는 이야기가 많다.
일단 훌리안과 마리솔을 볼 때 남자아이, 여자아이와 같은 성별로 구별되어 인식되지 않았다. 마리솔은 원피스를 입었지만 내 눈에 훌리안은 이름 덕분에 남자아이겠거니 했을 뿐 의상도 머리스타일도 하는 행동거지도 내가 아는 정형화된 남자아이답지 않았다.
마리솔 역시 야구모자를 쓰고 와서 예식 후에는 잔디에서 강아지와 뒹굴며 거침없이 놀았고 훌리안이 벗어준 옷을 기꺼이 입었다.
남자와 여자, 남자다움과 여자다움.. 이런 정해진 역할이나 편견이 들어갈 여지가 없이 이들은 그냥 천진한 아이, 사람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혼식을 올린 이 예식의 주인공들이 둘 다 여성이었다.
"신부들" 이라고 쓰고 있고 한 사람은 바지를 입고 있지만 누가봐도 여성이었다.
난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고 동성애나 동성간의 결혼을 지지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들의 결혼식이 하나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싫지도 않았고 거부감도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상하게 여기면 그게 더 이상할 것 같은 그런 상황이었는데 만약 이 책에서 이들의 결혼식에 관해 길게 설명을 덧붙였거나, 비장하게 보였거나, 사랑을 하면 상대가 동성이든 이성이든 결혼을 할수도 있는것이라고 했거나, 사람을 대할 때 선입견이나 편견을 갖지 말라고 했다거나, 이들도 사랑해서 한 결혼이니 축복해주도록 하잔다거나, 이런 소수의 사람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접근하여 풀어나가는 책이었다면 난 평소대로의 거부감이나 반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그저 행복한 결혼식과 즐거운 파티와 뭇사람들의 축하만이 가득할 뿐이고 색안경을 끼고 볼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마음을 열어놓고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고. 이 깨달음이 동성애나 동성간의 결혼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내가 편견어린 시선을 가졌었다는 걸 인정하는 과정을 언짢지 않게 그러나 곰곰이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해준 책이었다.